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2. 07. 세종문화회관. 박정희기념사업회 조찬 강연:박정희 대통령의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비전, 시스템과 정제된 언어
송종환(宋鍾奐)박사;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여러 어르신들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정책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1970년대 중반까지 남북대화 업무에 종사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인 1977년 청와대 정무비서실로 근무지를 옮겨 1982년까지 외무부와 통일원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 후 정부부처로 돌아가서 1998년 3월까지 해외관련 분야에서 일하던 중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에서 나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보고 드리는 것은 공직에서의 경험과 대학에서의 연구를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반도에 있는 두 국가 중 한 국가는 지식에 기반을 둔 제3물결의 경제와 문명으로 향하는 거대한 변혁의 선두에 서 있는 반면, 다른 한 국가는 굶주림과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다.
한쪽 국가의 국민들은 세련되고, 여행의 자유를 누리며, 초고속 인터넷을 통해 그 어디에 있는 누구와도 의사교환을 할 수 있는 반면 다른 국가는 자국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억압과 통제 속에 가두고 있다.
한쪽 국가는 미래의 혁신적 경제체제를 따라 고속으로 미래를 탐험하고 있지만, 다른 국가는 이전 세대의 박제화된 유물로서, 또 무기력하고 반혁신적인 경제체제를 고수하는 김정일 수령 지배 왕조국가로서 한국의 안보를 위협함은 물론 세계평화를 해칠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이상은 세계적 석학인 앨빈 토플러의 최근 저서인 『富의 미래』
(Revolutionary Wealth)에서 남북한을 비교한 부분을 요약하여 옮긴 것이며, 남북한을 정확하게 비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역사 상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
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슈퍼 파워(super power)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한국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학계에서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하바드 대학의 에즈라 보겔(Ezra Vogel)교수도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
습니다. 보겔 교수는 박대통령 정부가 서구식 민주정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지만 “박대통령은 국가에 일신을 바친 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3년 전 한국 갤럽이 조사, 발표한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해방 후 성취한 20개 업적 중에 박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이룩한 업적이 8개나 포함되었습니다. 그 업적들은 (1) 새마을 운동(1971), (3) 경부고속도로
(1970), (7)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1962), (9) 5. 16 군사혁명 후 행정개혁 실시(1961), (12) 수출 100억 달러 달성(1977), (14) 월남 파병
(1965), (15)가족계획 (1976)과 같이 순서별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은 박대통령의 비전과 그 당시의 효과적인 정부정책결정 시스템이 이룩한 결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박대통령이 이 땅에 처음으로 국가 이성과 국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근대국가를 건설하였다는 방향으로 시각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의 치적 중에는 경제발전에 못지않게 중요한 치적이 있으나, 1998년 이후 등장한 좌파 정부의 대북정책과 그로 인한 극도의 사회 갈등으로 왜곡되고, 잊혀지고 있는 중요한 정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과 대결의 관계에서 대화의 관계로 남북한 관계의 새 지평을 연 박대통령의 대북정책의 전환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
을 발표하여 남북한 간에 모든 형태의 왕래와 교류가 단절되었던 시기를 마감하고 1970년대 이후 남북대화의 개막을 여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남북한 관계의 새 지평을 연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배경과 의의, 비전, 정책결정과정 시스템과 대국민 설득 방법 등을 검토해본 후 오늘날 햇볕정책과 이를 계승한 대북 포용정책에 의거하여 전개되고 있는 남북한 관계의 추이와 특히 북한 핵실험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박정희기념사업회 회원 여러분을 비롯하여 국민들이 어떻게 하여야 그의 정책을 계승,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제, 국내 정세 변화와 북한 정세를 정확히 읽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 15 경축사」에서 통일 이전에 전쟁 방지와 평화정착과 같은 중간단계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북한이 모든 전쟁도발 행위를 중지하고 적화통일 정책을 포기한다면 남북한 간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덧붙여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도 제의하였습니다.
