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과 통일정책
우리의 통일정책,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박대통령의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돌아보며
송종환(宋鍾奐)・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국가발전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각 부처의 이견을 수용하여 정부 시스템이 모두 제 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정책결정을 하고 정제된 언어로 국민을 단합시켰던 지도자를 되돌아본다.
금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단절되었던 남북한 분단 당사자 간의 대화의 물꼬를 튼「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한 36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선언의 후속조치로 1971년 8월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된 후 오늘날까지 각종 남북대화는 개시,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양상은 박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취지를 벗어나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다.
2000년 「6. 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 현상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데, 그 핵심에는 북한과 우방 미국을 보는 상반된 시각이 있다. 1998년 이후 연이어 집권한 좌파정권은 대북 포용정책을 내세워 우방들과 마찰음을 내면서 북한에 대하여 일방적 유화정책을 쓰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친북반미세력들은 떼를 지어 백주대로에서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친북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수령유일지배체제와 연합, 연방을 하자고 선동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극도의 사회 갈등을 겪고 있는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 발표의 배경, 정책결정 과정과 의의 등을 검토해 봄으로써 박대통령이 제시한 평화통일 구현을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대내외 정세 변화를 정확히 읽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 15 경축사」에서 통일 이전에 전쟁 방지와 평화정착과 같은 중간단계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북한이 모든 전쟁도발 행위를 중지하고 적화통일 정책을 포기한다면 남북한 간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였다. 박대통령은 덧붙여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도 제의하였다.
‘선 평화, 후 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발표는 해방 이후 있은 소모적이고 비현실적인 통일정책을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정권을 선의의 체제경쟁의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남북한 평화공존이라는 말까지도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 비추어 대북 정책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외교정책결정과정을 분석한 학자들 중에는 각 국가의 외교정책의 목표, 수단과 전략은 국제정세, 국내정세와 상대방 국가의 정세와 같은 객관적 환경과 정책결정자의 인식과 같은 주관적 환경이 연결되어 결정된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준비와 결정과정은 학자들의 이러한 외교정책결정 학설을 입증하는 전형적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룰 둘러싼 국제정세로는 닉슨독트린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미국군의 개입 축소와 미국의 동맹국들의 자국 방위책임을 강조하면서 소련, 중국 등 공산진영과의 적대관계 완화와 협조관계 모색을 포함하고 있었다.
닉슨독트린이 동맹국들의 안전을 소홀히 하는 정책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미국 측은 1970년 4월 10일 확정된 대한국 군사원조액을 전년도에 비하여 3,000만 달러 삭감한 1억 4,049만 달러로 조정하고,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하여 주한미군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1971년 6월 30일까지 감축, 철수할 것임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여 왔다. 박대통령은 이제까지의 대화 없는 대결구조의 남북한 관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대결구도의 남북관계에 변화 도입
북한의 호전적 태도를 고려하여 전쟁을 막고 통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도 동 선언 발표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북한은 1960년 대 초반부터 강화해온 전쟁 준비를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 후반에 한국의 내부 혼란을 조성하는 한편 대남 폭력전술을 노골적으로 구사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한 무장공비 31명의 서울 침투, 1월 23일 동해상에서의 美 함정 푸에블로 호 납치, 10월 30일부터 11월 3일 간 북한의 무장 게릴라 130여 명의 울진・삼척 침투는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북한의 호전적 대남 태도가 전개하는 상황에서 한국 내의 정세도 변화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을 한 후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제건설을 추진하여 한국은 1969년을 계기로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1960년도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한국이 81달러, 북한이 120달러이었으며 이러한 열세는 1968년까지 계속되어 그해 한국이 168달러, 북한이 198달러이었다. 그러나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고도 성장을 지속하여 1969년에는 한국이 208달러가 되고 북한이 194달러로 떨어지게 되었다.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남한 내부의 정치정세는 1969년 10월17일 실시된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전후하여 결코 순탄하지가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끄는 야당이 민주화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공격하고 남북한 간의 교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미래 비전에 맞춘 ‘선 평화 후 통일 원칙’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은 국내외적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당시 남북한 간 체제경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의 무력도발 책동과 대남 혁명 전략을 저지하여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남북한 관계와 통일문제에서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전략적 구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은 지도자가 제시하는 미래 비전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의 기초를 다진 1960년대를「민족중흥의 전진 대열을 정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하고, 1970년대에 개발도상국, 1980년대에 중진국, 1990년대에 중진국 선두 및 선진국 진출 준비를 하여 세기 말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각종 국가정책의 초점을 이 비전 실현에 맞추었다.
박대통령은 분단 조국의 통일 추진도 이러한 경제건설 비전에 입각하고 있었다. 1969년부터 남북한 경제력 비교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을 확인한 박대통령은 1970년 1월 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1970년대 말까지 조국근대화 작업을 매듭짓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완료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동년 8. 15 경축사에서 2000년 전후 통일 실현을 위하여 1970년대에는 먼저 남북한 간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박대통령이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제시한 ‘선 평화, 후 통일’ 원칙은 1998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재직 시까지 최소한 평화정착과 교류의 동시 진행이라는 수준으로 꾸준히 지켜져 왔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위원장과 「6. 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 발표하면서부터 사실상 그 원칙을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對북한 교류와 지원을 확대하면서도 북한의 핵ㆍ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인한 안보문제 논의의 적극적 당사자 지위까지 포기한 것은 개탄할 일이다.
