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시 나홀로 싸우기'란 말로 통일합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북한군이 남침하면 막강한 미군과 손잡고 싸워야지 왜 '나홀로' 외톨이가 되어 싸우기를 자청하는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자신이 미국 대통령과 함께 戰時작전통제권의 공동소유자라는 것을 몰랐던 노무현씨는 戰時작전권환수라는 反美선동어를 개발하였다. 이는 어느 회사의 주식을 50% 갖고 있는 대주주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내것을 돌려다오'라고 소리치는 꼴이다. 자기 것을 자기가 어떻게 돌려받는단 말인가? 물론 盧씨는 미국이 戰時작전통제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이를 돌려받는 것이 자주국방이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 '환수'라는 말을 개발했던 것이다.

작년까지도 '환수'라는 용어는 말이 안된다고 비판해왔던 국방부는 대통령이 시키니까 '戰時작전통제권 단독행사'라는 말로 바꾸어 한미연합군사령부 해체작업을 준비해가고 있다. 국방부의 이 말도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더 쉽고 정확한 말은 없을까?

한미동맹의 집행기구인 연합사가 해체되어 사실상 韓美동맹이 기능정지된다는 것의 의미는 북한군이 남침할 때 한국군이 '나홀로' 싸우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盧정권이 사실상 김정일의 代行者가 되어 추진하는 한미동맹 해체 공작을 우리는 환수니 단독행사니 하는 어렵고 선동적인 용어로써 설명해선 안된다. 그 핵심을 따와서 '남침시 단독방어 계획'이라고 해야 한다. '남침시 나홀로 싸우기'라고 불러도 좋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북한군이 남침하면 막강한 미군과 손잡고 싸워야지 왜 '나홀로' 외톨이가 되어 싸우기를 자청하는가? 북한군이 이기도록 기도하는 인간이 아니면 이런 무리와 속임수를 써가면서 연합사와 연합작전개념을 해체할려고 발광할 리가 없다.







講義 要目


美國은 어떤 나라인가?


우리에게는 어느 다른 나라보다도 중요하고 그래서 잘 알아야 하고 그런가 하면 상당히 알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는 미국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리고 제대로 알고 있는가? 미국의 힘은 무엇이고, 미국의 문제는 무엇인가? 미국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국이란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미국의 歷史, 政治, 社會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역사, 정치 또는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강의를 할여는 것이 본 강좌의 목적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시도 하는 바는 미국사회의 중요한 구체적인 論題 및 問題(Topics and Issues)를 선정해서, 각각의 논제 또는 문제를 미국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사회의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조명(照明)해 보고 論 함으로서 미국이란 나라를 좀더 力動的이고 立體的으로 고찰, 분석 하고자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미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의 槪念的 틀이 제시 될 수 있기를 바란다.



週 論題


1,2 I. 自由의 나라

자유를 바탕으로 탄생한 최초의 나라
자유는 미국의 存在理由
자유와 안보의 잠재적 갈등
자유와 도덕성의 문제



II. 자유民主主義體制의 나라
3,4,5
미국의 역사는 自由와 民主化의 과정
人口의 반 이상이 투표권이 없던 나라
왜 미국 대통령선거는 直選制가 아닌가?
진보와 보수가 共存하는 미국



6,7 III. 移民의 나라, 機會의 나라

끝없는 西部로: “명백한 神의 뜻”
多 인종, 多민족의 사회
사라지는 “Melting Pot”; 부상하는 “多민족 문화” (?)
不法 滯留者가 가장 많은 나라
미국인은 누구인가: 正體性 위기 (?)



8,9 IV. 南北戰爭의 나라

미국의 原罪
Lincoln의 결단
노예해방 이후의 흑백문제 (실질적 分離主義)
민권운동이 승리한 “위대한 사회” 인가

10,11 V. 法治의 나라

美 헌법은 미국의 제2의 Bible 이다
누가 이 Bible의 절대적 해석자 인가
미국을 움직이는 9명의 대법관
美 대법원과 민주주의


12,13 VI. 富가 국력인 나라

미국의 富는 자유에서 창조 된다
물질주의, 이상주의 병존
機會의 평등이냐, 結果의 평등이냐
福祉國家 미국


14 VII. 종합적 논평 및 展望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I. 自由의 나라

콜럼버스(Columbus)가 新대륙을 발견한 時期로부터 20세기 西歐의 帝國들이 무너질 때까지 500년간의 세계역사는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西歐의 言語, 經濟, 文化 그리고 移民이 세계도처로 擴散된 “西歐중심의 시대” 또는 “서구가 支配한 시대” 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란 나라는 이러한 歷史의 과정에서 生成된 가장 意味 있고 가장 劇的이고 또한 冒險的인 産物인 동시에 “實驗”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美國의 특성이 미국이란 나라의 弱点이 될 수 도 있고 强占이 될 수 도 있으며, 그래서 미국은 單一 民族 文化 歷史를 가진 우리에게는 理解하기가 쉽지 않은 나라일 수 도 있다. 미국이란 나라에 관해서 한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은 시작된 그날로부터 모든 역사가 記錄으로 生生하게 보존된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역사에는 神話는 없다. 자랑스러운 역사와 수치스러운 역사 모두 사실로서 공개되어 있으니 감출 것이 없다. 이는 우리가 이야기 하고 저 하는 “自由의 나라” 미국과도 無關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冷戰에서 미국의 戰爭 없는 승리는 궁극적으로 “自由의 승리요, 자유의 확산”이라고 볼 수 도 있다.

美國이란 나라, 미국社會 또는 미국民主主義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이는 “自由” 특히 개인의 자유에 대한 미국의 執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個人의 自由를 獨立과 建國의 기본 철학으로 해서 세워진 최초의 나라다. 그래서 “자유”(liberty or freedom) 는 미국의 始作이고 또한 미국의 存在理由라고 하겠다. 미국혁명을 위한 Patrick Henry의 名言(1775)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미국의 魂을 가장 간결하고 가장 强烈하게 웅변해 주고 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은 “생명, 自由 그리고 행복의 추구”를 위한 선언이었으며, 1787년 美 合衆國의 헌법 역시 美 국민과 그 후손들에게 “自由의 恩寵”을 확고히 한다는 목적을 闡明하고 있다. 또한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미국 國民으로서의 基本權을 보장하는 條項도 헌법에 구체적으로 明示되어 있다. “自由人의 땅”을 찬미하는 句節은 미국愛國歌의 歌詞에서도 여러 번 반복된다. [독립 當時 미국인구의 20%는 흑인노예 엇으며, 물론 이들은 오랫동안 美國市民도 自由人도 되지 못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별도로 다룰 것임.]

보통사람 미국人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조금이라도 侵害를 받으면 강하게 반응하는 “價値”가 바로 그들이 日常生活에서 늘 함께하고 있는 自由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유의 개념 또는 가치는 그들의 역사, 그들이 살아온 自然의 조건과 환경, 그들의 가족관계, 이웃과의 관계 등 그들의 모든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미국人들에게 자유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일매일 그들의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함께하는 생활의 手段 또는 智慧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미국인들은 남의 자유를 존중하게 되고 自己自身의 자유의 限界도 認識하게 된다.

“태초에 온 世上은 아메리카大陸이었다.” 이 隱喩的 표현은 美國革命의 思想的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英國의 철학자 John Locke이 市民政府에 관한 그의 論文에서 한 말이다. 여기서 Locke은 아메리카대륙을 “市民社會” 以前의 “自然의 狀態”에 비유하여, 유럽人들에게 新대륙 아메리카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自由의 大地”로 보여 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17-18세기에 걸쳐 대서양을 건너 北美 대륙으로 이주해온 植民初期의 영국人 및 유럽人들은 中世유럽의 오랜 전통과 舊질서의 遺産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회의 땅”에서 원주민 “인디언”들의 끝없는 위협으로부터 그들의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켜 나가면서 도전과 모험의 정신으로 새로운 社會/政治질서를 실험해 보고 실천할 수 있었다. 이들 植民地 移住民들이 가진 큰 利點은 民主主義 혁명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그 당시 植民地의 民主主義에 필요한 사회적 與件이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이미 상당 수준 성숙돼 있었다는 점이다. 母國인 영국을 포함해서 그 당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北美 植民地사회는 社會/經濟的으로 현저하게 中産層이 많았다고 본다. 平等해 질 여고 노력할 필요 없이 이미 상당히 평등한 사회가 되어 있었다는 셈이다. 적어도 白人인구 중에서는 작위가 있는 귀족도 없고, 아주 上層部도 아주 下層部도 없었다. 이것 역시 “자유의 나라” 미국과 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初期 美國歷史에 關해서

이쯤해서 초기 植民地미국의 역사에 관해서 어느 정도 이야기 또는 정리를 하고 가는 것이 필요하고 우리의 全般的인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本 항에서 우리의 主題는 미국이란 나라의 탄생을 “自由”의 개념을 축으로 해서 들 여다 또는 생각해 보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時代的인 歷史的인 상황 및 배경을 통해서 미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고찰해 보는 것도 오늘의 미국을 알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植民地 初期에서 獨立宣言을 거쳐 독립戰爭이 완전히 끝나는 1783년까지의 미국역사를 요약해서 들 여다 본다.

우선 用語 使用에 관해서 한마디 한다면: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하면 물론 1776년 7월 4일 이지만, “미국혁명” (American Revolution) 또는 “독립전쟁”(War of Independence) 이라는 용어 또는 표현은 통상 독립전쟁이 勃發한 1775년 4월 19일부터 전쟁이 완전히 끝나는 1783까지의 8年間을 의미한다. 독립선언은 전쟁이 시작되고 15개월이 지나서 선포된 셈이다.

北美大陸에 있어 英國식민지의 歷史는 1607년에 시작된다.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온 105명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오늘날Virginia州 (물론 독립以前에는 “州”가 아닌 Virginia “植民地”로 지칭되었음) Chesapeake灣 어귀에서 멀지 않은 곳에 定着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첫 정착地를 그 當時 영국國王 James I세의 이름을 따서 “Jamestown” 이라고 命名한다. Columbus가 新世界를 발견하고 나서 115년이 지난 後가 된다. 그런데 이들 105명은 모두 男子들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점차 가족단위의 이민이 증가 하면서 Virginia식민지의 백인인구는 1619년에 2,000명가량으로 늘어난다.

1619년은 또한 미국의 初期 植民地 역사에서 세 가지 注目할만한 사건들이 일어난 해로 기억된다. 그 첫 번째는 母國 영국으로부터 젊은 미혼여성 90명이 Jamestown으로 오게 된다. 두 번째로, 영국議會를 본 따서 Virginia議會가 그 첫 會期를 Jamestown의 敎會에서 7월 30일부터 1週間 개회한다. 이것이 美 대륙에 있어 최초의 立法기구로 역사에 記錄되고 있으며, 미국 代議民主主義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自由民主主義로 의 첫 걸음마가 시작 된지 불과 3주 만에 이를 逆行하는 세 번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8월20일 네덜란드 선박으로부터 20명의 흑인노예가 Jamestown의 백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煙草(담배) 재배농장에 팔려온다. 이렇게 해서 1619년은 미국의 역사가 정반대의 방향이 다른 “自由와 奴隸”라는 두 갈래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해가 된다.

1619年이 Virginia에서는 明暗이 갈리는 해가 됐다면, 그 다음해인 1620년 에는 Jamestown 보다 美 역사에서는 더 잘 알려진 또 하나의 영국식민지가 대서양연안의 北方지역(New England)에서 시작된다. 다름 아닌 “淸敎徒의 出 英國”이 일어난다. 통상 “Pilgrims”라고 불리 우는 영국청교도(Puritan)를 포함해서 102명의 이주자들을 싣고 Mayflower號가 영국을 떠나 Holland를 거쳐 3개월의 항해 끝에 1620년 12월Massachusetts州 Plymouth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후 1630년에는 수천에 달하는 청교도들의 이민으로 Boston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청교도 식민지”가 Massachusetts에 형성된다. 이들 청교도 이주자들은 Jamestown에 온 개척민들과는 사뭇 다르다. Jamestown의 경우에는 모두 남자들로 주로 경제적인 이유와 목적으로 왔으나, 청교도들의 이주는 개인이 아닌 대부분 가족 단위로 이루어 졌으며 移 住의 主目的도 경제적인 것 보다는 “宗敎의 自由”를 찾아서 또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들 청교도는 그 당시 영국국교의 관행과 의식에 반대하여 개혁을 주창해 왔다.)

이렇게 시작된 英國식민지는 1607년에서 1732년 사이에 北美대륙의 大西洋연안을 따라 北쪽의 New Hampshire에서 南으로 Georgia에 이르는 13개의 個別 永久 植民地로 확대,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뒤에 이들 13개 식민지가 연합해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된 13개 州가 美 合衆國으로 탄생하게 된다.

17세기 영국정부는 海外植民사업에 정부가 직접 관여하지 않는 두 가지 방안을 채택, 실시하고 있었다. 하나는 營利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회사에 特許를 주어 식민지를 개발해 나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國王이 개인에게 일정한 植民지역을 하사(下賜)하여 관리/운영하도록 하는 일종의 “領主식민지”(Proprietorship) 制度라 하겠다. Virginia와 Massachusetts의 경우는 前者에 해당되는 例가 된다. 13개 식민지 中에서 Maryland, Pennsylvania, Georgia 등 7개 식민지는 後者인 영주식민지로 시작된 경우가 된다. 그리고 New York은 1623년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에 의해서 처음에는 New Amsterdam이라는 이름으로 植民地 化가 시작되었으나, 1664년 영국식민지로 주권이 移讓되면서 New York으로 地名이 바뀌게 된다. (1626년 여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Man-a-hat-a”라는 인디안 족으로부터 그 당시 $24에 해당하는 물품을 주고 오늘의 Manhattan을 구입했다.)

17세기 下半期까지 대체로 영국의 海外植民政策은 직접 관리할 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며, 영국왕실이나 영국국교(The Anglican Church)도 식민지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故로 美 대륙의 영국식민지에는 처음부터 아주 地方的이고 지방 分權的인 특성이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 또는 전통은 독립이 된 후에도 상당기간 존속해 왔으며 오늘날 까지도 미국사회를 특징 지워주는 요인으로 남아있다.

英國은 해외식민 사업을 통한 新대륙 영토 확장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및 프랑스 보다 한발 두발 늦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중엽까지 에는 영국은 北美대륙에 진출한 유럽국가 중에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키우고 그리고 다스리는 데는 결국 가장 성공적인 최대의 强者로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해외식민進出에 영국정부는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경우처럼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어도, 北美 대서양연안의 영국식민지로 영국人들의 이민은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18세기 중반 북미대륙의 영국식민지는 人口數에 있어 프랑스식민지 보다 15배 以上이나 많았다.

北美 內 영국 식민지들의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적으로도 번창해 지자, 17세기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英國王室 또는 정부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이들 식민지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개별 식민지에 왕실에서 임명한 총독(Royal Governor)을 보내 직접 관리하기에 이른다. 즉, 그 동안의 민간관리체제에서 “直轄 식민지” (Royal or Crown Colony) 체제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런던으로부터의 이 같은 통제가 3000마일 떨어진 식민지內의 일상 업무에까지 깊이 관여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各 식민지에는 그 지역 內에서 선출된 대표자들로 구성된 의회가 있어 母國으로부터 임명된 총독의 권한이나 역할이 실질적으로 상당히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직할 식민지”체제 下에서 큰 변화는 영국정부가 식민지의 수출입 상품에 대한 통제와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럽에서 북미 영국식민지로 들어가는 모든 물품은 母國인 영국을 통해서만 갈수 있도록 規制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母國으로부터의 移民은 줄어드는 反面 독일,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 영국 以外의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이민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한다. 미국사회의 多樣化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그들의 식민지 이주민들을 천주교인(Catholic)으로 제한을 했으나, 18세기 중엽 영국식민지의 경우 이미 인구의 20-30%가 非영국인으로 구성 됐으며, 특히 종교의 多樣性은 영국식민지가 다른 식민지들과 구별되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미국혁명 당시 미국의 백인 인구는 대략 2백50만으로 볼 수 있는데, 70% 가량이 영국 혈통이고 나머지 30%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다른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영국식민지의 多樣性은 그 당시 영국의 自由主義 전통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아진다.

美國革命

미국혁명 또는 독립전쟁은 1775년 4월 19일 Boston 近郊에 있는 Lexington과 Concord라는 곳에서 식민지 民兵隊와 영국 駐屯軍 間의 무력충돌에서 시작된 것으로 美 歷史는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13개 州의 代表 機構인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가 마침내 1776년 여름 독립을 선언하기로 決議했을 때는 영국과의 전쟁은 이미 1년을 훨씬 넘게 진행되고 있었다.

독립전쟁은 단지 미국의 독립을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다. 母國인 영국과의 전쟁은 일종의 집안싸움 또는 內亂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 당시 미국 인구의 대다수는 아직도 영국인 혈통으로, 母國에 대한 오랜 인연을 그것도 전쟁으로 단절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情緖的으로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母國 영국에 충성하는 소위 “王黨派”와 미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愛國者”들로 나뉘어져 심지어는 한 가족 內에서도 戰場에서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있을 수 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한 狀況에서 獨立宣言이 늦어졌으나, 결국 13개 식민지연합은 母國 英國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 당시 戰況에서 독립선언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主張은 식민지연합 미국이 莫强한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外國으로부터의 절대적 支援인데, 母國 영국과의 정치적 인연을 끊는 “獨立”을 선언할 경우 필요한 그리고 확실한 지원이 바로 프랑스로부터 올 것이라는 것이다.

독립은 선포되었고,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에 일등 공신이 된다. 한마디로, 프랑스의 支援과 同盟이 없었다면 미국독립은 不可能했다고 말 할 수 있다. 實은, 1775년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기다였다는 듯이 美 독립軍에 은밀하게 총기를 포함 군수품을 지원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쟁은 초장에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프랑스는 미국혁명을 그렇게도 도와주고 싶어 했는가?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20여년 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英佛 戰爭

18세기 중엽 프랑스와 영국은 서방세계의 强者로 北美대륙에서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된다. 17세기 以來 영국은 유럽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끊임없는 경쟁과 투쟁을 벌여 왔으며, 이러한 유럽의 力學關係는 북미대륙의 식민지 판도에서도 再現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 보다 먼저 식민사업에 進出한 스페인은 북미대륙에서 Florida와 西南部 지역(California에서 Texas까지) 그리고 멕시코와 中南美 및 南美대륙 (브라질은 제외) 을 일찌감치 차지했으나, 16세기末 “무적함대 (無敵艦隊)”가 영국에 敗한 以後에는 점차 斜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北美대륙의 프랑스植民地 (New France)는 17세기 初 캐나다 의 東南部 Quebec에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식민지 탐험과 답사는 프랑스王國의 영광과 번영의 時期인 Louis 14세의 帝位期間에 (1643-1715) 이루어졌다. 1682년에 탐험가 La Salle은 캐나다 東南部에서 西쪽의 五 大湖를 지나 Mississippi江을 따라 南으로 New Orleans를 거쳐 멕시코 灣에 도달한다. 東에서 西로 Appalachian산맥과 Rocky산맥 사이를 차지하는 이 광대한 領土를 La Salle은 국왕Louis 14세에 바친다는 뜻으로 “Louisiana 영토” 라고 命名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미국의 東部 대서양연안은 영국이, 中部는 프랑스가, 그리고 Florida와 西南部는 스페인이 各各 차지하고 있었다. 美 대륙에서 이와 같은 三國의 식민지 版圖는 대체로 18세기 중엽까지 존속하게 된다.


그러다가 드디어1754년 프랑스식민지와 영국식민지 사이의 緩衝地域인 “Ohio계곡”에서 영국軍과 프랑스軍 間에 무력충돌이 일어나면서 앙숙의 관계인 두 나라는 북미대륙에서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決戰에 돌입한다. 이를 美 歷史에서는 “프랑스 및 인디안 과의 戰爭” (The French and Indian War, 1754-1763) 이라 하고, 그리고 2년 뒤에 유럽에서도 英佛 전쟁이 일어나는데 西洋史에서는 이를 “7년 戰爭” 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와 전통적으로 가까운 스페인은 유럽 戰에서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한다.

패권 다툼인 英佛 전쟁에서 승자가 된 영국은 가장 두려워했던 宿敵 프랑스의 존재를 북미대륙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除去하게 된다. 1763년 굴욕적인 파리(Paris) 강화조약으로 패전국 프랑스는 캐나다 全部와 앞에서 언급된 Louisiana영토의 Mississippi江 東쪽 지역에 대한 權利를 영국에 移讓하고, 나머지 江 西쪽 부분과 New Orleans港은 스페인에게 양도 된다 (프랑스를 도와 參戰한 스페인에 대한 報償으로). 그 대신에 스페인은 Florida를 영국에 넘겨준다.

1763년 영국의 완전 승리는 분명 美 역사에 있어 중대한 轉機라 하겠다. 만일 영국이 아니고 프랑스가 승리했다면 미국의 존재 또는 미국의 역사는 달라졌고 따라서 세계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自由의 나라” 미국의 탄생이 1763년 영국이 승리한 結果의 産物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제 名實 共히 최대의 강자로 바야흐로 영국의 시대가 到來한 것 같더니 바로 영국의 승리가 식민지의 自主와 獨立에 대한 심각한 論議를 촉발시킨 결과를 가져 왔으며, 이것이 北美 內 영국식민帝國의 終末의 시작이 될 줄이야. 이기고 지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여기에서도 보게 된다.

프랑스의 위험과 존재가 美 대륙에서 사라지자 13개 식민지의 지도자들은 그 동안 母國 영국에 依存해 왔던 군사적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점차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영국정부의 植民地政策에 대한 이들 지도자들의 思考와 판단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英佛 戰爭에 모국과 함께 參戰하면서 이들은 個別 식민지들 間에 필요한 相互協力의 중요성을 새삼 認識하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3개 州의 연합에 대한 필요성도 처음으로 이들 식민지 지도자들 사이에서 論하게 된다. 또 하나의 새로운 발견은 George Washington을 비롯한 식민지軍의 지휘관들은 프랑스 軍과의 전투에 참가한 그들의 民兵 대원들이 영국 駐屯軍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북미의 영국 주둔군은 전쟁이 끝난 1763년 以後에도 새로이 획득한 지역의 치안 및 보호 등의 문제로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현지에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그런데 “駐屯軍 維持費用을 어떻게 充當하느냐”가 문제였다.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으로 이미 國庫가 밑바닥에 와 있는데, 戰費에 더하여 엄청난 “평화 유지비”는 쪼들리는 영국정부에 또 하나의 고민 덩어리를 안겨준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정부는 늘어난 植民帝國의 관리에 필요한 세입을 기존의 식민지들로부터 추가 징수하기로 한다. 국왕George III 下의 영국정부는1760년대 後半부터 輸出入 관세에 더하여 印紙稅 등 각종 直接稅를 식민지에 부과하기 시작한다. 식민지 지역의 안전과 보호에서 발생되는 비용은 식민지도 부담해야 한다는 영국정부의 주장에 식민지 側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주장으로 맞섰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새로운 中央執權的인 식민지政策은 自律과 自治에 이미 상당히 익숙해진 식민지 세력들과의 갈등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武力충돌로 이어지면서 美國革命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지나가고 만다.

雪辱(설욕)의 기회

한편 패전국 프랑스는 北美에서 이러한 狀況이 벌어지고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제 앞에서 우리가 던진 “왜 프랑스는 미국혁명을 그렇게도 도와주고 싶어 했는가” 라는 바로 그 질문으로 돌아간다.

1763년의 파리 강화조약은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프랑스에게는 굴욕적이고 비참하고 가혹하고 참을 수 없는 조약이었다. Louis 14세의 이른바 “위대한 프랑스”가 그야말로 땅에 떨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프랑스는 영국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그 날 만을 기다리면서 지내왔다. 그 고대하던 날이 드디어 1775년 4월 19일에 온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곧 식민지 혁명 軍을 “은밀히”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 총기 탄약 등 군수물자를 보낸다. (프랑스는 영국에 “公式的”인 전쟁선포를 아직 하지 않았음.) 특히 美 혁명군이 독립전쟁의 가장 어려웠던 첫 2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지탱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계속적인 프랑스의 지원이었다. 화약과 소총의 경우 혁명군이 필요한 보급의 90%가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

1777년 가을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轉換點이라고 할 수 있는 New York州의 Saratoga 전투에서 승리한 미국은 프랑스와의 공식적인 同盟을 이끌어내는 契機를 마련하게 된다. 1778년 2월 프랑스는 마침내 미국과의 軍事同盟 및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두개의 條約에 각각 調印한다. 그리고 곧 프랑스는 영국에 공식적인 전쟁선포를 하게 되고, 그 다음해 1779년 프랑스의 友邦 스페인도 對英戰에 참전한다. 1778년 군사동맹 이후부터 프랑스는 美 대륙에 함대와 병력을 파견, 영국軍과의 직접 交戰에 들어간다. 1781년 영국軍과의 마지막 決戰場이 되어버린 Virginia 주 “Yorktown 전투”에서 영국군 8,000명의 항복을 끝으로 실질적으로 美 독립전쟁은 끝난다. 그런데 이 전투에 참가한 프랑스 병력의 數가 美軍보다 많았다.

1783년 또 하나의 파리 강화조약에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1763년 패전국 프랑스가 굴욕적인 파리 강화조약을 조인한지 꼭 20년 後가 된다. 비로소 13개의 독립된 州들이 영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이제 영국은 완전히 미국 땅에서 북쪽 캐나다로 물러가고, 1763년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획득한 Louisiana 영토의 Mississippi江 동쪽 지역은 미국이 차지하게 된다. (서쪽 지역은 스페인이 계속 보유함). 1783년 파리조약으로 이제 미국의 영토는 대서양연안에서 Mississippi강까지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또한 영국은 20년 전에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Florida를 스페인에게 되돌려준다. 그러면 미국독립의 一等 공신인 프랑스는 과연 무엇을 얻었는가? 미국혁명으로 프랑스는 영국에 보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영국을 미국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밖에 프랑스가 얻은 것은 별로 없다. 북미대륙 內에 어떠한 영토상의 旣得權을 되찾은 것도 없다. 오히려 프랑스 정부가 1783년 까지 지출한 戰費는 12억 livre에 ($2억) 달했으며, 이로 因한 국고의 탕진은 결국 1789 年의 “프랑스革命”으로 가는데 一助를 하게 된다. 미국독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영국에 복수를 한 프랑스王國은 이렇게 종말을 맞는다. 이기고 지는 “역사의 아이러니”의 반복이다.

自由의 나라 미국의 탄생은 母國 英國의 遺産

미국혁명이 한창이었던 18세기 後半 유럽에서는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以來 휴머니즘이나 合理主義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계몽사상이 유럽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유럽국가 중에서 계몽사상이 가장 먼저 싹트고 뿌리를 내린 나라가 영국이었으며, 그 선구자는 앞에서도 언급된 미국의 독립과 건국의 사상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John Locke이였다. 舊질서의 권위와 전통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自然權 사상에서 출발한 個人의 自由와 權利가 주어지고 또한 보호되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과 요구가 불어나고 있는 시대였다. 그 당시 이 같은 “自由民”의 탄생을 위한 조건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 유럽의 어느 나라 보다 도 바로 北美의 영국식민지라고 볼 수 있겠다. 이들 식민지 거주민들은 왕도 귀족도 없는 그 당시로는 가장 자유스럽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 셈이다. 이는 마치 “자유”로 충만한 新세계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北美 영국植民地가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 가는 데는 유럽으로부터 移住한 여러 민족들이 서로 협력했지만, 특히 植民初期에는 여러 面에서 영국의 영향이 지배적인 것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植民地 사회의 言語, 法, 宗敎, 文化, 自治에 관한 훈련, 심지어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무너뜨린 政治理論 까지 이 모든 것이 영국으로부터의 遺産이라 볼 수 있다. 母國 영국과 북미의 영국 식민지는 사실상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모두 大憲章(Magna Charta, 1215)으로 시작해서 17세기 末의 “명예혁명”까지 數 세기에 걸쳐 서서히 그 뿌리를 내리게 된 이른바 영국의 “立憲自由主義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미 식민지가 누릴 수 있었던 自由는 一次的으로 이러한 영국의 정치적 전통과 그 특성의 德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식민지의 개척정신과 舊질서에서 벗어난 생활환경은 母國보다도 먼저 力動的인 新대륙 식민지에서 “입헌 자유주의”가 結實을 맺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혁명으로 태어난 “自由의 나라” 미국은 먼 희미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민족주의적인 소속감(所屬感)의 산물이 아니라 全세계의 注目을 받으면서 “자유의 價値”를 바로 드러내놓고 탄생된 최초의 나라가 된다. 18세기 중엽 당시 北美 식민지에서 새로운 독립國家가 생겨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독립以前의 13개 식민지들은 서로 완전히 떨어져 있는 거나 다름없는 별개의 자립적인 존재였다. 各各의 個別 식민정착지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그만 세계” 속에서 존재한 셈이며, 오랫동안 各 식민지들 間의 利害관계도 별로 많지 않았다. 심지어 各 식민지에서 유통되는 화폐도 달랐다. 13개 식민지는 영토적 통합도 돼있지 않았으며, 意志나 目的에 있어서도 한 목소리가 아니었으며, 식민지 住民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교육수준이 있는 年長者들) 그들의 영국 국적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이 같은 情況에서 이들 식민지의 地位나 身分에 변화가 있다면 이는 어떠한 억압이나 또는 모국에 대한 不信感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도리어 북미의 영국식민지 주민들은 그 當時 유럽의 어느 나라 국민들에 比해서도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정치적 및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북미 13개 식민지가 最强國인 모국 영국에 反旗를 들게 된 것은 그들이 억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자유는 한 차원 더 높은 자유를 기대하고 실현해 보겠다는 意志를 지닌다. 이들 식민지 주민들은 그들도 뿌리가 같은 영국人이었기 때문에 반기를 들 수 있었고 또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식민지 內에서도 독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영국 內에서도 독립을 지지하는 영국인들도 있었으며, 마침내 독립의 선택은 곧 자유의 선택이고 자유의 승리였다. 흥미 있는 사실은 독립전쟁이 일어난 後인 1776년 初 독립선언의 필요성에 불을 붙인 Thomas Paine은 영국으로부터 불과 3개월 전에 미국 땅을 밟은 아주 진보적인 “영국인”이었다. Paine은 그의 小책자 “Common Sense (常識)”에서 “미국 땅에서 영국군과 싸우고 있으면서 영국에 충성하는 체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행위다”라고 力說하면서 즉시 독립을 선언할 것을 촉구했다. 18세기 계몽사상의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價値로서의 自由 그리고 萬人의 自然權 또는 人權으로서의 自由의 槪念은 비로소 미국 독립선언에서 처음으로 그 實用的 適用性을 시험하게 되는 契機를 맞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누구 보다 도 영국에서 온 지식인 Paine의 역할이 돋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독립을 선포하게 된 “美國人”들은 그들 자신이 영국 또는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와 번영과 평등의 새로운 美國社會는 퇴폐적인 유럽의 君主制的 舊질서와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식민지 미국인들에게 미국혁명은 모국 영국에 대한 정치적 의존관계의 끈을 끊어버린 다는 것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혁명의 중대한 고비를 넘기면서 이제 미국인들은 그들이 역사와 문명의 벽지(僻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바로 역사의 선구자요 전위대라는 새롭고 강렬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즉, 미국은 자유와 평등으로 가는 民主主義의 길을 全세계에 보여주어야 하는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국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것은 美 共和國의 도덕적 기초가 된다. 이렇게 해서 뒤에서 다루게 될 미국인의 이른바 “選民思想”이 또한 태어나게 된다.