‘선 평화, 후 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박대통령의 「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 발표는 해방 이후 계속된 소모적이고 비현실적인 통일정책을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정권을 선의의 체제경쟁의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남북한 평화공존이라는 말조차도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 비추어 대북 정책의 전환을 의미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친 요소로는 국제정세, 국내정세와 북한정세와 같은 객관적 환경과 이러한 정세를 읽는 대통령의 인식과 그가 추구하는 비전과 같은 주관적 환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대북정책전환에 영향을 미친 당시의 국제, 국내정세 변화와 북한 정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한반도룰 둘러싼 국제정세로 먼저 닉슨독트린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미군의 개입 축소와 동맹국들의 자국 방위책임을 강조하면서 소련, 중국 등 공산진영과의 적대관계 완화와 협조관계 모색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닉슨독트린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미국 측은 1970년 4월 10일 확정된 대한국 군사원조액을 전년도에 비하여 3,000만 달러 삭감한 1억 4,049만 달러로 조정하고,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하여 주한미군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1971년 6월 30일까지 감축, 철수할 것임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여 왔습니다. 이로써 박대통령은 이제까지의 대화 없는 대결구조의 남북한 관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함께 한국 내의 정세도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박대통령이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을 한 후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제건설을 추진하여 한국은 1969년을 기점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습니다.
1960년도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한국이 81달러, 북한이 120달러이었으며 이러한 열세는 1968년까지 계속되어 그해 한국이 168달러, 북한이 198달러이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고도 성장을 지속하여 1969년에는 한국이 208달러가 되고 북한이 194달러로 떨어져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치정세는 1969년 10월17일 실시된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전후하여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끄는 야당이 민주화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남북한 간의 교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은 통일문제 논의에서의 이니셔티브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호전적 태도를 고려하여 전쟁을 막고 통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도 동 선언 발표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고 1964년 2월 ‘남조선 혁명’을 통한 한반도 공산화 통일노선을 확정한 후 1960년대 후반에 무장 게릴라 침투활동과 간첩활동을 급격히 증가시켰습니다.
무장 게릴라 침투 사례로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한 무장공비 31명의 서울 침투, 1월 23일 동해상에서의 美 함정 푸에블로 호 납치, 10월 30일부터 11월 3일 간 북한의 무장 게릴라 130여 명의 울진・삼척 침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무렵 간첩활동으로 1968년 한 해 적발된 남파간첩사건만 하더라도 1,247건이나 되었습니다.
특히 1912년 임자년 태생인 김일성은 1967~68년 인민군 부대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 환갑잔치를 1972년 4월 15일 서울에서 하자”고 말할 정도로 호전적이었습니다.
미래 비전에 맞추어 대결에서 경쟁ㆍ대화로 전환, ‘선 평화 후 통일 원칙’ 제시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은 국내외적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당시 남북한 간 체제경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의 무력도발 책동과 대남 혁명 전략을 저지하는 한편 남북한 관계와 통일문제에서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전략적 구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전략적 구상이 국가발전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 비전과 연계되어 제시된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경제개발의 기초를 다진 1960년대를「민족중흥의 전진 대열을 정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하고, 1970년대에 개발도상국, 1980년대에 중진국, 1990년대에 중진국 선두 및 선진국 진출 준비를 하여 세기 말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각종 국가정책의 초점을 이 비전 실현에 맞추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분단 조국의 통일 추진도 이러한 경제건설 비전에 맞추었습니다. 1969년부터 남북한 경제력 비교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을 확인한 박대통령은 1970년 1월 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1970년대 말까지 조국근대화 작업을 매듭짓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완료할 것이라고 제시하고, 동년 8. 15 경축사에서 2000년 전후 통일 실현을 위하여 1970년대에는 먼저 남북한 간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습니다.
북한 측은 이에 대해 8월 22일자 『노동신문』을 통하여 “남한 인민의 반미ㆍ반정부 투쟁을 조금이나마 무마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박정희 정부와의 통일 논의를 전면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가「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후속조치로 1971년 8월 12일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하자, 북한은 경제적 역량에서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착각과 1971년 4월 이후 있은 일련의 미ㆍ중 관계 개선 움직임을 잘만 이용하면 대남 관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 회담제의를 수락하였습니다.
남북한은 적십자 예비회담을 진행하는 과정에 1972년 7월 4일 남북한 간 정치적 대화 개시를 공식화하는「7. 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됨에 따라 남북한 관계는 ‘대화 없는 대결’에서 인도적 회담과 정치적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대화 있는 대결’로 전환되었습니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제시한 ‘선 평화, 후 통일’ 원칙은 1998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재직 시까지 최소한 평화정착과 교류의 동시 진행이라는 수준으로 지켜져 왔습니다만, 김대중 정부가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위원장과 「6. 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 발표하면서부터 무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관련부처의 적극 토론 유도와 異見을 수용, 종합하는 시스템으로 정책 결정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과 관련하여 강조할 것은 국가지도자의 비전과 함께 당시 이러한 정책 전환을 결정할 때의 시스템입니다. 이 선언의 작성은 크게 보아 1969년 추석 이후 정책 비전과 구상에 의한 대통령의 지시, 1970년 3월 초부터 학계와 언론계의 자문을 받으면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의 연설문 초안 작성, 7월 말부터 차관 급으로 구성된 관계부처 실무회의에서의 검토, 8월 9일 대통령 주재 장관급 정책결정 회의에서의 검토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총 소요 기간은 1년 정도 걸렸습니다.
