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물 터진 고구려 사극들
요즘 고구려 관련 TV 사극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시작된 MBC의 <주몽>을 시작으로, 7월부터는 SBS의 <연개소문>이 시작됐다. 9월부터는 KBS에서 250억원을 들인 <대조영>을 방영한다고 한다. 올해 말에는 광개토대왕 시대를 다룬 <태왕사신기>가 MBC전파를 탈 예정이라고 한다.
고구려를 다룬 사극들은 우리나라 TV 사극의 영역을 확장하고,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중국의 역사도둑질에 맞선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재 방송되고 있는 고구려 관련 사극들에서는 사실(史實)과 어긋나거나, 오늘의 현실을 고구려 역사와 오버랩시키면서 ‘닫힌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민족자주의식의 과도한 분출
SBS <연개소문>이나 MBC <주몽>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부분은 과도한 ‘민족주의’의 강조이다.
7월8일 방송됐던 <연개소문>은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 안시성이 당군에게 포위된 상황 속에서 부하 장수가 연개소문에게 “성안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보고하자, 연개소문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비록 우리가 오늘 이렇게 시련을 겪고 있지만, 우리 민족의 꺾이지 않는 의기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얼른 듣기에는 근사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성을 포위한 적의 대군과 싸워야 하는 장졸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에 대해 연개소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단군성조와 치우천왕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린다.
솔직히 나는 그런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김정일’과 ‘고난의 행군’을 떠올렸다. 300만 명의 인민들을 굶겨죽이면서도 이를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로 호도하고, 그 와중에서도 ‘민족의 자주성’을 드높이기 위해 ‘인공위성 광명성1호’(대포동1호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한 김정일의 모습은, 성안의 식량이 끊겨도 ‘민족의 의기 운운’하는 연개소문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3회 이후부터 <연개소문>은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을 다루면서, 고구려 영양왕의 요서 선공(先攻)과 수문제의 침략을 다룬다. 여기서도 고구려의 영양왕과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 강이식, 을지문덕 등은 고구려를 압박하는 수나라에 맞서면서 말끝마다 ‘대고구려의 영광’과 ‘자주’를 외친다. 수나라와의 화평을 이야기하는 일부 귀족들은 사대적이고 비겁하고 이기적인 소인배들로 그려진다.
SBS의 <연개소문>보다는 덜 두드러져 보이기는 하지만, MBC의 <주몽>도 심심찮게 ‘자주’를 내세운다.
극중에서 부여의 금와왕은 한(漢)나라의 압박에 당당하게 맞서는 자주적인 군주로 그려진다. 보다 선진적인 제강기술인 초강법을 습득하려는 부여의 노력을 방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만이(蠻夷)를 치기위해 부여의 파병을 강권하는 한나라의 현도 태수의 모습은 마치 북한에 대해서는 핵사찰과 미사일 개발 중지를 강요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이라크 파병을 요구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한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부여는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라고 협박하는 현도 태수를 향해, “잿더미가 되는 것은 한나라일 것”이라고 호령하는 금와왕의 모습은, 제1차 걸프전 이후 “조선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는 차라리 깨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답해 ‘미국이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던 김일성을 감탄케 했다는 김정일이나, 독도 문제를 가지고 일본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는 노무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史實의 왜곡
고구려의 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해야겠다는 의식이 앞서서일까?
이들 고구려 관련 사극에서는 역사에 대한 왜곡도 심심찮게 보인다.
MBC <주몽>에서 부여를 한나라에 당당하게 맞서는 ‘황제국’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그 한 예이다.
만주의 일각을 차지했던 부여는 ‘사출도’로 대표되는 부족들의 연맹체 국가로, 흉년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왕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었다. 반농반목(半農半牧) 단계에 있던 경제적 역량으로 봐서도 부여는 한나라에 맞설 만한 국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군사적으로도 부여는 후일 건국되는 고구려나 선비족에 침략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고구려에 병탄되고 마는 약소국이었다.
그런 부여를 한나라에 당당히 맞선 '황제국'으로 그리는 것은, 아무리 사극이라지만 도가 지나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SBS <연개소문>에서 고구려 영양왕의 요서정벌을 마치 본격적인 중국정벌인 것처럼 그렸던 것도(엄밀하게 말하면 그렇게 그리다가 말았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자치통감>등에 의하면, 598년에 영양왕이 말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쳤지만, 영주총관 위충에게 격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가(史家)들은 병력 수나 전후의 정황으로 보아 영양왕의 요서공격은 본격적인 중원정벌이라기보다는 수나라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 성격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이후 수문제의 아들 양량, 육군사령관 왕세적, 수군사령관 주라후 등 수나라군 30만 명이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실패했다. TV드라마에서는 이를 강이식, 을지문덕 등 고구려군의 승전으로 그리지만, 역사에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서는 수나라군의 실패 원인을 날씨와 질병탓으로 돌리고 있다.