自由와 安保의 갈등

自由는 미국의 시작이고 미국의 建國 理念이다. 그리고 자유는 오늘날에도 미국의 存在 理由라 하겠다. 지난 200년간 물론 기복과 불행도 있었지만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볼 때 미국사회에 있어 市民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量과 質의 면에서 사회의 모든 계층으로 확대 및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지난 200년간의 미국의 역사는 좀더 완전한 民主化로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人間社會에서 절대적 의미의 완전한 平等이 없듯이 절대적 自由 또한 존재할 수 없다. 民主主義의 諸가치가 서로 相反 될 수 있듯이, 상대적인 개념 또는 가치로서 자유도 국가와 사회를 보호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하고 중요한 다른 가치와 때로는 상충될 수 밖 에 없다.

民主主義國家에서 시민의 자유가 정당한 法의 절차 없이 제한되거나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하는 (또는 발생할 수 있는) 경우가 바로 自由와 國家安保 間의 문제다. 현실적으로 안보를 위한 자유의 代價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理論 上으로는 個人의 自由와 權利는 국가 또는 지역공동체의 安全에 위협이 될 경우에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본다. 국가의 안보가 없으면 국민의 자유도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안보의 위기라는 이유 또는 구실로 정부가 마음대로 무조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거나 박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래 개인의 자유가 별로 없는 공산국가에서는 자유와 안보의 문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미국과 같이 法이 지배하는 自由民主主義국가에서는 항상 국가안보의 위기가 있을 때 마다 (특히 적이 國內에 있을 수 있는 경우에는) 자유와 안보의 갈등과 양자間의 균형의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가장 최근의 이러한 例가 우리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2001年 9月 11日이다. 白晝에 온 국민의 바로 눈앞에서 미국의 심장부가 그것도 세 곳에서 국경도 없는 이슬람 테러리스트집단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지는 이 엄청난 사건은 분명 건국 이래 미국의 최대 國家安保 危機라 하겠다. 미국은 곧 “9-11”이라고 부르게 된 이 참화의 성격을 제2의 Pearl Harbor라고 定義하면서 싸울 對象國은 분명하지 않지만 이 상황을 戰時로 간주했다. 그러면 美정부는 9-11이후 國內安保를 위해 어떤 조치들을 취했는가. 사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정부 당국도 이 넓은 그리고 敵에게는 아주 有利할 만큼 “自由스러운” 미국사회에서 국민의 安全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인 준비된 對策이나 方案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선 美行政府와 議會는 1947이래 가장 의미 있는 정부조직개편으로 國內安保를 총괄하는 “國土방위부”(Dept. of Homeland Security) 新設에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또한 數개월내에 美 법무부는 위험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소위 “잠재적 범죄자” 1,200명가량을 事前 검거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適法한 절차 없이 체포된 경우도 많았다. 그 當時 아직도 9-11의 충격 속에서 미국國民은 정부의 강력하고 신속한 행동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충격이 가라앉고 시간이 지나면서 9-11의 경우에도 시민의 자유와 인권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美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실제로 정부가 이와 유사한 國家安保危機 상황을 다루었던 例가 여러 번 있다. 건국初期1790年代 末 아직 햇병아리 시절의 미국은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시작한 프랑스와 전쟁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2代 대통령 Adams는 “외국인 체류자 및 폭동교사에 관한 法令”에 서명한다. [The Alien and Sedition Acts of 1798] 이 法은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을 前提로 해서 미국 內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立案 된 것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는 그 당시 親 프랑스파인 Jefferson과 그의 추종자들을 의식한 조치였다. 이 法의 핵심내용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모든 외국인 체류자를 추방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또한 이 법의 집행을 반대하는 者와 정부나 대통령에 관해서 허위적이고 악의적인 글을 배포한 者에 대한 처벌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 法은 개인의 자유와 시민자유를 심히 침해할 소지(素志)가 많다는 점에서 違憲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 당시 부통령이었던 Jefferson은 이 法의 위헌性 뿐만 아니라 특히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할 수 있는 中央(연방)정부권한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문제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强하게 제기했다. (결국 프랑스와의 평화적인 해결은 이 法의 실질적인 집행을 無效化 시킨 셈이 되었다.)

위에서 본 Adams의 경우가 문제였다면 이는 그 후 半세기가 훨씬 지난 南北戰爭 中에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Lincoln이 취한 조치에 比하면 오히려 무색하다. 이른바 대통령의 “戰時 권한(War Powers)”과 “國家安保”라는 명분으로 Lincoln 대통령은 남북전쟁 中 내내 필요하면 언제나 “인신보호법”을 일방적으로 정지시키고 법관의 영장 없이 누구든지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전쟁 중인 1863년 3월 美議會가 정부는 정당한 法의 절차 없이 “용의자”를 20일 이상 구금할 수 없다는 法을 통과시켰는데도 Lincoln 은 대통령의 직권으로 계속해서 정치적인 구속 및 구금과 군사재판을 허용했다. (1866년 연방대법원은 민간인의 군사재판은 민간인의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했다.)

20세기에도 內部로부터의 敵과 관련된 유사한 例는 계속된다. 1941년 12월 Pearl Harbor 기습이 발생하자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하면서 1942년 初 Lincoln에 버금가는 위대한 대통령인 Roosevelt는 12萬가량의 日本系 美國거주자 (시민권자 포함) 들을 국가안보상의 이유로 California 및 西部地域의 몇 개 州에 분산 “격리수용” 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대통령令 9066). 그리고 1944년 美연방대법원은 격리수용에 관한 “대통령令”은 合法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1988년 Reagan대통령은 전쟁 중에 발생한 “격리수용”은 “중대한 不當한 조치”였다고 인정 하면서 수 천 명의 수용소 생존자들에게 一人 當 $20,000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法案에 서명한다. 이 같은 대통령의 공식적인 謝過 훨씬 以前인 1971년에 美의회는 조용히 “격리수용”관련 法을 무효화 폐지 시켰으며, 1983년에는 격리수용에 불복해서 이미 유죄판결을 받았던 3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美연방지방법원에 의해 復權되었으며 그들의 “유죄판결” 자체도 무효화 선언됐다.

시기적으로 韓國戰爭과도 겹치는 冷戰이 한창 시작된 1950년대 初의 産物인 이른바 “McCarthyism” (매카시즘) 도 “內部로부터의 敵”과 관련된 또 하나의 例라 할 수 있다. Wisconsin州 美 上院 의원인 Joseph McCarthy는 극우반공주의자로서 그 당시 미국정부 內 특히 국무부 內에 200명이 넘는 공산주의자 또는 소련스파이가 숨어있다고 떠들어 대면서 한때 “McCarthyism”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유명해진 정치인이었다. 美의회 청문회에서 선동적이고 잔인할 만큼 무섭고 야비한 그의 심문(審問)전술은 마땅히 비난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적 상황에서 소련첩자가 미국 내 침투돼 있다는 정보는 상당히 근거가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은 모든 연방정부 공무원에 대한 “보안검사” 실시를 대통령令으로 지시한 바도 있다. 많은 人士들이 McCarthy의 표적대상이 되었지만 결국 국무부 관료 몇 사람을 기소하면서 용두사미(龍頭蛇尾)격으로 끝난 “McCarthyism”은 오늘날 美 역사에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또한 중요한 교훈으로도 남아있다.

위의 例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國家安保와 개인의 自由와의 균형문제는 民主主義 미국사회에서 안보의 위기가 있을 때 마다 늘 문제 또는 과제로 남아있다. 9-11 (2001)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에서도 이러한 근본문제는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4년 6월 美연방대법원은 9-11이후 Guantanamo (쿠바 섬의 美 해군 기지) 에 적법한 절차 없이 아프간 전사들을 비롯해서 외국인들을 억류하고 있는 Bush 행정부의 정책은 不法이라고 판결했다. 물론 정부당국은 戰時상황에서 모든 경우에 모든 法的요건을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항변하고 불만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거져 나온 또 하나의 문제가 2006년 初에 발생했다. 美 상원의 法司위원회 그리고 兩院의 두 情報위원회가 모두 부시 행정부의 “테러리스트 감시프로그램”의 適法性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9-11이후 부시 대통령이 “국가안전 청” (National Security Agency) 에 해외테러리스트집단과 연계가능성이 있는 미국 內 居住者들의 모든 국제통화를 (전화 및 e-mail) 도청할 것을 은밀히 指示한 것을 말한다. 이 도청프로그램에 관해서는 美의회의 양당 院內지도자를 포함해서 정부 內 극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2005년 12월에 New York Times紙가 이 “비밀” 도청프로그램의 존재에 관해서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2006년 2월부터 이에 대한 美 議會의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의회의 양당 청문회 위원들의 대다수가 제기한 논점의 핵심은 한마디로 “現行法 下에서 이 도청프로그램은 不法이다” 라는 것이다. 1978년에 제정된 “해외정보감시 法”에 의하면 법원의 事前承認 없이는 國內 居住者에 대한 도청은 금지되어 있다. 물론 Bush 대통령 측은 이 도청프로그램은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으며, 이는 대통령의 戰時權限 內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議會 調査청문회에서 부시 정부의 법무장관은 문제의 도청프로그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戰時에는 대통령은 통상 법관의 사전승인 없이 敵에 대한 감시와 감청을 지시해 왔으며, 또한 이들 戰時 대통령들이 취했던 조치들은 테러리스트집단을 겨냥한 부시 대통령의 프로그램 보다 훨씬 광범위한 대상에 적용되었다고 본다.” 美 議會의 입장은 요약하면 이렇다: “戰時에 대통령은 필요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市民의 自由를 유지하고 저 한다. 부시의 현 도청프로그램은 法的근거가 없으며, 무고한 시민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까지(2006년 봄) 부시 대통령과 의회는 양측 모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9-11이후 한가지 정부가 과거의 失策을 교훈으로 실천한 것은 어느 특정 소수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표적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첨단기술 문명과 지구촌 世界化 속에서 自由와 安保의 균형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아마도 완전한 이상적인 “균형의 點”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질없는 일이라 본다. 이 “균형의 점”은 그때의 상황, 국민정서, 누가 대통령인가, 누가 의회의 다수당이냐, 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의 성향은 어떠한 가 등등의 변수에 따라 流動的일수 밖에 없다. 戰時 또는 安保危機 時에 대통령과 행정부는 통상 자유보다는 安保쪽에 무게를 두게 되고, 의회나 인권관련 시민단체는 상대적으로 자유의 보호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요한 것은 行政府와 議會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를 견제를 하고 그것도 合理的인 논쟁을 통해서 아주 잘하고 있다는 점이다. 美 헌법에 주어진 행정부와 의회間의 “견제와 균형”의 역할이 바로 미국이란 나라의 安全과 自由를 同時에 長期的으로 잘 지켜주고 또한 미국을 가장 富强한 나라로 계속 유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自由와 社會倫理 및 道德性의 문제

戰後 개인의 자유, 시민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等 미국사회에 있어 자유의 확대 및 확산은 1960年代에 불어 닥친 미국사회의 旣存 價値觀에 대한 치명적인 도전과 맞물리어 가면서 오늘날 進步와 保守 間에 심각한 倫理的, 道德的 갈등양상을 낳고 있다. 이 문제(issue)는 뒤에서 다른 주제와도 연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으며, 여기서는 주로 1960年代에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시대적 배경을 다루고저 한다.

그렇다면 1960年代에 도대체 어떤 변화의 물결이 미국사회에 밀려왔는가. 미국의 경우에도 60년대는 (특히 後半) “대학의 소요”로 기억되고 기록되는 時期다. 人口社會學的으로 보면 60년대는 이른바 前後의 “Baby Boom 세대”가 미국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그 數에서 대량으로 대학에 進學하게 된 時期이며, 이들은 그 당시 흑인民權운동과 월남戰의 渦中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미국사회의 새로운 “저항세력”으로 등장하면서 反戰運動을 주도하고 기존의 價値體系로부터 解放에 전위대 역할을 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변화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어 이를 “문화혁명” 또는 “문화전쟁”이라고 까지 표현한다.

戰後1946년에 시작된 “baby boom”은 57년에 절정에 달했다가 서서히 줄어들면서 1964년에 끝이 났다고 본다. 그리고64년 가을에는 “베이비 붐” 世代가 대학 캠퍼스에 첫발을 디딘다. 이제 젊은 대학생 “boomers”들은 그들이 원하는 人生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自由”를 가진 미국의 첫 世代가 된다. 이들은 1930년대 大공황 (Great Depression)을 겪으면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해본 그리고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던 그들의 父母세대와는 성장과정이 사뭇 달랐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만큼이나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라난 이들 “baby boomers”는 저축을 하면서 한참 뒤에야 만족감을 느껴보는 부모세대와는 달리 TV문화에서 “순간적인” 즐거움을 맛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1960년대 미국사회의 한 큰 축(軸)을 형성하고 있던 이들 젊은이들의 상당數가 그들의 부모세대는 상상도 못했을 새로운 思考, 새로운 生活方式, 새로운 價値觀에 轉向돼있었다. 이들이 자라온 환경과 관심사는 풍요, 안정, 그리고 자유다. 이 “自由”는 어떠한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는 “적극적인 自由”를 뜻한다. 고난과 전쟁을 전혀 모르고 자란 이 戰後世代가 대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1964년은 California 주립대학교 Berkeley 캠퍼스에서 후일 反戰운동의 효시(嚆矢)가 된 “자유언론운동”이 일어난 해가 된다.

60년대 후반 反戰운동이 전국의 대학가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自由奔放한 젊은 세대의 “도취되어 기성사회를 떠나자”는 “환각제 문화” 와 “전쟁 말고 애정행위를 하자”는 “性的 혁명”이 또한 대학캠퍼스를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女權신장/男女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운동” (Feminism)이 민권운동을 본 따서 시작된다. 흑인들이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듯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고 나온 것이다. 50년대의 “조용한 세대”로 그들의 부모, 선생, 그리고 성직자의 권위와 구속에서 이제 벗어난 수백만의 진보주의적인 이들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미국사회의 전통적 틀을 깨겠다는 정치적 투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法的으로 결혼을 원하지 않으면 이들은 쉽게 “同居”를 하기 시작했고, 또한 임신과 출산을 원치 않으면 피임과 낙태를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이들은 요구했다. 1950年代만해도 낙태는 범죄일 뿐만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 1973년 마침내 美연방대법원은 모든 州의 낙태禁止法은 違憲이고 낙태는 헌법에 보호된 여성의 權利라는 획기적인 판결을 내린다. 이로써 낙태는 일단 合法 化된 셈이지만, 낙태 法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미국사회의 “親 선택” (Pro-choice) 집단과 “親 생명” (Pro-life) 집단間에 가장 민감하고 불붙는 문제(issue)로 남아있다.

60年代에 시작된 이 같은 사회적/문화적 변화의 물결이 70/80年代를 거치면서 미국사회의 표면으로 떠오른 또 하나의 심각한 倫理/道德性의 문제는 통상 “gay”라고 불리는 “同姓연애자” 들의 문제다. 이들은 이미 벽장 속에서 나와 公公然히 그들의 인권과 사생활에 대한 보호와 권리를 주장하고, 法적으로 同姓 間의 결혼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男(gay)과 女(lesbian)의 동성연애자 集團들이 서로 연계해서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기도 한다. 2000년 Hillary Clinton 여사는 뉴욕 市에서 거행된 “Gay과시행진”에 참가한 첫 令夫人이 되었다. 대략 지난 20년간의 추세를 보면 “gay”라도 친구나 직장동료로 받아줄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數가 아직은 다수는 아니지만 증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2003년에는 드디어 美연방대법원에서 Gay들도 그들의 私生活에 대한 헌법상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法的 결혼을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Gay의 존재와 기본人權을 대법원이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권익향상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판결이라 하겠다. 과연 이들의 法的 결혼은 인정될 것인지. 이제 미국사회의 “문화혁명”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女權伸張, 낙태 合法化, 性的 자유, 同居, Gay의 權益보호” 等은 1960년대 이래 이른바 “文化혁명”이 성취한 업적들이라 하겠다. 反面 이는 1607년 Jamestown에 처음으로 永久식민정착지가 세워진 이래 미국사회를 지배해온 기독교文明의 倫理體系 와 道德的 秩序의 붕괴를 의미한다. 50年代만해도 미국사회에서 이혼은 汚名이었으며, 낙태는 혐오의 대상이었고, 同性戀愛는 감히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이었다. Gay를 보는 美 국민들의 어제와 오늘의 차이에서만큼 舊 道德秩序의 붕괴가 극명하게 드러난 예는 없다. 60년대 후반 “문화혁명”의 새로운 道德 律의 척도는 “누가 누구와 잠을 잦는 가” 가 아니라 (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민권운동을 위해 南部로 갔으며, 누가 인종차별에 저항했으며, 그리고 누가 非도덕적인 월남戰 反對행진에 참가 했는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미국이란 나라의 변화의 한 面이다. 변화의 방향이 “옳다 그르다” 또는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는 각자의 價値判斷의 문제라 본다. 확실한 것은 美國社會는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첫 主題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간단한 통계 하나를 말하고 싶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 인구는 통계상으로 80%가 넘는다. 개신교가 56%이고, 천주교가 28%이다.
























II. 자유民主主義體制의 나라

우리가 통상 美國이라고 부르는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은 1789년 George Washington을 初代 대통령으로 하여 美의회와 사법부로 三權이 分立되어 출발한 聯邦制 국가를 말한다. 이 미국은 君主가 아닌 4년마다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이 국가의 통치자가 된 최초의 “自由民主主義”의 나라다. 독립전쟁이 끝나면서 오늘의 美합중국이 바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13개 州가 독립을 선포한 1776년부터 美합중국이 탄생한 1789년까지는 미국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 잠시 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나서 미국의 民主主義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저 한다.

연합정부규약 (The Articles of Confederation)

13개 個別 식민지의 自立性 또는 地方性에 대해서는 앞의 主題에서도 이미 언급됐지만, 실제로 미국혁명以前에는 독자적인 이들 식민지의 거주민들은 “미국(America)”이란 대상에 소속감이나 충성심 같은 것은 없었다. 이들에게 충성심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국 영국이나 그들이 속해있는 식민정착지에 대한 것이라 본다. 1776년 이후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들 13개 州들은 연합을 이루어 (The United States) 단합된 행동도 보여주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州 연합정부” 보다는 각자의 州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즉, 그 당시 미국독립에서 태어난 것은 單一 新生國家가 아니라 13개의 個別 主權을 행사할 수 있는 독립된 州라고 볼 수 있다. 아직 州 民들은 “미국인 (American)” 보다는 Pennsylvania사람, Virginia사람, Carolina사람 등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립적 식민지에서 독립된 州를 거쳐 완전한 “미국인”으로 바뀌는 데는 美합중국이 탄생하고 나서도 한참의 세월이 지나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도 독립은 시작일 뿐이다.

독립전쟁기간 중에는 州대표들로 구성된 “대륙회의 (Continental Congress)”가 州들 間의 협력에 필요한 조정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나 가는 1781년에는 各 州가 승인한 “연합정부규약”이 발효되면서 “The Confederation Congress”라고 불리는 “연합정부”가 창설된다.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이것이 미국의 최초의 “정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州들의 연합을 명목상의 목적으로 발효된 이 “규약”은 시작부터 그 실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各 州의 대표들로 구성된 이 연합정부 (Congress)는 그 조직에서 행정부와 사법부의 不在로 실질적으로 州에 대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연합정부 內에서 각 州의 대표단은 하나의 투표권을 가지며, 연합정부는 주로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며 필요한 정부예산에 대한 州의 기여를 사정 (査定)하는 것으로 돼있으나 실직적인 권한은 개별 州들에 있었다.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연합정부는 현실적으로 군 병력을 유지할 자체의 재원이 없다. 연합정부는 州들 間의 통상관계 및 외국과의 무역을 규제할 권한이 없으며, 실제로 各 州가 독자적으로 관세도 부과하고 외국과의 무역협정에 관한 협상도 했다. 또한 사법부가 없으니 연합정부의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것도 州법원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 모두가 “이름뿐인 연합”의 한계를 보여주는 좋은 例들이다. “연합정부규약” 下에서는 新生미국의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갈 수 없다는 인식과 결론에 도달한 州지도자들은 마침내1787년 새로운 형태의 좀 더 완전하고 강력한 연방정부의 구성을 추진하게 된다. 그 결과가 美합중국의 탄생이다.

制憲의회 (The Constitutional Convention)

1787년 5월 25일Philadelphia에서 새로운 “美합중국헌법”을 立案하고, 논의하고, 협상하고, 합의하고 그리고 채택하기 위한 역사적인 “制憲의회”의 첫 회의가 개최되었다. Rhode Island 州를 除하고 12개 州로부터 55명의 대의원이 참가했으며, George Washington을 만장일치로 제헌의회 議長으로 선출했다. 55명의 대의원들은 독립의 元老 功臣인 다재다능한 81세의 Benjamin Franklin을 비롯해서 Hamilton, Madison 등 그 당시 미국사회의 엘리트집단을 대표했다고 보겠다. 여러 제안들에 대한 토의는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4개월간의 우여곡절의 진통을 거치면서 마침내 합의된 案이 9월에 채택되었다. 그리고 채택된 안에 대한 인준절차를 1788년 말 이미 11개 州가 끝냄으로써 (인준에 필요한 수는 9임) 새 헌법은 1789년 3월4일 정식으로 발효된다. 새 헌법에 따라 美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Washington은 1789년 4월30일 New York에서 취임식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나라 미국이 탄생한다. 이때까지 인준을 끝내지 못한 North Carolina와 Rhode Island 州도 이후 곧 연방에 동참하게 된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들의 헌법을 가리켜 “살아있는 文書”라고 한다. 美 헌법은 法治國家 미국의 권위와 힘의 원천이다. 미국인들은 이른바 “55명의 건국의 아버지들”의 작품이 마치 하늘이 내려주신 聖典처럼 이야기도 한다. 그런데 實은 1787년의 헌법은 妥協의 産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는 가능한 것의 예술이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타협의 정치라면 그 시작은 바로 1787년 Philadelphia에서 이였다.

위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1787년 새 헌법을 만드는 주목적은 명실 공히 美연방을 대표하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연방정부(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우선 새 헌법 하에서 중앙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의 三府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제헌의회 대의원들 간에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었으나, 三府간 권력배분의 문제는 권력집중을 우려하는 이들에게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이 문제는 삼권분립과 동시에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헌법에 明示함으로써 타협의 묘안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입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대통령의 각료 및 판사 임명권에 대한 의회의 인준, 그리고 대법원의 사법심사권으로 삼부가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게 한다.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정치 실험인 연방제 하에서 중앙정부와 州정부 間의 권력배분 또는 균형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더욱 민감하고 어려운 부분이었다. 새 헌법의 전문은 “우리 미국 국민은 ….”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이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이는 美연방 중앙정부의 권한은 個個의 州가 아니라 모든 州들의 집합체인 미합중국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美 헌법은 국방 및 외교 분야를 포함해서 租稅 權, 州들간의 통상규제 權 등 중앙정부의 일정한 권한들을 明示하고있다. 통상 美연방헌법에 열거돼 있지 않거나 또는 “내포”되어 있지 않은 권한은 州정부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1787년 대의원들은 중앙정부권한의 “강화” 필요성을 인식하고 또한 인정하고 있었지만, “强化”의 정도에 있어서는 그들 間에도 상당한 異見이 있었다고 본다. 미연방의 共同의 利害를 우선시하는 소위 “연방주의자” (Federalists) 들은 상대적으로 강한 중앙정부를 주장했고, 반면 “反 연방주의자” (Anti-federalists) 들은 상대적으로 덜 강한 중앙정부를 원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출현이 州의 권한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후자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Bill of Rights” (권리장전) 라고 알려진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첫 10개 헌법 수정안들은 (모두 1791년 발효) “反 연방주의자” 들의 요구에 응한 타협의 산물이다.
또 하나의 타협을 要하는 문제영역은 여러 州들 間의 상충되는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事案이다. 특히 민감한 대립적인 이해관계가 나타난 경우는 연방의회의 의석수를 어떤 기준으로 各 州에 할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인구가 많은 州들은 인구비례에 따른 기준을 고집했고, 반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州들은 인구數와는 관계없이 모든 州의 동등한 대표제를 주장했다. 오늘 우리도 잘 알고 있는 州의 인구비례를 기준으로 한 “하원”과 州의 평등원칙에 의한 “상원”은 이 역시 타협의 산물이며, 美 역사에서는 이를 “대 타협” (Great Compromise)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州들 間의 이해관계는 경제활동구조가 다른 南과 北으로도 갈라졌다. 상업과 제조업이 主경제인 북부 州에서는 이때까지 에는 이미 노예제도가 실질적으로 금지 또는 폐지되었지만, 연초와 목화 재배가 主경제활동인 Virginia에서 Georgia에 이르는 남부 州에서는 노예의 인구가 30-40%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남부 州들은 연방하원 의석수의 할당에 노예인구를 반영해줄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 나오게 된 “묘안”이 이른바 “5분의 3” 타협안이다. 즉, 노예 1명을 “5분지 3” 명으로 계산한다는 “이상한” 구절이 美 헌법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도덕적으로는 불미스러운 타협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지극히 실용주의적 해결책이 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새 헌법은 그 以前의 “연합정부규약”에 비하면 기본 원칙과 목표에 있어 발전적인 연방제를 이루어낸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 원칙과 목표를 구체화 하는데 제헌의회 대의원들은 그들의 異見과 분열을 정치적 타협과 “의도적인” 모호한 문구로 헤쳐 나갔다. 1787년 Philadelphia에서 무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미국의 기초를 놓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가능한 결합을 이끌어낸 노련한 정치인들이며 또한 뛰어난 정치 이론가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150년 以上 자립과 자치에 익숙한 13개 州들이 현실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연방국가의 틀을 마련해야 했다. 그 틀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 그때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2세기가 지난 오늘 그들이 심은 초목은 모진 비바람을 맞아 가면서 가지는 부러질 때도 있었지만 그 뿌리는 깊숙이 내려앉아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미국의 自由民主主義

미국하면 “자유” 만큼이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민주주의(democracy)”라 하겠다. 前後 지난 半세기동안 한국사회에서도 가장 많이 쓰인 “말, 구호, 용어 또는 표현” 중에 하나가 “민주주의” 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民主化(해야) 할 것인지 그 개념과 의미 그리고 실천에 무언가 분명치 않다는, 무언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多意的이고 복합적인 民主主義의 개념과 이론에 대한 論議를 여기서 할 수도 또한 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우리의 주제인 “自由民主主義”의 나라 미국에 관한 이야기를 할여고 한다. 이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생각해보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넓은 의미에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우리의 다른 모든 주제들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다루고저 한다. 먼저 개념적인 차원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정리해 보고, 그 다음에 몇 가지 구체적인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관해서 기술하고 설명해 보겠다.

“민주주의”라는 말 또는 표현을 쓸 때 그 개념, 의미, 用語사용에 혼란스럽고 혼동되는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미와 듣는 사람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이 사용할 때와 槪念 定義를 좋아하는 학자들이 사용할 때도 다를 수 있다. 또한 민주화의 역사와 과정이 다른 미국과 한국의 경우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認識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 하면 연상하고 연관지우는 것과 미국인들이 “democracy” 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통상 사용하는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自由민주주의 (liberal),” “代議민주주의 (representative) 또는 “選擧민주주의 (electoral)” 중에서 하나를 의미할 수도 있고 세 가지 모두를 포괄적인 개념으로 의미할 수도 있다. 대의민주주의와 선거민주주의는 실제로 같은 의미의 용어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선거”가 代議民主主義의 핵심요소로 간주되면서 이를 가리켜 “선거민주주의”라고도 한다. 특히 냉전이후 90년대 舊동구권 사회와 후진 개발도상국들에서 나타난 민주화 현상 또는 과정을 가리켜 학자들은 “선거민주주의”라고 기술한다.

冷戰시대에는 “自由민주주의”를 공산주의와 구분하는 용어로도 사용했다. 왜냐하면, 한때는 공산주의 국가들도 스스로를 “민주주의”라 불렀다. 아직도 북한의 공식명칭은 “조선인민 민주주의공화국 (DPRK)”이다. 물론 북한을 우리가 또는 서방세계가 사용하는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국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西歐 學者들은 英美를 비롯해서 서구의 선진국들이 주로 자유민주주의체제에 속한다고 본다. 非西歐 국가로는 일본이 포함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모두 자유 국가인 동시에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현상적으로 보면 이들 국가들에서 “自由와 民主主義” 間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자유가 민주주의를 조장(助長) 하는 것인지 민주주의가 자유를 조장하는 것인지, 즉 둘 사이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先進國의 경우 자유와 민주주의는 不可分의 관계에 있다고 보이는데, 미국에 있어 “자유민주주의”의 발달과정을 이해하려면 自由와 民主主義의 개념을 분석적으로 區分해서 들 여다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어로 “Liberal Democracy”라고 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입헌적 자유(constitutional liberty)”와 “민주주의(democracy)”의 두 개념이 엮어진 합성 體라고 할 수 있다. 論議의 편리상 民主主義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하고 나서, “입헌적 자유”를 論하겠다.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유래된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정치적 공동체의 통치는 바로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한다는 뜻이다(the rule of the people). 원래의 民主主義는 정치공동체의 자격 있는 구성원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의미했다 (direct democracy). 그러나 “직접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근대 또는 현대사회에서는 “代議民主主義 (representative democracy)”가 이를 代替하게 됐고, “선거”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국민은 “간접 통치”를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는 곧 “선거민주주의”를 의미하게 되고, 선거는 民主主義의 多數決 원칙을 구체화해주는 핵심적 요소로 간주된다. 요약하면, 민주주의(democracy)는 “열린, 자유로운 그리고 공정한 선거”에 의한 政治體制라고 定義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민주주의를 선거를 통해 정부를 창출하는 “과정” 또는 “절차”로 보는 개념을 말한다. 이같이 선거에 의해서 창출된 정부는 합법적인 민주주의 정부라고 할 수는 있지만, 민주주의 정부라고 해서 반드시 유능하고, 깨끗하고, 법을 존중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바람직스러운 정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유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정부의 능력 또는 도덕성은 별개의 문제다.