이 과정에 청와대 비서실과 관계 부처가 각기 맡은 바 소임과 역할을 다하고 박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회의에서는 각 부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언성을 높이면서 갑론을박을 하였습니다. 8월 9일 오전 10시에 시작한 회의가 장관들과 청와대 비서실 수석비서관 간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오후가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않자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주재로 의견을 다시 모아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은 오후 늦게 다시 회의를 주재하면서 이호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율사들이 이 정책 전환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강력히 반대한 취지와 외무부가 건의한 내용을 즉석에서 받아들여 직접 연설문 초안을 수정하였습니다.
강한 리더십으로 국가를 이끈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법무부 율사들이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연설문 초안을 준비한 작업 자체가 구속감이라고 지적하자,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비전과 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과 같은 중대한 대북 정책전환을 고려할 때 자신이 주재하는 정책조정회의에서 관계부처의 토론을 유도하고 이견(異見)을 수용하여 종합하는 시스템으로 정책을 협의・조정하였지만, 국회와 야당의 의견을 초당적으로 수렴한 흔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 정부’라는 비판을 받는 한계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국가정책 수립의 전반에 걸쳐 소리 없이 수행된 대통령 비서실장의 조정자적 역할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정부 각 부처 사이에서, 그리고 경쟁적 입장에 있던 대통령 비서실 내의 각 수석비서관 사이에서 수행한 조정 역할은 중복 보고의 방지는 물론 대통령과 장관, 수석비서관 간의 원활한 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효율적인 정책 결정을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 비서실장의 조정자적 역할은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집권 이후 비서실장의 사무실이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수석비서관들의 사무실이 있는 신관으로 옮겨지고, 비서실장의 배석 없이 수석비서관과 비서관들이 대통령에게 독대 보고를 하면서부터 사실상 축소되었습니다. 지금의 정부는 청와대 비서실의 복잡한 구성에 비추어 어느 직책에 있는 인사가 당시 비서실장의 역할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제된 언어’로 정책 전환을 발표
박대통령은 정책전환을 위한 결정을 할 때 정책조정회의에서 관계부처 관계관들의 토론을 유도하고 이견(異見)을 수용한 뒤 정제된 언어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에 비하여 언론의 보도가 자유스럽지 않았지만, 박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언론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잘 못 전달되거나 가십 꺼리가 되지 않도록 보좌진의 의견을 다 듣고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대중 앞에서 불쑥 불쑥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 시스템과 관련하여 또 하나 강조될 것은 정부가 이른바 코드가 다른 인사와도 대화를 하고 그들을 통하여 정부의 정책 전환의 취지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려고 시도하고 또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입니다.
박대통령은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에 대한 국내의 반발과 파장을 우려하여 관계부처와 중앙정보부로 하여금 주한외교단, 정계, 경제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 예비역 장성, 대학 총ㆍ학장 등을 대상으로 사전 설명을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이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를 앞둔 몇 일 전에 설명하자, 『김일성이를 무슨 도깨비로 알다가 이렇게 갑자기 제의를 하면 국민에게 주는 충격이 크다』라고 반발한 최석채 조선일보 주필의 당당하고도 분명한 반응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정부와 코드가 다른 인사 간에 언로가 열려 있었던 것은 코드 정치를 하는 현재의 좌파정권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정신을 계승, 구현하여야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여 대북정책을 전환하는 과정을 지금 되새겨보아도 노무현 정부에게 주는 좋은 교훈이 많습니다. 박대통령이 (1)국제, 국내정세의 변화와 북한정세를 정확히 읽고, (2) 미래비전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3) 정부 부처의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면서 이견(異見)을 수용하여 정책결정을 하고, (4) 결정적 타이밍에 정제된 언어로 발표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정책 수행은 이러한 교훈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전통우방국인 미국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 계획(global posture review)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할 예정입니다. 좌파정부의 일방적 유화정책을 배경으로 친북ㆍ반미세력들은 국가체제와 이념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수령유일지배체제와 연방을 하자고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산화 혁명 전략은 변화하지 않았고 남쪽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는데도 지난 7월 5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 9일에는 핵실험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은 머리 위에 북한 핵을 이고 살게 되었습니다. 