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살해범 文世光과 朴槿惠 테러범

육영수 암살 사건은 조총련과 북한정권의 합작품이다. 조총련이 포섭, 교육하고 북한이 지령했다.
1974년 8월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연설중이던 朴正熙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가 살해에 실패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陸英修 여사를 쏘아 죽게 했던 재일동포 文世光은 조총련 오사카 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에 의해서 포섭되어 암살범으로 교육되었다. 金은 文을 북한공작원에게 소개하여 구체적인 지령을 받도록 했다. 즉, 육영수 암살 사건은 조총련과 북한정권의 합작품이다. 최근 民團이 反국가단체 조총련과 화해하고 통일사업을 함께 펼쳐가기로 했다는데, 이는 民團內로 침투한 조총련 프락치와 民團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압력이 만들어낸 '民團內 좌익 쿠데타'라고 하여 많은 在日동포들이 분노하고 있다. 금명간 이 좌익쿠데타는 민단내의 애국자유세력의 궐기로 진압될 것으로 보인다.

朴槿惠 대표에 대한 살해미수 테러범이 단독범인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가가 수사의 쟁점인데, 文世光이 어떻게 조종당했는가를 알면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필자가 쓴 朴正熙 전기의 관련부분을 소개한다.


<文世光, 殺意의 탄생

文世光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오사카 이쿠노區는 在日교포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으로 도시빈민층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文世光은 일찌감치 민족차별 문제에 눈을 떴을 것이다. 文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치열하던 때였다. 文은 과격파에 속했다.

난조 세쿠오(南條世光: 문세광의 일본 이름)는 고교 시절 사회과학연구회의 멤버였다. 그가 고바야시 미키코(小林美喜子·요시이 미키코의 처녀 때 이름.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한 후 요시이 미키코가 되었다)를 만난 것은 이 서클에서였다. 여고 재학 시절의 미키코도 文世光 못지않은 운동권이었다. 미키코는 일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고 시절에 같은 반 친구들은 文과 내가 꼭 결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내게는 그가 첫사랑이지요. 상대가 한국 사람이니까 집에서 반대하더냐구요. 실은 그 반대랍니다. 내가 결혼할 것을 바라면 文은 「결혼은 한국 여성과 하겠다」고 단호히 말했어요』

고교를 중퇴한 文은 1968년부터 民團(민단) 이쿠노 지부에 가입해 韓靑(한청) 활동에 참여했다. 이때의 文은 말수가 적었고 무정부주의적인 성향도 있었다. 1971년 도쿄 民團에서 분란이 일어나자 文은 非주류파에 가담해 행동을 했다. 1971년 8월 民團 도쿄본부 습격사건 때는 선봉으로 참여해 오른팔에 부상을 입었다. 文이 左派(좌파)로 기운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해 9월3일 조총련계 청년조직 朝靑과 민단계의 韓靑은 오사카의 페스티벌 홀에서 「7·4 공동성명을 지지하는 在日동포 오사카 청년학생 공동대회」를 가졌다. 韓靑 소속이던 文은 조총련 오사카 西지부 정치부장 金浩龍을 여기서 만났다.

文世光 사건에 관한 검찰 공소장과 법원(1심) 판결문은 文과 金浩龍의 관계를 소상히 적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첫 만남 이틀 후인 1972년 9월5일 밤 10시쯤 金浩龍은 文世光의 집을 방문, 『같은 민족끼리 정치이념을 초월하여 자주 만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후 매월 한두 차례씩 만날 때마다 金은 『북조선은 金日成 주석의 주체사상 아래 모든 인민이 단결하여 잘 사는 사회를 이룩하고 있다. 반면 남조선의 경제는 일본 자본에 수탈당하고 있으므로 민생고가 날로 심해 가고 있다』는 교양을 했다>

1973년 8월 金大中씨 납치사건이 일어나자 9월 초 일본에서는 「金大中 구출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 위원회에 가입한 文은 오사카 주재 한국 총영사관을 점거하고 영사관 직원을 인질로 삼아 金大中씨와 교환할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文은 反韓운동가로 나선 것이다. 文世光에게 朴대통령에 대한 殺意가 싹트게 만든 것은 金大中 납치사건 이후 일본을 휩쓸던 反韓 분위기였다.


