읽는 분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 6월 하순 평양을 다시 방문하여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과 재회하면 김정일과 나라의 통일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김대중-김정일 두 사람 사이에 있을 ‘통일 문제 논의’를 앞두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의 차원에서 통일 문제를 미리 점검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있을 논의의 내용이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바람직하고 또 대한민국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허용될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준비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김대중 씨가 2000년6월 평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 같은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6.15 남북공동선언’이라는 사실상의 ‘사기문건’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유린당하는 상황이 전개되도록 방치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도록 허용할 수 없습니다. 그 같은 준비에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여러분이 아래에 소개하는 저의 부족한 글을 일독(一讀)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부족한 글이기는 하지만 여러분에게 참고가 되어드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봅니다.
이 글은 1999년 15대 국회에서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제가 한 대학교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강연 내용을 2006년 현재의 시점에 적합하도록 업데이트한 것입니다. 만약 이 부족한 글이 이 나라 젊은이들이 올바른 통일관을 갖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고 판단하신다면 주변의 젊은이들에게도 이 글을 읽어보도록 권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李東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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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
[1999.11.23 건국대학교 민족통일연구소 주최 “21세기 통일정책의 방향”에 대한 학술 세미나 개회식에서의 ‘기조연설’문을 업데이트한 것] [발췌]
우리나라는 작년에 ‘국토분단(國土分斷)’ 60주년, ‘국가분단(國家分斷)’ 57주년을 넘겼습니다. 우리는 보통 30년의 세월을 한 세대로 인식하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의 분단사는 벌써 두 개의 세대를 경과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분단’의 장기화는 분명히 민족적 불행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이면 누구에게나, 하루 빨리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당연한 민족지상의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생겨난 슬로건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통일지상주의(統一至上主義)’가 여기서 싹텄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은 절대악(絶對惡)” “통일은 절대선(絶對善)”이라는 관념론적 흑백논리(黑白論理)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통일은 어떠한 통일이라도 좋다”고 ‘통일’을 절대화하는 ‘통일만능론(統一萬能論)’이 풍미(風靡)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이 아니면 곧 분단”이라는 도식적인 이분법(二分法)도 등장했습니다. ‘통일론자(統一論者)’가 아니면 곧 ‘분단론자(分斷論者)’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분단론자’는 곧 ‘통일반대론자(統一反對論者)’의 동의어로 지탄(指彈)되기도 합니다.
이 같은 흑백논리의 저변에는 또 하나의 허구(虛構)의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통일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일인데도 ‘통일반대론자’들 때문에 안 되고 있다”는 허구입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바로 이 같은 허구의 논리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우리 쪽 국민들을 ‘통일지지세력(統一支持勢力)’과 ‘통일반대세력(統一反對勢力)’으로 양분(兩分)하여 이간(離間)시키고 있고, 또 우리 사회의 일각에도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통일’이라는 이슈가 국민을 ‘통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분열’시키는데 이용되는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우리 사회 안에 ‘통일반대론자’가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우리 사회 안에 ‘통일’ 문제에 관하여 견해와 입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크게 볼 때, 그 것은 ‘통일지상론(統一至上論)’과 ‘통일신중론(統一愼重論)’ 사이의 차이입니다. 이 경우 ‘통일신중론’은 ‘통일’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되, 그러한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통일’이 ‘내용’면에서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방법’에 관하여 ‘신중’을 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통일신중론자’들을 ‘통일반대세력’, 또는 ‘분단지향세력(分斷指向勢力)’으로 매도(罵倒)하는 ‘역(逆) 매카시즘’이 기세를 떨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북한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이고, 남의 우리 쪽 사회에서도 목격되고 있는 현상입니다만, 많은 국민들이 ‘통일’을 아주 단순화된 메시지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즉, “통일만 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다분히 주술(呪術)적인, 어떻게 보면 기복(祈福)적이기도 한, 신념체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북한주민들의 경우, '통일'은 어느 사이엔지 기독교인들의 ‘낙원(樂園)’, 불교인들의 ‘극락(極樂)’으로 둔갑(遁甲)하여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질곡(桎梏)을 기꺼이 견디고 이겨내게 하는 ‘마취제(痲醉劑)’와 ‘최면제(催眠劑)’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한국의 강토였던 한반도와 만주(滿洲)에는 본래 단일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개념이 모호했던 단군(檀君)과 고조선(古朝鮮) 시대 이후 이 땅에는 고구려․백제․신라(高句麗․百濟․新羅)의 ‘삼국시대(三國時代)’가 전개되었습니다.