첨단화된 수백 개의 재래식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도 핵보유국에는 군사전략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변화하고 있는 대내외 정세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정부 시스템이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못하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발언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우리에게 있어 안보의 기본이 달라짐을 의미하며, 생사와 존망의 갈림길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 핵 개발이 일리가 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여도 남북한 간의 군사균형이 깨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유사 시 미국이 69만 명의 병력, 5개 항공모함전단과 160척의 함정, 2,500대의 항공기를 자동 지원하게 되어 있는 실리를 버리고 전시작전권 단독행사를 추진하고 있고 대북포용정책도 바꾸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시작전권 단독행사 추진과 대북포용정책은 북한 핵 실험으로 비상사태를 맞아 전통우방인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고 국민들의 일치단결이 필요한 시기에 한ㆍ미동맹체제를 훼손하고 국민 여론의 분열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북한에 대하여 안이하게 대처하고 반미세력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지 않는 이념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을 배경으로 친북ㆍ반미인사들은 “북한 핵은 통일되면 민족의 재산이 된다”, “북한 핵 개발은 미국의 압박 때문이다”, “북한 핵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 “북한 핵이 한반도의 전쟁을 막아주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 실험을 한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할 일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 관련 계획을 폐기하고 핵 장막을 걷어내도록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이 안전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제공조 하에 북한 핵 폐기를 위한 협상을 하되, 유사시에 대비하여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한국은 북한이 처음부터 전쟁도발을 할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북한이 도전하면 싸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그리고 이러한 힘과 의지가 있음을 북한이 믿도록 하여 전쟁억지능력을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북한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선의를 베풀면 북한도 이에 대하여 선의로 대할 것이라는 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은 근본적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천재지변으로 재난을 당한 북한 주민을 돕는 인도적 지원 이외의 대북한 지원과 교류, 남북한 철도 연결, 개성공단 건설, 금강산 관광 등은 북한의 핵·미사일의 제거, 재래식 무기의 감축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과 연계되어 추진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지금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국가발전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각 부처의 이견을 수용하여 정부 시스템이 모두 제 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정제된 언어로 국민을 단합시켰던 그런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국가체제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와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적극 홍보하고 이에 도전하는 세력들에게 강력히 투쟁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민 전체가 내년에는 대한민국을 선진화하는 데 앞장서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끔직한 태풍ㆍ홍수와 폭염은 시간이 가면 많은 피해자를 남기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국가의 안전과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한반도의 적화현상은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비분강개해 하면서 개탄만 하고 수동적으로 응하였던 태도를 떨쳐버리고 열정을 다하여 참여하고 투쟁하는 자세로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야 합니다.
건국, 호국, 산업화를 주도한 인사들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지지인사들과 함께 이제까지 가꾸어온 정치, 경제 체제를 수호하고 나아가 나라를 선진화하기 위하여 재력 있는 사람은 재력으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와 지식으로, 용기와 시간이 있는 사람은 용기와 시간을 내어 체제도전 세력에 치열하게 투쟁하는 강력한 통일전선을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박대통령이「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제시한 ‘선 평화, 후 통일’의 정신을 계승ㆍ구현하고 나라의 선진화를 위하여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되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경청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송종환 교수의 약력
학력: 경남 마산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외교학과 졸업-정치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Tufts대 플레처 국제법ㆍ외교대학원 졸업-MALD
한양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경력: 해군사관학교 국제법ㆍ정치학 교관(중위)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참가
청와대 정무비서실 외무부・통일원 담당관
주유엔 대표부 공사 및 유엔 총회 대표
주미대사관 정무공사
국가안전기획부 해외정보실장
충북대학교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역임
2002년 이래 명지대 사회과학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상훈: 홍조근정훈장
저서: 북한협상행태의 이해』(서울: 오름출판사, 2002)
* 2003년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추천
『북한총람: 1993-2002』(서울: 북한문제연구소, 2003)의 정치편
『남북회담: 7. 4에서 6. 15까지』(서울: 극동문제연구소, 2004) 외
남북한 관계, 국제관계와 국가정보기관 개혁 관련 국, 영문 학술 논문
과 조선, 중앙, 동아, 국민일보, 월간조선, 신동아, 월간 북한 기고 컬
럼 다수
송종환(宋鍾奐)박사;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여러 어르신들 앞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통일정책에 대하여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1970년대 중반까지 남북대화 업무에 종사하다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인 1977년 청와대 정무비서실로 근무지를 옮겨 1982년까지 외무부와 통일원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 후 정부부처로 돌아가서 1998년 3월까지 해외관련 분야에서 일하던 중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정부에서 나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보고 드리는 것은 공직에서의 경험과 대학에서의 연구를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반도에 있는 두 국가 중 한 국가는 지식에 기반을 둔 제3물결의 경제와 문명으로 향하는 거대한 변혁의 선두에 서 있는 반면, 다른 한 국가는 굶주림과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다.