美 독립선언서 또는 美 헌법 어디에도 “democracy”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자유, 자연권, 재산권, 평등, 정당한 법의 절차” 등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문구 또는 표현은 여기저기에 나온다. 삼권분립과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항들도 뚜렷이 나와 있다. “Democracy”라는 말은 그러나 아무데도 없다. “Democracy”라는 용어를 英語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17세기에는 그것은 “직접 민주주의” 개념을 나타내는 말이었으며, 군중 또는 폭도를 가리키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용어로 인식되고 있었다. “민주주의(democracy)”가 英美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앞의 主題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충분히 논의된 바와 같이, 독립以前 식민지 時期의 미국인들은 이미 母國 영국의 “입헌자유주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었다. 특히 그 당시 사회의 엘리트층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즉, 미국이란 나라는 민주주의 보다는 또는 민주주의 훨씬 以前에 “自由와 法治”의 전통, 개념, 가치에 이미 노출되어 있었고 또한 젖어 있었다.

1787년 당시 건국을 주도한 미국의 지도자들은 “代議민주주의”를 마음에 둔 것이지만, 그들의 主 관심사는 정부를 어떻게 선출하느냐 (즉, “민주주의”) 하는 문제보다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부가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인가 (즉, “입헌적 자유”) 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美 헌법의 著者라고 할 수 있는 Madison을 비롯한 대의원들 대부분은 일반 대중이 정치 특히 선거에서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관리할 능력이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중의 판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는 권력(power)이 주어진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는 소위 “性惡說”의 前提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대단한 이론가인 36세의 Madison은 “인간이 천사라면 통치도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고 쓰고 있다. 뒤에서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미국의 민주주의가 “엘리트 민주주의”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이제 “Liberal Democracy”의 “민주주의” 부분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일단 중단하고 “입헌적 자유”쪽으로 가보자.
민주주의가 정부를 선출하는 절차에 관한 것이라면, “立憲자유주의”는 정부가 추구하는 목표 또는 가치를 말한다. 이는 西歐역사에 깊이 뿌리를 둔 전통으로서 개인의 기본 자유와 권리는 존중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특히 18세기 英美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입헌자유주주의 (Constitutional Liberalism) 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權 및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는 法의 권위를 重視한다. 미국의 경우 法의 권위는 美 헌법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이는 시민의 法 遵守를 포함해서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권력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법치(法治)를 뜻한다. 즉, 입헌자유주의는 “限定된” 정부의 권한과 권력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입헌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 (선거)民主主義의 개념과는 다르며 또한 역사적으로도 後者와 구분된다. 이를 위에서 論한 것들과 함께 풀어서 달리 기술하면, 오늘의 미국을 탄생시킨 1787년의 美 헌법은 “민주주의” (참정권) 보다는 그때까지 에는 이미 美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입헌자유주의” (자유, 법치) 에 그 바탕을 둔 것이며, 19세기를 지나면서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정치/사회개혁의 과정에서 美 국민의 참정권이 점차 확대되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참정권도 기본권에 속한다는 이른바 立憲자유주의와 民主主義의 “法的 結合”으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정착하게 된다. 미국은 입헌자유주의가 먼저 정착되고 나서 “민주화”의 과정을 밟은 셈이다. 이는 영국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1830년 영국 국민의 겨우 2%만 의회의 하원 선거에 투표할 수 있었으며, 1880년대에 와서 40%에 도달한다. 영국의 여성은 1920년대 末에 완전한 투표권을 행사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관한 이 같은 고찰은 곧 뒤에서 다루게 될 “왜 미 대통령선거는 직선제가 아니고, 왜 여성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 된다.

정리하면, “자유민주주의”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뿐만 아니라 법치, 권력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개인의 기본 자유와 권리 (오늘의 이른바 “인권”)의 보호를 그 핵심요소로 삼고 있는 정치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오늘날 미국이 국제관계에서도 “人權”을 論하고 重視하는 것은 민주주의 보다는 입헌자유주의 전통에서 비롯된다. 통상 우리가 民主主義의 諸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유, 평등, 법치” 등은 분석적으로 보면 “민주주의” 개념과는 별개의 것이다. 민주주의보다 法질서가 우선시되는 사회가 미국이다. 민주화를 위한 美 사회의 질서 있는 “시위문화” 그리고 法治에 의한 民主化도 입헌자유주의 전통에서 비롯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나고 있는 입헌자유주의 전통이 없는 非서방 국가들의 “민주화” (또는 “자유화”) 과정은 미국이 걸어온 길을 逆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진통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의 “민주주의”를 “선거민주주의”라 부른다. 이들이 민주주의와 立憲自由主義의 기반을 동시에 이룩할 수 있다면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와 이론에 새로운 章이 될 것이다.


왜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直選制가 아닌가?

美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88년 9월 美“연합정부” (The Confederation Congress)는 各 州에 새 헌법에 따라 수립되는 연방정부의 대통령을 뽑게 될 “대통령 선거인 (Elector)” 들을 선정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시작된 美 대통령선거는 그 以後 매 4년마다 실시돼왔으며, 지난 2004년 55번째 대통령선거를 치른 셈이다. 1788년 이래 美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선출” 방식의 기본은 아직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위의 표현에서 우리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관해서 두 가지 注目할 만한 사실을 보게 된다. 우선 美 대통령은 유권자의 직접투표에 依해서가 아니라 州단위의 “대통령 選擧人 團”에 (Electoral College) 의해서 “간접” 선거로 선출된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대통령을 실제로 뽑는 “선거인단”의 구성에 관해서는 연방(중앙)정부가 아닌 전적으로 州정부의 소관 사항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 또는 그 과정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기술할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여기서는 우리의 主題와 연관 지워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를 論議의 대상으로 해서 미국 “민주주의”의 성격과 변천을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도 우리의 論議에 필요한 부분은 최소한 記述해야 할 것 같다. 美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인단”은 모든 州의 “대통령 선거인”들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各 州의 “대통령 선거인” 數는 그 州의 연방 하원의석 數와 상원의석 數 (共히 2명)의 合이 된다. 예를 들어 현재 (2006년) 하원의석 數가 가장 많은 California州는 53명의 하원 수와 상원의 2명을 合한 55명의 “대통령 선거인” 數를 배당 받는다. 하원의석이 1명뿐인 Alaska州는 상원의 2명을 더한 3명의 “대통령 선거인” 수를 갖는다. 인구 기준으로 정해지는 各 州의 연방하원 의석수는 每10년마다 실시되는 인구조사에 따라 10년마다 그 數가 조정된다. 이에 따라 各 州의 “선거인” 數는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고 또는 그대로 前과 같을 수도 있다. 연방下院의 총 의석 數 435명과 50개 州의 上院의원 100명을 합한 535명에 미국의 수도 Washington, D.C. 에 할당된 3명의 “선거인”을 더하면 오늘날 “대통령 선거인단”의 총數는 538명이 된다. 美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 선거인단”의 과반수표를 얻는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부통령 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초대 대통령인 Washington은 그 당시 투표에 참가한 “선거인” 69명 全員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오늘날에는 538표의 과반수인 270표 이상을 받으면 당선된다. 2004년의 경우 31개 州의 “선거인” 286표를 획득한 Bush가 재선에 승리했다.

만일 후보자들 中에서 “선거인단” 표의 과반 수 이상을 得한 후보자가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美 헌법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 결정권은 미연방 下院으로 넘어간다. 하원은 上位득표자 3명의 후보자 중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는데, 이때 하원은 議員 個人 別로 투표하지 않고 州단위로 한(1) 표를 행사하게 되며, (오늘날에는) 50개 州의 과반수인 26표 이상을 얻은 후보자가 하원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실제로 선거인단의 과반수를 득표한 후보자가 없어 하원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例가 美 역사에는 두 번이나 있다 (1800, 1824). 지금까지 기술한 것 만 으로도 미 대통령 선출방식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겠다.

그러면 왜 1787년 美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복잡한 간선제 대통령 선출방안을 채택하게 되었는가. 間選制 배경에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와 같이 그 당시 미국의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民主主義와 大衆에 대한 不信感이 작용했다고 본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국민주권설”을 수용했지만 대통령 선출에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제도는 신뢰하지 않았다. 이들의 주 관심은 민주보다는 개인의 자유에 있었고, 자유의 가치는 대중 보다는 사회 엘리트와 美의회 대표자들에 의해서 향상되고 유지될 수 있다고 이들은 믿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인단”과 같은 제도의 출현은 그 당시 새로 구성되는 美 연방에 있어 중앙정부와 州들과의 역학관계 또는 균형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는 미국은 백악관, 美의회, 연방대법원 등으로 상징되는 主로 연방(중앙)정부의 미국이다. 오늘날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포함해서 미국인들은 州보다는 연방정부의 권한과 정책으로부터 직/간접으로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이 매년 내는 개인 소득세의 70-80%는 연방所得稅 (Federal Income Tax) 이며, 이는 “世界 예산”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그 방대한 美연방정부 예산의 원천이다. 그런데 1913년까지 미국에는 연방소득세가 없었다 (남북전쟁時를 제하고는). 1895년에 미연방대법원은 “소득세”는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며, 1913년 헌법개정으로 비로소 연방소득세를 징수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상대적으로 그만큼 연방정부의 역할이 적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로 남북전쟁(1861-65) 以前의 미국사회에 있어 일반 미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연방정부의 존재는 별 관련이나 의미가 없었다. 도로, 운하, 철도 등 소위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나 건설 사업은 연방정부가 아니라 州와 지방 정부 또는 창의적이 개인 사업가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추진되었다고 본다. 그 당시 미국인들의 지배적인 생각은 아직도 “작은 정부가 최선의 정부다”라는 것이었고, 작은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도 최선이라고 믿었다. 20세기 들어와서 중앙정부의 역할과 영향력이 州정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계속 확대되어온 것은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당연한 추세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州立 대학들은 연방정부의 보조 없이는 재정적으로 유지해나가기 힘들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200년간의 美 역사는 연방정부와 州정부 間의 균형의 우위가 後者에서 前者로 전환된 과정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1787년 당시 미 헌법은 많은 부분 실질적인 州의 “主權개념”을 반영하고 있었다. 州의 평등원칙에 바탕을 둔 美 上院은 半 이상의 州가 단합하면 실질적으로 연방정부는 아무런 입법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實 例다. 州 單位의 “대통령 선거인단” 구성은 바로 연방정부 대통령 선출에 州의 역할을 보장해준 제도다. 물론 이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타협”의 산물이다. 흥미 있는 사실은 아직도 미국의 모든 선거에 관한 규정이나 기타 사항은 州정부의 소관이라는 점이다. 1787년의 미 헌법에 “대통령 선거인”은 州의회가 定하는 바에 따라 선정한다고 명시돼있다. 건국초기에는 (1824년 까지) 거의 모든 州가 州의회에서 “대통령 선거인”을 임명한 셈이다. 그러다가 엘리트 중심의 미국政治가 점차 “민주화” 또는 “대중화” 되면서 1828년 선거를 전환점으로 “대통령 선거인단”도 의회가 선출하는 간접 방식에서 州유권자들이 직접 뽑는 州 民직선제로 바뀌게 된다. 이 같은 변화를 촉진시킨 중요한 요인은 1828년 Andrew Jackson의 승리가 몰고 온 政黨정치와 Jackson의 이른바 “대중민주주의”의 출현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좀더 다루게 될 것임).

정당정치와 “대중민주주의”의 확산은 아무래도 “대통령 선거인단”의 선출과 성격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대통령 선거인”으로 선출되는 지도층 인사들은 그들의 독립적인 판단에 따라 투표를 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으나, 이제 정당정치와 州民직선제라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서 선출된 이들은 현실적으로 특정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에게 집단으로 투표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선거인”의 원래의 역할과 실질적인 존재는 점차 유권자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같은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또 하나의 美 대통령선거의 특성이 소위 “승자 독식 (winner-take-all)” 制라는 것이다. 이는 州의 일반투표(popular vote)에서 多數를 得한 후보자가 그 州에 할당된 모든 “선거인” 표를 “독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實 例로, 지난 2004년 선거에서 Florida州의 일반투표 결과는 Bush가 52%이고 Kerry후보가 47%였다. Florida州의 27개의 “선거인” 표는 모두 Bush에게로 갔다. “선거인” 표에 관한 한 Kerry의 47%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같은 “승자 독식 제” 때문에 全國적으로 일반투표의 승자가 “선거인” 표에서 패자가 되어 이른바 “이기고도 진” 例가 실제로 美 역사에서 두 번이나 발생했다 (1876, 1888). 美 대통령선거제도는 “모든 표는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이론이나 원칙 보다는 연방제 하의 선거에서 州의 평등성과 중요성을 반영한 제도라 하겠다. 물론 미국 內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 論者들이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 같은 선거제도는 非민주주의적이고 또한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 왜 “선거인단” 간선제는 아직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이에 대한 간단한 답은 직선제로 바꿀 여면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직선제로 바꾸자는 분위기와 심각한 논쟁이 한동안 있었고, 실제로 1969년 美 下院에서 직선제를 위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으나 上院에서 부결됐다. 헌법 개정은 우선 美의회의 兩院에서 재적의원의 3분지 2의 투표로 통과돼야 하고, 그 다음 단계로 50개 州의 4분지 3인 최소한 38개 州가 인준을 해야 한다. 어떠한 결정적인 위기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현 “선거인단”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반면 現行 制度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논리와 주장도 만만찮다. “승자 독식”을 없애고 직선제를 하면 미국의 전통적인 양당정치의 구도가 깨질 것이라고 개혁 반대론자들은 우려한다. 남북전쟁 이래 오늘까지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주도하고 또한 정치적 안정을 이뤄온 실질적인 양당정치체제의 나라다. 좋든 싫든 “선거인단” 제도의 “승자 독식”이 양당제 유지와 동시에 군소정당의 출현을 억제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현 제도의 개정 논쟁의 밑바닥에는 정치철학의 문제가 깔려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미국은 독립된 州들의 연합으로 시작된 나라다. “승자 독식”을 품고 있는 “선거인단” 제도는 대통령 선출과정에서 州의 역할과 그 존재를 4년마다 미국인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있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의 미국의 총선 투표율은 보통 50% - 60% 사이다. 지난 2004년 선거의 투표율은 56%였다. 투표율을 民主主義의 척도로 본다면 미국은 그렇게 민주주의적인 나라는 못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미국이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이념이나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과정, 절차, 수단 또는 생활의 질서”로서 그들의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공정한 선거, 자유로운 政堂活動, 타협, 관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규칙과 절차에 대한 준수 등등 – 책임 있는 代議政治과정에서 요청되는 이러한 행태적 諸 요소는 개인이나 사회의 차원에서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거인단” 제도에 관한 문제 역시 미국인들은 民主主義의 이념적 또는 이론적 논쟁 보다는 그 제도의 기능적 측면에서 관심을 갖는다고 본다.

建國은 民主化의 시작일 뿐

정치제도라는 관점에서 미국의 특성, 즉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미국이 얼마나 “民主主義”인가 하는 감탄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 얼마나 “非민주주의”인가 라는 점이다. 美 上院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대표성이 없는 代議제도일 것이다 (아무 힘도 없는 영국의회의 상원을 빼고는). 앞에서 논의한 미 대통령선거제도 역시 非민주주의적인 例다. 그리고 뒤에서 별도 주제로 다룰 美연방대법원의 “막강한” 9명의 대법관들은 한번 임명되면 平生 職이다. 임기도 정년도 없다. 임기가 6년인 상원의원은 1913년 헌법 개정으로 州 民에 의한 직선제로 바뀔 때 까지 各 州의 하원에서 선출되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직선제가 처음부터 시행된 경우는 2년 임기의 美 하원의원 뿐이다. 美의회의 입법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는지 들여다보면 “多數”의 힘보다는 “少數”의 힘을 보게 된다. 정치제도 상으로만 보면 대한민국이 미국보다 오히려 더 民主主義국가로 보인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할 수는 없겠으나 미국민주주의를 制度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정치현상을 法이나 制度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建國初期에는 오늘의 기준에서 보면 非민주적인 요소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당시에는 누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투표를 할 수 있었나? 뒤에서 다룰 노예문제는 차치하고, 우선 女性은 무조건 투표권이 없었다. Jefferson의 그 훌륭한 선언적 名句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가 무색할 지경이다. 성인 남자의 경우에도 州에 따라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모든 州가 재산(토지) 소유자나 납세자에만 투표할 자격을 한정했다. 첫 연방선거에서 男性의 반 정도만 투표할 수 있었다. 오늘의 民主主義 개념에서 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물론 이 같은 선거권의 제한은 기본권의 박탈이 되겠지만, 선거 자체가 새로운 실험인 그 당시의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미국의 경우는 오히려 대단한 선거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830년대 Jackson의 대중민주주의를 거치면서 1850년까지 에는 재산소유자 및 납세자 제한규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1919년의 헌법 개정으로 비로소 1920년 선거부터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투표연령도 州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대부분 21세), 1971년에야 헌법 개정으로 모든 州의 투표연령이 18세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선거민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일단 정리가 된 셈이다. 南北전쟁 後 흑인의 法的 지위는 달라졌으나 南部사회에서의 실질적인 분리주의와 인종차별의 문제는 계속되었으며, 한 세기가 지나고 나서 1960년대에 비로서 흑인들의 民權은 그 확고한 빛을 보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에서 별도로 논할 것임.)

西部와 Andrew Jackson의 民主化

미국 역사에서 “西部 (West)”는 단순한 지역의 개념 以上의 것을 의미한다. “西部”는 오늘의 미국을 낳게 한 모든 것 -- 즉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원천 또는 원동력이었다고 봐야 한다. 19세기 미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西部의 歷史”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국以後 美정치의 흐름에 큰 변화도 西部에서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Andrew Jackson이 우뚝 서있다. 그 당시 미국인들에게 西部는 “Frontier” (변경지역) 을 의미한다. 건국初期 대서양연안의 기존 미국에서 Frontier “西部”는 Appalachian 산맥을 넘어 Mississippi江까지 펼쳐진 광대하고 비옥한 지역을 말한다. 건국에서 1820년 사이에 이 “西部” 지역에 8개의 新生 州가 탄생, 연방에 加入하게된다. (가입된 순으로, Kentucky, Tennessee, Ohio, Louisiana, Indiana, Mississippi, Illinois, Alabama). 이들 소위 “Frontier” 州들의 대부분은 연방에 가입하면서 채택한 州헌법에 “남성보통선거권”이 明示돼 있었다. 미국의 “민주화”는 “西部”가 주도한 셈이다.
“Frontier”의 인구밀도는 매우 희박했다. 몇 가구가 數마일 또는 數十 마일 씩 떨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하는 삶이다. 이들은 北美 Indian부족들과 共有하는 땅에서 항상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 이러한 생활환경에서 “Frontier” 개척민들은 (주로 미국으로 移民 온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 東部 미국인들에 비해 自立的이고, 지방 自治的이고, 협동적이고, 솔선수범 적이고, 순수하고 獨立心이 강하다. 이들은 거칠고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순박하고 서민적인 보통 사람들이다. Jackson은 이들에게 “보통 사람”의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이를 “Frontier 民主主義” 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의 民主主義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자연조건”이었다는 뜻도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잠시 Andrew Jackson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흥미 있고 그 당시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Jackson은 1828년과 1832년 두 번에 걸쳐 처음으로 직선제 “선거인단”에 의해서 선출된 대통령이다. 또한 후보 공천과정에서도 소위 Washington의 큰손 정치인들이 아닌 全黨대회에서 지명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 후보자다. Jackson은 美 역사에 특이한 존재로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軍 지휘관으로, 1812년 전쟁의 영웅으로, 또한 “인디언 平定者”로 George Washington이후 거의 40년 만에 軍人으로서 美 역사에 두 번째로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다. 미국이 아직 식민지였던 1767년 South Carolina에서 태어난 그는 12세에 독립戰爭터에 간다. 그리고 영국병사가 휘두른 칼에서 얻은 흉터는 뒤에 그를 위대한 장군으로 태어나게 한다. 10代를 고아로 보낸 그는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드문 의지와 용기로 자수성가(自手成家) 한다. 西部개척지 Tennessee로 간 그는 변호사 밑에서 수련 생으로 지내면서 21세에 그 자신 변호사가 된다 (그때는 이런 식으로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 당시 西部개척지에서 무일푼으로 가장 쉽고 빠르게 재산을 모으는 방법은 “땅 투기” (land speculation) 이었다. 이렇게 해서 10년 뒤 상당한 富를 얻은 Jackson은 동업자의 실수로 하루아침에 파산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1796년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Tennessee를 州로 승격시키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 Jackson은 곧 州를 대표하는 연방 하원의원과 그리고 상원의원으로서 首都 Washington으로 간다. 그러나 Washington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1801년 다시 테네시州로 돌아와 州정부 판사로 정착하게 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Jackson은 Tennessee州 민병대 지휘관(소장 계급)으로 선출된다. 타고난 강한 개성, 사나이다움, 정의감 그리고 뛰어난 지도력은 그의 인생 역정과 더불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불러오게 된다.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killer”다. Jackson만큼 “결투’를 좋아하고 실제로 많이 한 인물도 美 역사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시절 “西部”에서는 시비가 벌어지면 紳士道의 결투로 해결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의 결투의 半 이상은 그의 부인과 관련된 일이다. 연상인 그의 부인은 그가 하숙생활을 할 때 만난 하숙집 女 주인으로 이혼 女 이었다. Jackson은 그의 아내를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그때도 상류사회는 소위 “gossip”을 즐겼는가 보다. 그와 그의 아내에 대한 조롱이나 험담을 들을 때 마다 Jackson은 결투를 청했다. 이로 因해 그는 갈비뼈 사이에 박힌 두개의 총알과 파편 조각들을 죽을 때 까지 그의 몸에 품고 지낸 人物로도 유명하다.

그의 불같은 성미는 삼국지의 장비요, 그의 배짱과 대담성과 전략적 기질은 관운장과 맥아더를 合친 것이다. 이런 그에게 뒷날 그가 백악관으로 가게 되는 결정적인 契機가 온다. 다름 아닌 영국과의 전쟁이다. 이를 美 역사에서는 “1812년 전쟁”이라 부르는데, 건국이후 유일한 영국과의 전쟁이다. 2년 반 동안 진행된 이 전쟁은 헌법의 기초자인 Madison이 집권했던 時期였다. 전쟁 中 한때 수도 Washington이 영국군에 함락되어 백악관은 불에 타고 대통령Madison은 영부인과 헤어져 허겁지겁 탈출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전쟁은 영국이 걸어온 전쟁이 아니다. 미국이 먼저 선포한 전쟁이었다. 독립전쟁에 패한 영국은 미국을 승인했지만 미국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아직도 海上 강국인 영국은 대서양연안과 New Orleans항이 있는 남쪽 멕시코 灣에서 美 선박을 가끔씩 억류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또 하나 건국초기부터 골치 아픈 문제는 미국이 점차 西部로 확대되면서 北美 인디언 부족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다루어야 할 과제였다. 그러던 차에 영국이 인디언들에게 은밀히 총과 탄약을 공급해주고 있다는 情報가 확인되었다. 오늘의 표현으로 하면, 영국이 미국에게 이른바 “인디언 카드”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東部 州들은 영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인디언들과의 문제를 직접 겪고 있는 西部와 南部 州들은 一戰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들 主戰論 者들은 내친김에 아예 영국의 Canada와 스페인의 Florida까지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미국은 충분한 전쟁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영국과 인디언의 공모가 확인되면서 미국은 1812년 6월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영국과의 實戰이 벌어지면서 同時에 영국과 연루된 인디언들이 西部와 南部에서 미국인들을 살상하는 일이 벌어진다. 남부 Alabama에서는 Creek인디언 부족이 550여명의 백인 男女老少를 대량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時 点에서 Jackson은 Tennessee 민병대를 이끌고 Creek족에 대한 보복을 하라는 출동 명령을 받는다. 그를 따르는 지원병들을 포함해 數千의 병력을 이끌고 Jackson은 南으로 향한다. 이때가 1812년 하순이다. Jackson의 眞價는 이때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다. 만나는 인디언들은 모조리 포위 섬멸되고, 드디어 1814년 4월 Creek족 추장은 Jackson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그 다음 Jackson은 Washington의 승인도 기다리지 않고 곧 바로 그의 병력을 New Orleans 港으로 이동시킨다. 영국 군함의 침공을 미리 읽은 Jackson의 비상한 작전이었다. 1803년 미국은 나폴레옹으로부터 New Orleans를 포함해서 Mississippi江과 Rocky산맥 사이의 방대한 영토를 매입했다. 이를 美 역사에서는 “Louisiana 매입” 이라고 한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소유였던 이 엄청난 땅을 강제로 인수했다가 미국에 팔아넘긴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 New Orleans는 미국의 최대 “物流센터” 이었다. 미국의 全 농산품과 대부분의 공산품이 New Orleans항을 통해 드나든다. 북미의 무역체계가 한마디로 여기에 달려있었다.

Jackson은 New Orleans를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영국軍이 도착하기 한발 전에 그곳에 도착해서 영국군의 공격으로부터 New Orleans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Jackson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만일 New Orleans가 영국軍에 함락됐다면 미국의 경제는 마비되고 미국에 있어 “西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도 있었다. 이때가 1814년 12월 하순이었다. 이미 英美 間에는 유럽에서 停戰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쟁 자체는 무승부로 끝난 셈이다. 승자는 New Orleans의 영웅 Jackson이였다. George Washington 以後 새로운 “전쟁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이제 영국은 미국이라는 존재가 이론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합법적인 국가임을 인정하게 된다. 미국도 Canada의 합법적인 존재를 인정하기로 한다. 이 後로 英美관계는 友好的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 “美國人”들은 州 개념에서 벗어나 미국이라는 국가공동체(American Nation)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미국에 “1812 전쟁”의 중요한 意義다. 흥미 있는 사실은 오늘날 美 국민이 부르는 미국국가(國歌)의 歌詞는 영국과의 전쟁 중인 1814년 9월 한 애국 시민이 작사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전쟁의 영웅 Andrew Jackson의 功이다. 이 뿐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 Jackson은 Florida로 들어가 美 영토를 넘나들고 있는 Seminole 인디언 族을 혼내준다. 스페인이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미국이 할 수 밖에 없다는 협박이다. 이미 국력이 쇠퇴한 스페인 왕국은 1819년 Florida를 미국에 넘긴다.

