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님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정치 대신 애국운동에 백의종군 하시길....
-이회창 대망론-
어제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의 부친상에 문상을 오셨다더군요.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어, 이총재다!”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고개를 돌렸을 때 총재님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어제 신대표 부친의 빈소에는 비단 뉴라이트계열 인사들뿐 아니라 흔히 ‘보수우익’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 적지 않게 다녀갔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모습을 보였더군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 등 대권주자들이 보낸 화환도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가 보기엔 모두 ‘현역’들이었습니다. ‘현역’정치인, ‘현역’ 뉴라이트운동가, ‘현역’ 정통보수운동가 등등.....
그런 ‘현역’들 사이에 ‘퇴역’정치인인 이총재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뜻밖이었습니다. 총재님께서는 정계에 계실 때에는 물론이고, 200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신 후에도 신지호 대표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총재님께서 신대표 부친의 빈소에 모습을 나타내셨으니, 모두들 “이총재가 여기 나타나다니 무슨 일일까?”하고 궁금해 하더군요.
하긴 어제 총재님의 등장이 전혀 ‘뜻밖’은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근래 총재님께서 언론 인터뷰나 특강에 자주 모습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회창 대망론(待望論)’도 솔솔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재님과의 첫 만남-
문득 총재님을 처음 뵈었을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법대 신입생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헌법상 비상조치나 계엄령 등에 관심이 많아, 그에 대한 논문이나 판례들을 열심히 찾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세칭 '박세경 변호사 사건’ 판결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헌법에는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는 것은 비상계엄이 선포된 경우로 한정되어 있는데, 계엄법에는 비상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한 달에 한해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된 사례였습니다.
다수의 대법원 판사들은 위의 계엄법 규정에 대해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민간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기본권의 본질적인 침해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합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한데 소수 의견 가운데 하나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의견은 이랬습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두 달이라는 기간은 여하하여, 석 달이라는 기간은 여하한가? 기간의 장단으로 기본권의 침해를 논할 바는 아니라 할 것이다.”
그 소수의견을 접하는 순간 저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명쾌한 논리, 기본권에 대한 투철한 신념...
저는 “바로 이런 사람이 진정한 민주주의자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군사독재타도’를 외치면서도 학내에서 또 다른 독재체제를 만들어가고 있던 운동권, 말로는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권위주의 정권 못지않은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던 양김씨에게 식상해 있던 제게 그 소수의견을 쓴 판사는 ‘참된 민주주의의 전범(典範)’이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때 그 소수의견의 주인공이 바로 대법원 판사 시절의 이회창 총재님이셨습니다.
총재님은 모르시겠지만, 그것이 제게는 총재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총재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감사원장, 국무총리, 대권 후보-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총재님께서 감사원장으로 발탁되셨을 때, 저는 “정말 잘 된 인사다”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총재님께서 감사원장으로 구악(舊惡)에 메스를 들이댈 때도 저는 진심어린 응원을 보냈습니다.
YS가 총재님을 국무총리로 발탁했을 때, 저는 내심 ‘이건 아닌데...’싶었습니다. ‘대쪽같은 감사원장 이회창을 부담스럽게 여긴 정권 핵심그룹이 일단 이회창 감사원장을 국무총리로 영전시켰다가 내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 우려가 꼭 들어맞은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 이총재님의 총리 시절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국무총리의 헌법적 권한을 두고 대통령과 다투다가 사임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총재님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총재님께서는 1997년 한나라당의 대권 후보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기뻤습니다. “총재님 같은 분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정말 반듯한 나라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강연에서 총재님을 뵙고 사인을 받은 적도 있었죠.
하지만 총재님은 1997년 대선에서 아쉽게도 낙선하셨습니다. IMF사태로 인한 공황 상태 속에서 국민들은 그런 사태를 야기한 YS의 후계세력으로 지목된 한나라당 후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제의 탈당, DJ와 JP의 야합도 문제였지만,총재님의 하자(瑕疵)도 큰 원인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병역면탈- 총재님 댁 남자들의 내력이 그렇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군대에 갔다 왔거나 자식을 군대에 보낸 많은 국민들은 그걸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만이라도 방위로라도 군복무를 했다면...’하는 생각에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좌표를 잃었던 2002년 대선-
그리고, 김대중 정권 5년. 총재님께서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을 이끄셨습니다. 난생 처음 정권을 놓쳐 금방이라도 지리멸렬할 것 같던 한나라당은 총재님의 리더십 아래서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원내 제1당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총재님은 5년간 한나라당을 잘 ‘관리’했지만,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정치를 펼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2000년 김대중이 김정일과 만나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파괴하고 연방제로 가는 길을 연 6-15공동선언에 합의하고 돌아왔을 때, 총재님께서는 그에 대해 반대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고작해야 '총론 찬성, 각론 반대' 수준의 비판 정도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총재님께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총재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좌익들이 효순이-미선이 교통사고를 빌미로 반미 촛불시위를 벌였을 때, 거기에 얼굴을 내민 총재님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실망했는지 아십니까?
거기다가 유세 기간 중 젊은이들의 마음을 끌어보겠다고 노구를 이끌고 무대 위에서 안 되는 춤까지 추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정말 서글프더군요.