한쪽 국가의 국민들은 세련되고, 여행의 자유를 누리며, 초고속 인터넷을 통해 그 어디에 있는 누구와도 의사교환을 할 수 있는 반면 다른 국가는 자국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억압과 통제 속에 가두고 있다.
한쪽 국가는 미래의 혁신적 경제체제를 따라 고속으로 미래를 탐험하고 있지만, 다른 국가는 이전 세대의 박제화된 유물로서, 또 무기력하고 반혁신적인 경제체제를 고수하는 김정일 수령 지배 왕조국가로서 한국의 안보를 위협함은 물론 세계평화를 해칠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있다.
이상은 세계적 석학인 앨빈 토플러의 최근 저서인 『富의 미래』
(Revolutionary Wealth)에서 남북한을 비교한 부분을 요약하여 옮긴 것이며, 남북한을 정확하게 비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에도 못 미치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역사 상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
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슈퍼 파워(super power)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세계 여러 나라들은 한국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 학계에서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하바드 대학의 에즈라 보겔(Ezra Vogel)교수도 최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
습니다. 보겔 교수는 박대통령 정부가 서구식 민주정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지만 “박대통령은 국가에 일신을 바친 지도자였다”고 평가하였습니다.
3년 전 한국 갤럽이 조사, 발표한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해방 후 성취한 20개 업적 중에 박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이룩한 업적이 8개나 포함되었습니다. 그 업적들은 (1) 새마을 운동(1971), (3) 경부고속도로
(1970), (7)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작(1962), (9) 5. 16 군사혁명 후 행정개혁 실시(1961), (12) 수출 100억 달러 달성(1977), (14) 월남 파병
(1965), (15)가족계획 (1976)과 같이 순서별로 정리되었습니다. 이것은 박대통령의 비전과 그 당시의 효과적인 정부정책결정 시스템이 이룩한 결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박대통령이 이 땅에 처음으로 국가 이성과 국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근대국가를 건설하였다는 방향으로 시각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의 치적 중에는 경제발전에 못지않게 중요한 치적이 있으나, 1998년 이후 등장한 좌파 정부의 대북정책과 그로 인한 극도의 사회 갈등으로 왜곡되고, 잊혀지고 있는 중요한 정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과 대결의 관계에서 대화의 관계로 남북한 관계의 새 지평을 연 박대통령의 대북정책의 전환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광복절 경축사에서「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
을 발표하여 남북한 간에 모든 형태의 왕래와 교류가 단절되었던 시기를 마감하고 1970년대 이후 남북대화의 개막을 여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남북한 관계의 새 지평을 연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배경과 의의, 비전, 정책결정과정 시스템과 대국민 설득 방법 등을 검토해본 후 오늘날 햇볕정책과 이를 계승한 대북 포용정책에 의거하여 전개되고 있는 남북한 관계의 추이와 특히 북한 핵실험 이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박정희기념사업회 회원 여러분을 비롯하여 국민들이 어떻게 하여야 그의 정책을 계승,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제, 국내 정세 변화와 북한 정세를 정확히 읽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 15 경축사」에서 통일 이전에 전쟁 방지와 평화정착과 같은 중간단계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북한이 모든 전쟁도발 행위를 중지하고 적화통일 정책을 포기한다면 남북한 간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덧붙여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도 제의하였습니다.
