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東元 씨는 우리 시대를 산 또 한 명의 ‘風雲兒’였다

한국의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당시)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당시) 사이에 이루어진 ‘김-오히라 메모’로 돌파구가 마련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피나레는 한국에서는 국회 안팎에서 파도친 격렬한 반대 시위 때문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피나레의 주역은 이동원 외무장관(당시)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또 한 사람의 시대의 ‘풍운아(風雲兒)’였다.
李東元 씨는 우리 시대를 산 또 한 명의 ‘風雲兒’였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공화당 정부의 외무장관으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을 마무리한 주역이었던 이동원(李東元) 씨가 타계(他界)했다. 한국의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당시)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당시) 사이에 이루어진 ‘김-오히라 메모’로 돌파구가 마련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의 피나레는 한국에서는 국회 안팎에서 파도친 격렬한 반대 시위 때문에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피나레의 주역은 이동원 외무장관(당시)이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또 한 사람의 시대의 ‘풍운아(風雲兒)’였다.

대한민국의 ‘오늘’은 화려하다. 2004년도 자료로 본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 11위다. 53년 13억 달러였던 우리의 GNP는 523배인 6,810억 달러로 늘어났고 1인당 GNP는 67 달러의 211배인 14,162 달러로 늘어났다. 한국 경제는 54년 처음으로 5.6%의 성장을 기록한 이래 56년과 80년의 두 해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플러스 성장을 계속해 왔다. 산업구조는 1차 산업으로부터 3차 산업으로, 경공업 위주로부터 중화학공업을 거쳐 첨단 정보ㆍ통신사업 위주로 이동하여 선진국 형 산업구조로 환골탈태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단’ 이전에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에 비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분단’으로부터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 역전된 남북한의 경제는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북한의 경제는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중단한 1994년 이래 선고만 안 되었을 뿐이지 실제로는 파산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거덜 난 경제는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수백만의 주민이 기아(饑餓)로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 명의 주민들이 먹을 것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밀도강하여 만주 벌판을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북에 남은 주민들은 남한과 서방세계의 인도적 지원으로 겨우 집단 아사(餓死)를 모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이 1차 7개년 계획을 시작한 직후인 1962년 김일성은 이 계획이 완료되면 북한주민에게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돌아 갈 것”이라고 약속했었지만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이루어질 전망이 없는 실정인 것이다. 최근 미국의 Foreign Policy와 Fund for Peace라는 기관이 발표한 ‘2006년도 실패한 국가지수’(Failed States Index)에 의하면 북한은 조사 대상 146개국 가운데 14위였다.

‘국가분단’이 회갑(回甲)을 맞이하려 하고 있는 시점에서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회복 불가능한 실패한 나라’다. 북한의 ‘국가위험도’를 <유로머니>는 세계 185개국 가운데 185위로, 가 173개국 가운데 173위로, PRS가 140개국 가운데 109위로 평가하고 있고 OECD의 <국가위험도 전문가회의>는 7년 연속으로 북한을 전체 8등급 가운데 가장 낮은 7등급에 포함시키고 있다.

남북 간에는 지난 반세기 동안 국제무대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가 오늘날 두 ‘나라’의 ‘수교현황’에 반영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만을 제외한 전 세계 190개 독립국가 가운데 2006년 현재 대한민국의 수교국가는 모두 186개 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교국가는 모두 155개국이며 그 가운데 152개국이 남북한과 따로따로 ‘동시수교’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국교를 트지 않고 있는 나라는 쿠바, 시리아, 마케도니아, 모나코 등 4개국뿐이다. 대한민국은 91개국의 국제기구에 가입한 반면 북한이 가입한 국제기구는 30개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의 ‘성공담(成功譚)’은 결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성공을 견인한 4개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첫째로 1964년부터 1972년까지 계속된 ‘국군의 월남전 파병’, 둘째로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 셋째로 1968년 착공하여 1970년 완공․개통된 ‘경부 고속도로 건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1년부터 시작되어 이 땅의 농민들에게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한풀이의 기회를 만들어 준 ‘새마을 운동’이다. 이들 네 가지의 사건들 중 어느 하나가 없었더라도 대한민국의 ‘오늘’의 모습은 오늘과는 달라져 있을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한일 국교정상화의 마무리는 ‘이동원’이라는 ‘풍운아’가 있었음으로 해서 가능해 질 수 있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을 때 필자는 <한국일보>의 국회 출입기자였다. 어느 때인가 필자는 일본국 수도 도쿄에서 한일협정 조인을 마치고 귀국한 이동원 장관으로부터 한 토막의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도쿄에서 협정 조인을 끝낸 뒤 이 장관은 왕궁으로 히로히토(裕仁) 천황을 예방하게 되었다. 이 장관의 차에 동승한 그의 일본측 상대역 시이나 에스사부로(椎名悅三郞) 외상은 궁성에 도착하자 이 장관에게 한 가지 ‘부탁’의 말을 건넸다. “천황폐하와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왕궁에서 히로히토 천황은 이 장관을 상대로 6.25 전쟁을 화두로 삼아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천황은 갑자기 “전쟁 중의 격심했던 파괴로 인하여 한국에서는 전기가 부족하여 야간이 매우 캄캄하다더라”면서 한국인들의 야간 생활을 화두로 삼았다.

천황의 이 말을 들은 이 장관은 슬그머니 심술기가 발동하더라고 했다. 왜냐 하면 그때 일본 도쿄의 밤은 글자 그대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어서 가뜩이나 배가 아프던 차인데 천황이 한국의 ‘캄캄한 밤’을 화두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장관은 천황에게 이렇게 대꾸했다고 했다. “폐하, 한국에서는 밤이 어둡기 때문에 생산이 늘어나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를 들은 천황이 “어떤 것이 그렇게 더 많이 생산되느냐”고 묻자 이 장관은 “폐하, 아이들이 더 많이 생산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천황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이 장관의 사후담(事後談)은 “나는 아주 가벼운 음담(淫談)을 한 것인데 천황도 이를 음담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천황 예방을 마치고 궁성을 떠나는 이 장관은 은근히 걱정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시이나 외상으로부터 혹시 ‘항의’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엉뚱하게 전개되었다. 궁성 정문 앞의 니쥬바시(二重橋)에서 자기 차로 옮겨 타기 위해 이 장관과 동승하던 차에서 내린 시이나 외상이 열어놓은 차문 안으로 이 장관에게 120도 각도로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이나 외상이 한 ‘말’은 차 안에서 어리둥절해 하는 이 장관에게 “각하, 오늘 위트 있는 유머로 폐하로 하여금 파안대소를 하시게 해 주신 데 대해 일본 국민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간 뒤인 2002년 필자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왕실을 관리하는 궁내부를 비롯하여 일본 정부에서 다년 간 근무한 뒤 정년퇴임한 몇몇 원로들과 저녁 회식을 하는 기회가 생겼다. 이것저것 화제를 삼는 가운데 필자는 1965년 이동원 장관이 히로히토 천황에게 들려주었던 ‘음담’(?) 얘기를 되살렸다. 그러나, 아뿔싸, 일본 원로들의 표정이 우거지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그날 그 자리에서는 그냥 그 정도였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 온 필자에게 인편(人便)으로 그들로부터 점잖지만 분명한 ‘항의’가 전해져 왔다. “어떻게 천황폐하를 가지고 그러한 농담조의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동원 씨의 타계 소식을 듣고 삼성강남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분향ㆍ조문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 그때의 일들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기에 이렇게 적어 본다. 우리 시대의 또 한 분의 ‘풍운아’의 타계에 다시 한 번 심심한 애도(哀悼)를 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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