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트 맥주의 '태극기 말소사건'

<태극기 말소사건>은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진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손기정 선수를 생각하라. 태극기가 얼마나 소중한 지..

하이트맥주 측은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면서 '월드컵을 소재로 선수 유니폼에 태극기(특정국가 국기)를 내보내는 광고를 내보낼 경우, FIFA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으면 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염원인 우승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태극기 대신 다른 국가상징을 내보낸다는 것이 한반도기를 내보내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나.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



70년 전 <일장기 말소사건>이 망국의 설움을 일깨워 준 사건이라면, 2006년 6월 하이트맥주의 <태극기 말소사건>은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진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타이 손, 야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수에 얽힌 이야기는 언제 다시 봐도 가슴 뭉클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을 때, 한 독일인이 썼다는 손기정 선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었다.

재작년 8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렸던 <올림픽 108년, 그리고 손기정전(展)>을 관람한 적이 있었다.

이 전시회에는 서양화가 강형구 화백이 수집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관련 사진, 손기정 선수의 사진,유품,자료 등이 전시됐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이 손기정 선수에게 헌정한 23분짜리 기록영화였다.

레니 리펜슈탈은 당대 세계 최고의 영화감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를린 올림픽 공식 영화인 <민족의 제전>을 제작한 인물. 당시 리펜슈탈 감독은 <민족의 제전> 가운데 개막식, 마라톤 경기 및 시상식, 폐막식 장면 등을 발췌해 손선수에게 헌정했던 것이다.

짧은 영화였지만, 정말 멋진 영화였다. 개막식 장면에서는 파시즘의 광기가 지배하던 1930년대의 불안한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라톤 장면에서는 대지를 달리는 사나이들의 거친 숨소리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손기정 선수가 영국의 어네스트 하퍼 선수를 저 멀리 제치고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와 결승점에 골인한다. 그 순간 아나운서는 외친다.

“기타이 손, 야판!”

각국에서 온 건각들과 함께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42.195㎞를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던 나는, 아나운서의 멘트를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그러나 한 순간 잊고 있었던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상기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 그랬었다. 그때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었다. 손기정은 ‘손기정’이 아니라, ‘기타이 손’이었고, 남승룡은 ‘남승룡’이 아니라 ‘소류 난’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국은 ‘코리아’가 아니라 ‘야판(재팬의 독일식 발음)’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유명한 마라톤 시상식 장면을 보여준다. 2등을 한 영국의 어네스트 하퍼는 가슴을 펴고 국기를 우러러보는 반면, 1위을 한 손기정과 3등을 한 남승룡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장면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두 사람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불쌍했다. 너무나 불쌍했다. 인류 최대의 제전에 나가 당당하게 우승을 하고도 조국의 깃발을 달고 나갈 수 없었던 그들이, 죄인처럼 처연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그들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일약 전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시인 심훈은 이렇게 노래했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

- 백림 마라톤에 우승한 손-남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의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 하는 아래에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에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였던 고토의 하늘로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은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고 외쳤다. 그것은 ‘이겼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못난 식민지 백성의 처절한 절규였다.

손기정, “우리나라 일장기가...”

심훈은 손기정, 남승룡에게 헌정한 시에서 그들을 ‘조선의 남아’라고 불렀지만, 현실은 달랐다. 귀국한 손기정은 철저히 ‘대일본제국’ 신민이기를 강요당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재작년 손기정전시회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일제의 강요에 의해 만든 선전음반도 공개되었다.

이 음반은 “저는 손기정입니다. 우리들은 진정한 책임을 지고 8월9일 오후 스따뜨에 나섰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됐다.

이 음반 중간쯤 가서 나는 다시 한번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손기정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였습니다. 큰 기를 휘두르며 ‘6㎞ 남았다’고 외쳐...”

“시상대에...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우리나라 태극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일장기’였다. 손기정이 말한 ‘우리나라 국가’는 ‘애국가’가 아니라, 천황의 치세가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기미가요’였다.

아마 손기정도 이 방송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했을 것이다.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일장기를 ‘우리나라 일장기’라고, 기미가요를 ‘우리나라 국가’라고 말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미웠을 것이다. 그래서, 한 순간 손기정의 목소리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서 윽박질렀다.

“크게 읽어!”

그러자 손기정은 다시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승리....”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리나라’는 ‘대일본제국’이었다.

1936년 ; <일장기 말소사건>


하지만 그때도 일장기를 ‘우리나라 국기’로, ‘대일본제국’을 ‘우리나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을 받아든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가 달려있는 그 사진을 그냥 내보낼 수가 없었다. 사진부장 신냑균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동료인 이상범(동양화가)에게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936년8월25일자 동아일보에는 일장기가 지워진 선수복 차림의 손기정 선수의 사진이 실렸다.