‘선 평화, 후 통일’을 핵심으로 하는 박대통령의 「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 발표는 해방 이후 계속된 소모적이고 비현실적인 통일정책을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정권을 선의의 체제경쟁의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남북한 평화공존이라는 말조차도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엄혹한 상황에 비추어 대북 정책의 전환을 의미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에 영향을 미친 요소로는 국제정세, 국내정세와 북한정세와 같은 객관적 환경과 이러한 정세를 읽는 대통령의 인식과 그가 추구하는 비전과 같은 주관적 환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대북정책전환에 영향을 미친 당시의 국제, 국내정세 변화와 북한 정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한반도룰 둘러싼 국제정세로 먼저 닉슨독트린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여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1969년 1월 취임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미군의 개입 축소와 동맹국들의 자국 방위책임을 강조하면서 소련, 중국 등 공산진영과의 적대관계 완화와 협조관계 모색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닉슨독트린은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미국 측은 1970년 4월 10일 확정된 대한국 군사원조액을 전년도에 비하여 3,000만 달러 삭감한 1억 4,049만 달러로 조정하고, 7월 6일 포터 주한 미국대사를 통하여 주한미군병력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1971년 6월 30일까지 감축, 철수할 것임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여 왔습니다. 이로써 박대통령은 이제까지의 대화 없는 대결구조의 남북한 관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함께 한국 내의 정세도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박대통령이 5·16 군사혁명으로 집권을 한 후 조국근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경제건설을 추진하여 한국은 1969년을 기점으로 경제적 측면에서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습니다.
1960년도 남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한국이 81달러, 북한이 120달러이었으며 이러한 열세는 1968년까지 계속되어 그해 한국이 168달러, 북한이 198달러이었습니다. 그러나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고도 성장을 지속하여 1969년에는 한국이 208달러가 되고 북한이 194달러로 떨어져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정치정세는 1969년 10월17일 실시된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전후하여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이끄는 야당이 민주화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남북한 간의 교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은 통일문제 논의에서의 이니셔티브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호전적 태도를 고려하여 전쟁을 막고 통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야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도 동 선언 발표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고 1964년 2월 ‘남조선 혁명’을 통한 한반도 공산화 통일노선을 확정한 후 1960년대 후반에 무장 게릴라 침투활동과 간첩활동을 급격히 증가시켰습니다.
무장 게릴라 침투 사례로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을 위한 무장공비 31명의 서울 침투, 1월 23일 동해상에서의 美 함정 푸에블로 호 납치, 10월 30일부터 11월 3일 간 북한의 무장 게릴라 130여 명의 울진・삼척 침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무렵 간첩활동으로 1968년 한 해 적발된 남파간첩사건만 하더라도 1,247건이나 되었습니다.
특히 1912년 임자년 태생인 김일성은 1967~68년 인민군 부대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내 환갑잔치를 1972년 4월 15일 서울에서 하자”고 말할 정도로 호전적이었습니다.
미래 비전에 맞추어 대결에서 경쟁ㆍ대화로 전환, ‘선 평화 후 통일 원칙’ 제시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은 국내외적 환경 변화에 대응하여 당시 남북한 간 체제경쟁에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의 무력도발 책동과 대남 혁명 전략을 저지하는 한편 남북한 관계와 통일문제에서 이니셔티브를 쥐기 위한 전략적 구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전략적 구상이 국가발전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미래 비전과 연계되어 제시된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경제개발의 기초를 다진 1960년대를「민족중흥의 전진 대열을 정비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규정하고, 1970년대에 개발도상국, 1980년대에 중진국, 1990년대에 중진국 선두 및 선진국 진출 준비를 하여 세기 말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각종 국가정책의 초점을 이 비전 실현에 맞추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분단 조국의 통일 추진도 이러한 경제건설 비전에 맞추었습니다. 1969년부터 남북한 경제력 비교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을 확인한 박대통령은 1970년 1월 9일 연두기자회견에서 1970년대 말까지 조국근대화 작업을 매듭짓고 통일을 위한 준비를 완료할 것이라고 제시하고, 동년 8. 15 경축사에서 2000년 전후 통일 실현을 위하여 1970년대에는 먼저 남북한 간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밝혔습니다.
북한 측은 이에 대해 8월 22일자 『노동신문』을 통하여 “남한 인민의 반미ㆍ반정부 투쟁을 조금이나마 무마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박정희 정부와의 통일 논의를 전면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적십자사가「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후속조치로 1971년 8월 12일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하자, 북한은 경제적 역량에서 남한보다 우월하다는 착각과 1971년 4월 이후 있은 일련의 미ㆍ중 관계 개선 움직임을 잘만 이용하면 대남 관계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 회담제의를 수락하였습니다.
