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스러운 한나라당!

김영선 대표의 뉴라이트재단 축사들 듣고
이념적 정체성, 현대사 인식, 세계관에서 불철저해
 
 한나라당이 겪고 있는 혼돈이 그대로 나타나
 
김문수, “우리가 잘못했다”




어제 서울 을지로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뉴라이트재단 창립기념행사에 다녀왔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뉴라이트운동 관계자들은 물론 이명박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 당선자, 안상영 인천시장,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 김영선 한나라당 대표 등 한나라당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내빈들은 한 마디씩 축사를 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원조(元祖) 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김문수 경기지사 당선자의 축사였다. 그는 학생-노동운동을 벌였던 자신의 과거를 담담하게 회상하면서 “우리가 잘못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 안상영 인천시장의 축사도 있었지만, 뉴라이트운동에 대한 덕담 수준의 얘기였다.




정체성의 혼란 드러낸 한나라당 대표의 축사




이어서 김영선 한나라당 대표가 나섰다.

과거 소위 ‘진보’계열의 학자였던 안병직 교수,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문수 경기도지사 당선자,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주사파의 대부 ‘강철 김영환’ 등 과거 쟁쟁한 운동권들이 앞에 있어서일까?

김대표는 대학시절 탈춤반을 하면서 암울했던 시대에 대해 고민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마치 ‘나는 비록 본격적인 운동을 하지는 않았고, 사시 공부 열심히 해서 변호사가 됐지만, 시대에 대한 고민만은 당신들 못지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박정희 대통령은 잘 살아보려고 경제,행정,법률 등에서 베끼기를 잘했다. 쿠데타를 한 사람치곤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했다. “박정희를 넘어서는 리더십이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어 문제”라는 식의 얘기도 했다. 박대통령의 성취를 긍정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화제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사건 의혹으로 옮겨졌다. “국제자본이 우리 경제를 유린할 가능성이 높다. 큰일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서 그녀는 과학기술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자신은 국회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를 소속 상임위원회로 선택했는데, ”미국에 머무는 동안 ’미국과 단절하는 순간 우리는 후진문명국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의 얘기는 로봇공학과 나노공학의 결합에 대한 얘기를 거쳐, 뉴라이트운동에 대한 덕담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사실 오늘 행사에서 김영선 대표는 그저 내빈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아마 그녀도 따로 축사를 준비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는 7월11일까지 ‘한시적’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현재 제1야당이고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탈환하는 주역이 되어야 할 한나라당의 대표이다. 당연히 그녀는 단 하루를 대표를 하더라도, 어떤 자리에서 가볍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수권야당 대표로서 국민들에게 ‘한나라당이 하면 달라지겠구나’하는 희망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김영선 대표가 오늘 했던 축사에서 나는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그것은 ‘정치인 김영선’이나, ‘개인 김영선’에 대한 감정과는 전혀 무관하다. 내가 절망을 느낀 것은 그다지 길지도 않은 그녀의 축사 속에 ‘정체성(正體性)의 혼돈’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구꼴통’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한나라당




김영선 대표가 대학시절 탈춤반을 하면서 암울했던 시대에 대해 고민했던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지난 수년 간 자신이 ‘수구꼴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발버둥쳐 온 한나라당의 모습을 떠올렸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젊은 표, 진보 표를 끌어보겠다고 서울 교보문고 앞에서 열린 효순-미선 촛불시위 행사장을 기웃거렸던 이회창 총재의 모습이 김영선 대표의 얼굴 위로 오버랩 됐다.

“이대로 미국과 등을 돌리면 나라가 끝장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10만 인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였던 2003년 3-1절 국민대회 때나,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는 노무현의 말에 열 받은 칠십 먹은 노친네들이 찬바람 도는 2004년 늦가을날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다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고꾸라질 때, 끝내 나몰라라 했던 한나라당의 비겁을 떠올렸다.