Jackson은 美 南部와 西部는 물론 모든 美國人들이 인정하는 미국의 영웅으로 George Washington의 진정한 후계자가 된 것이다. 이제 역사의 한 章이 끝나고 미국을 民主主義의 시대로 이끌어갈 새로운 人物이 무대에 들어서고 있다. 쓰다 보니 길어졌다. Jackson에 관해서 못 다한 이야기는 뒤에서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다시 “민주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Jackson은 1828년 大選에서 처음 당선되었지만 1824년 선거에도 출마를 했었다. 1824년은 처음으로 여러 州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이 일반투표로 선출 되었으며, 또한 처음으로 “일반투표”의 통계가 집계된 선거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해가 된다. 1824 선거에는 Jackson을 포함에서 모두 4명의 후보가 출마 했다. 일반투표와 “선거인단”표에서 모두 Jackson이 다수의 득표를 했으나 過半數에는 미치지 못해, 선거는 美 하원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하원은 John Quincy Adams를 선출했다. Adams와 Henry Clay (후보로 뒤에 Adams의 국무장관이 됨) 間에 정치적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Jackson은 분노를 폭발하면서 다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Jackson의 추종자들은 1828년 大選을 위한 정당을 組織化하고, 全黨대회에서 Jackson은 후보자로 지명된다. 이것이 오늘의 민주당 (Democratic Party)의 시작이다. Lincoln은 1854년에 결성된 공화당 (Republican Party)의 1860년 대선 후보로 당선된 최초의 공화당 대통령인 셈이다. 1828년 Jackson의 당선을 시작으로 그 후 30년간은 주로 민주당의 시대라고 볼 수 있으며, 1860년 이후 50년간은 공화당의 시대가 도래 한다. 1828년 선거의 중요한 의미는 州의회가 아닌 실질적인 최초의 일반투표(직선)에 의한 “선거인단” 선출이라는 점이다. 24개 州 가운데 22개 州가 일반투표(popular vote)를 실시했다. Jackson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난 1832년 선거에는 모든 州가 일반 투표제를 적용했다. Jackson은 최초의 “Frontier西部” 출신 대통령이다. 소위 “東部의 왕조시대”가 일단 막을 내린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Jackson의 “민주화”시대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다. 위대한 Lincoln도 西部출신, 그리고 그 西部의 西部가 이어지면서 대서양연안에서 시작된 미국은 오늘의 西部 California로 확대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Jackson의 “民主主義”는 대중이 정책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민중정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것을 “平準化”하자는 平等主義的 철학을 의미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Frontier” 西部 사회의 정신 또는 理想은 누구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고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경쟁으로 얻은 富와 權力은 존중되고 선망(羨望)이 될 수 있는 “열린사회”를 의미한다. Jackson은 “건국의 아버지들” 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지혜를 믿었다. “Jackson主義者”들이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 평등” 아니라 “좀 더 열린 엘리트 體系”, 즉 그 당시 불어나고 있는 중산층의 정당한 경쟁을 통한 정치 참여의 확대를 말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들은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주도했고 또한 일반투표에 의한 “대통령 선거인단”의 선출을 이뤄냈다. Jackson은 대통령職을 국민으로부터 “위임” 받은 것으로 믿고 중앙정부 또는 대통령의 모든 권위와 권한은 국민과 국익을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다. 정부관리가 ‘公僕 (public servant)”이라는 개념도 이때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共存하는 미국

앞에서 우리는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自由民主主義”의 틀에서 그리고 歷史的인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어느 정도 정리를 한 셈이다. 여기서는 本 主題의 마지막 論題로 1930년대 이후 미국 정치의 흐름과 변화를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을 통해서 관찰해보고 논의해 보겠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국의 현실정치에 좀 더 접근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안목(眼目)을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늘날 넓은 의미에서 “진보 (liberal)”와 “보수 (conservative)”라고 표현되는 두개의 정치적 信念, 思考, 性向 또는 勢力이 美 정치를 지배하고 또한 설명한다고 본다. 미국의 현실정치를 “진보와 보수”라는 二分法的 구분으로 또는 이 같은 틀에서 보는 것은 실제 정치현상을 지나치게 單純化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미국의 지식인들과 학자들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미국인들 모두 또는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이 모두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에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中道)가 數에서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선거 전략에서 후보자들은 거의 모두 중도 유권자들을 겨냥하게 된다. 문제(issue)에 따라 보수적일 수도 있고 진보적일 수도 있는 유권자들이 60년대와 70년대에 비해서 늘어난 셈이다. 과거에는 오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이 좀 더 진보와 보수층으로 구분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형제도”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진보는 반대하고 보수는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오늘에는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진보와 반대하는 보수도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는 오늘에도 학자, 지식인, 정치인 등을 포함해서 미국인들이 정치현상 또는 정치적 성향을 기술하고 설명하는데 즐겨 사용하는 用語다. 아마 이보다 더 유용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의 민주당은 “진보” 정당이고 공화당은 “보수” 정당이라고 말한다. 물론 공화당원이나 공화당 지지자들이 모든 문제영역(issue areas)에서 보수이고 똑같이 민주당의 경우는 진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뜻이다. 美 의회에서도 의원들의 투표행태가 그들이 속해있는 黨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美 대통령은 在任 중 수많은 고위 정부관료 및 연방 판사들을 임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임명이 연방대법원 대법관이다. 이때 대통령이 고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리고 이와 관련 美 국민이 언론매체로부터 보고 듣게 되는 뉴스의 핵심은 지명되는 후보가 “어느 정도 진보 성향이냐 또는 얼마나 보수 성향이냐”에 관한 것이다. 이렇듯 진보 (liberal)와 보수 (conservative)라는 용어는 美정치를 이야기할 때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듣고 쓰는 말이다. 그런데 사전적 의미의 진보(進步)는 英語로는 “liberal” 보다는 “progressive”라는 단어가 더 정확한 영어의 번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conservative”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liberal”을 쓰고 있어 우리의 표현으로 “진보”가 내용상으로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원래 “liberal (진보)” 와 “conservative(보수)” 라는 용어를 美 정치에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제32대 대통령인 Franklin Roosevelt였다. Roosevelt는 잘 알다시피 미국이 “大 공항” (The Great Depression)의 위기로 실업률이 25%을 넘어선 1932년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어 내리 4選의 美 역사에는 全無 後無한 당선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4선이 계기가 되어 1951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의 임기는 두 번으로 제한되었음.] 39세에 닥쳐온 소아마비로 평생 wheel-chair 생활을 해야 했던 그는 넘쳐흐르는 낙관적인 그의 기질을 잃지 않았다. 뉴욕 州지사를 거쳐 50세에 대통령에 오른다. 13년간의 그의 재임기간에 (그는 4번째 취임 후 한 달 만인 1945년 4월 사망한다) Roosevelt는 이른바 “New Deal”이라고 알려진 혁신적인 개혁정책을 통해 30년대 “大 공항”으로부터 美 사회를 求하고 동시에 2차 世界大戰을 주도하여 前後 미국의 시대를 열게 한다. 이 과정에서 Roosevelt는 그 以前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福祉國家 미국”을 탄생시킨다. 오늘날 미국인들의 노후를 보장해주는 “Social Security” (사회보장제도), 최저임금제, 노사관리체제 등 국민을 위한 각종 정부 프로그램은 그의 “新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美 역사에는 內部的 요인으로 국가적 위기와 변화를 초래한 두 개의 분수령이 있다. 하나는 뒤에서 다루게 될 남북전쟁으로 Lincoln이 갈라진 나라를 구하고,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미국이 다시 태어난다. 두 번째 분수령이 1930년대 “大 공항”이다. “大 공항”으로 미국의 경제, 정치, 사회를 지배해왔던 신조 또는 사상체계가 무너진 것이다. 공자사상이 우리에게 그렇듯이, 식민지 시대부터 미국사회를 지배해온 정신적 뿌리는 소위 “개신교 윤리관” (Protestant Ethic) 이였다. 즉, 이는 인간은 자신의 양심과 행동에 대해서 이제는 神父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가 神 앞에 “직접” 책임을 진다는 信條를 말한다. 이러한 개신교적 신조 또는 윤리관이 미국의 정치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도 반영이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생활에 그들 스스로가 책임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생활이 좀 더 보람되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활철학에 적합하고 매력 있는 곳이 끝없이 펼쳐진 자유로운 비옥한 땅 미국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美國人들은 이 축복의 땅에서 밭을 갈고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노고에 합당한 보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의 이른바 “American Dream”은 이루어졌다.

이 개신교적 윤리, 믿음 그리고 개인 중심의 自立的 문화가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1932년까지 이끌어온 정신적 바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1929년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주식시장에서 무너져 버린 것이다. 自由방임주의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붕괴였다. 그리고 이 위기에서 Roosevelt 시대는 시작되고, 美 국민은 前例 없는 4選으로 그에게 보답한다. Wheel-chair에서 간신히 일어선 Roosevelt는 그 특유의 웅변으로 失意에 찬 美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는다. 그는 “개인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새로운 상황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책임지는 것이 정부의 당연한 의무” 라는 정부의 “긍정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이는 “작은 정부”의 전통에서 “큰 정부”로의 획기적인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복지국가 미국”의 신호탄이다. Roosevelt에서 시작된 새로운 “중앙정부의 역할”은 2차 大戰과 1960년대 Johnson의 “위대한 사회”를 거치면서 30년대 以前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확대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새로운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수용(受容)하는 사람들이 바로 “Liberal” (진보)이고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Conservative” (보수)라고 하면서 Roosevelt가 처음으로 이 用語를 사용했다. 1941년 Roosevelt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한 사실은 적어도 1932년 以後로 민주당은 ‘진보 정당’ (liberal party) 이고, 공화당은 ‘보수 정당’ (conservative) 이라는 것이다.” 1932년 以前에는 미국의 政黨정치와 관련해서 “liberal”이나 “conservative”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참고자료로, 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인구는 2억 8천만이 조금 넘었으며, 1930년 이래 미국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같은 期間에 美연방정부의 세입과 예산은 대략 500배 이상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정부에 비해서 그 정도와 규모는 훨씬 적지 만 州의 경우에도 1960대 이후 정부역할의 확대는 일반적인 추세였다고 본다. 오늘날 이라크 戰으로 Bush 정부의 예산이 불어났지만, 보수의 기본 입장은 이제는 마냥 불어나고 있는 “정부의 역할”을 줄여나가야 할 때라고 본다. Reagan의 “큰 정부가 바로 문제다”라는 한마디 표현이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사회의 성격과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 미국의 위치를 고려할 때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두고 볼 문제다.

여기서 Roosevelt 대통령이 사용하기 시작한 “liberal” 用語에 대한 역사를 잠간 짚고 넘어가자. 18세기에서 20세기 初까지 미국 정치와 경제에서 “liberal”의 용어는 “自由 放任的”인 정부의 “無간섭” (laissez-faire) 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오늘의 “liberalism” (진보주의)과 구분되는 18세기와 19세기의 “classical liberalism” (고전적 자유주의)은 정부역할의 最小化가 목표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당시의 “Liberal”들은 정부를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보호자 보다는 오히려 위협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1910년대에 대통령을 지낸 Woodrow Wilson (정치학 교수 출신) 은 “Liberalism의 역사는 정부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제 할여는 인간의 투쟁의 역사”라고 요약했다. 여기서 “Liberalism”은 물론 고전적 개념을 뜻한다. 즉, 고전적 “Liberalism”은 “개인, 자유, 제한된 정부”의 개념을 강조한다. 이것이 1930년대 “大 공항”과 Roosevelt의 “New Deal 정책”을 전환점으로 해서 오늘의 “Liberal” (진보)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개인과 자유”의 중요성은 그대로 있으면서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시정하고 사회정의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데 “긍정적인”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새로운 의미의 “Liberalism” (진보주의)이 탄생한 것이다. 이 같은 개념에서 美정치를 “liberal” (진보) 와 “conservative” (보수) 라는 兩大 신념 또는 세력으로 구분한 것은 Roosevelt 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역사와 정치/사회를 즉 미국이 걸어온 길을 이해하는데 “liberal”의 개념과 그 用語의 시대적 변천史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Roosevelt는 “진보와 보수”라는 용어를 “價値 中立的”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은근히 보수는 낡은 배척되어야 할 대상 또는 이념으로 취급하면서 진보는 찬미 되어야 할 미래의 미국으로 비추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의 양대 축에서 볼 때 1930년대에서 60년대까지의 미국은 진보가 지배하는 소위 진보의 황금시대라고 할 만 하다. 戰後에 유일한 군사 및 경제 大國으로 등장한 미국은 냉전을 거치면서 명실 공히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戰後 Eisenhower의 8년간을 제하고는 민주당이 집권한 全盛期였다. 50년대와 60년대는 美의회의 兩院 모두 민주당의 시대라 하겠다. 빈곤층과 흑인을 위한 정부의 각종 혜택과 지원 프로그램들도 이 시기에 나온다. “위대한 사회”를 내걸은 60년대 Johnson대통령은 월남戰으로 고역을 치루고 再출마를 포기했지만, 국내적으로는 특히 소수민족의 民權 향상에 있어 美 역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이룬 대통령이라 본다.

그러나 역사는 뒤바뀌게 마련인지 70년대를 거치면서 進步와 保守의 형세는 역전되기 시작한다. 1968 및 1972년 大選에서 확고한 保守 Nixon의 승리는 보수의 결집을 가져왔고, 미국사회가 서서히 보수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진보가 너무 지나치다 보니 사회적 반발을 불러오게 된 面도 적지 않은 것 같다. 70년대 이른바 통상 “neo-con”이라고 알려진 “新보수”의 등장은 진보와 보수의 역학관계에 결정적 요인이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Nixon의 승리와 관련해서 미국에 있어 양당정치의 흐름과 변화를 고찰해 보자. 이를 달리 표현하면, 보수와 진보의 세력 분포가 70년대 이후 지역적으로 再정립되고 있는 양상을 관찰해보는 이야기가 된다.

1861년 南北戰爭이 일어났을 때 美연방은 34개 州로 구성돼 있었다. 이 중 南部의 11개 州가 탈퇴한 것이다. Lincoln의 공화당은 戰前에 북부의 黨으로 태어난 것이다. 남북전쟁 後 다시 연방으로 되돌아온 南部 州들은 北의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한동안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공화당에 반감을 가진 南部는 자연히 민주당 一黨 지역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를 보고 정치적으로 남부를 “Solid States”라고 불렀다. 남북전쟁 以後 거의 1세기 동안 南部 11개 州는 실질적으로 一黨 지역으로 존재한 셈이다. 1960년대까지 美의회의 南部 출신 의원들은 兩院 모두 민주당 소속 이었다. 그러나 南部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 성향이 원래부터 保守的이었다. 실제로 남부 출신 의원들은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들 보다 도 더 보수이지만 남북전쟁의 결과로 이름은 민주당 우산을 쓰고 있게 된 셈이다. 우리는 통상 진보적인 민주당은 소수민족의 民權向上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보수적인 공화당은 民權法案에 미온적이라고 알고 있고, 그리고 이것은 일단 맞는 말이다. 그러나 1950년대와 60년대 민주당이 多數黨이었던 의회에서 民權法案이 항상 난항을 겪었던 이유는 바로 남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보수 공화당 의원들과 제휴하여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 당시 진보 민주당이 多數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美의회에서 왜 보수성향의 법안이 생각보다 많이 나오게 되었나를 설명해 준다. 또한 이것이 뒤에서 다루게 될 왜 연방대법원이 民權運動의 先導者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를 암시해준다.

1968年 大選戰에서 공화당의 Nixon 후보는 승산이 있는 南部 保守性向의 州들을 집중 공략해 민주당 후보에 근소한 差로 승리하게 된다. 1970年代와 80年代를 지나면서 南部 州에서도 공화당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오늘날에는 (2006년 현재) 南部 11개 州가운데 9개 州를 대표하는 美 상원의원은 모두 공화당이며, 하원의 경우에도 南部에서 공화당이 민주당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 2000 및 2004년의 大選에서 Bush는 남부 11개 州 모두에서 민주당 후보를 앞질렀다. 이제 보수성향의 南部는 민주당을 버리고 마침내 그들과 정치성향이 비슷한 공화당을 선택하게 된 셈이다. 반면,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强勢 地域이었던 東北部와 태평양연안 州들에서 밀려났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세기가 훨씬 지나서야 南部가 그의 적이었던 北의 공화당과 드디어 손을 잡은 것이다. 이제 남부는 공화당의 主 근거지다. 南部Texas 州지사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Bush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2006년 현재) 공화당이 백악관뿐만 아니라 美의회 兩院에서도 모두 多數黨이 된 것은 南部에서의 승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진보의 쇠퇴와 新보수 “neo-con”의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1970년대 후반에는 이미 보수성향의 美 政治人들은 自身을 “보수”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들은 “보수”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반면, 자신을 “진보”라고 떠들어대는 정치인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들의 명칭은 “진보”에서 “온건적 진보” 또는 “중도 진보” 등으로 후퇴한다. Nixon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 중에 Watergate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사임하게 된 여파로 76년에 당선된 민주당의 Carter는 이미 대세로 다가오기 시작한 “보수”의 물결에 휩쓸리어 가고 만다. Nixon 保守의 理念的 후계자라 할 수 있는 Reagan 대통령의 8년간 (1981-89) 보수정권은 美 정치에서 “진보주의 Liberalism”을 거의 의미 없는 用語로 전락시킨다. 1980, 1984, 1988년 세 번 연타를 당하고 난 진보는 아예 “진보”라는 용어에서 도주하고 만다. 스마트한 민주당의 Clinton은 자신의 이미지를 “중도”로 포장하는데 성공, 8년간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 그러나 2000년 (아들) Bush의 등장으로 보수는 再신임을 받아 오늘에 이른다. 지난 20-30년간은 분명 보수의 시대라 하겠다.

그러면 진보의 전락(轉落)은 왜 그리고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60년대 후반 진보의 민주당은 그 당시 反戰 분위기의 와중(渦中)에서 온건진보와 “New Left”라는 新좌파로 분열된다. 이 좌파적 진보는 그들의 이념적 목표로 자유보다는 “평등” (equality) 을 추구했다. 이들은 평등의 이념을 내걸은 공산주의에 동정적이고 동조적이다. 월남戰을 극렬하게 반대한 이들은 美정부의 反共에도 반대한다. 여기에 흑인의 지위향상과 민권운동을 主唱하는 진보주의자들이 “평등”의 이념을 축으로 합세 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좌파적 이념에 대한 正面 도전과 설득력 있는 비판은 보수 공화당이 아니라 진보內의 지식인 및 정치인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친 進步와는 同行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이른바 “neo-con”이며, 70년대 이후 美 정치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이념적 성향과 추구하는 목표가 같은 보수 공화당과 동행하게 된다. “Neo-con”의 핵심은 합리적이고 이념적으로는 철저한 反共主義 的인 지식인 및 학자들이며, 오늘날 Bush 행정부의 고위직에 -- 主로 법무부, 국무부, 국방부 등 – 포진 되어 있다고 본다. 新보수의 상당수는 Roosevelt를 찬미하는 前민주당 지지자들이었으나, 60년대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급진적 진보”의 입장, 지나치게 “進步主義的”인 사회개혁 그리고 이 같은 개혁을 합법화해준 진보성향의 대법원 판결 등에 대한 異見과 우려와 불만으로 민주당을 떠난 인사들이다.

이들 新보수는 Roosevelt의 社會正義와 “기회의 평등”은 필요한 사회개혁으로 受容하지만, 社會主義的인 “結果의 平等”에는 强하게 반대한다. 新보수가 특히 크게 반발하고 있는 사회/정치적 문제 (issue)는 “Affirmative Action Program” 이라고 통상 알려진 흑인의 지위향상을 위한 “할당(quota) 制” 프로그램이다. 이 용어는 우리말로 문자 그대로 번역해서는 그 뜻이 통하지 않는 술어 중에 하나다. 이는 인종차별의 역사적 유산으로 因해 불리한 사회적/경제적 여건에 처해있는 소수민족 (흑인) 의 지위향상을 위한 실천 프로그램을 말한다. 例를 들어, Harvard 대학 法大 (또는 의대)의 입학정원이 100명이라고 한다면, 그 중 15%인 15명은 무조건 흑인에게 “할당”된다. 흑인에게 할당된 15명은 흑인 지원자 중에서 자격 순으로 선발된다. 흑인에 할당된 15명 때문에 이들 15명의 흑인보다 자격이 우수한 백인 지원자들이 희생된다는, 즉 백인이 “逆 인종차별”을 받는다는 논쟁의 소지가 대단히 많은 프로그램이다. 1973년 美 대법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 공공기관에서 “인종(race)” 은 입학査定, 고용인 채용 및 승진에 고려할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결함으로써 “Affirmative Action Program” 자체는 일단 합법화 된 셈이다. 지난 2003년 Michigan 주립대학 입학기준과 관련된 소송 件에서 대법원은 多數決로 再次 이 프로그램의 합헌성을 인정했다. 이 판결과 관련 흥미 있는 사실은 현재 대법원의 唯一한 흑인 대법관인 Clarence Thomas는 “합헌”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反對 意見을 내놓았다. (그 자신 이 프로그램의 혜택으로 Yale대학 법대를 입학하고 졸업했다.)

新보수는 물론 인종차별은 반대한다.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러나 “결과의 평등”을 의미하는 “할당제” 까지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neo-con”은 확실하게 보수의 편에 서있다. Neo-con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앞 주제에서도 다루었던 소위 “反文化的” 윤리 및 도덕성에 관한 것이다. “Gay” 문제에 있어 이들의 입장은 전통적 보수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사회는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오늘날 “보수” 內에는 소수이지만 극우 보수도 있고, 선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보수 집단으로 “기독교 보수” (Christian conservative)가 있다. 현재 Bush 체제에서는 新보수 (neo-con) 가 주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진보와 보수 間의 차이는 절대적이라 보다는 상대적인 차이다. 양자가 모두 “개인, 자유, 평등, 재산권, 법치, 국민적 동의” 등등 미국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합의를 이루고 있고 또한 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고 본다. 1930년대 以後 진보와 보수가 대략 30년 단위로 週期的 순환을 한다면, 保守의 시대도 끝나게 될 것인지 다음 大選을 기다려 볼만하다. 오늘의 保守가 지나친 진보의 결과라면 보수는 그 교훈을 스스로 잘 수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保守와 進步만이 선거의 절대적인 변수는 아니라고 본다. 理念的이기 보다는 實用的인 美國人들이 보수와 진보를 떠나 그들이 선호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 아마도 進步와 保守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兩 黨이 그렇듯이 共存할 것이다.












III. 移民의 나라, 機會의 나라

미합중국이 탄생한 다음해인 1790년 실시된 첫 인구조사(census)에 따르면 미국의 인구는 400만에 육박했다 (이 중 18%는 흑인). 지난 2000년 인구조사는 미국의 人口를 2억 8천 200만으로 집계하고 있다. 건국이후 210년 동안에 미국의 인구는 70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이 期間에 미국 인구의 증가는 자연 증가 만큼 “이민”에 의한 증가로 볼 수 있다. 건국 이래 현재까지 이민으로 미국 땅에 流入된 이민자의 수는 1억이 훨씬 넘는다. 건국 이래 (또는 그 以前부터) 미국으로의 이민은 세계 도처로부터 꾸준히 계속 이어져왔다. 이들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약속의 땅”이었다. 모두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품고 그들의 고국과 고향을 떠나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自由”의 땅에서 西部로, 산으로, 강으로, 도시로, 바다로 뻗어나가 새 삶의 터전에서 그들의 후손과 그들의 나라 미국을 위한 “이민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 미국이란 나라는 분명 “이민의 나라, 기회의 나라”였다. “인디언”을 除하고는 모든 미국인들은 사실상 이민자 또는 이민자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이 위대한 “이민의 나라” 미국이 2006년 봄 바로 이민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건국 이래 多인종 多민족의 미국사회에서 이민과 관련된 이런 저런 문제와 갈등이 있었지만 오늘과 같이 이민의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고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 된 적은 없었다. 정치권도 反 이민법안과 親 이민 법안으로 대립양상을 보이고 있다. 法治의 나라에서 불법체류 노무자들이 힘을 과시하는 파업을 하고, 反 이민법안 반대시위에도 참가하고 있다. 오늘의 이민 문제는 그 성격, 내용 및 방향에서 前例없는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미국의 정치와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아갈 것인지가 미국의 진로와 장래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아진다. 1990年代 初에 냉전 以後의 세계를 “문명의 충돌”이라는 틀로 豫見한 바 있는 Harvard大 원로 정치학 교수 Huntington은 최근에는 이민의 문제를 21세기 미국의 中心的 문제(issue)로 제기하고 있다.

본 강좌의 첫 句節에서 필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탄생을 “계속되는” 하나의 “大 實驗”이라고 보는 견해 또는 명제를 내놓았다. 20세기까지 미국의 “실험”은 노벨상을 받을 만큼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自由民主主義를 바탕으로 미국은 “Pax Americana'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체제) 시대를 열었다. 근대국가의 典型인 민족국가 (nation-state) 시대에 多인종 多민족 국가로 성장해서 최대의 강국이 된 미국은 인종과 민족과 종교의 벽을 넘어 自由와 民主主義라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가치의 바탕에서 이러한 國家가 과연 존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의 나라 미국은 20세기까지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아직도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best'는 모두 미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이민문제에서 무엇이 미국의 보수와 진보를 갈라놓고 있는가? 왜 보수는 현재의 상황을 국가적 위기로 보고 있는가. 이민문제에서 보수 공화당內의 입장 또는 생각은 일치하고 있는가. 새로운 포괄적인 이민정책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 그리고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공감하고 있지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과 접근방법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미국이라는 大 “실험”의 성패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있는 오늘의 이민문제를 미국사회와 국민이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 美정치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표면상에 떠오른 문제(issue)의 핵심은 2006년 현재 미국 內에 거주하고 있는 1,200萬에 달하는 “불법체류者” (illegal aliens) 들의 존재와 그 처리문제에 관한 것이다. (불법체류者에 대한 美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는 없다. Time紙는 2004년 적게는 1,200만에서 많게는 1,500만으로 추산했다.)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不法이니 不法으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하는 단순한 논리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이면에는 法의 차원을 넘어 미국의 歷史, 價値, 哲學이 깊고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이 문제는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우리의 大 主題와도 깊이 관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의 복합적인 성격과 내용을 7가지 측면 또는 차원으로 나누어서 들여다보고 論議해 보고자 한다. 즉, 오늘날 미국의 “이민문제”(issue)는: (1)法的 문제, (2)경제적 문제, (3)정치적 문제, (4)國家安保 문제, (5)人道主義的 문제, (6)多인종 多민족 多문화 사회 문제, 그리고 (7)歷史的 (역사와 관련된) 문제다.

法的 側面

오늘날 先進사회와 後進사회를 구분하는 기준의 하나는 法이 얼마나 제대로 遵守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命題로서 이 區分은 民主主義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자유의 나라이고 民主主義의 나라인 것은 무엇보다도 법이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동차 문화가 선진화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교통법규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法治國家인 미국에서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제대로 적용도 집행도 되지 않는 경우가 바로 “不法체류자”의 문제다. 遵法 意識이 있는 미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불법체류자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법과 질서의 문제로 볼 것이다. 참고로, 이들 불법체류者(illegal alien)는 “불법이민자 (illegal immigrant)” 또는 “밀입국者 (undocumented person)”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용어는 미국에서 같은 의미로 통용되고 있으며, 여기서는 主로 “불법체류者” 또는 “불법이민자”의 표현을 사용하겠다.

미국 內 不法이민자의 數는 1996년 500만에서 2006년 1,200만으로 급증했다. 10년 동안에 2倍 半가량 늘어난 셈이다. 아마도 오늘날 불법이민자 또는 불법체류者가 가장 많은 나라가 미국일 것이다. 이들 중 대략 80%는 멕시코와 中南美 국가들로부터 왔으며,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멕시코 한나라가 미국 내 불법체류者 전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불법이민자의 80%가 (1,000만) “Hispanic”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Hispanic'이라는 용어는 통상 美 사회에서 'Latino'라고도 불리는 스페인語를 사용하는 중남미 출신의 이민자나 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 4,000만이 넘는 이들 Hispanic계 미국인들은 주로 멕시코와의 접경 州들인 California, Arizona, New Mexico, Texas와 Cuba에 가까운 Florida주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다. (Hispanic 인구와 이민문제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論할 것임.)

그러면 오늘날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90년대 이후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불법체류者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멕시코와 접하고 있는 California에서 Texas에 이르는 이들 州에는 1960년대 이후 멕시코로부터 이주해온 Hispanic이 상당수 살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멕시코 교포라고도 할 수 있으며, 영어보다는 스페인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1세대 Hispanic이다. 이들 중에는 처음부터 합법적인 이민자들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 “불법이민자”로 있다가 美 정부로부터 사면혜택을 받아 합법적 영주권자가 되었다. Reagan 정부는 1986년 이민개혁법과 관련해서 그 당시 3백만 가량의 불법체류者들에게 사면과 합법적 永住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불법체류자의 수는 다시 5백만에 달했고, 그 이후 10년간 매년 합법이민보다 훨씬 많은 “불법이민”이 미국으로 主로 멕시코 국경지역을 통해 유입된 셈이다. 이 같은 “불법이민의 홍수”를 촉발시킨 主요인이 1986년의 사면(amnesty)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땅에서 일정기간 불법체류자로 지내다보면 결국에는 사면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희망이 이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국경을 넘어오게 한 것이다. 美 정부의 단호한 조치가 없는 한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같은 대규모의 지속적인 불법이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불법이민자를 단속할 수 있는 법은 없었는가? 불법체류者를 고용하는 고용주에 대한 처벌규정은 없었는가? 이에 대한 간단한 답은 정부당국이 방치했고, 법을 집행할 의지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방치하고 철저한 단속을 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한 또 간단한 답은 不法移民의 문제가 오늘처럼 정치적으로 “issue 化”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00마일에 달하는 멕시코 국경지역을 일일이 순찰하고 체포할 수 있는 국경순찰대의 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 정부의 의지가 부족했다고 보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부족한 조건에서도 국경순찰대는 2005년 120만 국경 밀입국者들을 체포했다는 비공식 자료가 있다. 물론 이보다 더 많은 밀입국者들이 국경횡단에 성공했다고 본다. 가히 불법이민의 규모를 알만하다. 오늘날 “불법이민” 문제의 아이러니는 문제가 “문제 化” 되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또다시 “사면”을 論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 內 1,200만의 외국인 불법체류者들의 존재는 사실이고 현실이다. 물론 美 정부도 이들의 존재를 “不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數”가 法의 차원에서는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해 있다는데 문제의 고민이 있다. 1,200만의 불법체류者들을 체포해서 추방한다는 것은 그 실천이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또한 미국 내에는 이들 불법체류者들에게 “관대한” 진보세력과 인도주의자들이 있는가하면 불법체류者들로부터 得을 보는 조용한 “경제적 보수”도 있다. 대부분 멕시코에서 온 이들 불법체류自들은 자신들이 범법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이 함께 살고 있는 경우 부모는 불법체류자이지만 자녀는 미국에서 출생한 市民일수 도 있다. 한 가족 내에 合法과 不法이 혼재되어 있는 현실은 문제의 法的 접근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사회에서 “불법이민”의 문제는 20세기 훨씬 후반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 以前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이민의 문제나 제한은 실질적으로 없었다. 19세기에는 누구든지 대서양을 건너 미국 땅을 밟으면 미국에서 살게 되고 미국인이 되었다. 그때는 “불법이민”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용되지도 않았다. 이제 미국의 인구가 3억에 육박하면서 이민의 통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20세기를 거치면서 멕시코와 미국은 모두 人口가 2-3倍 증가한 반면, 두 나라의 경제적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미국으로 멕시코人들의 불법이민은 두 나라間의 이러한 경제적 현실의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經濟的 側面

미국은 4,000마일에 달하는 Canada와의 국경을 기본적으로 소방차 몇 대로 지키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계에서 아마 가장 긴 “무방비” 상태의 국경이 될 것이다. 사실 미국과 캐나다는 국경이 없는 거나 다름없다. 兩國 국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그런데 남쪽 멕시코와의 국경은 그 길이가 北쪽의 반도 못되는데 1개 사단병력도 부족하다고 많은 미국인들은 믿고 있다. 2006년 美정치권의 큰 논쟁의 하나가 멕시코 국경의 경비강화 문제다. 그 차이를 어떤 사람들은 北쪽은 白人이고 南쪽은 Hispanic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無知하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오늘날 미국은 멕시코 국경으로부터 “불법이민의 홍수” 라는 눈앞에 보이는 實在的인 문제에 봉착해 있다. 왜 이 엄청난 필사적인 南으로부터의 대량 移住가 끊이지 않는가. 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불법이민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Bush대통령은 그가 텍사스州 知事로 있던 1999년 멕시코로부터의 “불법이민유입”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아주 단순하면서도 인간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하루에 기껏해야 50센트 버는데, 북쪽을 보니 잘하면 하루에 50弗도 벌수 있어, 그리고 굶주린 자식을 보면, 당신도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인접한 두 나라 사이에 소득의 격차가 가장 큰 경우가 미국과 멕시코다. 바로 이 현저한 경제적인 차이가 미국에서는 “대량수요”를 그리고 멕시코와 중남미로부터는 “대량공급”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면 이 모든 불법이민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法的으로 보면 물론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밀입국者들은 처벌 대상이다. 그러나 “밀고 끄는 (push and pull)” 잠재적인 요인을 現實化하는 데는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資本主義 미국” 또는 “企業 미국”이 멕시코로부터의 불법이민자들을 필요로 하고 실제로 이들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불법체류者 문제는 상당부분 미국 스스로가 그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멕시코로부터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불법이민은 멕시코 경제가 불어나는 인구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멕시코 경제가 멕시코 국민의 일자리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限 그리고 미국 內에 이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여는 기업이나 고용주가 존재하는 限 불법이민의 流入은 계속될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누가 불법자인지 구분이 명확치 않다. 멕시코 당국은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을 100% 방치하고 있다. 방치가 아니라 묵시적으로 이를 장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멕시코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 마다 두 나라 국경의 완전 개방을 主唱하고 있다. 이들 불법체류者들이 고국에 보내는 송금이 멕시코 경제의 세 번째로 가장 큰 세입의 원천이 되고 있다.