남북한은 적십자 예비회담을 진행하는 과정에 1972년 7월 4일 남북한 간 정치적 대화 개시를 공식화하는「7. 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됨에 따라 남북한 관계는 ‘대화 없는 대결’에서 인도적 회담과 정치적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대화 있는 대결’로 전환되었습니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제시한 ‘선 평화, 후 통일’ 원칙은 1998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재직 시까지 최소한 평화정착과 교류의 동시 진행이라는 수준으로 지켜져 왔습니다만, 김대중 정부가 2000년 6월 15일 김정일 위원장과 「6. 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 발표하면서부터 무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관련부처의 적극 토론 유도와 異見을 수용, 종합하는 시스템으로 정책 결정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과 관련하여 강조할 것은 국가지도자의 비전과 함께 당시 이러한 정책 전환을 결정할 때의 시스템입니다. 이 선언의 작성은 크게 보아 1969년 추석 이후 정책 비전과 구상에 의한 대통령의 지시, 1970년 3월 초부터 학계와 언론계의 자문을 받으면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의 연설문 초안 작성, 7월 말부터 차관 급으로 구성된 관계부처 실무회의에서의 검토, 8월 9일 대통령 주재 장관급 정책결정 회의에서의 검토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총 소요 기간은 1년 정도 걸렸습니다.
이 과정에 청와대 비서실과 관계 부처가 각기 맡은 바 소임과 역할을 다하고 박대통령이 주재하는 마지막 회의에서는 각 부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언성을 높이면서 갑론을박을 하였습니다. 8월 9일 오전 10시에 시작한 회의가 장관들과 청와대 비서실 수석비서관 간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오후가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않자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주재로 의견을 다시 모아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은 오후 늦게 다시 회의를 주재하면서 이호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율사들이 이 정책 전환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강력히 반대한 취지와 외무부가 건의한 내용을 즉석에서 받아들여 직접 연설문 초안을 수정하였습니다.
강한 리더십으로 국가를 이끈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법무부 율사들이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연설문 초안을 준비한 작업 자체가 구속감이라고 지적하자,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비전과 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열변을 토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과 같은 중대한 대북 정책전환을 고려할 때 자신이 주재하는 정책조정회의에서 관계부처의 토론을 유도하고 이견(異見)을 수용하여 종합하는 시스템으로 정책을 협의・조정하였지만, 국회와 야당의 의견을 초당적으로 수렴한 흔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 정부’라는 비판을 받는 한계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국가정책 수립의 전반에 걸쳐 소리 없이 수행된 대통령 비서실장의 조정자적 역할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정부 각 부처 사이에서, 그리고 경쟁적 입장에 있던 대통령 비서실 내의 각 수석비서관 사이에서 수행한 조정 역할은 중복 보고의 방지는 물론 대통령과 장관, 수석비서관 간의 원활한 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효율적인 정책 결정을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통령 비서실장의 조정자적 역할은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집권 이후 비서실장의 사무실이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수석비서관들의 사무실이 있는 신관으로 옮겨지고, 비서실장의 배석 없이 수석비서관과 비서관들이 대통령에게 독대 보고를 하면서부터 사실상 축소되었습니다. 지금의 정부는 청와대 비서실의 복잡한 구성에 비추어 어느 직책에 있는 인사가 당시 비서실장의 역할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제된 언어’로 정책 전환을 발표
박대통령은 정책전환을 위한 결정을 할 때 정책조정회의에서 관계부처 관계관들의 토론을 유도하고 이견(異見)을 수용한 뒤 정제된 언어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오늘날에 비하여 언론의 보도가 자유스럽지 않았지만, 박대통령은 자신의 말이 언론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잘 못 전달되거나 가십 꺼리가 되지 않도록 보좌진의 의견을 다 듣고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대중 앞에서 불쑥 불쑥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 시스템과 관련하여 또 하나 강조될 것은 정부가 이른바 코드가 다른 인사와도 대화를 하고 그들을 통하여 정부의 정책 전환의 취지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하려고 시도하고 또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는 점입니다.
