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뮐러가 살아 있다.”-
1953년 소련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던 일단의 독일군 장병들이 귀국했다. 10여년 이상 동토의 땅에 갇혀 있다가 돌아온 이들은 일단 겔렌기관(나치 독일군 장성 출신인 라인하르트 겔렌이 만든 서독의 정보기관)으로 보내져 소련억류생활에 대해 진술해야 했다. 그들이 소련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사소한 일들도 종합하면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정보요원들은 몇몇 귀환 장병들로부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었다. 모스크바에서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비밀국가정치경찰) 총책이었던 하인리히 뮐러를 보았다는 얘기였다.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승기념식에서 독일군 포로들을 시가행진 시킬 때 소련군 대령 복장을 하고 소련 고관들과 함께 사열대에 서 있는 하인리히 뮐러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넓고 네모난 두상, 땅딸막한 몸매, 입가에 깊은 상처가 나 있는 창백한 얼굴-포로들이 보았다는 그 인물은 분명히 패전의 와중에 죽은 것으로 알려진 하인리히 뮐러였다.
하지만 어떻게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총책이 살아서, 그것도 소련의 고관들과 함께 전승기념식장의 사열대 위에 설 수 있다는 말인가?
독일 정보기관원들은 뮐러의 생존 소식을 일소에 부쳤다. 귀환포로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귀신’을 보았다는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그 후로도 뮐러가 살아 있다는 정보는 심심찮게 입수됐다. 알바니아 비밀경찰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그를 보았다거나, 그가 동독비밀경찰과 함께 일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1963년, 마침내 서독정부는 서베를린에 있는 뮐러의 묘지를 파헤쳤다. 무덤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무덤 속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의 유골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뮐러의 것은 없었다.
-‘게슈타포 뮐러’-
하인리히 뮐러는 1900년 독일 뮌헨에서 한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경찰에 입문해 타고난 성실함을 바탕으로 꾸준히 승진했다.
혼돈의 1920년대, 그는 신생 극우정당인 나치당에 대한 사찰을 담당했다. 나치당의 리더인 슈트라서 형제가 퇴역군인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라는 선동가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사람도 뮐러였다.
뮐러는 나치당원들은 ‘약간 맛이 간 작자들’ 로 평가했지만, 그들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뮐러는 독일 내에서 나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나치는 집권 후 즉각 경찰을 접수했다. 누가 봐도 지난 10여 년 동안 나치에 대한 사찰을 담당해 온 뮐러는 옷을 벗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뮐러는 친위대 보안국(SD) 국장이자 중앙보안청장(경찰청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 신설된 대공(對共)수사부서인 ‘반(反)소련과’의 책임자로 중용됐다.
과거 재야 시절 뮐러에게 시달렸던 고참 나치 당원들이 항의했지만, 하이드리히는 이를 무시했다. 하이드리히는 뮐러가 치밀하고 근면성실하며 ‘비(非)정치적'이어서 누가 정권을 잡든 충성을 다하는 전형적인 ‘독일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뮐러는 하이드리히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 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 소련 간첩망을 가차 없이 분쇄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뮐러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 총책으로 고속승진했다. 이후 그는 ‘게슈타포 뮐러’라는 이름으로 악명을 떨쳤다.
라인하르트의 후임 SD책임자인 발터 셸렌베르크는 뮐러를 좋아하지 않았다. 열렬한 나치주의자였던 셸렌베르크가 보기에 뮐러 같은 ‘비정치적'인 인물은 상황이 바뀌면 얼마든지 다른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자였다.
뮐러가 처리한 몇 가지 소련 간첩 사건에서도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게슈타포 본부에서 소련측으로 보내는 알 수 없는 전파가 포착된 적도 있었다.
셸렌베르크는 “패전을 예감한 뮐러가 조국을 배반하고 소련에 붙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가 뮐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려 할 즈음,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뮐러는 사라졌다. 1945년 4월29일 히틀러의 지하벙커에서 그를 본 사람이 있었지만, 이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히틀러의 다른 측근들처럼 그도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려다가 소련군에게 사살된 후, 베를린의 시립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63년 뮐러의 묘를 파헤쳤을 때, 그의 시신은 거기에 없었다.
뮐러는 정말 제2차세계대전 말기, 나치 비밀경찰 총책 신분으로 적국과 비밀 거래를 해 목숨을 건졌고, 이후 소련-동구 공산정권들을 위해 복무했을까?
'나치를 사찰하던 자가 나치 정권 아래서 고속 출세해 비밀경찰 총책이 되고, 공산주의자들을 분쇄하던 자가 공산정권의 비밀경찰 고문이 되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민주적인 바이마르공화국, 나치 독일, 그리고 공산정권이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세 개의 정권에게 충성을 한 것이 된다.
소련-동구 붕괴 이후에도 뮐러에 관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아마 ‘게슈타포 뮐러’의 비밀은 세계첩보전사에 영원한 미궁(迷宮)으로 남을 것이다.
-김만복 신임 국정원장-
신임 국정원장에 김만복 국정원 1차장이 임명됐다.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첫 공채 출신 국정원장이다.
'서울법대 졸업. 1974년 중앙정보부 입부(入部), NSC정보관리실장(1급), 국정원 기조실장, 동(同) 제1차장 역임.'
김만복 신임 원장의 이력이다. 그가 박정희 시절 정보맨으로 출발해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국정원장 자리에 오르는 동안,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일대 숙정을 겪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 살아남아 마침내 정보 수장(首長) 자리에 올랐으니, 능력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에게는 ‘이종석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그는 2002년 세종연구소에서 연수과정을 밟으면서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던 이종석과 친분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고속 승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내에서는 현 정권과 ‘코드’를 맞추면서 김승규 전 원장의 간첩수사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김승규 전 원장도 그의 원장 임명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지금 김만복 신임 원장의 앞에는 김승규 전 원장이 남겨 놓은 ‘386간첩단 사건’이라는 엄청난 숙제가 남겨져 있다. 국회상임위원장을 지낸 여당 의원이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아찔한 얘기다. 국민들이 국정원의 간첩 수사에 전에 없는 관심과 성원을 기울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간첩단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에 따라 국정원의 운명, 더 나아가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
이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파헤칠 경우, 김만복 원장은 전임 김승규 원장의 뒤를 이어 '국민의 국정원장'으로 두고두고 추앙받을 것이다.
반면에 만에 하나라도 김만복 신임 원장이 ‘386간첩단 사건’을 유야무야할 경우, 그는 '절조 없는 출세주의자'로 낙인찍히면서, 이런 별명이 따라 붙을 지도 모른다.
‘한국의 하인리히 뮐러’라고.....
사라진 게슈타포 총책과 김만복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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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1-02, 13: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