옛 애인과 부부로 가장, 홍콩으로

정보부의 조사과정에서 文은 1973년 10월 하순 자신의 집을 찾은 金浩龍과 이런 약속을 했다고 진술했다.

「朴대통령 저격장소는 삼일절 기념식장으로 한다. 무기는 권총으로 하되 출처를 숨기기 위하여 제3국에서 購得하기로 한다. 무기 구입 자금은 金浩龍이 조달하고 무기 구입은 혁명정신에 입각하여 文世光이 직접 한다」

이 무렵 文과 그의 첫사랑 미키코는 각자의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文은 한국 여성 姜成淑과 결혼하였고, 미키코는 요시이 유키오와 결혼하였다. 文과 미키코는 연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973년 10월 하순 어느 날 정오 오사카 天王寺驛 근처 에코호텔 지하 다방에서 文과 미키코가 만났다.

文은 『한국의 공산혁명을 성공시키려면 朴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며 『권총을 구입하기 위해 홍콩에 가야겠는데 나는 韓靑과 金大中 구출위원회 활동 등으로 인해 한국대사관에서 여권을 발급받기 어렵다. 당신 남편 이름으로 일본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키코는 文의 부탁을 들어 주겠다고 대답하고 『부부로 가장하여 함께 홍콩에 가자』는 文의 제의에도 동의했다고 한다.

1973년 11월11일 金浩龍은 文을 찾아와 여비 등의 명목으로 50만 엔을 주었다. 다음날인 文은 한큐여행사를 찾아가 요시이 유키오의 서류에 자신의 사진을 첨부해 제출하며 여권 작성을 의뢰하였다. 11월17일 文은 요시이 유키오 명의의 단수여권을 발급받았다.

11월19일 부부로 위장한 文과 미키코는 오사카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에 도착했다. 이날부터 두 사람은 홍콩과 구룡반도 일대의 고물 시장, 장물 시장, 총포점 등을 돌아다니며 권총 구입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가 여행을 떠나기 전날인 11월18일부로 남긴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일본 오사카 경찰 발표).

「올해(1973년)는 朴정권이 金大中씨 사건으로 붕괴의 시기에 있어 11월의 유엔 총회가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일인독재를 타도하는 것이 한국혁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 나는 죽음이냐, 승리냐의 구호 밑에서 혁명전쟁의 여행을 출발한다」

일본 경찰에 따르면 文은 홍콩을 거쳐 한국에 들어갈 예정으로, 서울의 한 호텔을 예약해 놓고 홍콩으로 떠났었다고 한다. 文이 서울行을 포기한 것은 홍콩에서 무기 구입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文을 조사했던 전직 정보부 요원은 『우리는 文과 미키코가 불륜의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文은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키코와는 혁명적 동지 관계이기 때문에 육체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 文의 진술이었다』고 말했다.


만경봉號에서 만난 북한공작원

11월 하순 文은 다시 金浩龍을 만났다. 文은 「홍콩여행에서 권총 구입에는 실패하였으나 해외여행의 경험을 체득하였고, 불법여권 사용에 성공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金은 『앞으로 계속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1974년 정초가 되자 金浩龍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韓德銖 조총련 중앙본부 의장이 혁명과업 수행을 위하여 가일층 노력하라는 당부와 함께 정초 선물을 보내왔다』며 인삼주 한 병과 과실주 한 병을 내놓았다.

1974년 2월 초 金이 또 文의 집을 찾아왔다. 金은 『朴正熙 암살은 8·15 기념식행사 때로 하라. 앞으로 이 계획에 전념하기 위해 韓靑과 金大中 구출대책위원회 등의 모든 조직활동에서 손을 떼라』는 지시를 내렸다. 金은 또 『도쿄 아다치(足立) 소재 아카후도(赤不動) 병원에 십이지장궤양을 구실로 1개월간 입원하라. 입원방법은 병원장을 찾아가 가와가미 유지(川上勇治)라고 말하면 된다. 병원 비용은 우리가 댄다』고 말했다.