미국 內에 거주하고 있는 불법체류者 1,200만 중 750만 가량이 불법 취업자로 추산된다. 이들이 主로 고용되는 업종은 식육가공도매업, 造景관련회사, 건설현장, 건물/사무실 청소회사, 24시간 편의점, 피복 공장, 농산물 재배농장 등이다. 이들이 불법체류者 고용으로 처벌받는 일은 별로 없다. 지난 1986년 美 의회가 제정한 “이민개혁 및 통제 法”에는 불법체류者 고용 1명 당 $10,000까지 벌금을 不法고용주에게 부과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회사나 고용주들은 이 규정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Reagan 대통령도 그 후임 대통령도 이 법을 적극적으로 “집행”할 政治的 意志나 意慾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上記 法에 따르면 고용주가 사전에 피고용인의 “법적 신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정부가 “全國전화확인시스템”을 설치하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직도 이 “전화확인시스템”은 가동되지 않고 있다. 의회와 정부는 불법고용에 대한 처벌규정은 만들어 놓고 “집행”할 의사는 없는 것 같다. 또한 불법체류者들의 불법고용을 단속하고 이에 대한 법을 집행할여는 이민당국의 노력은 종종 정치권과 지역이익집단들의 압력으로 무산된다. 이것이 지난 20년간의 현실이다.

政治的 측면

1980年代 以後 미국사회의 反이민정서는 통상 수면 아래서 끓다가 가끔씩 그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는데 그 週期가 10년인 것 같다. 1986년과 1996년이 그랬고, 2006년 봄 또다시 정치적 수면위로 올라와 불꽃이 타올랐다. 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이민은 2001년 “9-11” 參事이후 한동안 주춤했다가 2003년 다시 그 이전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9-11”의 여파로 국가안보의식이 한창 고조된 분위기에서 “국경안보”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불법이민의 문제도 정치권에 주요 issue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눈 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불법체류者들에 대한 미국 內의 사회적 부담과 비용의 문제는 西南部 국경 州들에서 선거의 주요 issue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또한 미국의 주요 언론매체에서도 국경순찰대의 고충과 밀려오는 불법이민자들로 인해 국경지역 주민들이 겪는 애로사항 등에 관한 심층취재가 보도되면서 불법이민의 문제는 국민적 관심을 일으키게 된다. 멕시코와 접경州인 Arizona에서 2005년 4월에 결성된 애국시민들의 이른바 “자원국경순찰대” 운동은 곧 다른 州들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상징적으로 “Minuteman Project”라고 명명된 이 “국토 지키기” 운동은 정부가 그들의 땅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국민 스스로가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원래 “Minuteman”은 美 독립전쟁 당시 “즉시 출동할 수 있는 민병대”를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국경순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內陸 州로 스며들기 시작한 불법체류者들의 색출과 불법고용주 고발에도 앞장을 서고 있다. 2005년 10월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1%는 불법이민을 줄이는 것이 제1의 우선순위라고 답을 했다. 이는 1997년의 42%에서 9% 증가한 수치다. 2006년 初 표본조사에서 53%는 미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불법체류者들은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응답했고, 42%는 이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합법적인 체류를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도 불법이민 문제와 관련 새로운 이민개혁법의 필요성을 論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불법이민 문제에 있어 보수와 진보, 공화당과 민주당 間에는 의견이 대체로 갈라진다. 그런데 각 진영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양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보수 쪽을 보면, 사회/문화적 보수는 불법이민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주장하는 반면, 불법이민으로 得을 보는 경제적 보수는 이 문제에 비교적 조용하다. 美 의회를 보면, 하원이 상원보다 불법이민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하원의원들이 상원의원들 보다 그들의 선거구 주민들을 더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移民문제에서 민주와 공화 양당은 共히 현재 (2006) 미국 인구의 13%를 차지하고 있는 Hispanic 票를 의식하고 있다. 거의가 천주교신자인 Hispanic은 사회/문화적 보수이지만 이민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의 동족에 동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2000년 大選에서 근소한 표차로 승리한 Bush는 Hispanic 표의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새 이민개혁법과 관련 上院과 下院은 불법이민 문제에서 각각 다른 法案을 통과시켜 놓고 있다. 2005년 12월 통과된 하원 法案은 미국 내 불법체류者를 범법자로 규정하고, 불법이민을 돕는 者와 불법고용주에 대한 처벌규정을 강화하고, 또한 멕시코 국경의 700마일에 물리적 장벽 조성을 포함하는 국경安保강화 등을 主 내용으로 하고 있다. 下院 案은 불법체류者에 대한 赦免이나 초청근로자 프로그램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上院은 일정한 요건을 충족시키는 조건으로 불법체류者들에게 합법적인 永住의 길을 열어주는 法案을 2006년 봄 통과 시켰다 (“사면”이라는 표현은 피하고 있다). 上院 法案은 150만 명의 초청근로자 프로그램도 포함하고 있다. 국경안보 보강 등 기타 내용에서는 하원 案과 크게 다르지 않다. 下院의 보수 강경론자들은 上院 案은 “사면”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1986년의 “사면”과 다를 것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상원의 합법화 방안은 결국 더 많은 불법이민의 유입을 부추겨 불법이민의 문제를 악화시킬 다름이라고 본다.

下院 法案이 불법이민 단속규정을 강화하고 法집행에 초점을 두었다면, 上院 案은 미국 내 불법체류 자들에 대한 구제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핵심 내용이 된다. 2006년 현재 兩院 모두에서 美 의회의 多數黨은 공화당이다. 상원의 法案은 찬성 62표, 반대 36표로 가결 되었다. 공화당이 多數인 상원에서 어떻게 이 같은 “진보적”인 이민개혁 법안이 그것도 상당한 표차로 통과될 수 있었는가. 上院의 표결 내용을 보면, 찬성 62표는 민주당 의원 38, 무소속 1 그리고 공화당 의원 23명을 포함하고 있다. 즉, 공화당 의원 55명 中 23명 (주로 온건보수) 과 민주당 의원 38명이 상원 案을 가결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민주/공화 양당의 연합이 가능했는가. 여기에는 Bush 대통령의 역할과 영향이 작용했다고 본다.
Bush는 사회/문화적 이슈(issue) 에서는 통상 철저한 보수이지만, 이민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을 “자비로운 보수” (compassionate conservative) 라고 부른다. “이민”은 Bush 대통령에게 정치나 정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특별한 개인적인 애착과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Bush는 어린 시절을 Texas에서 보냈는데, 그 당시 멕시코에서 온 가정부가 어머니같이 늘 보살펴주고 때로는 호되게 꾸짖어 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Bush는 그분을 어머니처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2006) Bush정부의 법무장관인 Alberto Gonzales는 Bush의 오랜 측근이고 법률고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온 불법이민자 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Bush의 제2 외국어는 스페인語다. 그의 인생은 Hispanic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Florida州지사인 그의 동생의 부인은 Hispanic이다. 부시는 “이민의 나라”로서 미국의 전통과 유산을 존중한다. 대통령으로서도 부시는 오늘날 미국에 살고 있는 불법체류者들에게 등을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진보적인 上院의 법안을 보수적인 下院 법안의 代案으로 내놓는데 主導的인 역할을 했다.

이제 (2006년 하반기) 美 하원과 상원은 각각의 이민개혁 법안을 놓고 兩者가 受容할 수 있는 타협案을 도출해 내야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부시는 다른 부분에서 양보를 해도 어떤 형태로든지 불법체류의 합법화 방안을 포함하는 새 이민개혁법이 그의 임기 내에 나올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일단 상원의 법안 통과는 부시에게는 승리다. 그러나 하원의 강경보수의 반발도 예사롭지 않다. 2006년 11월에는 중간 선거가 있다. 美 의회의 하원의원 全員과 상원의원의 3분지 1이 해당된다. 反이민정서 분위기는 이락戰으로 곤혹스러운 공화당에 도움이 될 것이다. 불법이민자 문제는 소위 “조용한 다수”가 개인적으로는 관심사인 문제(issue)이지만 여론조사에서는 이야기를 꺼려하는 그런 종류의 issue다.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이민개혁법이 “정치적” 타협으로 이루어 질 것인지, 선거이후로 미루어 질 것인지 또는 無産되고 말 것이지 기다려 볼 일이다.

國家安保 측면

2001년 이른바 “9-11” 국가안보위기의 사태가 발생하자 Bush정부는 신속히 국토방위部(Homeland Security)를 신설하고, 법무부에 속해있던 연방이민업무를 국토방위部 산하로 이전했다. 국토방위부의 主 임무中의 하나가 국경안보를 책임지는 일이다. 부시 대통령은 그의 “포괄적 安保” 개념에서 국경안보(border security)를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에 연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앞에서 논한 美 兩院의 이민개혁 법안은 모두 멕시코 국경안보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9-11”이후의 국가안보 분위기에서 멕시코 국경을 통한 잠재적 테러리스트 조직의 국내침투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이 같은 국내침투가 부끄러울 정도로 용이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實은 “9-11”이후 멕시코 국경안보는 구멍이 더 뚫린 상태라는 것이다. 非 공식 推計에 따르면 2004년 300만 이상의 불법이민이 멕시코 국경을 통해서 試圖되었으며, 그중 120만 가량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 內의 불법체류자로서 數萬에 달하는 범법자들이 멕시코와 미국 국경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지만 이중 극소수를 제하고는 현실적으로 이들을 색출해 낼 수 있는 방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현 제도 하에서 불법체류者에 관한 정확한 정부의 통계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9-11”이후 국가안보문제와 관련해서 연방정부 차원의 “National I.D. Card” (신원/신분 확인증) 제도의 도입 문제가 美 의회에서도 잠시 論議된바 있으나 별 진전은 없다. 미 국민은 아직은 정부 발급의 “신원확인증”을 싫어한다. 개인의 자유가 제한될 수도 있고 불편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반대 이유다. 미국에는 연방정부가 발급한 우리의 “주민등록증” 같은 “I.D. Card”가 존재한 적이 없다.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I.D.” 목적에 근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운전면허증”일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운전면허증은 “National I.D.”는 아니다. 우선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은 면허증이 없다. 그리고 미국은 한 나라이지만 50개 州마다 발급하는 50개의 운전면허증이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州가 신원확인 없이 신청자 누구에게나 소정의 절차만 필하면 운전면허증을 발급했다. 요즘에는 신청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를 요구하는 州가 늘어나고 있지만 신원확인용으로 제출한 서류의 신빙성은 확인하지 않는다. 아직도 9개 州에서는 신청자의 신원 또는 법적 신분 (불법체류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 확인 없이 운전면허증을 발급하고 있다. 실제로 면허증이 필요한 불법체류者들은 모두 면허증을 가지고 운전을 하고 다닌다. 일단 미국사회 속으로 들어오면 일상생활에서 불법체류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곳이 아직까지 미국의 현실이다.

불법체류者들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지 못하도록 美 의회에서 각州의 면허발급 요건을 규제하는 입법을 시도하고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면허증은 통상 州정부의 소관사항으로 돼왔기 때문에 그 발급 요건은 州가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기본적으로 州는 중앙정부의 지원과 도움은 원하지만 간섭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유럽에 비해 불법체류者들이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곳이 아직도 미국임에는 틀림없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정치인들 그리고 양당의 대선 후보자들은 항상 입으로는 멕시코 국경통제의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불법이민의 동기를 제공하는 미국 내의 불법고용의 단속에는 별 소리가 없다. 아마도 제2의 또는 제3의 “9-11”이 발생하면 “national I.D.”의 필요성에 대한 美 국민의 인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 2001년 “9-11”이후 여론조사에서 美 국민의 50%는 “national I.D.” 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었다.

人道主義的 측면

2008년 대선의 민주당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堂內 진보세력의 대표주자인 Hillary Clinton 前 “First Lady”이고 現 美 상원의원(New York州)은 하원의 공화당 反이민법안을 “무자비하고 非기독교적”이라고 强하게 질타했다. 또한 Los Angeles 지역의 500만 천주교인의 정신적 지도자 Mahony 추기경은 下院의 불법체류者 강력단속 법안에 불만을 표하면서 특히 불법체류자를 돕는 것도 범법행위로 규정하는 조항에 대한 그의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추기경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만일 이 법안이 立法化되면 司祭와 교구민들은 이 法을 무시하고 불법이민자들을 계속 도와줄 것을 촉구했다. 順從을 美德으로 보는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상당히 “과격한” 행동에 대한 요청이라고 볼 수도 있다. Mahony 추기경과 같이 많은 천주교 지도자들은 이민의 문제를 “道德的 issue”로 보고 있다. 로스엔젤리스 지역의 급증하고 있는 Hispanic 人口로부터의 지지와 지원이 이 지역 敎區의 장래에 긴요하고 또한 이들 중 상당수가 불법이민자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추기경의 입장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하고 안정된 그리고 이민의 전통과 유산으로 이루어진 미국사회에는 弱者인 불법이민자를 受容하고 도와주려는 人道主義者들 또는 그 집단이 진보나 보수를 떠나서 항상 있기 마련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미국 땅을 밟게 된 이들을 人道主義的 동기에서 또는 개인적 道德心에서 돕겠다면 이를 잘못이라고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오늘날 미국 內 불법이민자의 문제는 그 정도와 성격에 있어 對策 없는 人道主義 次元에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불법이민자 개인이나 가족에 관한 감동적이고 “人間的인 스토리”는 수없이 많다. 아내와 자식을 떠나 불법체류자로 지내면서 겪는 人生歷程, 어릴 때 北에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고 떠난 어머니를 10년이 지나서 그 아들이 멕시코 國境을 넘어 찾아온 이야기, 불법체류자의 아들이 성장해서 연방이민국 직원으로 국경에 배치되어 불법이민자를 검거해야 하는 갈등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민국 직원인 아들이 찾아오면 지금도 부인에게 “이민국에서 나를 잡으러 왔다”고 소리치며 벽장 속에 숨는 “코미디”를 연출하는 이야기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1,200만 불법체류者들이 하나의 統計數値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 이야기”임을 느끼게 한다.

불법체류자의 數가 미국사회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적을 때는 오히려 미국사회로부터 人間的인 同情과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수가 1,000만이고 1,500만이 된다면 사회의 균형이 깨어지게 된다. 공립학교가 혼잡해지고, 병원의 응급실이 초만원이고, 병원의 신생아실은 불법체류者들의 출산으로 간호사의 손이 모자라고, 州정부의 복지예산은 파산지경에 달한다. 실제로 이런 현상이 California에서 일어나고 있다. 人道主義의 한계점이다. 이렇게 되면 불법이민의 문제는 정치적/사회적 “issue”가 되면서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 間의 이해관계의 충돌로 변질된다. 지금 미국의 “이민문제”가 이 같은 상황에 와있다고 볼 수 있다. 통제가 없는 이민으로 得을 보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집단이 있게 된다. 인도주의를 내세우면 정면으로 반박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미국사회의 이른바 “조용한 다수 (silent majority)”는 人道主義에는 반발을 보이지 않지만 불법이민문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투표”에서 조용히 나타낼 수 있다. 불법이민 또는 불법체류의 主目的이 경제적 이유라면 근로계약에 따라 일정기간 기본권이 보장되는 합법적 체류가 가능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合法的이고 또한 人道主義的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현재의 불법체류者와 잠재적 불법이민자의 數가 “합법적 근로계약”으로 해결 또는 흡수하기에는 너무나 끝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원하는 것은 일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하고 永住하는” 것이다.



多인종 多민족 多문화 측면

지난 2000년 Harvard의 Huntington교수는 매년 끊임없이 밀려오는 “不法移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바 있다: “만일 백만이 넘는 멕시코 군인들이 국경을 넘어왔다면 美 국민들은 당연히 이 사태를 國家安保에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에 따른 적절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백만이 넘는 멕시코 民間人들의 국경침략(invasion)은 미국의 社會安保에 똑같은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며, 따라서 美 국민은 이에 강력히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Huntington은 멕시코로부터의 대량 불법이민을 “社會安保”라는 次元에서 미국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Huntington이 우려하는 “社會安保”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의 이민문제와 관련해서 2004년 Huntington은 <우리는 누구인가? 미국의 정체성에 도전> 이라는 5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내놓아 또 한 번 미국의 知識人들 間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의 논점의 핵심은 이렇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통제되지 않은 非백인인구의 (합법적인) 대량이민은 그 數와 量에서 이미 “critical mass” (臨界질양) 의 수준을 넘어 미국의 전통적 가치와 國家正體性 (national identity) 에 前例가 없는 不安定한 要因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進步 측 지식인 및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를 기우(杞憂)라고 일축하면서 이러한 보수적 견해는 인종/민족 間 갈등을 조장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보수는 多 民族/多 文化的 “分離主義”가 오히려 갈등의 요인이 된다고 반박한다. 여하튼 이 문제가 21세기 미국의 또 하나의 실험이 될 것으로 본다. 앞에서 우리는 이민의 문제를 主로 “不法移民”의 관점에서 論한 셈이다. 여기서는 1960년대 이후 달라진 미국의 이민 추세의 産物이라고 할 수 있는 “多문화주의 (Multiculturalism)” 와 관련해서 이민과 미국의 正體性 문제를 論 할여고 한다. “多문화주의”라는 용어 또는 개념이 머리에 정확히 들어오지 않으면 그냥 읽어 내려가면 풀리게 될 것이다. “이민의 나라” 미국의 성격을 어떻게 定義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보면 이 부분이 가장 핵심적인 論題가 될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인종과 민족의 다양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민족적 또는 인종적 갈등은 이념적 갈등보다도 훨씬 더 폭발성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냉전 후 舊소련과 유고슬라비아에서 우리는 민족과 인종으로 국가가 해체되는 모습을 보았다. 인도,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Angola, Iraq, Lebanon, Burma, Cyprus 등등 크고 작은 나라에서 민족적 갈등과 긴장으로 골치를 앓고 있다. 심지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같은 先進國에서도 민족갈등의 심화현상을 본다. 그러면 큰 나라이면서 多인종/多민족 국가로서 성공한 例는 없는가. 그게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多民族 사회로 존재해 왔다. 또한 미국은 多민족 국가이면서 單一文化 內에서 존재해 왔다. 적어도 얼마 전 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성공 秘訣은 무엇인가. 그 답은 미국의 이른바 “Melting-Pot”의 “同化 文化”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원래 “Melting-Pot (용광로)”라는 용어는 미 독립전쟁이 끝나가는 1782년 프랑스에서 New York으로 이민 온 젊은 수필가인 John de Crevecoeur가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그는 정착민 사회에서 할아버지는 영국인, 할머니는 네덜란드인 그리고 아들은 프랑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4명이 모두 각각 다른 민족의 여자들과 결혼을 한 3代 가족을 보고 이 같은 정착민들의 “다양성”에 놀라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Crevecoeur는 스스로 그 유명한 질문을 한다: “도대체 이 새로운 사람 미국인은 어떤 사람이가?” 그리고 그는 유명한 自問에 유명한 自答을 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나라 사람들이 녹아서 새로운 인종으로 다시 태어난다.” 즉, 미국은 神의 용광로이고, 이 위대한 용광로에서 유럽의 모든 민족은 녹아서 改造된다는 것이 “Melting-Pot America”를 뜻한다. “용광로 미국”의 목표는 옛 문화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美國文化”를 용광로를 통해 주조해서 새 이민자들이 이에 同化되어 미국人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광로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이민자들을 녹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Melting-Pot”의 主 대상은 “유럽인” 또는 “白人”들이었다고 보아야한다. 그리고 言語와 價値觀과 制度的인 면에서 새로운 미국인은 “영국인”일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까지 美國社會의 主流는 이른바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라고 定義할 수 있다. 흑인, 아시아人, 북미 인디언 등을 포함에서 非백인 미국인들은 대부분 미국의 主流社會 밖에서 존재해왔다. 지난 200년 동안 'Melting-Pot America'는 미국의 多民族 백인 사회를 큰 갈등 없이 하나의 美 국민으로 統合해 나아가는데 중요한 기능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美國人口의 構成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난다. 合法 이민에 의한 非 白人 少數民族들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急增하기 시작한 것이다. 美 정부의 인구조사 통계자료에서 1850년부터 1960년 까지 미국으로 유입된 이민의 통계를 보면, 이민의 80-90%가 유럽 국가들로부터 왔다. 그러나 유럽이 차지하는 이민의 비중은 1970년대부터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末에는 20%로 떨어진다. 2000년 자료에서 이민이 “어느 나라로부터” 가장 많이 유입되는지를 보면, 그 첫 번째가 멕시코로 거의 30%를 차지하고, 한국은 2.8%로 7번째 이민 出願 국가다. 서열 1번에서 7번까지에 속하는 유럽 국가는 하나도 없다. 앞으로 이 같은 이민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미국은 모두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나라가 될 수도 있다. Hispanic계 인구를 모두 非 白人으로 분류하면 오늘날 미국의 白人인구는 75% 미만이 된다. 아직은 백인 多數의 나라다.

소수민족인구와 관련 1980년대부터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미국 內의 Hispanic 인구가 가장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4년 Hispanic 인구는 4천만을 넘었으며, 이미 2000년 인구조사에서 흑인 인구를 제치고 제1의 소수민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 960만에서 30년 만에 4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Hispanic 불법체류者 數를 포함하면 오늘날 미국 내 Hispanic인구는 실질적으로 5천만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2006년 아시아系 인구는 1,200만 가량으로 추산된다. Hispanic 이민과 아시아 국가들로부터의 이민이 急상승한 배경에는 1965년에 발효된 새 이민法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본다. 1924년부터 미국 정부는 北유럽과 西유럽 국가들에게 매년 이민 “quota” 혜택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그 外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은 사실상 극히 제한돼 있었다. 그러다가 1965년에 Johnson 정부는 이 “이민할당制”를 폐지하고 非백인 국가들에게 이민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쿼터 制”의 폐지로 1960년대 이후 미국 內에 불어나기 시작한 소수민족 이민사회로부터 80년대를 지나면서 “Melting-Pot America”를 거부하는 소위 “多 文化主義” (multi-culturalism)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多문화주의자들은 백인중심의 “용광로 미국”에서는 소수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이 존중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소수민족의 권리와 지위향상에 있어서는 60년대의 사회/문화적 진보세력과 손을 잡는다. 또 한편 이들은 “세계화” 추세에 편승하여 국가적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를 벗어나 미국사회 소수민족의 “다양성”과 “정체성”을 개발하고 확보하는 것이 21세기 미국이 지향해야하는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論理는 主로 진보적 성향의 엘리트층에 의해서 구체화되고 있다. 90년대 Hispanic 유권자들로부터 70% 이상의 지지를 받은 Clinton 前 대통령이 오늘날 “多 文化主義”의 대표적 옹호론자다. 그렇다고 해서 소수민족사회의 지식인 또는 구성원 모두가 多문화주의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같은 多민족 사회에서 문화적 전통의 효과적 전수는 공립학교 교육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용광로 미국”의 경우도 그랬다. 이민가족의 어린이들은 공립학교에서 영어습득과 함께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同化”과정을 밟게 되고 미국化가 되었다. 80년대부터 多문화주의자들은 “용광로 미국”이 아닌 “Multi-cultural America” (多문화 미국)에 대한 새 교육 프로그램을 공립학교 교육과정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소수민족 이민자들은 주로 大都市 지역에서 그들의 이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백인 인구가 多數였던 로스엔젤리스 지역은 1980-1990년 사이에 처음으로 白人小數 지역으로 바뀐다. Florida州의 Dade County 學區는 1991년 123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포함하고 있다. New York市도 상황은 비슷하다. 뉴욕市 초등학교 아동의 25%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가정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질문이 “왜 영어를 모르는 이 학생들이 전적으로 서구 가치관에서 출발한 역사와 문화를 배우도록 강요받아야하는가” 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로스엔젤리스市 에서도 비슷하다. 결국 이들 大都市의 공립학교들은 스페인어, 중국어, 한국어, 베트남어 등의 소수민족 언어를 사용하는 선생들을 별도로 고용하게 되었다.

교육프로그램 내용도 백인 중심의 미국 역사관 (즉, 용광로 미국) 에서 多문화주의적 非백인 非유럽의 관점으로 바뀌고 있다. 多문화 교육프로그램은 미국사회에 있어 흑인, 인디언, 아시아人 그리고 Hispanic 소수민족은 백인 중심의 교육문화와 제도의 희생물이라고 가르친다. Columbus가 新대륙을 발견한 이야기 대신에 多문화 교육은 美 대륙에는 이미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고 유럽人들이 美 대륙을 약탈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백인들의 “西部로의 팽창”을 多문화주의자들은 폭력적인 과정으로 묘사한다. 조금은 극단적인 例를 들어 보았다. 이념적 보수는 말할 것도 없고 合理的 보수도 多 文化主義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애초에 이들 소수민족 이민자들에게 미국의 문을 개방하게 된 것이 미국의 전통, 가치관, 원칙인데, 이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知的으로 현명한 일이 못된다고 보수층은 多 文化主義의 不條理를 지적한다.

오늘날 미국에는 서로 對立的이고 敵對的인 두 개의 미국이 존재한다고 우려하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나는 오랜 전통의 “Melting-Pot”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Multi-cultural America” (多문화적 미국) 이다. 前者는 “同化”에 의한 하나의 미국을 추구하며, 後者는 인종/민족/문화적 평등성과 정체성을 바탕으로 多元的 미국을 기대한다. 多문화주의는 “同化”를 白人우월주의와 연관 지운다. “Melting Pot”문화는 영어 사용을 동화의 필수 요건으로 간주하며, 공식적으로 영어 이外의 다른 언어는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다문화주의자들은 영어 이외의 언어의 사용과 이용 가능성을 제기한다. California를 비롯해서 소수민족 인구가 많은 州에서는 이미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영어 외에 다른 소수민족 언어로 볼 수 있다. 2006년 5월 美 上院에서 통과된 이민개혁 법안에 “English”를 미국의 “國語”로 한다는 결의안을 삽입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1990년대 初 半 캐나다의 “French-speaking”지역인 Quebec의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잘 기억하고 있는 미국의 보수는 多민족사회에서 언어 사용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

多문화주의가 同化와 統合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개인 보다는 인종적/민족적 집단의 이해관계를 우선시 한다면, 이는 集團分離主義를 부추기는 것이 되고 또한 미국의 전통, 신념 및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보수층은 우려한다. 오늘날 급증하고 있는 Hispanic의 대량 不法이민의 문제에 대한 보수의 예민한 반응도 多문화주의와 연관해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다문화주의를 지나가는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시각은 미국에서 태어난 소수민족 이민사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부모세대와는 달리 그들 자신을 어느 특정 민족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보다는 “미국인”으로서 생각한다고 본다.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는 주목할 만한 지표는 다른 민족 間, 다른 종교 間, 심지어는 다른 인종 間에 결혼이 美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출생이 미국이 아닌 미국시민이 3천만이 넘는 오늘의 미국사회에서 이민문제에 대한 이념적, 인종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논쟁은 百害無益하다. 좀 더 건설적인 논의는 오늘의 이민자들이 어디에서 왔던지 그들이 “同化”된 미국인이 되는 것이 바라는 것이라는 點에 그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이민의 역할을 사실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 미국이란 나라는 이민으로 시작했고 이민으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19세기에도 그랬고 20세기에도 그랬다. 이것이 미국이 다른 나라와 철저히 다른 점이다. Andrew Carnegie, Einstein, Henry Kissinger 모두 1세대 이민자다. 남북전쟁 後 미국의 대륙횡단 철도건설은 이민의 노동력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민의 후손인 오늘의 미국인들은 이민을 그저 하나의 문제로 생각하고, 이 문제는 단지 지난 半세기에 미국사회의 전면에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과거에도 이민의 문제는 있었고 미국의 “용광로”는 결국 이를 녹이고 말았다. 물론 오늘의 미국의 이민문제는 “Melting-Pot 美國”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다고 본다.

미국人口의 다양성이 점증하고 있는 오늘날 통합이념과 공통문화에 대한 필요성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다고 본다. 美國社會와 美 國民이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21세기 미국의 또 하나의 大실험이 될 수도 있다. 이 실험은 21세기 미국人은 누구인가에 관한 실험이고, 더욱 세분화 되어가는 미국사회가 어떻게 또다시 통합해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실험이 될 것이다.

歷史的 측면

建國 이래 미국이 줄기차게 사실상 무제한의 이민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西部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는 이민을 불러왔고 이민은 서부의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서부의 역사는 19세기 말에 끝난 셈이지만, 이민은 20세기로 계속 이어지면서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오늘날 논쟁이 되고 있는 멕시코로부터 대량 불법이민의 문제는 19세기 미국의 서부로의 영토 팽창과도 깊은 역사적 관계가 있다. 여기서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 19세기 멕시코와 미국과의 관계를 미국의 “서부로의 팽창” 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論議하고 저 한다. 먼저 서부팽창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하고 멕시코와의 관계를 다루겠다.

대서양 연안의 13개 州에서 미시시피 江까지의 西部는 이미 건국당시 미국의 영토였다. 1790년 미국의 총 면적은 89만 평방 마일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1803년 미국으로서는 생각지도 않던 뜻밖의 행운으로 총 한방 쏘지 않고 그렇다고 구걸할 필요도 없이 역사에서 前無後無한 국가 間의 “영토매매”를 통해 미국의 영토는 하루아침에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건국이후 첫 번째 西部로의 영토 확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를 美 역사에서는 1803년의 “Louisiana Purchase” (루이지애나 영토매입)이라고 부른다. 이 행운의 주인공은 美 독립선언서의 저자이고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Thomas Jefferson 이다.

