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전답 1결마다 조 10말을 거두는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는 찬성이 9만 8557명, 반대가 7만 4149명으로 집계됐다.
여론 수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세종
조선시대에도 여론조사를 한 사례가 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도 임금들이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정책을 집행하곤 했다는 얘기다. 여론 수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세종이었다.
영조는 직접 대궐 밖으로 나가 민심 파악
5ㆍ31 선거를 맞아 여론조사기관들이 호황을 맞고 있다. 출마자들은 시시각각으로 언론을 통해 발표되는 여론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유권자의 표심 잡기에 골몰하고 있다. 정부도 정책 입안과정, 집행과정에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사례들이 발견된다. 과학과 통계가 발달한 요즘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여론조사가 활발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여론조사를 한 사례가 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도 임금들이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정책을 집행하곤 했다는 얘기다. 여론 수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세종이었다.
세종 12년(1430) 3월 5일 호조에서 전답 1결[곡식 수확량을 기준으로 정한 토지 면적. 한 움큼을 1파(把),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結)이라 했다]마다 세금으로 조 10말을 거둘 것을 건의하자 세종은 이렇게 답한다.
“정부 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각 품관(관직은 없고 품계만 갖고 있던 관리의 집단)과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이에 대한 첫 보고가 발견된 것은 세종 12년 7월 5일 실록이었다.
<안순(호조 판서):“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었사온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 평안 황해 강원 등 각 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임금:“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행할 수 없다.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하면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일을 숙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호조는 8월 10일 여론조사에 대한 종합 보고를 올렸으니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의 3품 이하 현재 재직 중인 259명과 전직자 443명 등은 찬성하고…. 여산 부원군 송거신을 비롯하여 3품 이하 현직자 393명과 전직자 117명은 반대하고…. 유후사의 품관과 촌민 등 1123명은 찬성, 71명은 반대하며…. 경기의 수령 29명과 품관 촌민 등 1만 7076명은 찬성하고 수령 5명과 품관 촌민 합계 236명은 반대한다 합니다.”
결국 전답 1결마다 조 10말을 거두는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는 찬성이 9만 8557명, 반대가 7만 4149명으로 집계됐다. 찬반양론이 팽팽하자 세종은 황희 등에게 의논하여 결정할 것을 지시했다. 3월 5일 여론조사를 하라는 어명(御命)에 의해 시작된 여론조사가 5개월 후인 8월 10일에 집계되었으니 당시 교통 사정이나 통신 사정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세월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민의(民意)를 읽어 정책에 반영하려는 시도들이 잦았으니, 영조 시절에는 정책 집행에 앞서 임금이 직접 대궐 밖으로 나가 의견을 들은 다음 의사결정을 한 사례도 발견됐다. 영조 26년(1750) 7월 3일, 그 무렵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곤궁해지자 임금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돕고, 세수(稅收)를 안정시키기 위해 호포를 호전(군역세로 양인에게 거두던 포 대신 가호를 대상으로 돈을 거두는 것. 양반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치 못함)으로 바꾸어 실시하는 균역법을 실행할 것을 지시한다. 아울러 유생(儒生)들에게도 호전을 부과할 것을 지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너희들은 유생에게 호전을 부과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것이나 위로 삼공에서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역은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 너희들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는 모두가 나의 적자(嫡子)다. 내가 만일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혹은 그 기간)에 있을 때라면 나도 의당 호전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지시는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노비나 주인이나 똑같이 호전을 내는 것이 명분을 문란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니, 오늘로 치면 집단 이기주의의 덫에 걸린 셈이다. 유생들이 모두 호전 시행을 반대하자 영조는 “유식한 선비들은 조금 기다려라. 내가 다시 묻겠노라” 하고는 대궐 문 밖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 정책을 집행했다.
서울 백성들은 호전이 편하다고 하는 자가 많았지만 유생과 신하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허튼말을 하니 믿을 수 없습니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사관은 준엄한 필치로 신하들의 행태를 꾸짖는다.
<임금이 폐단을 고칠 대책을 널리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묘책을 내어 임금의 걱정을 덜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이 이러하니 어떻게 나라 일을 도모하겠는가.>
민주주의가 만개한 대한민국이건만 이 나라의 권력자와 지도층들이 민의, 여론을 소중히 하고, 민초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한다는 평가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리하여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 실세들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에게 호통을 치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여과없이 언론을 통해 전달되면서 “오만하다” “건방지다”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말까지 듣고 있으니…. 그 시절에도 민의를 소중히 여기는 최고 지도자들의 마음가짐이 그립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여론 수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세종
조선시대에도 여론조사를 한 사례가 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도 임금들이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정책을 집행하곤 했다는 얘기다. 여론 수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세종이었다.