입원한 文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하였다. 3월11일까지 입원해 있는 동안 文은 金浩龍으로부터 입원비로 16만 엔, 생활비로 85만 엔, 잡비로 5만 엔을 받았다.

5월3일 金浩龍은 文에게 『4일 밤에 오사카港에 정박 중인 만경봉號에 승선하라』고 지령했다. 4일 밤 9시경 文은 金浩龍이 보낸 사람(성명 미상)의 안내로 15명의 조총련계 교포와 함께 만경봉號에 탔다.

한 시간 가량 船內에서 대기한 文은 밤 10시쯤 선박 안 식당에서 47세 가량으로 보이는 북한인을 만났다. 文은 북한인으로부터 『그동안의 영웅적 사업은 이미 보고를 받아서 잘 알고 있다. 혁명정신과 투쟁경력에 치하를 보낸다. 현 시점에서 남조선의 공산혁명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朴正熙를 암살하는 길밖에 없으니 이 과업을 끈기 있게 수행해 주기 바란다』는 지시를 받았다.

6월 말 文은 요시이 유키오의 집 부근 다방에서 요시이 부부를 만났다. 먼저 요시이 유키오가 『내가 북조선에 가게 되었는데 여권 신청을 하면 당신이 홍콩여행할 때 내 명의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난다. 걱정이다』는 말을 했다.

文은 『나는 이번 8·15에 朴正熙를 암살해야 한다. 당신의 북조선 방문을 다음 기회로 연기하고 이번에도 당신 명의의 여권으로 남한에 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유키오는 文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7월 초 文은 범행에 사용할 총을 오사카 南경찰서 고츠(高津) 파출소에서 훔치기로 했다. 그는 여섯 차례 승용차를 몰고가 파출소 뒤쪽 주차장에 세워 놓고 정찰했다.

7월18일 새벽 4시30분 순찰을 돌고 온 히라시마(平島), 하타(畑) 두 경관이 파출소에서 잠에 들었다. 文은 뒷문을 파이프 렌치로 따고 들어가 이들이 풀어 놓은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과 실탄 다섯 발, 그리고 다른 권총 한 자루와 실탄 다섯 발을 훔쳤다.

文은 이때 같이 훔친 수갑이 달린 권총집을 나라(奈良) 현의 야마토천(大和川)에 버렸다고 진술하였다. 일본 경찰은 文의 진술을 토대로 야마토川 부근을 수색해 이 권총 케이스를 찾아냈다.


『밤이슬이 내리듯 방아쇠를 당겨라』

미키코로부터 남편 요시이 유키오의 신원서류를 받은 文은 7월20일 한큐여행사를 찾아가 여권 발급, 서울까지의 왕복 항공권, 그리고 조선호텔 예약을 의뢰하였다. 7월24일 文은 여권과 항공표를 발급받고, 7월30일에는 오사카 한국 총영사관에서 관광 목적의 사증을 발급받았다.

文은 7월24일 저녁 金浩龍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고 전화했다. 다음날 文의 집 앞에서 金은 80만 엔을 주면서 『빛이 내리듯, 밤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듯 방아쇠를 당겨라. 가급적이면 安重根 의사의 경우처럼 1m 이내의 거리로 접근하여 사격하라』고 말했다.

8월5일 文은 산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구입, 내부를 뜯어내고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을 감추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文은 8월6일 오전 11시30분 오사카發 서울行 대한항공기에 탑승, 오후 1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文이 이날 갖고 들어온 가방은 13kg짜리 하나였다. 권총이 든 라디오를 이 가방에 넣어서 세관을 통과한 것이었다. 당시 김포공항 검색대 근무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면세품이기 때문에 별다른 검색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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