단재 신채호 등은 이를 중국이 수치스러운 역사를 감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 사서들이 수나라 양제의 참패나 당나라 태종의 패배는 기록하면서, 수문제의 패배는 그런 식으로 얼버무렸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고구려는 과연 동북아의 패자(覇者)였나?
TV사극에 나타난 개개의 사실(史實)들을 따지기에 앞서, 고구려가 과연 중원대륙을 도모했던 동북아의 패자(覇者)였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한 검토가 필요하다.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시기는 4세기말~6세기 중엽이었다. 그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4군과 투쟁하고 인근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착실하게 성장했지만, 동천왕 때에는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략을 받아 국도 환도성이 함락되는가하면, 고국원왕때에는 전연(前燕)의 모용황의 침략을 받아 국도가 파괴되고 왕모(王母)를 비롯해 5만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후 소수림왕대를 거치면서 체제정비를 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복전쟁에 나섰다. 광개토대왕은 숙신과 거란을 복속시키고 후연과 싸워 요동을 손에 넣었으며, 백제를 치고 가야지역으로 들어온 왜구를 몰아냈다.
이어 장수왕-문자명왕대를 거치는 동안, 고구려는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北魏)가 남제(南齊)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대우할 만큼 국제적 위상을 인정받았다.
이는 분명 고구려 역사의 자랑스러운 부분이지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우리가 위대한 정복군주로 기억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에도 고구려는 중원의 통일왕조와 정면 대결해 패권을 다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모용씨의 선비족에게도 밀리던 고구려는 광개토대왕대에 이르러 선비족이 사분오열된 틈을 타서 요동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북중국으로의 진출은커녕 요서지역으로의 진출도 꿈꾸지 못했다.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북위 등 북조(北朝)국가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는 강국이었지만, 그들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북조 국가들이 고구려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은 고구려 자체의 국력이 강했던 덕분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목민들의 정복왕조인 북조 국가들의 주적(主敵)은 고구려가 아니라 한족(漢族)남조 국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고구려는 천손(天孫)의 자손임을 내세우면서 ‘태왕’이라는 독특한 왕호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조 국가들과 형식적으로나마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위상은 5세기 중엽 이후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의 강화, 내전으로 국력이 약해졌다. 신라의 북진으로 한강유역은 물론,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함경도 지역까지도 신라에게 빼앗겼다.
고구려에게 있어 더 큰 위협은 중국에서 300여 년 간의 분열이 끝나고, 통일왕조가 들어섰다는 점이었다. 수(隋)나라의 중국 통일이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는 수나라 및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 70년에 걸쳐 사투를 벌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백성들을 성 안으로 피신시키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견벽청야 堅壁淸野), 게릴라전으로 적의 보급선을 끊고 적을 피로하게 하다가, 적이 철수하면 뒤를 치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수양제의 침략시 요동성 전투나 살수대첩, 당태종의 침략시 안시성 전투나 평양성 방어전 등에서 잘 나타난다. 당태종의 1차 고구려 침략때 수양제의 침략때 참전했던 정천숙이 “요동은 길이 멀어 양곡을 수송하기가 곤란하고, 동이(東夷)는 수성(守城)을 잘하여 갑자기 항복시킬 수 없다”고 한 것이나, 안시성 전투 당시 대로(對盧) 고정의가 “군사를 주둔시키고 싸우지 않고 시일을 오래 끌면서 기병(奇兵)을 나누어 보내서 적의 양도를 끊을 것”을 강조했던 것도 이러한 고구려의 전술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당은 번번히 실패를 거듭하다가, 당나라 태종 말~고종대에 이르러 소규모 국경도발을 빈번히 자행해서 고구려를 피로하게 하는 한편, 백제를 쳐서 남쪽에서부터 제2전선을 형성하고 신라로부터 병력과 군량을 공급받는 전략으로 결국 고구려를 굴복시켰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는 분명 한때 동북아의 주인공으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대륙이 분열했던 시기에 국한된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수세적 입장에서 방어에 치중하다가, 결국은 중국의 압도적인 국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연개소문은 과연 영웅이었나?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민족사상 제일가는 영웅으로 꼽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선 단재 신채호 류의 역사인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중원정벌을 도모했던 민족영웅이자 대당 자주론자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史實)과는 거리가 있다. 영류왕이나 연개소문 공히 당에 대해 강경론과 주화론을 모두 구사했다.
