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권 민심은 완전히 떠났다!"

노무현 고발 407명 서명 받아 온 한 老兵
◎생명을 바쳐 일궈 온 나라, 또 다시 생명을 바치겠다는 고백 앞에 어린 나는 작고 작게만 느껴졌다. 피로 지키고, 땀으로 일궈 온 조국을 누리고만 살아온 우리는 저들 위대한 세대에게 모두 빚진 자들이었다.
28일 오후 국민행동본부(國本) 사무실에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6·25참전용사인 金모씨(77세)는 國本이 전개하고 있는 「대통령 노무현 고발장」에 서명한 명단을 수북이 들고 있었다. 서명인원은 총 407명.

이 서명지에는 20대 젊은이에서 80대 노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사람 할 것 없이 고루 참여해 있었다. 그야말로 男女老少가 망라된 것이다.

『서명지를 내밀면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경제는 망쳐놓고, 김정일만 돕고 있으니 국민들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여론은 이미 돌아섰어요. 민심은 끓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국민을 계속 속이고, 사기 치지만 이젠 안 통합니다. 국민들이 더 잘 알고 있어요.』

「민심이반」은 5·31지방선거에서만 확인된 것이 아니었다. 金옹은 아파트단지, 동네 헬스장, 지하철까지 돌아다니며 무작위로 서명을 부탁했지만, 거절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몇 장씩 가져가는 사람들, 가족들 서명까지 받아다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400명 넘게 서명을 받아왔지만 뒤로 빼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았습니다. 약간 멈칫거리는 사람도 설명을 해주면 흔쾌히 서명을 해주더군요.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을 한 명 만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이 정상이고 다른 의견도 존중해야죠. 귀하가 반대하는 것도 민주주의 아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어쨌든 이런 사람도 있어야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 아니겠어요?』

金옹의 서명지에는 20대 젊은이들도 10여 명에 달했다. 그는 청년들에게 『너희들이 일자리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줬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지난 번 선거 땐 찍어 볼만 했는데 저 X 있는 동안은 되는 일이 없다』며 서명을 해줬다고 한다.

『대통령 취임할 때 헌법과 국가를 수호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취임 이래 헌법을 밥 먹듯 안 지키지 않아요? 자기들 마음에 안 드는 법은 안 지켜도 된다 하니 누가, 어느 국민이 법을 지키겠어요? 그러니 평택은 무법천지가 되는 것 아닙니까?
진보세력이라지만 이 나라에 진보세력이 있습니까? 김정일·김일성이를 신봉하는 광신도들이지. 사이비종교 신자들이야. 진정한 진보면 북한서 벌어지는 끔찍한 독재를 보고서도 왜 한마디 말이 없습니까? 신부·승려·목사 이런 사람들까지 북한만 갔다 오면 왜 한 마디 비판을 못해요?』

『민심이 완전히 떠났다』고 말하는 金옹은 대선을 앞두고 盧대통령과 김정일이 평화체제(平和體制)와 같은 야합을 시도한다 해도 국민들이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국민적 각성이 확산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체험적 反共세대인 金옹은 6·25 참전용사이다. 그는 6·25발발 6일 전인 50년 6월19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달 28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서울포격이 작렬해지자, 친구들과 함께 헤엄을 쳐 한강을 건넜다. 인근에 있던 사람까지 20여 명이 강물에 뛰어들었지만 살아난 사람은 절반. 몇몇은 포탄에 맞아, 또 몇몇은 물살에 쓸려 목숨을 잃었다. 부산에 도착해 부두노동자 등으로 연명하다 9월 중순 연락장교(통역장교) 4기생으로 軍에 입대했다. 金씨는 10월3일 소위로 임관한 뒤 韓美연합군 특공대로 배치돼 최초로 평양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탱크 5대, 美軍1개 분대, 國軍1개 분대 그리고 저는 통역장교로 참가했죠. 우리 임무는 주력군이 진군하기에 앞서 상황을 정찰하고, 문서를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50년 10월11일 오후 대동강 남쪽으로 진격해서 노동신문 사옥에서 하룻밤을 보냈죠. 이튿날 새벽 김일성 관저를 경호하던 인민군을 생포해 「이틀 전 인민군들이 모두 퇴각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곤 평양형무소로 향했습니다.』

평양형무소에는 참혹한 장면이 벌어져 있었다. 서울에서 소위 「소개(疏開)작전」으로 끌려온 남한 인사들이 사살돼 널 부러져있는 것이었다. 당시 시신들은 800여 구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대부분이 눈가리개도 하지 않은 채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그야말로 도륙돼 있었다.

통역장교로 참전한 金옹은 1·4후퇴로 대구본부에 내려온 후 이듬해 2월 英연방27여단 소속 캐나다대대 수색대 연락장교로 파견됐다.

『외국군에겐 총이나 보급품을 지급해주지 않아 처음 몇 달은 몽둥이를 들고 수색을 나갔습니다. 비가와도 판초를 안 주니 쫄딱 맞아야 했죠. 그러다 연대창설 기념파티를 하는 날 헬멧에 위스키를 가득 채워 폭탄주를 돌려 마시곤 서로 친해졌죠. 그제 서야 총도 받고 보급품에 짚 차까지 몰 수 있게 됐습니다』

전쟁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6·25당시 통역장교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전쟁이 나자 대학생을 통역장교로 선발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은 영어가 서툴렀고 「치명적」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통역을 잘못해 적군(敵軍) 진지가 아닌 아군(我軍) 진지에 포격을 유도해 즉결처분을 받는 장교가 나올 정도였다.

대학교 1학년 입학을 하자마자 입대한 金옹은 역시 전쟁터에서 콘사이스를 들고 다니며 영어를 익혀야 했다. 캐나다軍과 함께 주둔할 때는 캐나다 종군기자와 밤마다 위스키를 마시며 영어를 배우기기도 했다. 그러나 6·25는 수만 명의 영어권(英語圈) 동지들을 가진 수천 명의 영어 능통자를 키워냈고, 이들은 이후 韓美血盟 아래 근대화의 주역들로 활약하게 된다. 캐나다의 6·25전사(戰史)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기록돼 있는 金옹 역시 5년8개월의 軍 생활을 마치고 복학한 뒤 세계 각국과 무역을 하는 사업가로 성공했다.

『전쟁이라지만 좌익의 만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동족을 기습남침하고, 개·돼지처럼 학살한 것이 6·25때 김일성이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요즘 같은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는 것인데...그러나 우리 같은 참전용사들은 조국에 이미 한번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대한민국이 적화돼 망하느냐 마느냐 하는 위기에서 이미 한번 바친 목숨 또 한 번 바칠 생각입니다』

이야기가 끝이 나자, 그는 『우리가 걸어온 길을 시끄러운 소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명을 바쳐 일궈 온 나라, 또 다시 생명을 바치겠다는 고백 앞에 어린 나는 작고 작게만 느껴졌다. 피로 지키고, 땀으로 일궈 온 조국을 누리고만 살아온 우리는 저들 위대한 세대에게 모두 빚진 자들이었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