미시시피 江에서 서쪽으로 로키산맥까지 펼쳐진 이 광대한 “루이지애나 영토”는 (텍사스와 美 西南 部는 제외) 1763년 以前에는 프랑스의 소유였고 그 이후에는 소유권이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첫 주제의 “영불전쟁” 참조). 프랑스 혁명이후 실권 독재자로 등장한 나폴레옹은 1800년대 初 이미 쇠퇴해가는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영토”와 New Orleans港을 강제로 회수한다. 대통령 Jefferson은 고민에 빠진다. 이제 다시 유럽의 强者가 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北美 대륙의 中部 그것도 바로 미국의 옆에 “프랑스 식민제국”을 세울 계획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상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그러나 숙적 영국과의 피할 수 없는 一戰을 마음에 두고 있는 Napoleon은 프랑스가 “루이지애나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限 미국과 영국은 싫어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영국과의 전쟁에 필요한 戰費의 마련도 그에게는 또 다른 문제다. 결국 1803년 4월 프랑스 외상은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New Orleans항을 포함 全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 (1 에이커 當 3센트) 현금 지불조건으로 미국에 양도할 의사가 있음을 Jefferson정부에 전달한다.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을 Jefferson은 그해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발표할 수 있도록 서둘러 매듭 짖는다. 이로써 미국은 국토의 면적이 유럽만큼이나 큰 나라가 되었으며, 서부로의 팽창은 미국의 운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1804년 Jefferson은 再選에서 압승을 거둔다.

루이지애나 영토매입은 곧이어 로키산맥을 지나는 美 대륙의 西北부 지역에 대한 원정탐사 ('Lewis and Clark Expedition,' 1803-1806)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수집된 다량의 귀중한 정보와 자료는 뒷날 미국의 지도제작에 기틀이 된다. 또한 이 탐사로 1840년대 미 중부에서 시작되는 “Oregon Trail” (오리곤 개척路)은 서북부 지역으로 移住를 가능케 했고, 마침내 1849년에 미국은 이 지역 (오늘의 Oregon과 Washington 州) 을 차지하게 된다. 1845년 Texas의 합병 그리고 이로 因한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획득한 California와 美 西南부 지역을 마지막으로 북미대륙에서 미국의 “서부로의 팽창”은 19세기 중반에 마무리 짖게 된다. 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11代 James Polk 이었다.

오늘의 불법이민 문제와도 역사적 관련이 있는 Texas 합병과 멕시코 전쟁 (The Mexican War, 1846-1948)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원래 California에서 Texas에 이르는 미국의 西南부 지역은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땅이었다. Catholic 국가인 멕시코는 미국과의 경계지역인 광활한 Texas에 미국인들이 이주해서 사는 것을 허용했다.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미국인 정착민들은 가톨릭敎를 받아들일 것과, 둘째는 멕시코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다. 數千의 미국인들이 이 제의를 수용했다. 이렇게 해서 1821년 미국인들의 Texas 정착은 시작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미국인들이 Texas 인구의 90%를 차지하게 된다. 1835년 Santa Anna라는 軍 독재자가 멕시코의 정권을 잡게 되면서 충성맹세와 거짓 改宗에 지쳐버린 Texas의 美 이주민들은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Alamo'참사를 거치면서 1836년 이들은 Texas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리고 1845년 28번째 州로 美연방에 합병된다. 이를 계기로 1846년 미국과 멕시코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멕시코市가 함락되면서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1948년 초 Guadalupe-Hidalgo 조약으로 패전국 멕시코는 California와 오늘의 Arizona, New Mexico, Nevada 및 Utah 지역을 미국에 양도하는 수모를 겪는다. 미국은 보상으로 $1,500만을 멕시코에 지불한다. 그러나 이 전쟁이 미국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값싼 전쟁은 아니었다. Polk 정부는 10만의 병력을 동원 했으며, 戰死자는 1,700명 정도에 그쳤지만 10,000명 이상의 병사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래도 California는 Texas 보다도 훨씬 만족스러운 전리품이었다. 1848년 당시 Calif 인구는 고작 1만이 조금 넘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멕시코 대중과는 다른 스페인 혈통의 후손들이었다고 한다. 흥미 있는 사실은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849년 Calif에 金이 발견되면서 Calif 인구는 급증하기 시작한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광으로 몰려드는 이른바 “Gold Rush”는 가히 기록적이었다. 1854년 한 해에 유럽 도처에서 Calif로 밀려든 이민은 43만에 달했다. San Francisco는 바로 이 “Gold Rush”의 産物이라고 볼 수 있다. 멕시코 입장에서 보면 Calif를 포함해서 영토의 半 이상을 미국에 빼앗긴 셈이다. 오늘날 멕시코 국민은 미국에 대한 “역사적” 불만의 씨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정서나 자세에 있어 과거의 유럽으로부터 이민과 오늘의 멕시코로부터 이민의 근본 差異점이기도하다. 수백만의 멕시코 人들이 1세기 半 前에는 그들의 땅이었던 Calif와 Texas에서 오늘에는 불법체류자로 살고 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멕시코로부터 이민의 홍수는 계속될 것이다. Calif에서 Texas에 이르는 옛 멕시코 영토는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言語 上으로 상당부분 이미 “멕시코 化”되 가고 있다. 이것이 또한 “Melting-Pot America”를 그리워하는 미국인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Manifest Destiny ('명백한 神의 뜻)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西部로의 팽창은 두말할 것 없이 오늘의 미국에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미국은 이른바 “운명적인 西部로의 팽창”을 어떻게 합리화/정당화 했고 또는 하려고 했는가? 바로 “Manifest Destiny” 사상 또는 개념이 이에 관한 것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本 主題를 끝내겠다.

간단히 말해, 근대 “民族國家”는 일정한 지역 또는 영토에서 오랜 동안 언어, 문화, 역사 등을 共有함으로서 소속감을 갖게 된 社會集團들이 “民族”이라는 大집단을 형성해 국가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이 그렇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 유럽의 근대국가들이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민족국가는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하나같이 “民族主義”라는 이념 또는 사상으로 통합되고 유지된다. 국가(state)는 法的인 개념이지만, “민족”(nation)의 개념은 다분히 情緖的이고 文化的이고 社會的이고 그리고 心理的이다. 그래서 공통의 역사와 전통은 성공적인 民族主義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한마디로, 미국은 民族國家가 아니다. 미국독립 또는 미국혁명은 “민족주의”와는 無關한 것이었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과 다른 點이기도하다. 미국혁명은 18세기 자연법사상의 “個人의 自由”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로 이 점이 첫 主題에서 필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要旨다.

미국에도 소위 “미국 민족주의 (American nationalism)” 가 있다면 이는 건국이후 19세기 미국이란 國家의 성장과정에서 생성된 현상으로 본다. 北美대륙의 西部를 모두 흡수하는 것이 미국의 운명이라는 思考가 1830年代까지에는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서부로의 팽창에 대한 美 국민의 새로운 열망과 기독교의 “메시아 的”인 요소가 부합되어 나타난 “Manifest Destiny” 사상은 정치적 및 종교적 정당성을 갖게 된다. “Manifest Destiny” 개념은, 요약하면, 西部로 그리고 태평양으로 미국의 팽창은 自由와 民主主義의 확산을 의미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명백한 神의 뜻”이며 미국의 운명이라는 美 國民의 믿음을 말한다. 이 “神秘的” 확신은 19세가 끝나면서 완전히 현실로 다가온다. 1803년 “Louisiana 매입”을 시작으로 19세기 미국의 영토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팽창된다. 그리고 Alaska를 포함 마침내 태평양의 Hawaii와 필리핀까지 확대되면서 미국은 대서양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强國으로 20세기 미국의 시대를 열게 된다.

美 역사 특히 外交史에서 “Manifest Destiny” 사상은 19세기 미국의 영토 확장에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해 줌으로서 미국國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멕시코 전쟁의 경우 순수하게 “Manifest Destiny”의 틀에서 보아야 할 것인지 또는 침략전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異見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경 남쪽에서 총성이 먼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實은 미국 측이 유도한 전쟁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갖는다. 참고로, “Manifest Destiny”라는 用語 자체는 New York의 時事 잡지 (Democratic Review) 의 편집자인 John O'Sullivan이 1845년 (멕시코 전쟁에 때맞추어) 그의 논설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이다.

그 당시 미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지도자들은 “Manifest Destiny” 이념을 적극 옹호했다. 이들은 미국은 예외적으로 독특한 나라라고 믿으며, 그 독특성은 自由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태어나 최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19세기 미국 시인 Walt Whitman은 “미국의 팽창은 인류의 행복과 자유의 영역을 넓혀가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 찬미했다. 20세기 미국의 시대를 시작한 Ted Roosevelt 대통령은 自由와 民主主義의 확산은 미국이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짐이며,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갈등과 전쟁이 불가피 할 때도 있다고 믿었다. 1세기가 지난 오늘 Bush 대통령의 Iraq戰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面이 있지 않은가 싶다.





IV. 南北戰爭의 나라

美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남북전쟁 (The Civil War)은 外勢와는 관련이 없는 美國 內 南北지역 間의 이해관계의 불기피한 충돌에서 빚어진 불행한 大사건이었다. 양측에서 동원된 병력이 2백만이 넘었고, 戰死자만도 40만에 달했으니 참혹한 전쟁이라 하겠다. 미국이 참전한 전쟁으로서 2차 大戰 다음으로 사상자가 많은 전쟁이 남북전쟁이었다. 南部의 노예제도 청산에 대한 代價라 볼 수 있겠지만, 전쟁 말고 다른 해결 방법은 없었는가. 아쉬운 感은 남아있다. 그러나 건국 후 70년이 지나 마침내 흑인을 포함 “萬人은 평등하다”의 “자유의 나라” 미국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자유의 승리는 곧 美연방의 “위대한 실험”의 성공을 의미한다. 연방의 존속, 즉 하나의 미국을 지킨 것이 Lincoln의 “위대함”일 것이다.

남북전쟁이 흑인노예 문제와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남북전쟁은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흑백의 문제는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남북전쟁은 흑인노예 문제에 대한 南의 백인들과 北의 백인들 間의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흑백의 人種差別 문제는 오히려 남북전쟁 이후 또는 남북전쟁의 결과로 主로 南部에서 불거진 현상으로 20세기 중반에 와서야 法的으로 확실히 마무리 된다. 여기서는 南北戰爭 자체를 기술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보다는 건국이후 미국이 당면하게 된 남북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 이 위기의 한가운데서 나라의 운명을 떠맡은 보기 드문 지도자 Lincoln의 역할, 그리고 남북전쟁이후 흑백의 문제를 통해 미국의 또 다른 면을 들여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美國의 原罪

그 과정이 어떠했던지 미국 땅에 존재하게 된 “노예제도”를 필자는 미국의 원죄라 부르고 싶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원죄가 Eve의 금단의 사과에서 비롯되었다면, 기독교국가 미국의 원죄는 1619년 Virginia 식민정착지에 팔려온 흑인노예에서 시작된 셈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이 원죄를 품고 태어난 것이다. “원죄”는 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자유의 나라” 미국으로서는 별로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 罪 값을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호되게 치렀고 지금도 미국사회는 그 代價를 지불하고 있다. 그래도 미국의 원죄를 이해 할여면 그 당시의 상황과 역사를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고 본다.

15세기말 콜럼버스가 新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以前부터 아프리카에는 노예제도가 늘 존재했었다. 그러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노예를 이용하기 시작한 나라는 Portugal 이었으며, 15세기 중반부터 Portugal人들은 “노예교역”에 들어선다. 또 한편 16세기 初 中南美 植民地 개발에 나선 스페인은 노동력 부족으로 포르투갈 人들을 통해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들여오기 시작한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노예를 기반으로 브라질에 사탕수수 농장을 확장하면서 16세기 후반에는 그 당시 브라질을 세계에서 가장 큰 노예수입의 중심지로 만든다. 그 후 300년간 브라질은 어느 나라보다도 더 많은 노예를 흡수하게 된다.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브라질에 흑인 인구가 가장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약하면, 16세기 내내 포르투갈은 대서양 노예교역을 독점했으며, 16세기末까지에는 이미 230,000에 달하는 아프리카 노예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移住되었다고 본다. 즉,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대륙에 발을 들여놓기 1세기 前부터 스페인의 후원과 보호아래 포르투갈 人들이 구축한 농장노예제도와 노예교역이 이미 카리브해역의 서인도 제도와 中南美 대륙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의 미국에 흑인노예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 특히 18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Virginia의 연초재배농장과 南 Carolina의 쌀 재배농사가 활발해지면서 발생되는 노동력 부족은 카리브해역의 노예교역에서 쉽사리 충당되었다. 1700-1775 사이에 북미 영국식민지로 수입된 흑인노예의 數는 대략 250,000으로 추정된다. 자연증가를 가산하면 독립당시 미국의 흑인인구는 50만에 육박했다. 이들의 90%는 南部 (Virginia, Carolina, Georgia 등) 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부 식민지에는 실제로 흑인노예 인구가 백인보다 많은 곳도 있었다. 1740년대 South Carolina 인구의 65%이상이 흑인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흑인노예는 “사고 팔수” 있는 “動産”의 개념으로 (“chattel slave”) 소유자의 재산으로 간주 되었다. 독립以前에 이미 흑인노예 인구가 남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흑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南部의 社會經濟的 구조가 노예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나라” 미국은 노예문제를 안고 태어났다. 이미 노예의 존재는 남부의 현실이고 경제적 필수요소로 돼있었다. 그래서 1787년 制憲議會에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노예문제를 비켜가면서 타협으로 南과 北을 하나로 봉합할 수 있었다. 1790년 첫 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인구는 거의 4백만, 이 中 흑인은 670,000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흑인 모두가 노예는 아니었다. 6만은 “자유흑인” (free blacks) 으로 주로 北部 New England 지방 (오늘의 동북부) 에 거주하고 있었다. 건국 당시 대부분의 북부 州에서는 이미 노예제도는 실질적으로 폐지된 상태에 있었다. Rhode Island 州는 1774년 노예수입을 금지했다. (연방 차원에서는 1808년 노예수입금지 법안이 미 의회에서 가결되었다.) 1775년 노예폐지운동을 위한 사회단체가 Philadelphia에서 결성되었다. 도덕적으로 또는 기독교 국가로서 노예제도를 그 당시에도 옳다고는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경우 노예제도는 1833년에 폐지되었음.) 그렇다면 남부의 백인들이 북부의 백인들보다 더 非도덕적이고 더 非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북부의 백인들이 그 당시 남부에서 살았다면 그들의 대부분은 노예제도의 현실을 수용했을 것이다. 南部 Virginia 출신인 George Washington과 Thomas Jefferson은 모두 많은 노예를 거느린 당대의 가장 존경 받은 지도자들이었다. “만인은 평등하다”의 Jefferson이 40세에 부인을 잃고 그 후 독신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Sally Hemings라는 그의 下女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흥미 있는 소재로 남아있다.

면화 (cotton) 와 南部

사실상 독립以前 1세기동안 노예제도는 그 당시의 식민지 社會에서 특별한 비판 없이 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美 革命時期의 “자유와 진보적” 분위기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認識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 변화는 특히 美 혁명의 중심지였던 北部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제 노예제도는 일상생활에서 늘 존재해왔던 그러한 것이 아니라 正道에서 벗어난 南部의 “特異한 제도” (peculiar institution) 라는 비판적 시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노예제도를 계속 유지할여면 이를 변호해야하는 입장에 들어선 남부는 처음으로 “南部”라는 “地域差別 性”에 대한 强한 自意識을 갖게 된다. 또 한편 독립 以前에 번창했던 연초재배농장들은 수출시장이 줄어들면서 노예제도의 장래마저 불투명하게 된다.

연초재배농장이 흑인노예를 수입하게 된 初期 南部의 경제적 요인이었다면, 19세기 초반의 南部 (Deep South)를 탄탄한 노예州 (slave state)로 성장하게 한 경제적 무기는 대규모 “면화농장 (cotton plantation)” 이었다. 면화가 없었다면 아마도 노예제도는 19세기 初 미국에서 기독교적 도덕성에 依해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南部의 노예제도를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바꾸어 놓아 남북전쟁을 불가피한 결과로 만든 것도 바로 cotton의 힘이다. 18세기末 영국과 유럽의 방적産業과 직물공장들의 원면(原綿) 수요 急增에 때를 맞추어 등장한 1793년 Whitney의 조면기(繰綿機/cotton gin) 발명은 南部의 원면생산에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노예 1명이 하루에 1파운드 원면을 생산하던 것을 조면기를 사용해 하루에 50파운드를 생산할 수 있으니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1810년 영국은 8천만 파운드의 원면을 소비했으며, 이 중 半가량을 미국의 南部가 공급했다. 50년 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前 해인 1860년 영국의 원면 수입량은 무려 10억 파운드에 달했으며 이 중 92%를 美 南部가 공급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총 수출량의 2/3 가 원면이었다면 남부의 “면화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 할만하다. 이 당시 미국의 富의 가장 큰 원천은 “cotton”이었다. Whitney의 조면기는 남부 노예제도의 활성화에 일등 공신이다. 노예제도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번창했다. 원면 수출 “붐”이 일어나기 前에는 노예의 몸값은 하락하고 있었다. 1800-1850년 사이에 그 값은 $50에서 무려 $800-$1,000로 상승했다. 1808년 노예수입이 연방정부 法으로 금지된 이후에는 “전문노예사육 業”이 그 자체로서 새로운 사업으로 불어났다. 1860년 노예인구는 400만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Cotton 王國” 남부는 대서양 연안의 S. Carolina에서 Georgia와 Alabama를 지나 Texas까지 확대된다.

南部의 노예제도를 단순히 舊시대의 유물로 보는 견해는 맞지 않다.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대량생산을 목표로 성장한 19세기 남부의 “棉花 經濟”는 유럽 산업혁명의 産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보면 노예제도는 남부經濟構造에 必修 不可缺한 요소가 되며, 이것이 바로 南部가 노예제도를 근절 또는 포기할 수 없는 요인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노예의 經濟的 價値는 남부의 총자본의 35%를 차지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미 노예 노동력에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투자를 한 남부는 노예제도에 대한 변명을 넘어 적극적인 변호를 하게 된다. 남부 정치인들은 노예勞動을 불가피한 惡으로서가 아니라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오히려 “고마운” 일로 변호한다. 남부는 北의 인구가 南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구의 증가는 곧 美 의회에서 北部 州들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850-60년 사이에 유럽으로부터 들어온 250만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북부와 서부로 갔다. 물론 南部도 이들의 移住를 환영했지만 이들은 임금 노동자로서 흑인노예와의 경쟁을 원치 않았다. 이제 南은 “노예 州(slave state)” 北은 “자유 州(free state)”로서 사회/경제 構造的으로 점점 더 地域的인 “차별화”가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1820년대 初에 노예문제 해결방안으로 Monroe 대통령이 추진하고 시도했던 “기발한” 계획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그 자신 평생 노예소유자였던 Virginia 출신의 Monroe 대통령 (1817-25)은 진보적인 해결책으로 미국의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는 소위 “逆 이민” 계획을 추진했다. 노예폐지 시민단체와 종교단체들도 이 계획에 동참해서 1822년 西아프리카에 미국의 자유흑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식민지로 오늘의 Liberia가 탄생한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이 이주하면서 Liberia 수도를 Monroe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Monrovia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았던 이들은 오히려 아프리카가 생소한 곳이라는 것을 곧 실감하게 된다. 미국의 흑인들은 본능적으로 이 계획은 성공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됐고, 미국에서의 노예생활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南部흑인들의 생활형편은 유럽의 白人 임금노동자들보다도 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남북전쟁 以前까지 대략 12,000명의 미국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Liberia로 이주했다고 본다. 자유 독립국가 Liberia공화국이 1847년 공식적으로 수립된다. 미국으로부터의 흑인 이주민들의 후손들이 오늘날 Liberia 인구의 5% 이지만 Liberia의 지배계급으로 계속 군림하고 있다.

政治的 妥協과 對決

자유州 北部와 노예州 南部가 西部로 확대해 나가면서 兩者 間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1803년에 획득한 “Louisiana 영토”內에 있는 Missouri Territory가 1819년 연방정부에 州 가입 신청을 했다. (州로 가입되기 以前의 지역을 “Territory”라고 부르는데, 準 州의 성격을 가진다.) 州 가입은 美 議會의 승인을 要한다. 이때의 美연방은 22개 州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자유州와 노예州가 각각 11개州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미주리(Missouri)는 이 당시 이미 10,000여명의 흑인노예를 포함하고 있어 州로 가입되면 노예州가 된다. 결국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타협으로 미주리는 노예州로 東北부의 Maine은 자유州로 각각 연방에 가입하게 된다. 1820년 美 의회에서 통과된 이 타협안을 美 歷史에서는 “미주리 타협” (Missouri Compromise) 이라고 부른다. 이 타협의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1820년 以後로는 미주리 南端 (緯度 36도 30분) 을 경계로 그 北쪽지역에는 노예가 금지된다는, 즉 노예州가 들어설 수 없다는, 條項이다. 이 조항이 뒤에 南北이 갈라지게 되는 화근이 된다.

“미주리 타협”은 20여 년간 별 문제없이 지켜져 왔다. 그러다가 1840년대 중반 Texas 합병과 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西南부의 거대한 영토가 추가되면서 노예論爭은 다시 민감한 국면에 접어든다. “미주리 타협”의 制限을 받지 않는 이미 노예지역인 Texas는 1845년 노예州로 연방에 가입된다. 그러나 California, New Mexico, Utah 지역의 경우는 달랐다. 아직 정착인구가 많지 않은 이들 지역이 자유州로 또는 노예州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북부와 남부에 共히 중요한 관심사 일수밖에 없다. “미주리 타협”에 따르면 이들 3개 지역은 노예州가 될 수 없다. 美 하원에서는 南部가 이미 수에서 北에 밀리고 있었지만 上院에서는 이직 州 가입을 저지할 수가 있었다. 결국 “1850년 타협” 으로 California는 자유州로 연방에 가입되고, New Mexico와 Utah는 “Territory”로 남아 後日 定着住民들의 의사에 따라 州 가입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미주리 타협 (1820)”에 묶여 앞으로 노예州의 追加 加入의 가능성이 희박해 지면서 南部의 불안과 초조함은 깊어진다. 마침내 南部의 극단론자들은 “미주리 타협”을 전면 無效化시키는 政治的 對決로 나가게 된다. 이러한 남부의 움직임에 구세주로 나타난 인물이 Illinois州 美연방 상원의원 Stephen Douglas다. Douglas는 當代에 이름을 낸 유능하고 야심이 많은 민주당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보다는 1850년대 비교적 無名의 Lincoln을 全國的인 有名人物로 만든 장본인으로 더 유명하다 (이 부분은 잠시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대통령 출마를 마음에 품고 있는 Douglas는 “미주리 타협” 문제를 그의 정치적 야심에 남부의 지지를 끌어들일 절호의 기회로 보게 된다. Douglas 상원의원은 “미주리 타협” 무효화 작업에 그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한다. 1854년 Douglas는 미주리州와 인접하고 있는 Kansas Territory를 Kansas와 Nebraska로 兩分해서 定着住民들로 하여금 州 가입의 기준 (자유州/노예州) 을 결정하도록 하는 法案을 美 의회에 제출한다. “Kansas-Nebraska Act”라고 불리는 이 법안의 “合法性”은 “住民主權 원칙”에 근거한다는 論理를 Douglas는 내 놓는다. New Mexico와 Utah Territory의 장래를 정착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한 “1850 타협”은 실질적으로 1820년의 “미주리 타협”을 무효화 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논리를 Douglas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住民主權” 說이 “미주리 타협”을 대치한다는 論理가 된다. 결국 “Kansas-Nebraska 법령”은 1854년 5월 美 의회를 통과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노예문제를 둘러싼 南北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Douglas 는 그의 야심에 노예문제를 이용 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같은 해에 노예 확산금지를 綱領으로 내 걸은 공화당이 창당된다.

또 한편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국사회는 노예제도의 道德性 문제에 침묵을 깨기 시작한다. 1840년대 이미 노예州에서 자유州로의 노예탈출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를 도와주고 또한 수송을 맡은 흑백의 소위 “철도지하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1850년 까지 대략 20,000의 노예가 남부에서 북부로 탈주했다고 추정된다. 이 모든 것이 노예문제에서 남북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1852년 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면서 미국사회의 노예문제는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Tom이라는 노예를 중심으로 노예생활의 실상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한권의 책은 미국사회를 격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사회 전체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책의 저자는 자유州 Ohio와 노예州 Kentucky의 경계지역에 살고 있는 Harriet Beecher Stowe라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출판되자 1週 만에 10,000부가, 10개월 만에 300,000부가 미국에서 賣盡되었다. 이 책은 곧 數 個 國語로 번역도 되었으며, 英 帝國에서만도 백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文學的 가치를 떠나서 歷史에 이 만큼 영향을 준 책 도 드물다. 시간과 역사에 南部는 逆行하고 있다. 이를 느끼고 있는 남부의 불안은 깊어만 진다. 북부의 유권자들은 물론 남부 사람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 “Uncle Tom”의 이야기는 1860년 Lincoln의 당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1862년 南北戰爭 中 백악관에서 작가 Stowe부인을 접견한 Lincoln 대통령은 체구가 작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이 이 큰 전쟁을 불러온 바로 그 책을 쓰신 작은 여인이시군요.”

Lincoln의 등장

Abraham Lincoln은 노예州 Kentucky에서 1809년에 태어나 어릴 때 부모와 함께 Indiana로 移住했다가 성년以後에는 줄곧 Illinois에서 보냈다. 자라면서 학교는 모두 합쳐 1년 남짓 다녔으며, 독학으로 1836 변호사 자격을 받는다. 1830年代에는 Illinois 州 議會 의원으로 거의 10년간을 보냈다. 1843년 美 하원에 출마했으나 실패, 1847-49년에는 성공 Illinois 美 下院의원을 지냈다. 그 以後에는 Illinois로 돌아와 변호사 業에 종사하다가 1854년 反노예정당으로 창당된 공화당에 참여하면서 美정치 무대에서 注目받는 人物로 急부상한다. Lincoln은 19세 때 南部 New Orleans港을 방문해서 처음으로 도시를 구경했고, 3년 뒤 다시 New Orleans에 갔을 때 사슬에 묶여 매질당하는 흑인노예를 목격했다고 한다.

單一 人物로서 미국人에 관한 책이나 글이 Lincoln에 關해서 만큼 많이 나온 경우도 아마 없지 않은가 생각된다. 神話가 없는 길지 않은 美 역사에서 Lincoln의 傳說 또는 정치神話는 나올 만도 하다.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른 罪 많은 백성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그들을 대신해 고통을 받으면서 “敵意는 접어두고 慈悲는 베푸는” 聖스러운 기독교의 美德으로 이들의 죄를 赦해주고 성공의 정점에서 惡意의 제물로 가버린 위인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신화나 전설을 이야기 하거나 만들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노예문제와 南北戰爭을 중심으로 정치인 Lincoln과 대통령 Lincoln을 그 자신의 글과 연설文을 자료로 그 당시의 歷史와 狀況에서 노예문제와 Lincoln 그리고 남북전쟁을 理解하는 노력을 해보겠다.

위에서 간단히 소개한 그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Lincoln은 일찍부터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정치를 시작했고, Illinois에서 변호사 생활을 보낸 몇 년 間을 除하고는 실제로 길지 않은 그의 평생을 정치인으로 보낸 셈이다. 그의 본격적인 정치적 야망과 행보는 1854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그는 45歲로 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한다. 바로 노예문제가 美國政治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時期였다. Illinois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Lincoln은 나름대로 노예문제에 대한 공부를 하고 自身의 생각을 정리해온 것 같다. 1854년 같은 Illinois 출신인 Stephen Douglas 美 상원의원이 “住民主權” 說로 문제의 “Kansas-Nebraska 법안”을 合理化하자 Lincoln은 정면으로 Douglas의 論理를 반박한다. Lincoln은 西部에 있어 노예문제는 地域住民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또한 全 美國의 關心事이기 때문에 “住民主權” 원칙은 잘못 적용된 것이라고 신랄하게 論駁한다. 그리고 4년 뒤 두 사람은 “Lincoln을 有名人物로 만든” 유명한 Lincoln-Douglas 토론으로 숙명의 대결을 하게 된다.

Lincoln은 노예제도 자체를 道德的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자신 노예제도 폐지론자는 아니었다. 여기서 Lincoln이 노예폐지론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가 원칙적으로 노예폐지를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예문제에 대한 해결 또는 접근 방안으로 南部의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Lincoln은 노예문제에 있어서는 확고한 道德主義 者이면서 同時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하는 現實主義者이었다. Lincoln은 모든 그의 연설에서 기회 있을 때 마다 그 자신은 노예폐지론자가 아니며 “노예제도 확대” (the extension of slavery)를 적극 반대한다는 그의 입장을 강조하는데 애를 써왔다. Lincoln은 노예제도의 확산을 막아 노예문제를 南部에 최소한 묶어두면 결국 시간이 가면 노예문제는 “自然死”할 것으로 보고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1854년 10월 Illinois 州 下院 연설에서 Lincoln은 그의 정치인생에서 처음 노예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그 자신은 南部의 노예제도를 간섭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모든 세속적인 권력을 내게 준다고 해도 나는 현존하고 있는 [노예]제도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이 때(1854) Lincoln은 공화당 후보로 美 하원에 당선되지만 곧 사임하고 美 상원에 도전하지만 실패한다. (註: 이 당시 美 上院의원은 州 의회에서 선출되었다.)