- 신라: BC57-AD935
- 고구려: BC37-AD668
- 백제: BC18-AD660
668년 고구려가 나․당(羅․唐) 연합국에 패망함으로써 우리 역사상 첫 ‘통일국가’가 등장합니다. ‘통일신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국가’로서의 ‘통일신라’의 위상은 많은 논란과 시비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三國統一)’은 자력이 아니라 외세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꺼풀 속을 드려다 보면, 신라의 ‘통일’은 ‘속 빈 강정’에 불과했습니다.
고구려 패망 30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고토(故土)였던 만주에서는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渤海)가 건국됩니다. 이로써, 엄밀한 의미에서는, ‘통일신라’의 존속기간은 발해가 건국된 해까지 30년간에 불과합니다. 이때로부터 발해가 쇠망한 926년까지 228년간의 우리나라는 북의 발해와 남의 신라로 양분된 또 하나의 ‘분단국가’였습니다. 게다가, 남쪽 신라의 영토 내에서는 소위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전개됩니다. 900년에는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가, 그리고 다음 해인 901년에는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이 등장하여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918년 궁예의 ‘태봉’에서 정변이 발생합니다. 궁예를 내몰고 권좌에 오른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開國)합니다. 왕건은 935년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다음해인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후삼국통일'을 이룩합니다. 이로써 비로소 한반도에서는 992년간(고려: 936-1392; 조선: 1392-1910)의 ‘통일국가’ 시대가 막을 열게 됩니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토가 지나치게 위축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초기의 국토는 북으로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456년에 걸친 고려 왕조의 존속기간은 거의 전 기간을 통해 특히 북쪽의 외세와의 무력갈등으로 영일(寧日)이 없었습니다. 고려는 차례를 바꾸어가면서 북방에 등장한 거란족의 ‘요(遼)’ 나라, 여진족의 ‘금(金)’ 나라, 몽골족의 ‘원(元)’ 나라와 간단없는 무력갈등 속에서 조금 씩 조금 씩 북쪽으로 국경선을 밀고 올라갔습니다. 고려의 국경이, 그 것도 겨우 강 하구의 신의주(新義州) 근처에서,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 6대 임금 성종(成宗)때인 993년경이었고 함경남도(咸鏡南道) 함흥(咸興) 근방에 6성을 쌓은 것이 15대 임금 숙종(肅宗)때인 1104년경이었습니다. 1239년부터 시작된 40년간의 대몽(對蒙) 항쟁을 거쳐 고려는 한 때 ‘원’ 제국의 부마(駙馬)국가로 전락합니다.
이 기간 중 ‘원’ 제국에 의한 쌍령총관부(雙嶺總管府)와 동녕부(東寧府)의 설치로 인하여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고려의 국토가 옛날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시의 규모로 줄어들기도 합니다. 우리 국토가 두만강까지 확장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400년대 조선(朝鮮) 왕조 4대 임금, 세종대왕(世宗大王)때였습니다.
- 6鎭과 4郡 설치
우리 세대가 풀어야 할 숙명적 과제인 나라의 ‘분단’과 ‘통일’ 문제는 이 같은 민족사의 큰 흐름 속에서 생각해 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사에서 ‘분단’은 유독 우리 세대만이 유일하게 겪는 고통스런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통일’에 이르는 길이 순탄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이 다르기는 했지만, 과거의 ‘통일’은 모두 무력에 의한 ‘유혈통일(流血統一)’이었습니다.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외세의 힘을 빌어서 이를 달성하는 과오도 범했습니다. 이 같은 ‘통일’을 통하여 ‘통일’을 얻기는 했지만 그 대신 잃는 것도 대단히 많았습니다. 가장 뼈아픈 상실은 국토의 상실이었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이룩하는 대가로 만주라고 하는 광대한 영토를 상실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또다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해야 할 운명을 타고 난 우리 세대가 이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분단’보다 못한 ‘통일’을 택하거나,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분단’ 상태에서 소유하던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롭게 ‘통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단’상태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미덕시(美德視)' 하는 대신 ‘분단’을 ‘죄악시(罪惡視)' 합니다. 문제는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정당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하여 6.25라고 하는 엄청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겪었습니다. 김일성(金日成)의 공산북한은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1950년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전면남침을 감행함으로써 3년간에 걸친 ‘6.25전쟁’이라는 이름의 국제전쟁을 도발하여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수십만 명의 인명을 희생시켰을 뿐 아니라 1천만 명 이상의 남북의 동포들에게 가족이산이라는 단장의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전쟁은 1953년 ‘휴전(休戰)’이라는 형태로 겨우 봉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한반도에서는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어 유명무실(有名無實)해 진 가운데 우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구호 아래 ‘전쟁억지력(戰爭抑止力)’의 유지를 통해 겨우 ‘비전비화(非戰非和)’의 사이비(似而非) 평화를 불안정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남북의 두 동족사회 간에는 상호 철저한 단절과 고립 속에서 엄청난 사회적 이질화가 진행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적대적인 남북의 두 동족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기 상대방에 의한 전쟁도발(戰爭挑發)과 전복책동(顚覆策動)으로부터의 자기체제 방어를 명분으로 심각한 인권의 제약과 갖가지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국토분단’․‘국가분단’․‘민족분단’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엄연한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분단’이야말로 이 역시 하나의 역사적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북의 ‘선택’은 ‘공산주의’와 ‘독재’였고 남의 ‘선택’은 ‘민주주의’와 ‘자유’였습니다. 북의 ‘선택’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입각한 ‘명령사회’였고 남의 ‘선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경쟁사회’였습니다. 북의 ‘선택’은 ‘폐쇄’와 ‘고립화’였고 남의 ‘선택’은 ‘개방’과 ‘국제화’였습니다.