영류왕은 당과 포로를 교환하고. 태자를 입조시키고 봉역도를 바치는 등 당과 화친을 추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침략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구축토록 했다.
연개소문은 당의 사신 장엄을 구금하는가 하면, 645~662년 당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는 등 대당 강경책을 구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에 진사사절을 보내고 당 황실에서 존숭하는 도교의 도사들을 초빙하는 등 화해 제스처도 취했다.
당과의 전쟁은 고구려나 연개소문의 자주정신이나 중원도모의 소산이라기보다는, 당의 팽창주의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태로 봐야 한다.
둘째, 당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역할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당 태종의 1차 침입을 격퇴했던 안시성 성주(양만춘이라는 성주의 이름은 야사에서 나타난다)는 연개소문의 집권을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SBS <연개소문>에서처럼,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를 진두지휘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연개소문이 축조를 지휘했다는 천리장성이 당나라 침입시 어떤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
연개소문의 역할이 보이는 것는 662년 사수전투 정도이다. 이 싸움에서 연개소문은 그 전해부터 평양성을 포위했던 당나라군 가운데 방효태군을 습격해서 방효태와 그의 아들13명을 죽였다. 이후 소정방 등 다른 당나라군 부대들은 추위와 굶주림끝에 포위를 풀고 철병했다.
셋째, 연개소문은 내부 단결에 실패했다. 645년 당태종이 침략했을 때에는 백암성주 손대음(손벌음이라고도 함)이 성문을 열고 당군에 항복했다.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15만 병력을 이끌고 출동했던 고연수와 고혜진은 주필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당태종에게 힘없이 항복했다.
연개소문 사후 정권을 잡았던 남생은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하자 당에 투항, 침략군의 선두에 섰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연개소문 사후 신라에 항복했다.
고구려와 운명을 함께 해야 할 귀족이나 무장들이 적에게 투항하는 이런 현상은 수문제나 수양제의 침략시에는 없었던 현상이다. 이는 영류왕을 비롯해 중앙귀족 180여명을 학살하고 집권한 연개소문이 내부 통합에 실패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넷째, 연개소문은 후계자 선정에 실패, 망국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연개소문이 후계자로 선정했던 장남 남생은 661년 당군의 침략시 압록강 전투에서 3만 병력을 잃었던 인물이다. 이후 남진한 당군은 1년 이상 평양성을 포위했다. 고구려군의 농성에 결국 당군이 물러가기는 했지만, 고구려가 국도를 포위당한 것은 고국원왕 때 모용황의 침략을 받아 국도가 파괴된 이래 300여년 만에 겪은 위기였다.
이렇듯 전시 지도자로서 한계를 보여줬던 남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줬지만, 그는 동생들과의 권력다툼 끝에 당에 항복해서 침략군의 향도(嚮導)가 됐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피할 수 있었을 수도
특히 아쉬운 것은 길게 봐서 642년부터 668년 고구려 멸망시까지 26년, 짧게 보면 660면 백제멸망시부터 8년 정도만 고구려가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국제관계를 잘 관리했다면 고구려의 멸망을 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당의 대외팽창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재미있는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대외팽창이 주춤한다는 점이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안시성-부여성 등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계속됐다.
676년 신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당은 이듬해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서 신성으로 옮겼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에는 당나라 영주로 강제이주됐던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연합해 발해를 세워 이후 200여 년간 만주를 지배했다.
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도 고구려 옛 땅에 대한 당나라의 지배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 서쪽에서는 토번이 흥기해 당나라를 괴롭혔다. 소정방, 설인귀 등 백제-고구려 정벌 때 활약했던 쟁쟁한 장수들이 토번과의 전쟁에 동원됐지만, 고전했다. 670년 이래 당은 678년까지 토번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676년 이후 당이 신라와의 전쟁을 그만두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긴 것도 이러한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다.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고 있던 692년에 이르러 재상 적인걸은 안서4진을 포기할 것을 상소하면서 “하늘이 낳은 사이(四夷)는 모두 선왕(先王)이 봉한 ‘역외(域外)’라고 강조했다. 이후 당나라 내부의 정정이 불안해 지는 가운데, 발해가 건국하자 당은 이를 마지못해 승인했는데, 이는 적인걸의 상소에 나타난 것처럼 당의 대외팽창주의가 한풀 꺾인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그리고 나는 역사에 가정을 두는 것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편이지만), 고구려가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당태종에게 침략의 빌미를 주지 않았거나, 660년대 이후 고구려가 내분으로 자멸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당나라의 극성스러운 대외팽창주의 시기를 피해갈 수 있었다면, 고구려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고구려 역사를 바로 보자1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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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31, 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