그때 이미 총재님은 제가 알던 ‘대쪽 이회창’이 아니었습니다. ‘이념적 좌표를 잃은 이회창’의 모습은 많은 애국시민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동생들에게 “이회창 후보를 찍으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노무현이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2002년12월19일 투표장에 가서는 주저 없이 ‘기호 1번 이회창’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또 졌습니다. 시내에서 광란의 축제를 즐기는 노사모들을 보다가 술을 잔뜩 마시고 집으로 들어와 쓰러졌습니다. 다음날 TV에서 총재님의 정계은퇴선언을 보고 난 후, 거의 석 달 가까이 TV를 켜지 않았습니다.
‘이 놈의 세월이 언제 가나’ 싶어 달력을 보면, 그 빌어먹을 노무현은 아직 대통령 취임식도 안 했더군요.
-그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래도 세월은 흐르네요. 여론조사기관들이 날이면 날마다 후보지지율 조사결과를 발표하는 것을 보니, 대선이 다가오긴 다가온 모양입니다.
2002년 대선부터 4년여,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2003년, 노무현 취임 전부터 서울시청앞에서는 애국시민들이 모여 “한미동맹강화”를 외쳐댔습니다. 그해 3-1절 국민대회나 6-25 국민대회, 2004년 10월 국가보안법폐지반대 국민대회는, 이 나라 애국시민들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 장거였습니다.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었지만,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애국시민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리로 나와 노무현 정권과 싸웠습니다. 노무현 탄핵을 위해, 수도이전 반대를 위해, 북한인권을 위해, 연방제 사변 저지를 위해,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를 위해....
2002년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총재님의 열혈 지지자들도 ‘개표기 컴퓨터 조작’의혹을 제기하며 법정에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총재님!
그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총재님 지지자들이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개표기 조작 의혹’을 고발하는 전단지를 돌리고, 서초동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를 적에,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들이 옥인동 이총재님 댁 앞으로 몰려가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외칠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총재님과 비슷한 연세의 노인들이 한미동맹이 깨질까봐 꽃샘추위 맞아가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 때, 8월의 땡볕 아래서 '애국가'와 '전우가'를 목 놓아 부를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찬바람 부는 2004년 늦가을,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노인들이, 노무현 정권의 주구가 된 경찰들이 쏘는 물대포에 맞아 쓰러질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노무현 탄핵!'을 외치는 애국청년들이 국회 앞에서, 헌법재판소 앞에서, 노사모 패거리들과 몸싸움을 벌일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지난 여름, '노무현의 한미동맹 파괴를 막아야 한다'며 애국집회 참석차 상경했던 재향군인회 소속 노인이 나라 걱정에 거리에서 쓰러져 숨을 놓을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젊은 애국 청년들과 예비역 해병대원들이 맥아더 동상을 지키겠다고 빨갱이들과 피흘려 가며 육박전을 벌일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애국청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칼을 갈고 있을 때, 전향한 옛 운동권들이 ‘뉴라이트’의 깃발을 올릴 때, 총재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어디 계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왜, 무엇을 바라고, 지금 얼굴을 여기 저기 내미시는 것입니까?
또 다시 후보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킹 메이커라도 되고 싶으십니까?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나라 국민 누구보다도 먼저 ‘창빠’가 되었던 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지금은 총재님이 나설 때가 아닙니다.
총재님께서 지난 4년 동안, 애국시민들의 싸움터에 나타나, “내가 잘못해서 나라가 이렇게 됐다. 하지만 그런 죄인이기에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이렇게 나왔다. 애국운동에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면서 백의종군의 자세로 좌익들과 싸워왔다면, 하다못해 총재님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렸던 노무현 무리들의 사기성을 고발하는 투쟁이라도 해오셨다면, 저도 이런 모진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총재님은 지난 4년 동안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두 번이나 대선에서 패배해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나라를 나락으로 몰아넣었으면서도, 지난 4년 동안 무위(無爲)의 세월을 보내셨던 분이, 무슨 면목으로, 무엇을 기대하며 옥인동 집에서 나오셨습니까?
두 번 심판을 받으셨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십니까?
이번에 나서면 두 아드님의 병역문제가 다시 안 나온다는 보장 있습니까?
한나라당이 ‘차떼기당’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총재님이 다시 대선 주자로 나선다면, 그 소리가 안 나오겠습니까? 적들은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총재님이 옥인동 집에 칩거해 있던 4년 동안, 새로운 리더십들이 성장했습니다.
‘청계천’으로 상징되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국민들에게 역동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4년 '탄핵 역풍'으로 난파 직전에 놓였던 한나라당을 구했고,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나라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지사 재임 중 활발한 외자유치와 건실한 행정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김문수 경기지사, 김태호 경남지사 등도 한나라당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총재님이 설 자리는 이제 없습니다. 적어도 정치권에는 없습니다.
-정치 대신 애국운동에 투신하십시오-
그렇다고 총재님의 역할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총재님을 기다리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애국운동진영입니다.
마침 ‘한미연합사해체반대 1000만인 서명운동본부’ 고문을 맡고 계시더군요. 고마운 일입니다.
지금 애국운동진영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애국시민들을 하나로 모을 만한 어른이 없습니다.
그곳 애국운동진영으로 가십시오. 거기서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백범 선생과 같은 마음으로 백의종군하십시오.
두 번이나 대선에 나섰고, 내년 대선을 앞두고 주목 받고 있는 어른께서 그렇게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오늘을 사는 국민들에게는 물론이고, 후세에 두고 두고 귀감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총재님께서 두 번의 대선 패배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국가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던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길도 될 것입니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에 유의하시길 빕니다.
2006.11.21
강철군화 올림
이회창 총재님께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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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1-21, 1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