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상고사>에 충격을 받다 -
사실 내게도 고구려에 푹 빠져 지낸 시절이 있었다. 그게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읽었던 중3 겨울방학 때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조선상고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도끼로 머리를 쪼개는 듯한 충격을 받았었다. <조선상고사>에 나타난 고구려는 단순히 수(隋)양제나 당(唐)태종의 침공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 당당히 중원대륙을 도모했던 제국이었다. 연개소문은 민족사상 제일가는 영웅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나는 고구려 관련 전시회나 학술행사가 열렸다 하면 어디든 쫒아 다녔다. 유현종의 <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나, 북한에서 나온 고구려 관련 사서들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면서 나는 고구려를 다룬 사극이 나오기를 갈망했었다.
‘왜 우리나라 TV는 허구헌 날 대원군과 민비, 장희빈, 수양대군, 연산군 등 조선시대 궁중 암투를 다룬 사극만 내보낸단 말인가? 왜 대륙을 말달리던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다룬 사극은 만들지 못하는가?’
그 시절 내게 있어서 고구려는 구한말 이래 망국과 일제식민통치, 분단 등 치욕으로 점철된 우리 역사와 여전히 강대국에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답답한 현실로부터의 탈출구였다.
내게 ‘고구려’는 현실적인 의미도 있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기상을 이어받아 민족주의로 철저하게 무장해서 부국강병과 민족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램이 있었다.
-고구려의 명암 -
그러나 역사를 알게 될 수록, 나는 점차 고구려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요동정벌, 영양왕의 요서 공격,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양만춘의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의 사수대첩 등 고구려의 불요불굴의 대외투쟁사는 분명 자랑찬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었다. 고구려가 스스로 천손(天孫)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사실상 ‘천자(天子)’의 의미를 갖는 ‘태왕(太王)’ 칭호를 사용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던 것도 가슴 뿌듯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는 많은 한국인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처럼, 중원대륙을 도모했던 동북아의 패자(覇者)는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고구려는 대외정책의 실패로 인해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얼마 후 발해가 다시 일어나기는 했지만, 고구려의 멸망은 만주가 우리 겨레로부터 멀어지는 첫 걸음이 됐다.
-삼국시대 역사에 민족개념 소급시킬 수 없어-
또 고구려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지만(<삼국사기>는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을 기록하면서 고구려를 ‘우리’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역사의 본류(本流)가 되지는 못했다.
우리 역사의 본류를 형성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를 잘 살펴 당시의 패권국가였던 당과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후, 당나라마저 몰아내고 통일전쟁을 마무리 지은 신라였다.
혹자는 이러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와의 결탁해서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20세기의 역사인식을 소급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 시달리던 신라에게 백제나 고구려는 동족의 나라가 아니라 적국이었다. 신라에게 고구려나 백제는 당나라나 왜국과 다를 바 없는 외국이었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다. 백제는 아신왕 때 고구려의 침략을 받자 왜를 끌어들였고, 부흥운동과정에서도 왜의 지원을 받았다. 고구려도 장수왕 때에 북위를 끌어들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과 결탁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이유로 신라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외세’를 끌어들였던 고구려나 백제의 행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백제나 고구려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삼국은 상호간에도 동맹과 배맹(背盟)을 거듭했다. 신라는 왜를 막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원조를 받았지만, 장수왕대 이후에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의 남하에 저항했다. 백제는 신라의 배신으로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성왕이 목숨을 잃은 후에는 고구려와 연대해 신라를 공격했다.
결국 삼국은 필요에 따라 삼국 상호간에 때로는 동맹을 맺었다가 때로는 배신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이나 왜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국가이익(좀더 엄밀히 말하면 왕조의 이익이지만)에 충실했을 뿐이다.
신라가 7세기 후엽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였던 당을 동맹으로 택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고, 당을 이용해 라이벌이던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후 당나라와 끊임없는 싸움 끝에 당나라마저 축출한 것은 용감한 행동이었다.
삼국시대의 역사에 오늘날의 민족 개념을 적용하고, 더 나아가 오늘날 남북관계를 오버랩시키는 것은 역사인식의 소급적용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둔감하다가 결국 패망의 길을 걸었던 백제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으로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는 와중에도 얄미울 정도로 국제정세를 잘 활용해 삼국쟁패 시대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신라이다.
-민족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다-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될 무렵, 나는 민족주의에 대한 신화(神話)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민족(Nation)’이라는 것이 아득한 고대(古代)부터 이어져 온 원초적이고 영속적인 존재가 아니라 근대 시민민주주의의 산물이며, ‘민족’은 역사-전통-혈연 공동체라기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이념적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나는 굳이 단재 신채호가 야사(野史)와 가설(假說)을 통해 그려낸 ‘고구려’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통해서 충분히 국가적-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당연히 내게 ’통일‘은 ’남과 북의 민족이 하나 되어 얼싸 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누리고 있는 자유와 번영을 휴전선 이북으로 확장시켜 북한 동포들도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영어로 하면 다 같은 ‘Nation'이지만, 나는 ’민족‘ 대신 ’국가‘에 귀의하게 된 것이다.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노래하자 -
단재 신채호가 고구려에 집착했던 것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 고대사에서 ‘제국주의’적 전통을 찾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등에 쓴 신채호의 논설 등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늘날에는 북한이 고구려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1차적으로는 북한 정권이 고구려 고토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북한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이념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철저히 파산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니 김씨 조선은 더 이상 민족공동체의 모델이 될 수 없다.
19세기 이래 독일, 러시아 등 중-동부 유럽국가들이나, 일본 등 후진국가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정치적-이념적 공동체로서’의 ‘민족’ 대신, 공통의 역사와 전통,언어, 혈연 등에 기초한 퇴행적 민족주의, ‘닫힌 민족주의’를 지향했던 것처럼, 북한 역시 현재의 성취도, 미래의 비전도 보여줄 수 없기에 고구려에 매달리면서 ‘우리민족끼리’를 소리 높여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를 이야기하고, 고구려를 통해 외세배격과 자주를 외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건 ‘닫힌 민족주의’고, 19세기말~20세기 초 제국주의의 침략에 항거하던 저항민족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굳이 고구려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통해 얼마든지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낡은 혈연과 전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내용물을 가지고 ‘민족’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다.
강한 나라, 잘사는 겨레를 향한 지난 100년간의 비원(悲願)은 ‘고구려’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통해 실현되어 왔고, ‘대한민국’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소리 높여 노래해야 할 것은 1300년 전 고구려가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이고, 충성을 맹세해야 할 대상은 관념속의 혈연공동체인 ‘민족’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 번영의 구심점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인 것이다.
고구려 역사를 바로 보자2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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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31, 23: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