이 같은 ‘선택’의 결과는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1948년에 이루어진 남북의 이같이 상이한 ‘선택’의 결과로 지금 남쪽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가히 민족사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획기적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 지표를 통하여 확인해 봅니다.
2004년도 우리나라의 경제력은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 11위입니다. 53년 13억 달러였던 우리의 GNP는 2004년에는 그 523배인 6,810억 달러로 늘어났고 1인당 GNP는 53년의 67 달러에서 2004년에는 그 211배인 14,162 달러로 늘어났습니다.
- ①미국, ②일본, ③독일, ④영국, ⑤프랑스, ⑥이탈리아, ⑦중국, ⑧스페
인, ⑨캐나다, ⑩인도, ⑪대한민국
한국의 경제는 54년 처음으로 5.6%의 성장률을 기록한 이래 56년과 80년의 두 해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플러스 성장을 계속해 왔습니다. 산업구조는 1차 산업으로부터 3차 산업으로, 경공업 위주로부터 중화학공업 위주로 비중이 크게 이동하여 선진국형(先進國型) 산업구조로 환골탈태(換骨奪胎)되어 있습니다.
1945년 해방 당시와 비교한 광복 60주년 때의 각종 경제지표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45년 대비 쌀 생산량이 2.7배, 철강 생산량이 59.400배, 자동차 생산대수가 50만배, 시멘트 생산량이 6,037배, 선박 건조량이 약 1,900배로 늘어났으며 수출액은 52년 대비 9,200배로 늘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948년 국가분단 시점에서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1945년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 역청탄의 98%, 전력의 92%가 북한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또 1960년의 통계수치에 의하면, 비록 GNP에서는 19억 달러 대 17억 달러로 남이 약간 앞섰지만 1인당 GNP는 94 달러 대 137 달러, 수출액은 3천3백만 달러 대 1억5천4백만 달러로 북한의 경제가 남한을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남북한의 본래의 경제구조는 남농북공(南農北工), 남경북중(南輕北重)의 상호 보완형으로 북이 주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분단으로부터 반세기가 경과한 지금 남북한의 경제는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북한의 경제는 북한이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중지한 1994년 이래 선고만 되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은 파산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경제력 비교>(2004년)
- 인구 48백만 : 23백만 명 = 1/2
- GNI 6,810억 : 208억 달러 = 1/33
- 1인당 GNI 14,162 : 914 달러 = 1/15.5
- 무역총액 4,783억 : 29억 달러 = 1/167
- 수출 2,538억 : 10억 달러 = 1/149
- 수입 2,244억 : 18억 달러 = 1/122
- 발전설비 5,996만 : 777만 kw = 1/7.7
- 발전량 3,421억 : 206억 kw/h = 1/16.6
- 원유도입량 82,579만 : 390만 배럴 = 1/212
- 자동차 347만 : 4,500 대 = 1/771
- 강철 4,752만 : 107만 톤 = 1/44.5
- 시멘트 5,433만 : 563만 톤 = 1/9.6
- 비료 361만 : 43만 톤 = 1/8.3
- 화섬 198만 : 2.5만 톤 = 1/79
지금 북한의 산업설비 가동률은 30%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굶주린 근로자들이 유휴설비들의 환금가치(換金價値)가 있는 부품들을 모두 뜯어내어 양식과 바꾸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유휴설비들은 이제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거덜 난 경제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수백만의 주민이 기아(饑餓)로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밀도강(密渡江)하여 만주 벌판을 헤매고 있습니다. 북에 남은 주민들은 서방세계의 인도적 지원으로 겨우 집단 아사(餓死)를 모면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1차 7개년 계획에 착수한 직후인 1962년 김일성은 이 계획이 완료되면 북한주민에게는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1948년에 이루어진 북의 ‘선택’의 결과인 것입니다.