시스템에 의한 정책 결정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과 관련하여 강조할 것은 국가지도자의 비전에 이어 당시 이러한 정책 전환을 결정할 때의 시스템이다.「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은 크게 보아 대내외 정세,북한 정세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1969년 추석 이후 정책 비전과 구상에 의한 대통령의 지시, 1970년 3월 초부터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의 연설문 초안, 7월 말부터 차관 급으로 구성된 관계부처 실무회의에서의 검토, 8월 9일 대통령 주재 장관급 정책결정 회의에서의 검토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실제 기간은 최소 5개월 이상이 걸렸다.
이 과정에 청와대 비서실과 관계 부처가 각기 맡은 바 소임과 역할을 다하고 박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회의에서는 각 부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언성을 높이면서 갑론을박을 하였다. 8월 9일 오전 10시에 시작한 회의에 참석한 청와대 비서실 수석비서관과 장관들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오후가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않자 김정렴 비서실장 주재로 의견을 다시 모아오라고 한 대통령의 지시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호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율사들이 이 정책 전환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강력히 반대했다. 박대통령은 오후 늦게 다시 회의를 주재하면서 법무부 율사들이 반대한 취지와 외무부가 건의한 내용을 즉석에서 받아들여 직접 연설문 초안을 수정하였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법무부 율사들이 북한을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고 연설문 초안을 준비한 작업 자체가 구속감이라고 지적하자 대통령의 비전과 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열변을 토하였던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시스템적인 정책 협의・조정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 결정 과정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 정보원)의 지원 역할이다. 중앙정보부는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강인덕 북한국장의 책임 하에 만 5년간 연인원 2,000 여명이 참가하여 全 9권, 총 4,925쪽에 달하는「남북한 경제력 비교」제하의 남북한 체제경쟁의 중간평가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자들은 한국 정부가 북한과의 대결에서 자신감을 얻게 하고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구상함에 있어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정제된 언어 구사’로 신중성에 만전 기해
박대통령은 정책전환과 결정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고 또 기했다. 일단 정책 결정을 할 필요가 있으면 박대통령은「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 때처럼 당신의 구상을 구현할 수 있는 시안을 정부 내 관계관에게 입안토록 지시한 연후에도 그 구상에 대한 관계부처 장관의 의사를 꾸준히 타진하여 중지를 모으고 정책조정회의를 거쳐 발표하는 시스템을 선호하였다.
박대통령의 비전과 시스템에 의한 정책결정에 추가하여 강조되어야 할 것은 그는 대중 앞에서는 매우 정제된 언어를 구사하였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잘 못 전달되거나 가십 꺼리가 되지 않도록 그는 보좌진의 의견을 다 듣고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대중 앞에서 불쑥 불쑥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 시스템과 관련하여 또 하나 강조될 것은 정부가 이른바 코드가 다른 인사와도 대화를 하고 그들을 통하여 정부의 정책 전환의 취지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려고 시도하고 또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이다.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의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설명에 대하여 『김일성이를 무슨 도깨비로 알다가 이렇게 갑자기 제의를 하면 국민에게 주는 충격이 크다』라고 반발한 최석채 조선일보 주필의 당당하고도 분명한 반응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부와 코드가 다른 인사 간에 언로가 열려 있었던 것은 코드 정치를 하는 현재의 좌파정권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 정신으로 돌아가야
현재 노무현 대통령은 변화하고 있는 대내외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는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정부 시스템이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못하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발언을 시도 때도 없이 하다가 임기 말년을 맞이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거기에 더하여 국민을 편 가르기까지 하다가 5. 31 지방선거의 결과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북한의 對南 인식은 변화하지 않았다. 대남공산화 혁명 전략을 변화시키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한국을 겨냥한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대북포용정책을 내세워 북한을 지원하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이행될 수도 없고 또 북한 측에 의하여 이행되지도 않는 합의를 계속 만들어 내는 대화를 하고 있다. 이러한 대화는 남북한이 서로를 불신하고 국민 간의 갈등은 물론 전통 우방국과의 유대에도 부정적 영향을 줌으로써 통일의 길을 점점 멀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정부를 포함한 한국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이 36년 전에 발표한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 대북한 지원과 교류, 남북한 철도 연결, 개성공단 건설과 금강산 관광이 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제거, 재래식 무기의 감축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과 연계되어 추진되도록 지혜와 힘을 모아 나가야 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국가발전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각 부처의 이견을 수용하여 정부 시스템이 모두 제 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정제된 언어로 국민을 단합시켰던 지도자, 국민은 지금 그런 지도자의 출현을 원하고 있다.
〈필자 소개 이력〉
1944년 경남 마산 출생, 경복고 졸업, 서울대학교․대학원 외교학과 졸업, 미국 Tufts대 플레처 국제법ㆍ외교대학원 석사, 한양대 정치학 박사,
해군사관학교 교관(중위), 남북대화 참가, 청와대 정무비서실 외무부・통일원 담당관, 주유엔 대표부 공사 및 유엔 총회 대표, 주미대사관 정무공사, 국가안전기획부 해외정보실장, 충북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朴대통령의 '8· 15 평화통일구상 ' 회고
- 宋鍾奐(송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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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03, 15: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