영조는 직접 대궐 밖으로 나가 민심 파악
5ㆍ31 선거를 맞아 여론조사기관들이 호황을 맞고 있다. 출마자들은 시시각각으로 언론을 통해 발표되는 여론조사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유권자의 표심 잡기에 골몰하고 있다. 정부도 정책 입안과정, 집행과정에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사례들이 발견된다. 과학과 통계가 발달한 요즘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여론조사가 활발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여론조사를 한 사례가 왕조실록 기록을 통해 밝혀졌다. 조선시대에도 임금들이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정책을 집행하곤 했다는 얘기다. 여론 수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세종이었다.
세종 12년(1430) 3월 5일 호조에서 전답 1결[곡식 수확량을 기준으로 정한 토지 면적. 한 움큼을 1파(把),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結)이라 했다]마다 세금으로 조 10말을 거둘 것을 건의하자 세종은 이렇게 답한다.
“정부 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각 품관(관직은 없고 품계만 갖고 있던 관리의 집단)과 각 도의 감사 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의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이에 대한 첫 보고가 발견된 것은 세종 12년 7월 5일 실록이었다.
<안순(호조 판서):“공법의 편의 여부를 가지고 경상도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었사온즉 좋다는 자가 많고 좋지 않다는 자가 적었사오며, 함길 평안 황해 강원 등 각 도에서는 모두들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임금:“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행할 수 없다.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하면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일을 숙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호조는 8월 10일 여론조사에 대한 종합 보고를 올렸으니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의 3품 이하 현재 재직 중인 259명과 전직자 443명 등은 찬성하고…. 여산 부원군 송거신을 비롯하여 3품 이하 현직자 393명과 전직자 117명은 반대하고…. 유후사의 품관과 촌민 등 1123명은 찬성, 71명은 반대하며…. 경기의 수령 29명과 품관 촌민 등 1만 7076명은 찬성하고 수령 5명과 품관 촌민 합계 236명은 반대한다 합니다.”
결국 전답 1결마다 조 10말을 거두는 문제에 대한 여론조사는 찬성이 9만 8557명, 반대가 7만 4149명으로 집계됐다. 찬반양론이 팽팽하자 세종은 황희 등에게 의논하여 결정할 것을 지시했다. 3월 5일 여론조사를 하라는 어명(御命)에 의해 시작된 여론조사가 5개월 후인 8월 10일에 집계되었으니 당시 교통 사정이나 통신 사정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세월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민의(民意)를 읽어 정책에 반영하려는 시도들이 잦았으니, 영조 시절에는 정책 집행에 앞서 임금이 직접 대궐 밖으로 나가 의견을 들은 다음 의사결정을 한 사례도 발견됐다. 영조 26년(1750) 7월 3일, 그 무렵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곤궁해지자 임금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돕고, 세수(稅收)를 안정시키기 위해 호포를 호전(군역세로 양인에게 거두던 포 대신 가호를 대상으로 돈을 거두는 것. 양반들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치 못함)으로 바꾸어 실시하는 균역법을 실행할 것을 지시한다. 아울러 유생(儒生)들에게도 호전을 부과할 것을 지시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너희들은 유생에게 호전을 부과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길 것이나 위로 삼공에서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부역은 고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 너희들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는 모두가 나의 적자(嫡子)다. 내가 만일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혹은 그 기간)에 있을 때라면 나도 의당 호전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지시는 유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노비나 주인이나 똑같이 호전을 내는 것이 명분을 문란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니, 오늘로 치면 집단 이기주의의 덫에 걸린 셈이다. 유생들이 모두 호전 시행을 반대하자 영조는 “유식한 선비들은 조금 기다려라. 내가 다시 묻겠노라” 하고는 대궐 문 밖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 정책을 집행했다.
서울 백성들은 호전이 편하다고 하는 자가 많았지만 유생과 신하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허튼말을 하니 믿을 수 없습니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사관은 준엄한 필치로 신하들의 행태를 꾸짖는다.
<임금이 폐단을 고칠 대책을 널리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 가운데 한 사람도 묘책을 내어 임금의 걱정을 덜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이 이러하니 어떻게 나라 일을 도모하겠는가.>
민주주의가 만개한 대한민국이건만 이 나라의 권력자와 지도층들이 민의, 여론을 소중히 하고, 민초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한다는 평가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리하여 최고 권력자와 그 주변 실세들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에게 호통을 치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여과없이 언론을 통해 전달되면서 “오만하다” “건방지다”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말까지 듣고 있으니…. 그 시절에도 민의를 소중히 여기는 최고 지도자들의 마음가짐이 그립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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