- 미국 Foreign Policy와 Fund for Peace의 ‘2006년도 실패한 국가지수 (Failed States Index)’에서 조사대상이 된 146개국 가운데 북한은 14위 [수단(1), 콩고민주공화국(2), 코트디봐르(3), 이라크(4), 짐바브웨(5), 차드(6), 소말리아(7), 아이티(8), 파키스탄(9), 아프가니스탄(10)], 한국은 123위 [독일 (124), 스페인(125), 이탈리아(127), 미국(128), 프랑스(129), 영국(130), 싱가포 르(133), 일본(135),,, 호주(139), 뉴질랜드(141), 스위스(142), 아일랜드(143), 핀란드(144), 스웨덴(145), 노르웨이(146)] (‘성공한 국가지수’로는 23위)
여기서 우리는 1948년의 시점에서 우리의 ‘선택’이 분단이 아닌 다른 것, 즉 무리를 무릅쓴 우격다짐 ‘통일’이었을 경우 오늘 우리의 현실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지를 상상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을 듯 합니다.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그 때 우리의 ‘선택’이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었다면, 그 ‘선택’이 초래한 결과는 미․쏘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信託統治)’였던가 아니면 ‘공산화 통일’, 또는 내용은 ‘공산화’인 거죽만의 ‘중립화(中立化) 통일’ 가운데 어느 하나로 귀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경우가 되었더라도, 그렇게 성취된 ‘통일국가’의 지금의 모습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모습에는 크게 못 미치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 때 우리가 ‘신탁통치’를 수용했었다면, 오늘의 우리나라는 여전히 좌우대립(左右對立)의 사상적․이념적 혼미(昏迷) 속에서 방황을 계속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마도 이미 ‘공산화’의 수순(手順)이 진행되어 있기 쉽습니다.
만약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통일국가’가 실현되었다면 지금 그 ‘통일국가’는 오늘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변모하여 있을 것입니다. 또 ‘공산화’가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면, 지금 그 ‘통일국가’의 운명이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외국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수많은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가들의 운명과 궤적을 함께 하고 있지 않으리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습니다.
그 동안 남북의 두 상이한 체제 간에 벌어진 엄청난 발전의 격차는 1948년 일시적 ‘차선책(次善策)’의 차원에서 ‘통일’을 잠시 유보하고 ‘분단’의 길을 택한 대한민국(大韓民國) 건국 주역들의 ‘선택’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곧, ‘분단’이 반드시 ‘죄악’일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입증된 것입니다.
이 때 ‘분단’의 ‘선택’은 곧 ‘체제’와 ‘이념’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단’을 ‘선택’한 결과로 그 동안 남북 간에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정글의 규칙이 지배하는 가운데 상호 우열을 다투는, 사활(死活)을 건, 체제경쟁이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 체제경쟁에서 승자(勝者)가 되어 살아남기 위하여 남북은 그 동안 혼신(渾身)의 힘을 기우려 왔습니다. 남은 이 체제경쟁에서 승자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체제’와 ‘이념’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체제’와 ‘이념’의 우월성만이 승리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 위대한 승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일면 국방․일면 건설”의 기치아래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뭉쳐서 피와 땀을 받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분단’을 미화(美化)시키거나 예찬(禮讚)할 필요가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분단’은 어디까지나 불가피했던 “차선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분단’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수많은 긍정적인 일들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도매금(都賣金)으로, 부정․부인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해서는 안 되는 진실은 남쪽의 우리가 ‘분단’을 선용(善用)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본 반면 북쪽의 공산정권은 ‘분단’을 악용(惡用)함으로써 절망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토분단’ 61주년, ‘국가분단’ 58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체제경쟁에서 이긴 승자의 입장에서 ‘통일’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시리(時利), 즉 시간상의 유리한 고지(高地)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에 ‘분단’이 우리에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통일’도 당연히 ‘선택’의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조건은, 체제경쟁에서 이긴 승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정해야 할 우리의 몫이지 패자(敗者)인 북쪽의 몫이 아닙니다.