그 댓가는 혹독했다. 동아일보는 9개월간 정간당했다. 사장 송진우, 주필 김준연, 편집국장 설의식, 기자 이길용은 언론계에서 쫒겨났다. 사회부장 현진건(소설가), 사진부장 신낙균, 화가 이상범은 체포되어 구류를 살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2006년 ; <태극기 말소 사건>

그런데, 최근 <태극기 말소 사건>이 벌어졌단다. 독일월드컵이 개막되어 다시 한번 태극기가 물결치고 ‘대~한민국’이라는 환호 소리가 이 강산에 진동하기를 고대하고 있는 이때, 그리고 가능하다면 손기정 선수가 70년 전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시상식대에 올랐던 그 베를린 스타디움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꿈을 꾸고 있는 이때, 국가대표 축구팀 가슴에서 태극기를 지우고 한반도기를 그려 넣는 해괴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태극기 말소사건>을 저지른 것은 하이트맥주.

이 회사가 국가대표 축구팀이 선전(善戰)을 기원한답시고 내보낸 광고를 보면 선수들 가슴에는 태극마크 대신 한반도기가 붙어있었다.

참, 기도 안 찬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선전을 기원한다면서, 태극마크가 아니라 한반도기라니....

더 웃기는 것은 ‘라이트 코리아’, ‘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여성모임(대세모)’등 애국단체들이 하이트 본사를 방문해 항의하자, 하이트 관계자들이 했다는 변명이다.

그들은 “정치적 의도는 없었다”면서 '월드컵을 소재로 선수 유니폼에 태극기(특정국가 국기)를 내보내는 광고를 내보낼 경우, FIFA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으면 이를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염원인 우승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태극기 대신 다른 국가상징을 내보낸다는 것이 한반도기를 내보내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나.

아, 그래, FIFA에 낼 로열티 절약하느라 그랬다면 누가 이쁘다고 할 줄 알았나? ‘로열티 몇 푼 아끼겠다고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한반도기로 바꿔치기한 하이트맥주의 작태는 돈 몇 푼에 조국을 팔아먹은 비열한 짓거리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태극기 대신 다른 국가 상징’운운한 것도 웃기는 소리다. 도대체 언제부터 한반도기가 대한민국의 ‘국가상징’이 됐나?

태극기를 내보내는 것이 어렵다면 태극마크를 변형해서 내보낼 수도 있고, 무궁화 표식으로 대신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건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되는 일이다.

행여 하이트맥주가 FIFA에 로열티 안 내면서도 ‘우리의 염원인 우승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그런 광고를 내보냈다고 해서 축구팬들이 그 마음을 갸륵하게 여기리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오산이다. ‘붉은 악마’는 작년 8-15민족대축전 남북축구경기 당시 주최측이 태극기와 ‘대~한민국’ 연호를 금지하겠다고 하자, 아예 경기 응원 자체를 보이코트했었기 때문이다.

하이트맥주가 왜 그런 닭짓을 했을까?

혹시 십수년간 천연암반수를 뽑아 쓰는 바람에 천연암반수가 고갈되자, 북한 백두산이나 묘향산에서 천연암반수를 뽑아 쓰기 위해 북한 당국을 향해 설레발을 친 것은 아닐까?

한총련이나 전교조, 민노총, 열우당이나 민노당 같은 세력들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또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아래서 먹고 사는 이나라 최대의 맥주회사까지 태극기를 대신할 국가의 상징으로 한반도기를 떠올렸다는 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이 얼마나 무너져 내렸는지, '우리 민족끼리'라는 주술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6-15공동선언 이래 김정일과 야합하면서 끊임없이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허물어 온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조성한 것이다.

70년 전 <일장기 말소사건>이 망국의 설움을 일깨워 준 사건이라면, 2006년 6월의 <태극기 말소사건>은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진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대한민국은 정말 가망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만다. 다행히 '라이트코리아','대세모'등 애국단체들이 하이트맥주에 대해 1차 경고를 발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하이트맥주의 변명은 그들이 아직도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응징이다. 장사꾼들에게 제일가는 경고는 그의 물건을 안 사 주는 것이다. 하이트맥주가 관련 광고를 거두어들이고 제대로 된 사과를 할 때까지 하이트맥주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고, 사장실에 항의전화를 해야 한다.

OB 맥주에 밀려 만년 2위만 하다가 ‘100% 천연암반수’라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으로 대역전극을 벌인 하이트맥주의 진취성과 자기혁신의 정신을 나는 좋아했었다. 맥주집이나 음식점에서 맥주를 시켰을 때, 종업원이 습관처럼 하이트맥주를 들고 와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던 것도 그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늘부터 나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맥주를 시킬 일이 있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기 맥주 한 병. 하이트맥주만 아니면 돼요”라고....

* 주의) 프라임, 스타우트,엑스필, 칼스버그, 포스터스(이상 맥주), 랜슬롯, 커티샥(양주), 퓨리스(생수)도 하이트 제품임.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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