Lincoln은 노예제도의 不道德性과 不正義를 비난하면서도 또 한편 현실적으로 노예제도를 없앨 별 방법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西部 自由地域으로 노예 확산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許容될 수도 正當化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所信이었다. 정치인 Lincoln은 19세기 중반 유럽으로부터의 이민으로 불어나고 있는 西部 地域住民의 여론과 정서를 정확히 읽고 있었다. 이들 이민자들은 南部의 노예제도를 용납하지 않지만 이들이 “자유”흑인들과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해야 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노예제도의 도덕적 부당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흑인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은 수용할여고 하지 않는 이들 백인의 兩立적인 정서를 Lincoln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새로운 공화당의 支持基盤으로 西部 住民의 이 같은 정서에 호응할 수 있는 戰略이 필요했다. 특히 中下층 백인들의 이 같은 양립적인 정서는 전통 北部에서도 상당부분 潛在해 있었다. 이들은 경제의 밑바닥에서 출발해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 토지소유의 自作農이 되고, 번창하는 식료잡화점의 주인도 되고,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은 학교선생, 변호사, 의사 또는 사업가로 성공하는 그런 보통 미국인들이었다. 실패해도 이들은 사회보다는 자기 자신을 탓하는 “Protestant ethic”(개신교적 윤리)에 젖어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Lincoln은 자신을 이들 소위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대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Lincoln의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노예폐지론자들과 이들의 人道主義 동조자들은 全國에 특히 Lincoln의 强勢지역인 西北부에서 확실한 성공적인 政堂을 구성하기에는 그 數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西北부의 백인들은 대부분 특별히 노예폐지론자도 또는 옹호론자도 아니다. 이들은 그냥 흑인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白人들이다 ('Negrophobes'). 이들은 노예제도 자체는 惡으로 보지만, 또한 이들은 노예제도 폐지의 결과로 나타날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예제도가 아니라 “노예이든 자유人이든” 흑인을 두려워하고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노예폐지론을 강조하면 數많은 백인들을 불안하게 해서 그들의 표를 잃을 수도 있고, 그렇다고 反노예정당인 공화당으로서 노예문제에 침묵한다면 공화당의 핵심 지지기반이 실망과 배반감에서 등을 돌릴 수도 있다. 이러한 공화당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Lincoln의 戰略이다: 즉, 노예폐지론자들을 위해서 Lincoln은 “노예제도는 惡”이라고 계속 강조하면서 同時에 北部와 西部의 백인 대중이 안심할 수 있도록 Lincoln은 “나는 노예폐지론자는 아니다; 나는 다만 노예 확산을 반대 한다”고 외친다. 여기서 우리는 Lincoln의 계산된 정치적 판단, 고도의 정치적 전략, 그리고 그의 정치적 표현을 읽을 수 있다. 이 戰略의 중요성은 Lincoln이 1854년부터 1860년 大選에 당선될 때 까지 그의 모든 기록된 연설에서 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1858년 Lincoln은 대선으로 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된다. 6월 Illinois州 공화당 전당대회는 美 상원 후보자로 Lincoln을 지명한다. 그의 민주당 상대는 다름 아닌 Douglas다. 지명수락 연설에서 Lincoln은 노예문제를 둘러싼 南北갈등 해소의 모든 노력은 실패했으며 이제 나라는 어쩔 수없이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그의 悲壯한 결의를 다짐하는 “갈라진 집안은 오래갈 수 없다”는 名言을 남긴다. 그리고 8월에서 10월까지 2개월간 7회에 걸쳐 Douglas와 決戰의 토론을 벌리게 된다. Illinois 유권자들을 향한 토론이지만 두 사람의 論爭은 全國的인 관심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Lincoln은 Douglas의 이른바 “住民主權原則” 論과 관련해서 그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州가 되기 以前 ‘準 州지역’ (Territory)의 住民은 그들의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合法的으로 排除할 수 있는가?” Douglas가 “Yes”라고 答하면 자유州 Illinois에서는 勝者가 되지만 南部에서는 敗者가 될 것이고, 만일 “No”라고 答하면 南部에서는 승자가 되지만 Illinois에서는 패자가 될 것이다. Douglas는 결국 “Yes'라고 답하게 되도, Illinois州 美 상원의원으로 再選된다. 그는 2년 뒤 대선에서 남부를 잃고 비참한 패자가 되지만,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하게 되자 그도 Lincoln 대통령을 지지하게 된다. Lincoln은 Douglas와의 토론으로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고, 1860년 대선에서 승자가 된 것이다. 上院 선거에서 패하고 대선에서 이기는 그의 전략이다.

1858년과 1859년에 Minnesota와 Oregon이 各各 자유州로 연방에 들어오고, 노예지역인 Kansas의 연방加入은 부결된다. 南部가 두려워했던 美연방 議會의 勢 균형이 깨지고 만 것이다. 대세를 절감한 남부의 불안은 더욱 심화된다. 南部의 농장主들은 노예제도를 지탱해준 “면화경제”도 산업화의 변화에 따라 이제 내리막길을 가고 있음을 괴롭지만 인식하고 있다. 1860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결국 南北으로 갈라지고 그 결과는 공화당 Lincoln의 당선을 가능케 했다. 처음으로 노예제도 반대를 강령으로 채택한 공화당이 授權 政堂이 된 것이다. 南部는 마침내 연방탈퇴를 선택하게 된다.

대통령 Lincoln

Lincoln은 1861년 3월 4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취임 前에 이미 7개 남부州가 연방탈퇴를 선언하고 “南部聯邦” (Confederacy) 을 구성했다. 이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Lincoln의 至上課題는 “자유냐 노예냐”가 아니라 나라 자체 즉 美연방을 保存하고 保全하는 일이다. 취임사에서 대통령 Lincoln은 탈퇴한 7개 州가 연방으로 되돌아 올수 있도록 과거의 그의 연설에서 한 구절을 인용 한다: “나는 南部 州에 현존하고 있는 노예제도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간섭할 의사가 전혀 없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法的 權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다음 Lincoln 대통령은 남부 州들의 연방탈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聯邦은 영원하다. ... 어떤 州도 일방적으로 연방을 탈퇴할 수 없다”고 단호한 경고를 한다.

그러나 南北戰爭의 역사는 일어났다. Lincoln 대통령의 우정의 손길을 거부한 “南部聯邦”은 1861년 4월 12일 South Carolina의 Charleston港 연방군 요새 'Fort Sumter'에 포격을 가한다. 4월 15일 Lincoln 대통령은 동원령을 내린다. 이렇게 남북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4개의 남부州가 추가로 탈퇴, “南部聯邦”에 가입한다. 이 당시 탈퇴以前의 美연방은 모두 34개州로, 이中 15개 南部 州가 노예州이었다. 이들 15개 노예州들 중에서 北部 자유 州들과 接하고 있는 4개 노예州 (MO, KY, MD, DE)는 탈퇴하지 않고 연방에 存續하기로 결정했다. 즉, 東쪽 Virginia에서 南으로 Florida 그리고 西로 Texas까지의 11개州가 탈퇴한 것이다. Virginia의 Richmond가 남부 연방 (Confederacy)의 수도가 됐으며, Mississippi의 Jefferson Davis가 南部聯邦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남부 연방의 인구는 900만, 이중 흑인노예가 350만이었다. 이에 비해 北部 19개州의 인구는 거의 2천만에 달했다. 인구에 있어 열세이지만 남부軍에는 Robert Lee와 Stonewall Jackson 같은 보기 드문 유능한 지휘관들이 있어, 北軍은 南軍을 맞아 예상외로 苦戰을 겪게 되고 전쟁은 길어진다. 이 같은 Lincoln의 고민을 해결해준 북군 지휘관이 Ulysses Grant 장군이다. Grant는 41세에 북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마침내 1865년 4월 West Point (美 陸士) 大 선배이자 존경하는 R. Lee 장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Grant는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後에 18대 대통령을 지낸다.

대통령으로서 Lincoln에게 주어진 제1의 課題는 갈라진 연방을 되찾는 일이다. 노예해방을 포함 그 外의 모든 것은 우선순위에서 종속변수에 속한다. 연방을 보존하게 되면 노예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사라질 것이라고 Lincoln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연방을 求하는 길은 오직 적극적인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Lincoln은 잘 알고 있다. 南部聯邦의 입장에서는 이 전쟁은 목숨을 건 전쟁이다. 남부 州들은 그들의 存立 자체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 반면, 北部는 전쟁의 목적에 있어 통일이 돼있지 않다는데 Lincoln의 고민이 있다. 공화당 內 급진파들은 노예제도를 그대로 놔두고 남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著)이라고 Lincoln 대통령에게 노예해방선포를 요구하고 있다. 또 한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북부 보수층의 여론과 정서는 연방을 위한 전쟁은 기꺼이 감수하겠지만 흑인을 위한 전쟁에는 목숨을 바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Lincoln은 이를 충분히 읽고 있었다. 또 다른 많은 北部 미국人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에 직접 관련이 없는 전쟁에 피를 흘릴 생각이 없는 無關心한 유권자들이다.

그가 추구하고 願한 전쟁은 아니지만 Lincoln은 근본적으로 道德的 名分을 위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Lincoln은 노예를 섣불리 해방시킬 수는 없다. 연방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 4개의 노예州들 (소위 “border states”) 을 연방 內에 保有하고 있는 것이 우선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에 대한 대통령의 분명치 않은 태도를 힐난하면서 노예해방선포를 촉구한 New York Tribune紙 사설에 대해서 1862년 여름 Lincoln은 Tribune 紙의 주필 Horace Greeley 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傳했다:

“이 싸움에서 나의 으뜸 되는 목표는 연방을 求하는 것이지
노예제도를 求하거나 말살시키는 것이 아님이다. 노예를 해방
시키지 않고도 연방을 求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며,
내가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서 연방을 求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서 연방을 求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도 할 것임
이다. 노예제도와 흑인에 대해서 내가 취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연방을 求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임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Lincoln은 가끔은 실제의 자기 생각보다 더 과격한 발언을 할 때도 있었다. 이제 대통령으로서 Lincoln은 노예문제와 관련해서 자기 뜻보다 더 보수적인 행동을 보여야 했다. 그럼에도 Lincoln 대통령은 공화당의 핵심세력으로 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急進派들의 요구를 계속 無視만 할 수도 없었다. 이제 이들 급진주의자들은 南部의 노예제도를 없애버릴 작정을 하고 있었다. 노예해방은 미국혁명以後에 가장 혁명적인 措置가 될 것이다. Lincoln은 그의 특유의 초연함 속에서 급진파들의 항의와 비판과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한편 그는 南部의 가난한 백인들과 北部의 백인 임금노동자들이 해방된 흑인들과의 경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급진주의자들의 압력과 논리에 Lincoln은 노예해방 쪽으로 전략적 후퇴를 하게 된다. 애초에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노예제도”라는 사회적 현상인데 이제 그 자신이 바로 “現狀維持”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면 論理가 맞지 않다는 생각도 Lincoln은 해본다. 1862年 9月 Lincoln 대통령은 다음해 1月 1日 發效될 노예해방령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에 서명한다. 북부軍 점령 지역에서는 실제로 이미 흑인노예들이 해방되고 있었다. 이 時點에서 미리 發表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와 목적은 영국의 “南部聯邦” 승인 가능성을 事前에 차단하려는데 있었다. 뒷날 Lincoln은 노예문제에 있어 보수에서 급진으로의 자신의 변화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상황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를 통제한 것이다.”

Lincoln은 美 歷史에서 최대의 危機라 할 수 있는 “4년간” 권력의 정상에서 나라를 求한 미국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評價되고 있다. 그는 권력에 빠져들지 않고 오히려 權力으로 순화(醇化)된 지도자다. Lincoln은 정치를 초월한 것이 아니라 正義와 大義와 나라를 위한 “政治”의 達人이었다. 그가 스스로 작성한 모든 사람의 심금(心琴)을 때리는 名文의 연설들은 겸허한 지도자의 영혼에서 나온 글들이다.

南部 (South) 의 再建

4년間의 남북전쟁은 南과 北 사이에 깊은 증오의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오래갔다. Lincoln은 再選 취임 40일 만에 南部 청년의 총탄에 쓰러져 갔다. 1865년 4월 15일 享年 56세, 전쟁이 종식 된지 1週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北部보다는 南部에 더 큰 손실이었다. 남부는 戰後의 남부를 도와줄 최대의 후원자를 잃은 것이다. 이제 전쟁의 폐허와 상처에서 南部를 재건하고 再조정해서 연방으로 복귀시키는 일이 남아있다. 이 힘들고 혼란스런 과정이 1877년 까지 미국의 政治舞臺를 차지한다.

Lincoln 대통령을 승계한 부통령 Andrew Johnson은 Tennessee에서 無學의 양복재단사로 시작, 민주당에 입당 州지사와 美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에 오른 立志的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戰後의 복잡한 난국을 이끌어갈 만한 정치적 힘이 부족했다. Johnson은 Lincoln의 영향력이나 권위에는 미치지 못했다. 前 민주당 정치인이었던 Andrew Johnson은 이 당시 美 議會를 장악하고 있는 공화당내 急進勢力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Johnson은 美 역사에서 최초로 下院의 탄핵을 받은 (上院에서 겨우 모면) 대통령으로 아마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공화당의 美 의회는 남부再建과 관련 “처벌적” 법안들을 통과시킨다. Lincoln의 뜻을 잘 알고 있는 Johnson은 이들 법안을 “veto'하지만 매번 議會에 의해 묵살된다.
美 의회는 戰後의 남부를 5個 軍 관리지역으로 나누어 “軍政”을 실시한다. 군정 통치자들은 그들이 선정한 南部 백인들과 이제 자유인이 된 흑인들 그리고 한 件을 노리고 北에서 몰려온 이른바 “carpet-bagger” (정상배) 들에게 民政을 移讓하는 式이된다. 이 과정에서 戰前의 南部 정치인들은 排除된다. 이로 因해 남부 백인들은 공화당과 흑인들에 대한 反感을 가지게 된다. Lincoln 대통령이 두 번째 임기를 完遂할 수 있었다면 그의 “惡意는 버리고, 慈悲는 모두에게” 라는 남부 포용정책으로 재건의 내용과 방향이 달라졌으리라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존의 남부 민주당 세력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게 된다. 1880년까지에는 민주당은 남부의 거의 모든 州에서 多數黨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75년간 남부는 民主당 一堂 지역으로 존속하게 된다. 南北戰爭의 가장 큰 歷史的 意味는 전쟁의 폭풍으로 그래도 短期 間 內에 미국이란 나라를 다시 “큰 하나”로 統合했다는 것이다.

黑白문제와 民權운동

남북전쟁은 美연방을 試驗했고, 美연방은 그 시험을 통과했다. 이제 탈퇴도 없고 노예도 없는 미국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萬事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을 가져왔지만, 흑백의 문제는 전쟁의 결과로 시작된 셈이다. 노예문제의 “진짜 문제”는 노예제도의 終熄이 아니라 그 以後에 일어날 自由人 흑인과 백인과의 문제다. Lincoln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준비 없는 노예해방을 주저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상당히 달라졌지만 19세기 중반 특히 南部 미국사회에서 흑백이 함께 일하고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Lincoln은 솔직했다. 그는 단순히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백인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바 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해도 萬人이 그렇게 생각 한다면 民主主義 體制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Lincoln은 이 문제를 늘 생각하고 고민한 지도자다. 아직도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Gettysburg 연설”(1863)의 첫 구절에서 Lincoln은 美 독립선언서의 “만인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명제를 美 國民들에게 상기시키면서 미국은 “自由의 새로운 탄생”을 갖게 된다고 다짐한다. 이 때 Lincoln은 흑인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法 앞에 “평등해야만” 된다는 그의 信念을 吐露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Lincoln은 미국사회가 이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870년대 末 再建時期가 끝나가면서 南部에 Lincoln이 고민하고 우려했던 문제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부의 各 州정부를 장악하게 된 남부 민주당은 1880년대에 흑백分離정책을 위한 각종 法律을 제정한다. 1868년과 1870년에 각각 인준된 美 헌법수정 제 14 및 15조는 미국市民인 黑人도 法의 동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와 모든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남부 州들은 州법 및 地方自治법을 통해서 학교와 모든 공공시설에서 흑백을 분리하고 또한 흑인들의 정치참여를 制限하는 一連의 立法을 내놓기 시작한다. 1881년 Tennessee를 시작으로 기차, 버스 등 모든 공공수송 편 그리고 공원, 극장, 화장실 등 모든 공공시설에서 흑백을 분리했다. “문맹시험” 法을 제정, 시험에 통과한 유권자만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선거稅” (poll tax) 法으로 세금을 내지 않은 대부분의 흑인들은 투표에서 제외되었다. 모든 남부 州는 흑백間의 결혼을 法으로 禁했다. Alabama 州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chess(서양장기)를 두는 것도 금했다. 이 같은 일련의 “흑백분리” 관련法을 “Jim Crow”法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Jim Crow”는 1830년대 순회극단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흑인노예를 상징한다.) 그래서 “Jim Crow”는 美 歷史에서 黑白分離(segregation)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1880年代 南部에서 시작된 “Jim Crow” 體制는 그 後 75년간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다.

1896년 흑백차별의 “Jim Crow”법에 대한 美 大法院의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 “Plessy 소송”에 관한 이 判例의 내용은 요약하면 이렇다. Plessy는 흑인으로 南部에서 北으로 가는 열차 탑승에서 백인 전용 칸에 앉았다가 승무원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다. 이에 Plessy는 열차에 흑백 칸을 구분하는 것은 인종차별이라는 근거로 소송을 제기, 美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대법원의 판결은 “인종분리” 자체가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Plessy의 경우 인종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그 근거는 “동등한 시설”이 주어지는 한 백인과 흑인은 분리될 수 있으며, 이 경우에 “분리”는 “차별”이 아니라는 판결이다. 여기서 나온 판례가 소위 “separate but equal (분리지만 평등한)” 論理로서 1954년 이 先例가 위헌으로 美 대법원에 의해서 번복(파기)될 때까지 모든 공립학교와 모든 공공시설에서 黑白分離가 合法화 되었다. 즉, 1896년의 대법원 판결은 “Jim Crow”법을 합법화 시켜준 판결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남부의 경제적 조건에 더하여 “Jim Crow”체제와 백인 우월주의는 南部黑人들를 北으로 移住하게하는 요인이 된다. 남부에서 자유인이 된 흑인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19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흑인들은 농촌지역에 살고 있었다. 흑인人口의 北의 大도시로 이동은 1890년대에 시작해서 1차 大戰 때 그 절정에 달한다. 임금이 좋은 戰時경제의 일자리를 찾아 남부 농촌지역의 흑인들은 New York, Philadelphia, Boston, Chicago, Detroit 등 北의 大도시로 이주했다. 그 수가 500,000이 넘었다. Chicago의 경우, 1910년 흑인인구 44,000에서 1920년 110,000으로 늘어났다. 北으로 흑인人口의 大이동은 계속 된다. 1916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6백만 이상의 흑인이 北으로 이주했다고 본다. 이중 4백만은 1940년대 以後에 北의 도시로 이주했으며, 이로 因해 60년대 以後 북부 도시의 백인인구가 郊外로 빠져나가게 되면서 北의 都市들도 흑백의 갈등을 겪게 된다. 80년대 이후에는 소위 新남부경제가 불어나면서 南部로 다시 돌아가는 흑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2차 大戰은 美 흑인에게도 새로운 변화의 기회를 제공했다. 19세기말에 시작된 흑인들의 소위 “出 남부농촌”은 半세기에 걸쳐 北部도시로 흑인인구의 大이동을 가져왔고, 이제 남부농촌을 벗어난 이들은 參戰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그들의 몫을 당당히 해낸다. 세계를 보고 듣고 돌아온 흑인 병사들은 이미 Georgia, Alabama, Mississippi의 농부는 아니었다. 제대 장병으로 이들은 정부의 혜택을 받아 전문기술 습득과 대학교육의 기회를 넓혀간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들은 미국市民으로서 자신들의 權利를 생각하게 되고 또한 이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아직 남아있는 남부의 “Jim Crow”法을 없애야 한다고 나서기도한다. 흑인 民權運動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즈음 1954년 美 大法院으로부터 흑백문제와 민권운동은 물론 미국사회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될 획기적인 판결이 나온다. 통상 “The Brown case”라고 불리는 20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이 판결은 위에서 언급된 1896년의 “Plessy”判例를 거의 60년 만에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은 “分離지만 평등한” (separate but equal) 論理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즉 “分離” 자체가 “不平等”이라고 판시한 것이다. 이 판결이 나오게 된 실제 배경은 南部의 公立초등학교 체제가 백인학교와 흑인학교로 “분리”되어 있는 현실에서 흑인학생이 가까이에 있는 백인학교에 가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또한 시설도 빈약한) 흑인학교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흑인민권단체가 흑인학생들의 權利를 위해 제기한 소송에서 비롯됐다. 美 대법원의 판결은 곧 미국의 法이다. “Brown 판결”에 근거해서 196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美전역은 各 地域 연방법원의 指針에 따라 흑백으로 분리된 공립학교는 “통합”으로 재편성되는 혼란의 과정을 겪게 된다. 엄청난 白人부모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된 이 “통합정책”은 郊外로 또는 더 먼 교외로 백인들의 “탈주”를 가속화 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두 개의 美國 -- 즉, 都市는 主로 가난한 백인과 흑인 및 기타 소수(이민)민족들로, 郊外는 중상층의 백인 및 소수민족들로 나누어진 사회/경제적 二分 현상은 “Brown 判決”과도 관련이 깊다. (민권문제를 포함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서 大法院의 역할과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主題에서 좀 더 깊이 그리고 포괄적으로 다룰 것임.)

北으로 흑인人口의 大이동 그리고 1954년의 大法院 판결은 활기찬 民權運動으로 이어지고, 1960년대 Johnson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에서 그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본격적인 民權運動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조그만 사건이 1955년 12월 1일 南部 Alabama州 Montgomery市 버스 안에서 일어난다. 백인 지정席에 앉아있는 40대 초반의 흑인女人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경찰에 체포된다. 체포의 근거는 그 당시 버스의 흑백 좌석을 구분하도록 돼있는 Alabama州 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그女의 체포가 알려지자 격분한 그 지역 흑인들은 버스승차 거부운동을 벌리고, 이 사건은 흑인民權運動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민권운동의 “大母”로 불리는 이 여인의 이름은 Rosa Parks이며, 그 때 직업은 재봉사이었다. 버스 “보이콧” 381日 만인 1956년 11월 美 대법원은 문제의 Alabama州 法이 違憲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용기 있는 한 평범한 흑인여인이 시민으로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이루어낸 결과다. 이 때 “버스 보이콧”을 이끌어나간 사람은 그 당시 Montgomery의 흑인침례교회에 새로 부임한 26세의 Martin Luther King 목사였다. 이를 계기로 King 목사는 以後 민권운동을 “非폭력” 행진으로 主導하게 되고, 1963년에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나는 꿈이 있다”는 감동적인 연설로 흑인은 물론 수많은 백인들의 마음과 가슴을 열게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35세에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美 의회는 1964년 포괄적인 民權법안 (Civil Rights Act of 1964)을 통과시킴으로서 南部의 “Jim Crow”體制를 종식시킨다. 또한 1965년 Johnson정부는 “투표권 法” (Voting Rights Act) 을 法制화함으로서 남북전쟁以後 처음으로 남부흑인들이 모든 선거에 대거 참여하게 된다. 39세에 King목사도 Lincoln과 같은 운명을 맞는다. Rosa Parks 여사는 2005년 92세로 他界했다.
































V. 法治의 나라

人間이 天使라면 정치나 정부도 필요 없다는 Madison의 말을 우리는 앞에서 인용한바 있다. 정치도 인간이 하는 것이고 그래서 완전한 (perfect) 民主主義가 없듯이 완전한 法治도 있을 수는 없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미국은 “법치의 나라,” 즉 법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할만하다. 여기서 “法治” (rule of law) 는 法의 준수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국가/정부 권력에 대한 制限 또는 견제(牽制) 장치로서의 개념을 강조한다. 근대民主主義 정치제도의 기본은 三權分立이다. 독립적인 행정, 입법, 사법의 3부가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견제하면서 국민의 권리와 복리를 보호하고 증진하자는 뜻이 된다. 戰後 後進國의 民主主義에 있어 司法府는 통상 “권력의 시녀”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대한민국의 경우도 그랬지만, 요즘 사법부의 獨立的인 役割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다. 發展的인 현상이다.

美國만큼 사법부의 독립성과 그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美 立憲民主主義의 실질적인 首長은 美 대통령이 아니고 美 大法院長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美 의회의 兩院을 통과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美國 法도, 州 의회에서 통과된 州 法도, 美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 그날로 무효가 된다. 成文헌법이 없는 英國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英國의회(Parliament)가 제정한 法이 곧 나라의 최고의 法이 된다. 미국에 있어 法體系의 “Bible”은 美연방 헌법이다. 제2의 Bible인 美 憲法의 최종 해석자는 美 대법원의 9명의 大法官이다. 개개別 판결에 있어 위헌이냐 합헌이냐의 결정은 대법관 9명의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요약하면, 美 대법원의 막강한 힘의 根源은 대법원의 최종 “司法심사권” (power of judicial review), 즉 美연방 헌법을 해석하는 최종의 權威와 權限이다. 1974년 Watergate 사건과 관련 Nixon 대통령이 사임을 결심하게 된 것도 “대통령의 특권에도 한계가 있다”는 美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직후였다.

이들 9명의 대법관은 美 上院의 인준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일단 임명되면 임기도 정년도 없는 平生 職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가 아닌 종신임명제 대법관 9명이 이 같은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은 남아 있지만, 여론조사에 나타나는 美 대법원은 美 政府 부처 중에서 美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상으로 항상 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5년, 10년 또는 20년 후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展望해보는 지표 또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의 美 대법원 構成과 判決 내용을 분석해 봄으로서 내일의 미국을 豫見해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 있어 大法院의 役割과 영향을 쉽게 그리고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는 접근은 대법원의 실제 判例들을 가지고 논의해 보는 것이다. 여기서 論議의 방향은 판결의 法的 측면 보다는 판결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영향에 초점을 두겠다. 이는 美 대법원의 판결은 法的 의미보다는 그 判決의 社會的/政治的 영향이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며, 9명의 大法官도 이점을 항상 인식하고 판결에 臨한다고 본다.

Warren 대법원과 社會改革

Earl Warren(1891-1974)은 1953년에 美 대법원장에 취임, 그 후 16년간 美 역사에서 가장 進步的이고 社會개혁적인 그래서 가장 論爭의 대상이 되는 대법원을 주도해온 人物로 20세기 美 歷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진보와 흑인民權論者들은 Warren을 적어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대법원장으로 꼽는다. 반면, 그 당시 그의 지나치게 進步的인 판결과 그의 지나친 “사법심사권” 행사(行使)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많다. 그럼에도 1950년대와 60년대 소위 “Warren 대법원”의 判決들이 같은 時期에 美 議會가 내놓은 모든 立法보다 미국社會에 더 크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데는 異見이 없을 것이다. Warren 대법원장은 특히 黑人의 人權향상과 “弱者”의 人權을 보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評價된다. 이에 대한 論議에 앞서 Warren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 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arl Warren은 법조인 보다는 공화당 정치인이었다. 法大를 나왔지만 판사 경력은 없다. 그는 대법원장이 되기 前까지 California에서 지방검사를 거쳐 1930년대末 州법무장관을 지냈고, 1941년부터 前例 없는 3선의 California 州지사에 오른다. 3선의 Warren 지사는 1952년 大選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大 恐慌 (Great Depression) 으로 1932년부터 20년간 민주당에 백악관을 내준 공화당은 한국전쟁을 기회로 大選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후보로 2차 大戰의 영웅 Eisenhower 장군의 영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공화당 지도자들은 黨의 단합과 승리를 위해 Warren 지사가 양보할 것을 설득한다. Earl Warren은 경선사퇴의 代價로 Eisenhower가 당선되고 대통령 임기 中 대법원장 자리가 公席이 되면 자기를 임명해줄 것을 요구했고, 그 요구는 수락된다. Eisenhower는 1953년 初 대통령에 취임한다. 공교롭게도 그해 8월 63세의 Vinson 대법원장이 돌연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Warren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Eisenhower는 국무장관 자리를 제의 했으나 Warren은 원래의 약속履行을 요구, 결국 53년 10월 Warren은 자기의 뜻대로 14대 美 大法院長에 오르게 된다. 後日 Eisenhower는 保守에서 超 進步 대법원장으로 돌아선 Warren의 임명에 대해 이렇게 내뱉었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아주 바보 같은 실수였다.” 대법관에 任命된 後 진보가 보수가 되고 보수가 진보가 되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Warren이 53년 10월 대법원 청사 그의 집무실에 첫 출근 했을 때는 公立학교 人種분리의 위헌성에 관한 “Brown 소송件”이 이미 대법원에 올라와 있었다. “Brown 판결”의 내용과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는 앞 主題에서 충분히 다루었음으로 여기서는 主로 판결과정에서 Warren 대법원장의 接近과 役割에 초점을 두고 저 한다. 그 당시 Warren의 동료 대법관들은 판사로서의 경력이나 法 理論에서는 모두 그보다 한수 위다. 대법원장은 9명의 “평등한” 대법관들 中에서 단지 선임자일 뿐이다 (“first among equals”). 소송件과 관련 대법원장은 모든 대법관 會議를 주재(主宰)한다. 대법원장의 개성과 개인적인 역량에 따라 토론의 방향을 주도할 수는 있겠으나, 이 경우 9명의 대법관들은 各自 개개별 “독립된 主權 體”로 보아야 한다. 法理와 良心에 따른 설득으로 동료 대법관들의 의견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대법원장이라 해서 그 이상의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Warren은 “Brown 판결”에 대한 그의 전략적 접근을 구상한다. 아직 동료 대법관들은 “Brown 件”에 대한 공화당 출신 신임 대법원장의 속을 모르고 있다.