‘통일’의 순간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미 실패한 북의 체제가 무대(舞臺)로부터의 퇴장(退場)을 앞두고 잔열(殘熱)을 불태우는 임종(臨終)의 시간일 뿐입니다. 종착역(終着驛)을 아는 이상 우리에게는 초조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분단’ 반세기를 넘겼다는 것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문이 열리려 하고 있는 새 천년의 유장(悠長)한 시공간(時空間) 속에서는 수유(須臾)에 불과합니다. 나무 가지에 달린 채로 병들어 썩어들어 가고 있는 감을 굳이 따내는 수고는 불필요합니다. 저절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독일통일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어차피 ‘통일’이 되면 남북 간에 조성된 경제발전의 격차는, 싫든지 좋든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남쪽의 ‘재력(財力)’으로 메워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과는 달리, 우리의 어려움은 아직도 우리의 여력(餘力)이 충분치 않다는데 있습니다. 구(舊) 서독(西獨)의 국력을 가지고도, 통독(統獨) 이후 1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독일은 소화불량성 배탈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국력을 가지고 ‘독일식 통일’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과연, 우리의 경우, 그로 인한 후유증이 소화불량성 배탈을 호소하는 정도로 그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택’은 자명합니다. 아직은 설익은 ‘통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국력을 더욱 키워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독일식 통일’에 대비하는데 만전을 기해야 할 때입니다. 파이를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북한이 그렇게 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이러쿵저러쿵 이른바 ‘통일방안’을 가지고 ‘방법론’의 차원에서 ‘통일’ 문제에 접근하려 시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같은 노력은 도로(徒勞)에 불과합니다. 왜냐 하면, 남북의 극단적으로 이질적이고 상호 부정적인 두 체제 사이에 ‘통일방안’에 관하여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2000년6월15일자 ‘남북공동선언’ 제2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을 가 지고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
우리의 ‘통일’ 노력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짓거나 신기루(蜃氣樓)를 쫓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와는 달리 ‘통일’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착실하게 관리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과정’으로서의 ‘통일’은 한마디로 ‘분단’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통일국가’라는 ‘결과’보다는 ‘분단관리(分斷管理)’라는 ‘과정’에 치중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분단관리’ 단계를 도외시하는 ‘통일국가’ 논의는 한낱 정치적 선전구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통일’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현실적인 노력은, 우선 남북 분단상태를 제도화하여 이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면서, 이미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북한에서 체제변화가 발생함으로써 쌍방의 두 상이한 체제가 통합되는데 필요하고도 충분한 정도의 “가치의 상사성(相似性)”과 “체제의 상용성(相容性)”이 확보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단’ 및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것은 분단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분단’과 ‘통일’의 주체세력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동안 ‘분단’과 ‘통일’ 문제는 ‘분단’을 직접 체험한 ‘분단’이전 세대의 전유물(專有物)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통일’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當爲)’의 문제이고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성(感性)’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분단’은 “본래 하나였던 것이 인위적으로 둘로 나누어지는데서 초래된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통일’은 “분단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인구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분단’이전 세대는 숫자 면에서 격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구의 90% 이상에게 ‘분단’은 스스로 ‘체험’한 ‘직접적 사실’이 아니라 제3자를 통하여 ‘전문(傳聞)’한 ‘간접적 사실’일 뿐입니다. 따라서 ‘통일’ 역시 이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는 현실적 문제라기보다는 머리로 오는 관념적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의식화된 운동권 학생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들에게 ‘통일’은 관념적으로는 ‘절대성’을 지니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상대적’ 이슈로 퇴색(褪色)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입니다. ‘신세대’는 ‘기성세대’에 비해 북한의 존재를 ‘감성적’ 상대보다는 ‘이성적’ 상대로 인식하며 ‘분단’과 ‘통일’ 문제도 ‘감성적’ 차원보다는 ‘이성적’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통일’이 ‘분단이전 세대’에게 ‘원상회복(原狀回復)’, 즉 Status Quo Ante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재통합(Reunification)’의 문제로 인식되었다면, ‘분단이후 세대’에게는 하나의 창조적 가치로서 ‘새로운 통일(New Unification)’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음이 들어 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차이는 앞으로 우리의 ‘통일정책’의 향배(向背)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인구의 연령별 분포의 급격한 변화로 말미암아 어제까지 전전(戰前)의 ‘기성세대’의 전관수역(專管水域)이었던 ‘분단’과 ‘통일’의 영역이 이제는 전후(戰後)의 ‘신세대’의 것으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
“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
- 李東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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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5-25, 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