아마도 한나라당은 자신들을 친일사대세력, 외세굴종세력, 쿠데타 세력, 학살 세력으로 모는 김대중-노무현 세력이나 자칭 진보세력의 비난 공세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한나라당이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논리에 매몰되어 스스로 움추려들수록, 한나라당의 추락과 고립은 가속화됐다. 그런다고 젊은 표, 진보표가 한나라당으로 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나라당의 정체성 결여에 실망한 보수층의 이탈만 재촉했을 뿐이다.




과거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중심에 섰던 김문수 경기지사 당선자 같은 이들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자리에서, 한나라당 대표가 뒤늦게 “나에게도 ‘진보적 마인드’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상황-이걸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희극이라고 해야 하나?




어정쩡한 역사인식




한나라당의 기반이 대한민국정통세력이라는 것, ‘뉴라이트’조차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성취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김영선 대표는 돌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베끼기를 잘했다”,“쿠데타를 한 사람 치곤...”운운하는 표현에서 박정희 시대의 성취에 대한 애정이나 존경, 감사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5-31지방선거 유세 당시 김문수 후보가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에 반대했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면서 ”박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근대화와 산업화는 물론, 오늘날의 번영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나,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발전이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뒤집는 주장을 내놓은 이영훈 교수 등 뉴라이트운동 계열 경제학자들의 연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차라리 강금실이나 공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소신껏 ‘박정희’를 부정했다면 모르겠다. 박정희 대통령을 긍정하긴 해야겠는데, 대학생 시절 ‘심파(心派) 운동권’의 의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정희를 흔쾌히 긍정할 수 없다’는 의식 깊은 곳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듯한 김영선 대표의 태도는 한 마디로 찜찜했다.

그런 어정쩡한 역사인식으로, 철저하게 반(反)대한민국적 자학사관으로 무장한 좌파들과 어떻게 맞서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됐다.




세계화에 대한 인식도 헷갈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진보 마인드’의 편린이 있음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철저하게나마 박정희를 긍정하는 식의 혼돈은, 김영선 대표가 한편으로는 외국 자본의 경제침략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과정에서 부정과 비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위법을 밝혀내는 것과, 세계화 경제 속에서 “국제자본이 우리 경제를 유린”운운 하면서, 외자를 ‘경제침략자’라도 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런 류의 인식은 민노당 대표나 민노총 위원장의 인식이라면 몰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해 대한민국의 선진화를 견인해야 할 한나라당 대표의 인식이 그래서는 곤란하다.




그러면서도 김대표가 ’미국과 단절하는 순간 우리는 후진문명국으로 떨어진다‘라고 얘기하는데 이르러서는 “이 사람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대열에서 낙오해서는 국가적 불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는 아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김대표의 진심에 가까운 것인지....




마지막으로 김대표가 로봇과 나노공학을 언급한 것은 ‘한나라당도 이렇게 시대의 트렌드를 이해하려 애쓴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런 작은 얘기들까지 그 자리에서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은 있다.




긴장과 정체성 확립 필요




문제는 어제 김영선 대표의 축사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이 김 대표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좌파들과 죽기로 싸울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들로만 똘똘 뭉쳐도 싸움에 이길까 말까 한 상황 속에서, 역사에 대해서도, 현실에 대해서도 불철저하고 불투명한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공천을 주고, 최고위원 자리를 주고, 한시적이라고는 해도 대표까지 맡기는 것이 한나라당의 현주소다.




하기야 5-31지방선거 후 열우당과 좌파들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을 때, 한나라당이 당을 이끌어나갈 만한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들인 내년 대권주자들을 배제한 채, 한가하게 ‘관리형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나 준비하고 있는 것도 한나라당의 현 주소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당내 대권주자 경선 과정에서의 불공정 시비는 두렵고, 지휘관 없는 상태로 당을 이끌어나가면서 대권 주자들을 정치 이슈의 최전선에서 후방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는 것인지....




솔직히 특정 정치인과 한나라당의 치부를 드러내는 글이라 이 글을 쓰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현실정치가 정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한나라당이 애국우파세력의 여망을 담을 현실적인 그릇이라면, 그에 대한 감시와 질타를 게을리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몇 자 적은 것이다.

한나라당의 긴장과 철저한 정체성 확립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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