Warren은 20세기 중반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自由世界의 지도자인 미국이 인종분리정책을 실시하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사회도 이제 생각과 자세를 바꿀 때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큰 뜻을 품은 정치인에서 대법원장에 오른 Warren은 美 대통령도 美 의회도 할 수 없는 역사를 바꾸는 일을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래서 그는 대통령보다 美 大法院長을 願했는지 모른다. Warren은 인종분리정책의 위헌성 또는 합헌성 문제를 떠나 인종차별문제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美 헌법을 단지 18세기의 歷史的 法문서로 보지 않고 20世紀 美國의 現實에서 그 意味를 읽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Warren은 憲法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시대에 맞는 “公正하고 公平하고 바른” 것을 보증해 주는 文書라고 본다. 1950년대 美國에서 州정부가 인종분리를 정책으로 보호한다면 이는 잘못일 뿐만 아니라 美國의 장래에도 도움이 될 수 없다고 Warren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사회 특히 南部는 아직도 분리정책을 고수하고 있었고, 美 의회의 다수당인 민주당의 실권을 쥐고 있는 보수 南部출신 의원들이 개혁적인 民權法案을 지지할 것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Warren 대법원장은 인종분리정책을 합법화 시켜준 1896년의 “Plessy 판례” (앞의 주제 참조)를 이제 “Brown 판결”에서 위헌으로 번복함으로서 정치권이 아닌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인종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8명의 동료 대법관들의 성향을 분석한 후 Warren은 “Brown 件”에 대한 자신의 속뜻과 진심을 진보에서 보수로 돌아선 前 Harvard 법대교수 Frankfurter 大法官에게 토로하고 조언을 구한다. 의외로 Frankfurter의 반응은 협조적이었다. 그다음 접촉을 하면서 Warren은 자신을 포함해 5명의 同意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確信 感을 갖게 된다. 그러나 문제의 민감성을 고려하면 만장일치의 판결이 아니고는 정치권과 여론의 반발을 극복하기 힘들 것으로 Warren은 판단했다. Warren은 공립학교 인종분리가 초등학교 학생들과 미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대한 사회학자, 심리학자, 교육학자 등 전문가들의 의견을 판결審理과정에 반영했다. 그는 法律的인 접근보다는 社會心理學的 접근을 시도했다. 그런 다음 Warren 대법원장은 가장 힘든 보수성향의 대법관 2-3명을 한사람씩 설득해 나갔다. 1954년 5월 17일 마침내 美연방 대법원 9명의 대법관들은 역사적인 “Brown 判決”에서 공립학교 인종분리는 “違憲”임을 美 全域에 선포하고, 민권운동을 가속화 시키는 轉機를 마련한다. 분리정책을 半세기 이상 합법화 시켜준 “Plessy 判例”를 대법원 스스로가 번복한 것이다. 스스로 작성한 판결문에서 Warren은 “분리 (separate)”는 시설이 동등하다 해도 그 자체로서 “불평등 (unequal)”이라고 선언했다. “Warren 대법원”의 진보적이고 적극적 “사법심사권” 시대가 본격 시작된 것이다. “Brown 판결”의 헌법적 근거는 美 헌법 改訂제14의 “어느 州도 ... 그 관할지역內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平等한 法의 보호를 거부할 수 없다”는 조항이다. “개정 제14”는 Warren 대법원의 계속되는 진보적 판결의 “憲法的” 무기가 된다.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에 걸쳐 “Warren 대법원”은 南部의 소위 “Jim Crow” 法體系를 위헌으로 완전 소멸시켰다 (앞 主題 참조). 또한 Warren 대법원은 “1인1표제” 원칙을 확립하는 획기적인 판결들을 내놓았다. 1962년의 “Baker 판결”에서 州 의회 선거구들 間에 불평등한 人口배분을 시정했고, 1964년의 “Wesberry 판결”에서는 각州의 美 의회 선거구들이 평등한 인구분포를 갖도록 再 區劃 化할 것을 지시했다. 이 같은 대법원의 판결과 시정 명령은 입법부에 대한 사법부의 직접적인 도전으로 비쳐질 수도 있어 한때는 입법부와 사법부間의 정면 대결의 양상까지 몰고 갔다.

“Warren 대법원”을 특징지어주는 또 하나의 획기적인 改革영역은 피고인 또는 피의자 權利보호에 관한 판결이다. Warren 대법원의 특징이 될 만큼 이 부분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두 개의 대표적 판결을 다루겠다. 1963년 “Gideon 소송”에서 美 대법원은 “모든”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에 의한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 소송의 배경은 이렇다. 50대의 Clarence Earl Gideon은 1961년 Florida의 Panama City 근교에 있는 당구장을 범죄목적으로 침입해 들어갔다는 罪名으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가난한 떠돌이 노숙자였다. 법정에서 Gideon은 판사에게 관선 변호사를 요구했다. 그 당시 Florida 州법에 의하면 重犯의 경우 또는 정신적 무능의 경우에만 가난한 피고인에게 州정부가 관선변호인의 혜택을 제공하도록 돼 있었다. Gideon의 경우는 輕犯罪에 해당됨으로 변호인 없이 재판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판사의 설명이었다. 변호인 없이 재판을 받게 된 Gideon은 1심에서 유죄 그리고 上訴에서도 유죄 확정판결을 받는다.

Gideon 억울했다. 그는 당구장을 무단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 근처에서 노숙을 하다가 피의자가 되고 기소가 된 것이다. 배운 것은 없지만 그는 평생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최소한의 法律知識을 얻은 것이 있었다. 교도소에서 Gideon은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교도소 동료의 도움으로 작성해서 美 大法院 앞으로 보낸다. 탄원서에서 Gideon은 변호인 없이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재판에서 미국시민으로서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法의 절차” (헌법 개정 제14)를 거부당했다고 호소했다. Warren은 Gideon의 탄원서에서 관선변호인의 혜택이 重犯의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Florida法이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Gideon 소송件”이 대법원 再審에 選定된 것이다. 대법원은 事實審理는 하지 않는다. 대법원의 판결은 절차상의 문제에만 해당된다. 즉, Gideon이 有罪이냐 無罪이냐 하는 문제는 대법원의 審理에서 제외된다. 대법원이 따져야하는 논점의 핵심은 Gideon이 Florida 재판과정에서 “정당한 法의 절차”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9명의 대법관은 모두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정당한 법의 절차가 거부된 Gideon의 Florida 재판은 무효가 된 것이다. Gideon은 즉시 석방 되었다. Gideon 뿐만 아니라 Florida 교도소에 변호인 없이 有罪判決을 받아 복역 중인 수백 명의 수감자들도 석방되었다. 또한 Gideon의 판결은 관선변호인 제도가 없는 다른 모든 州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것이 無名인 弱者 Gideon의 승리다. (뒤에 Gideon의 이야기는 영화化 되었다.)

Gideon의 대법원 판결이 裁判과정에 있어 피고인(defendant)의 권리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로 소개할 1966년의 “Miranda 판결”은 裁判과정以前 경찰의 체포와 審問과정에서 발생되는 피의자(suspect)의 권리에 관한 획기적인 판결이다. 9명의 의견이 5對4로 갈라진 판결로 “Warren 대법원” 16년간의 판결 中 가장 심한 批判과 論爭을 불러온 判例라 하겠다. 우선 사건의 개요를 들어보자. 1963년 3월 Arizona州 Phoenix市 근교에서 18세의 백인 女子가 강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다. 10일후 23세의 멕시코系 미국인 Miranda가 용의자로 체포되고, 그는 곧 피해자에 의해 그女의 加害者로 확인된다. 경찰의 審問에서 Miranda는 처음에는 범죄를 부인 했으나 2시간 후 그는 자백을 하게 된다. Miranda는 2시간 동안 격리된 방에서 2명의 경찰심문관에 의해 심문을 받은 후 “自意”로 자백했다는 진술서에 서명했다. (피의자의 “자발적”인 자백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Miranda는 Arizona 법정에서 有罪판결로 20년 刑을 받는다. Miranda의 변호인단은 美 대법원에 상소한다. 上訴의 근거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지 않을” 헌법에 보장된 피의자의 權利가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헌법 개정 제5조).

이제 9명의 대법관이 결정해야할 문제의 핵심은 “두 시간의 경찰심문과정에서 피의자 Miranda는 과연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았느냐”에 대한 것이다. 경찰이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서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Miranda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多數의 意見이었다. Warren을 포함 5명의 대법관은 강요받은 것으로 판단했고, 다른 4명의 대법관은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의 다수의견서에서 Warren은 심문 자체가 “심리적”으로 피의자의 자백을 강요하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피의자는 심문을 받기 前에 그가 원하지 않으면 어떠한 질문에도 答할 필요가 없으며 (“묵비권”) 또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도 할 필요가 없으며, 변호사의 배석을 요구할 권리도 있다는 등의 피의자 權利에 대해서 경찰로부터 충분한 “事前注意”를 받았어야한다는 것이 多數意見의 要旨다. 이 모든 것은 또한 헌법 개정 제14조의 “정당한 法의 절차”에 속한다고 본다. 4명의 少數意見 또는 異見은 多數意見을 强하게 비판했다. 즉, 경찰은 심문과정에서 피의자 Miranda에게 부당한 협박이나 압력을 加하지 않았으며, 多數의 의견은 피해자의 권리보다 오히려 加害者의 권리를 더 보호할여고 한다는 異見을 이들 小數는 내놓았다.

가해자로서 Miranda의 有罪에는 9명의 대법관 모두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차상의 문제로 Miranda는 석방되었다. 보수층의 반발은 거셌다. 南部 全域에서는 거리에 “Earl Warren을 탄핵하자”는 표어가 나붙었다. 그 자신 검사 시절을 보낸 Warren은 소수민족 피의자들이 부당하게 취급받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Warren을 비롯한 5명의 多數는 미국 內에서 法을 집행하는 모든 일선 경찰관들에게 피의자의 基本 權利도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大法院의 “Miranda 판결”은 일선 경찰들이 피의자를 다루는데 지켜야할 행동지침을 내려준 것이다. 만일 이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피의자는 有罪라도 Miranda와 같이 석방될 것이라는 경고다. 全國的으로 그 영향은 實로 엄청 났다.

John Marshall의 司法심사권

위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美 大法院의 막강한 힘은 司法審査권에서 나온다. 그러면 “사법심사권” 자체는 어디에서 緣由하는가. 美 헌법 어디에도 “사법심사권”에 대한 言及은 없다.

美 대법원의 司法심사권은 제4대 대법원장 John Marshall (1755-1835)에서 由來한다고 말할 수 있다. 1800년 대선에서 Jefferson에게 敗한 연방주의자 대통령 John Adams는 퇴임 바로 前인 1801년 초 그의 국무장관이며 강력한 聯邦主義자인 45세의 John Marshall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 후 34년간 Marshall은 美 역사에 최長期 대법원장으로 대법원의 權威와 權限뿐만 아니라 聯邦政府의 권한을 確立한 특이한 人物로 評價되고 있다. 법조인들에게 美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법원장을 뽑으라면 아마도 절대多數로 Marshall을 擇할 것이다.

1803년 “Marbury v. Madison”으로 불리는 소송件에서 대법원장 Marshall 은 그의 뛰어난 論理로 美 의회가 立法한 1789년의 “사법부 편제 法”의 一部를 違憲으로 판결함으로서 美 대법원의 “사법심사권”을 확립하게 된다. 이것이 美 의회가 제정한 法이 최초로 위헌판결을 받은 判例가 된다. 이 판결은 1800년 대선에서 패배한 연방주의자들과 승리한 Jefferson 政派 間에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소송에 관한 것으로 그 내용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며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Marbury 판결”의 역사적 意味와 重要性은 이 판결에서 “사법심사권”이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원래 制憲 당시 美 헌법은 상당부분 中央政府의 權限을 制限하는 조항들을 담고 있었지만, 미 헌법은 또한 중앙정부의 權限과 役割을 擴大해 나가는데 憲法적 근거와 정당성을 제공해준 基本 文書이기도하다. Marshall은 19세기 초반 34년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사법심사권”의 창의적인 활용으로 美 聯邦制하에서 제한된 중앙정부의 권한을 점차 확대 및 확립해 나가는데 決定的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의 代表的인 判例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자. 1819년 中央정부의 권한과 州정부의 권한이 충돌하는 소송件이 美 대법원으로 올라왔다 (McCulloch v. Maryland). 이 소송의 배경을 요약하면, 1816년 美 議會는 제2의 연방은행 설립허가에 관한 法을 制定 했으며, 이를 근거로 중앙정부는 Maryland州 Baltimore에 지점을 개설하게 된다. Maryland 州정부는 州 은행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연방은행에 세금을 부과했고, Baltimore 연방지점은 세금납부를 拒否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州 법원의 판결은 州정부의 세금부과 권한을 인정했다. 1819년 Baltimore 연방지점은 美 대법원에 上訴하게 된다.

미 헌법을 보면 중앙정부에 속하는 권한들이 열거돼있다. 이를 중앙정부에 “위임된 권한” (delegated powers)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美 헌법은 “중앙정부에 위임되지 않은 권한들은 州가 보유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은행 “설립인가”에 관한 권한을 美 議會 (중앙정부)에 “위임”한 조항이나 문구는 美 헌법에 나와 있지 않다. 故로 중앙정부는 州관할지역內에 중앙은행을 설립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Maryland 州정부의 論理이고 주장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리로 들린다. 이에 대한 Marshall 대법원장의 논리는 달랐다. 물론 미 헌법은 구체적으로 은행설립에 관한 권한을 중앙정부에 “위임”하지는 않았음을 Marshall은 인정한다. 그러나 美 헌법은 “州들 間의 통상규제”에 관한 권한을 美 의회에 “위임”하고 있고, 또한 통상규제권한을 포함 해서 기타 “위임된” 권한들을 수행하는데 “필요하고 적절한” (necessary and proper) 法을 美 議會가 제정할 수 있음을 美 헌법은 明示하고 있다고 대법원장 Marshall은 지적하고 想起시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논리로 판결을 내린다. 즉, 美 의회의 연방은행 설립허가 法은 위임된 권한에 속하지는 않지만 “위임된” 또는 “명시된” 중앙정부의 권한을 수행하는데 “필요하고 적절한” 法의 범위 內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 美 의회의 은행설립허가 法은 합헌이라는 판결을 Marshall 대법원은 내리게 된다.

美 憲法의 묘미는 상반되는 또는 달리 해석이 가능한 조항 또는 문구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소위 “건국의 조상”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필요하고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는 해석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정당한 法의 절차”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1819년 “McCulloch” 판결에서 Marshall 대법원장은 “위임된” 권한에 더하여 “내포된” 권한 (implied powers) 이라는 새로운 개념 또는 論理를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이 판결로 대법원장 Marshall은 州정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確固한 優位를 定立했다. 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美 헌법은 9명의 대법관의 해석에 따라 그리고 時代에 따라 그 意味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2006년 大法院: 展望

John Roberts 大法院長은 2005년 9월 Bush 대통령의 지명과 美 上院의 인준을 거쳐 10월초에 시작되는 대법원 會期에 맞추어 제 17대 대법원장에 취임했다. 2006년 6월 대법원장으로서 첫1년의 회기를 끝마친 셈이다. 아직 “Roberts 대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생소(生疎)한 感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많은 美 대통령의 취임선서를 그가 執行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Harvard 법대 졸업, 그가 승계한 Rehnquist 前 대법원장의 보좌관 (law clerk), 법무장관 특별 보좌관, Reagan 대통령 법률고문, 유수(有數)한 법률회사의 변호사, 법무부 고위직 검사, 연방 상소법원 판사를 거쳐 50세에 美 대법원장에 올랐다. 1801년 45세에 대법원장에 취임한 John Marshall 以來 最 年少 대법원장이다. 그가 21세기 美 대법원의 進路를 어떻게 어디로 이끌어갈 것인지 -- 뒷날 歷史는 아마도 Bush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이라크 모험이 실패하면) 50세의 Roberts 대법원장의 임명으로 평가할지도 모른다.

John Roberts는 원래 Bush 대통령이 年老한 Rehnquist 前 대법원장의 후임 재목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人物이었다. 그런데 첫 여성 대법관인 O'Connor 여사가 2005년 여름 은퇴 의사를 표명해 그 후임으로 Bush는 우선 Roberts를 지명했다. 그러던 중 Rehnquist 대법원장이 사망하게 되자 Bush는 Roberts를 후임 대법원장으로 다시 지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Bush 대통령은 O'Connor의 후임으로 10월초 그의 백악관 법률고문인 Miers 여사를 지명했으나 보수층과 공화당內의 반발에 부딪쳐 한 달 만에 지명을 철회했다. Bush는 그 자리에 제3연방 상소법원의 Samuel Alito 판사를 지명하게 되었다. Yale 법대 출신인 55세의 Alito 판사는 법조인으로서 훌륭한 경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보수 성향에 대한 민주당의 강한 반대가 있었으나 多數黨인 공화당의 절대적인 지지로 상원 인준을 통과, Alito는 2006년 2월 제110代 대법관으로 취임했다. 이렇게 해서 Bush 대통령은 4개월 간격으로 2명의 보수성향 대법관을 임명한 셈이다. Roberts 신임 대법원장과 Alito 대법관의 임명으로 대법원內의 보수/진보의 균형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잠시 뒤로 미루고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과 상원의 인준에 관해서 이야기 해보는 것도 大法院과 美정치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美 연방정부의 사법부 體系는 기본적으로 97개의 지방법원 (District Court), 11개의 상소법원 (Court of Appeals), 그리고 하나의 대법원으로 구성돼있다. 9명의 대법관을 포함해 모든 연방법원 판사는 美 上院의 인준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州의 경우에는 대부분 선거에 의해서 판사를 선출한다.) 대통령의 임명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임명은 물론 대법관이다. 그래서 통상 지명된 대법관은 上院 법사위원회에서 철저한 검증을 받게 된다. 새 임명이 대법원의 기존의 이념적 균형에 변수(變數)로 작용할수록 지명자에 대한 양당間의 공방은 그만큼 치열해진다. 건국 以來 美 歷代대통령이 대법관 후보로 지명한 수는 150명이 넘는다. 그중 상원의 동의를 얻지 못해 임명에 실패한 경우도 30건 가까이 된다. 대법관 임명이 상원에서 부결된 최근의 例가 1987년 Reagan 대통령이 지명한 Robert Bork의 경우가 된다. Bork의 경우는 지명자의 “이념적 성향” 때문에 상원에서 부결된 대표적 例라 할 수 있다.

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1981년 취임한 Reagan은 “Warren 대법원”의 소위 “진보적 司法 行動主義”를 비판하면서 보수 대법관을 임명하겠다고 약속한다. 재임 8년간 Reagan 대통령은 3명의 대법관을 임명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 당시 美 상원의 多數黨은 민주당이었다. Reagan의 첫 번째 임명은 1981년 최초의 女性 대법관으로 Sandra Day O'Connor를 지명한다. 상원의 민주당이 이를 거부할 수 없음을 Reagan은 잘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기회는 1986년 年老한 Burger 대법원장의 은퇴로 주어졌다. Reagan은 상원의 동의를 거쳐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보수 Rehnquist 대법관 (1972년 임명되었음)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고, 그 자리에 Antonin Scalia 연방 상소법원 판사를 상원의 인준을 거쳐 임명한다. Scalia는 현재 대법원의 보수를 대표하는 理論家다.

문제는 1987년 Reagan의 세 번째 임명에서 터졌다. 80세의 Lewis Powell 대법관이 은퇴 의사를 표명했다. Powell은 1972년 Nixon이 임명한 중도 보수로서 73년의 “낙태 합법화” 판결과 그 후 “affirmative action' (소수민족 지위향상) 관련 문제(issue)에서 진보 측의 5대 4 판결에 결정적인 ”swing vote' 역할을 해왔다. Powell은 보수이면서 중요한 판결에서 종종 진보와도 연합했다. 이 자리에 Reagan 대통령은 보수 중에 보수라 할 수 있는 연방 상소법원판사인 Robert Bork를 후임으로 지명한 것이다. Bork는 “Watergate”사건으로 1973년 Nixon 대통령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법무부 서열 세 번째인 “Solicitor General”의 職에 있었다. Bork는 그 당시 “Watergate” 사건과 관련해서 백악관의 관련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Archibald Cox 특별검사를 해고시킨 장본인으로도 유명하다. Bork는 논리와 소신이 뚜렷한 보수다. 헌법학자로서 또한 법조인으로서 그의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때때로 진보에 합세했던 중도 보수 Powell을 민주당이 극우 보수인 Bork로 대치할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여성단체 (다시 “낙태 불법화”를 우려) 와 흑인민권단체에서 조직적인 Bork임명 반대운동을 펼쳤다. 12일間의 상원法司 委 청문회 그리고 4개월간의 全國的인 토론 끝에 Bork의 임명은 58:42로 上院에서 부결됐다. 그때 그가 임명되었다면 오늘날 대법원 판결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으리라 본다.

Bork의 임명이 否決되고 나서 Reagan은 또 다른 연방 상소법원판사인 보수성향의 Anthony Kennedy를 지명, 긴 “Bork 전투”의 뒤라서 그런지 쉽게 상원의 인준을 받는다. Kennedy는 Bork의 부결로 대법관에 오르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한동안 조용한 보수로 지내더니 근년에 와서 보수 동료대법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지난 2003년 Kennedy는 4명의 진보와 합세 5:4의 판결에서 Gay(동성연애자)들의 인권보호와 관련 그들의 성적 행위도 私生活이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多數意見을 내놓아 주위의 보수를 황당하게 했다. Alito가 승계한 여성 대법관 O'Connor도 마지막 수년간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결정적인 “swing vote” 역할을 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issue”인 “affirmative action”과 관련된 판결에서 O'Connor는 진보와 합세 흑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 대한 혜택은 미국사회의 “다양성(多樣性)”을 위해 필요하고 또한 합법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한때는 이를 두고 “O'Connor 대법원”이라는 별칭까지 나왔다. 오늘날 Reagan 대통령이 살아 있다면 Eisenhower가 Warren에게 그랬듯이 O'Connor와 Kennedy에게 속았다고 할 것이다.


美 대법원 대법관 구성 (2006년 현재)

임명연도 출생연도 종교
John G. Roberts 2005 1955 (Ind.) Catholic
(Chief Justice)
John Paul Stevens 1975 1920 (Ill.) Protestant
Antonin Scalia 1986 1936 (N.J.) Catholic
Anthony M. Kennedy 1988 1936 (CA) Catholic
David Souter 1990 1939 (MA) Episcopal
Clarence Thomas 1991 1948 (GA) Catholic
Ruth Bader Ginsburg 1993 1933 (N.Y.) Jewish
Stephen G. Breyer 1994 1938 (CA) (해당 없음)
Samuel A. Alito, Jr. 2006 1950 (N.J.) Catholic


2005년 9월 John Roberts 신임 대법원장의 상원인준 표결은 78대 22로 압도적 찬성이었는데 反해, 2006년 2월 Alito 대법관 임명의 경우에는 58대 42로 공화당은 95% 찬성 민주당은 90% 반대로 정당별로 표가 완전히 갈렸다. 공화당이 多數黨이 아니었더라면 Alito의 임명은 부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Roberts의 경우 민주당 상원의원의 半인 22명이 공화당과 함께 찬성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났을까? 두 사람은 모두 믿을 수 있는 보수라고 볼 수 있다. 上院 표결에서 두 사람의 현저한 차이는 소위 “Bork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보수 Roberts는 보수인 Rehnquist를 승계한 것이고, 확실한 보수 Alito는 때때로 진보와 연합한 중도보수 O'Connor를 승계했기 때문이다. 즉, Roberts의 임명은 기존의 진보/보수 균형에 상관이 없지만, Alito의 임명은 그 균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민주당 지도부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의 表에서 現 대법원의 구성을 보면 (임명年度에서 알 수 있듯이), 9명의 대법관 中 Ginsburg와 Breyer를 除하고는 7명 모두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의 보수와 진보의 비율은 7:2도, 6:3도 또한 5:4도 아니다. Clinton 대통령이 임명한 Ginsburg (두 번째 여성 대법관) 와 Bryer는 확실한 진보이고, 공화당 Ford 대통령이 1975년에 임명한 Stevens 대법관은 이미 오래前부터 대법원 판결에서 진보 쪽이다. 1990년 “아버지 Bush” 대통령이 임명한 Souter는 마치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처럼 처음부터 진보색채를 드러냈다. 이렇게 보면 대법원 판결에서 믿을 수 있는 진보에는 4명이 있는 셈이다. 현재 (2006) 믿을 수 있는 보수는 Roberts, Scalia, Thomas (두 번째 흑인 대법관), 그리고 신임 Alito를 포함해 4명이다. Scalia와 Thomas는 임명된 이래 판결에서 한번도 보수를 이탈한 적이 없다. Roberts와 Alito의 경우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지나온 과정을 보면 보수를 이탈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 쌍방의 열쇠는 Anthony Kennedy가 쥐고 있다. Kennedy의 연방 상소법원 시절의 판결기록을 보면 보수성향이다. 물론 그래서 Reagan이 임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그는 O'Connor의 뒤를 이어 대법원內 이른바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自處하고 나선 것 같다. Kennedy는 “균형자”로서 그의 영향력을 즐기고 있는 듯 하다. 지난 2006년 6월 Kennedy의 “영향력”이 극적으로 드러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의 최소 多數가 Guantanamo에 수감 중인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Bush 대통령의 “특별군사재판”은 대통령 권한의 한계를 넘은 것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테러용의자들의 人權이 國家安保에 앞선 판결이라고 Bush는 불만이다. 美 의회의 승인 없이 Bush 행정부는 Guantanamo에서 특별군사 재판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판결문을 선임대법관 Stevens가 바로 옆에 흐뭇하게 앉아있는 Kennedy를 보면서 읽어 내려갔다. Kennedy가 4명의 진보 측에 합세, 2001년 “9-11”이후 Bush의 테러정책이 처음으로 헌법적 참패를 당하는 순간이었다. 진보는 이 판결을 환호했고, 보수는 Kennedy의 변신을 한탄했다. Gay 등의 인권문제에서는 Kennedy는 계속 진보와 연합할 것으로 본다. 사형제도 등 형사문제와 관련해서 Kennedy는 보수와 궤를 같이할 가능성이 높다. 당분간 Kennedy의 “swing vote” 가 계속될 전망이다.
앞으로 은퇴할 대법관은 Stevens 外에는 당분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건강문제가 특별히 없는 한 대법관들은 통산 80세를 넘긴다. Stevens는 현재 (2006) 86세다. Bush 대통령의 임기는 2008년 末 까지다. Stevens 대법관이 그 以前에 은퇴를 하게 되면 Bush는 확실한 보수로 “떠나는” 진보를 대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럴 경우 대법원 구도는 최소한 5:4로 보수가 확고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면 낙태 (abortion)가 불법으로, 'affirmative action' (소수민족 지위향상) 프로그램도 불법으로 번복될 가능성을 보수는 기대할 것이다. 현재 보수가 우려하고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2009년 민주당 대통령에게 Stevens 대법관이 후임을 임명할 기회를 주는 것이 될 것이다. 反面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Roberts 대법원”의 보수 구도가 정착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美 大法院의 역할과 美國 民主主義

1969년 Nixon 대통령은 제15대 Burger 대법원장을 임명하면서 대법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역사적인 評價를 했다: 지난 200년간 歷代 대통령과 歷代 대법원장을 각각 하나로 묶어 비교한다면 後者가 前者보다 美國社會에 끼친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좀 과장된 비교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미국사회에 있어 大法院의 역할과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적절히 표현했다고 본다.

앞에서 우리는 美 大法院의 실제 判例들을 통해서 대법원이 美國社會와 美 국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어떻게 주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왜 民主主義 나라에서 9명의 無期 限 任命직 대법관이 이 같이 큰 역할을 해야 하는가? 국민의 대표기구인 美 議會가 아니고 9명의 또는 5명의 대법관이 나라의 인종관계, 국민투표권, 형사상의 절차문제, 낙태문제, 사회도덕성의 문제 등을 개혁하고 결정하는 것이 과연 적합하고 옳은 일인가? 美 大法院은 “사법심사권”을 통해서, 즉 헌법의 최종해석자로서, 결과적으로 미국의 政策을 立案하고 立法 機能까지 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같은 대법원의 역할과 기능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미국의 獨特한 현상이다.

모든 민주주의가 그렇듯이 미국 民主主義의 정치과정에서도 “완전한” 또는 “순수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選擧” 민주주의와 社會正義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Gideon”과 “Miranda” 판결에서 Warren 대법원은 정치적 힘이나 목소리가 없는 弱者의 편에 섰다. 정치적인 이유로 美 의회가 손발이 묶여있을 때 대법원이 “initiative”를 취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1954년 “Warren 대법원”은 “Brown 판결”을 통해 미국사회의 인종문제에 대한 개혁을 先導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자의 권리와 사회문제에 있어 “Warren 대법원”의 적극적인 司法的 關與를 비판자들은 “사법적 제국주의”라고 비난했다. 이 같은 대법원의 역할과 기능이 非 民主主義的이라면 美 大法院은 逆說的으로 “民主主義的 價値와 理想”을 촉진하고 실현하는 “非 民主主義的” 制度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법원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美 대법원이 일방적으로 美 社會를 변화 또는 개혁시킬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대법원의 오만이고 無知가 될 것이다. 9명의 대법관은 法服을 입고 超然한 자세로 法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그 판결의 정치적 사회적 결과는 불가피하다. 때로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이를 이들 대법관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적 사회적 결과를 계산하고 판결을 내릴 때도 있다. “司法審査”를 통해서 大法院은 法的 決定보다는 “政治的” 決定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9명의 대법관은 法服을 입은 상원 의원이고, 대통령이고, 기업인이고, 농부이고, 노동자이고, 학부모이고, 피의자이고 또한 판사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9명의 대법관은 각자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과 여론의 방향을 注視한다. 시대와 사회에 지나치게 앞선 판결도 또한 반대로 시대와 사회의 흐름에 뒤진 판결도 대법원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여론을 잘못 판단했을 때 대법원은 效力을 잃게 된다. 1954년 “Brown 판결”에서 Warren 대법원장은 시대의 흐름과 여론을 제대로 읽고 있었다. 이미 北部 美國社會에서는 南部의 인종분리정책과 “Jim Crow” 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었다. 戰後 인종분리 문제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南部의 정치권이 움직일 수 없을 때 대법원이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857년 “Taney 대법원”은 “Dred Scot 소송”에서 “흑인은 美國市民이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림으로서 南北戰爭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다.

美 대법원의 “司法審査권”의 限界와 개개별 판결에 대한 논란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18세기 末에 만들어진 헌법을 20세기를 지나 21세기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늘 남아있고 여기에는 異見이 있을 수밖에 없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美 헌법을 立案했을 때는 노동조합, 주식시장, 낙태, 복지국가, 심지어는 개인소득세의 개념도 없었다. 또한 그 당시 人權의 기준과 개념이 오늘과 같을 수 없다. 美 憲法 改訂 제8조는 형사범에 대한 “cruel and unusual”한 처벌을 禁하고 있다. 무엇이 “cruel and unusual”한 것인지 사형제도와 관련해서 지금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그래서 대법원의 판결에는 항상 찬반이 있다. 그럼에도 대법원의 판결은 意外로 잘 지켜지고 있다.

法을 바꾸려는 사회적 힘과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法의 힘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美 大法院은 시대의 흐름과 사회여론을 따르면서 또한 同時에 이를 先導해 나아갈 수도 있다. 法을 바꾸려는 사회적 힘의 진공 상태에서 대법원이 일방적으로 사법심사권을 발동해 法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무모한 짓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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