박대통령은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에 대한 국내의 반발과 파장을 우려하여 관계부처와 중앙정보부로 하여금 주한외교단, 정계, 경제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 예비역 장성, 대학 총ㆍ학장 등을 대상으로 사전 설명을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강인덕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이 「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발표를 앞둔 몇 일 전에 설명하자, 『김일성이를 무슨 도깨비로 알다가 이렇게 갑자기 제의를 하면 국민에게 주는 충격이 크다』라고 반발한 최석채 조선일보 주필의 당당하고도 분명한 반응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정부와 코드가 다른 인사 간에 언로가 열려 있었던 것은 코드 정치를 하는 현재의 좌파정권이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의 정신을 계승, 구현하여야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하여 대북정책을 전환하는 과정을 지금 되새겨보아도 노무현 정부에게 주는 좋은 교훈이 많습니다. 박대통령이 (1)국제, 국내정세의 변화와 북한정세를 정확히 읽고, (2) 미래비전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3) 정부 부처의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면서 이견(異見)을 수용하여 정책결정을 하고, (4) 결정적 타이밍에 정제된 언어로 발표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정책 수행은 이러한 교훈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전통우방국인 미국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 계획(global posture review)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감축할 예정입니다. 좌파정부의 일방적 유화정책을 배경으로 친북ㆍ반미세력들은 국가체제와 이념의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면서 북한의 수령유일지배체제와 연방을 하자고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산화 혁명 전략은 변화하지 않았고 남쪽으로부터 엄청난 지원을 받았는데도 지난 7월 5일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 9일에는 핵실험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한국은 머리 위에 북한 핵을 이고 살게 되었습니다. 첨단화된 수백 개의 재래식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도 핵보유국에는 군사전략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변화하고 있는 대내외 정세를 정확히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전도 제시하지 않고 정부 시스템이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리더십을 발휘하지도 못하면서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발언을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우리에게 있어 안보의 기본이 달라짐을 의미하며, 생사와 존망의 갈림길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북한 핵 개발이 일리가 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여도 남북한 간의 군사균형이 깨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유사 시 미국이 69만 명의 병력, 5개 항공모함전단과 160척의 함정, 2,500대의 항공기를 자동 지원하게 되어 있는 실리를 버리고 전시작전권 단독행사를 추진하고 있고 대북포용정책도 바꾸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시작전권 단독행사 추진과 대북포용정책은 북한 핵 실험으로 비상사태를 맞아 전통우방인 미국의 지원이 절실하고 국민들의 일치단결이 필요한 시기에 한ㆍ미동맹체제를 훼손하고 국민 여론의 분열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북한에 대하여 안이하게 대처하고 반미세력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지 않는 이념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을 배경으로 친북ㆍ반미인사들은 “북한 핵은 통일되면 민족의 재산이 된다”, “북한 핵 개발은 미국의 압박 때문이다”, “북한 핵은 우리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 “북한 핵이 한반도의 전쟁을 막아주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 실험을 한 이 시점에서 한국 정부가 할 일은 북한이 모든 핵무기 관련 계획을 폐기하고 핵 장막을 걷어내도록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치를 취하여 국민이 안전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제공조 하에 북한 핵 폐기를 위한 협상을 하되, 유사시에 대비하여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한국은 북한이 처음부터 전쟁도발을 할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북한이 도전하면 싸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그리고 이러한 힘과 의지가 있음을 북한이 믿도록 하여 전쟁억지능력을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북한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선의를 베풀면 북한도 이에 대하여 선의로 대할 것이라는 현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은 근본적으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천재지변으로 재난을 당한 북한 주민을 돕는 인도적 지원 이외의 대북한 지원과 교류, 남북한 철도 연결, 개성공단 건설, 금강산 관광 등은 북한의 핵·미사일의 제거, 재래식 무기의 감축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정착과 연계되어 추진되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지금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국가발전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각 부처의 이견을 수용하여 정부 시스템이 모두 제 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정제된 언어로 국민을 단합시켰던 그런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국가체제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와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적극 홍보하고 이에 도전하는 세력들에게 강력히 투쟁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민 전체가 내년에는 대한민국을 선진화하는 데 앞장서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끔직한 태풍ㆍ홍수와 폭염은 시간이 가면 많은 피해자를 남기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국가의 안전과 평화가 위협을 당하고, 한반도의 적화현상은 도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비분강개해 하면서 개탄만 하고 수동적으로 응하였던 태도를 떨쳐버리고 열정을 다하여 참여하고 투쟁하는 자세로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야 합니다.
건국, 호국, 산업화를 주도한 인사들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지지인사들과 함께 이제까지 가꾸어온 정치, 경제 체제를 수호하고 나아가 나라를 선진화하기 위하여 재력 있는 사람은 재력으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와 지식으로, 용기와 시간이 있는 사람은 용기와 시간을 내어 체제도전 세력에 치열하게 투쟁하는 강력한 통일전선을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박대통령이「8. 15 평화통일구상 선언」에서 제시한 ‘선 평화, 후 통일’의 정신을 계승ㆍ구현하고 나라의 선진화를 위하여 국민 전체가 하나가 되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경청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송종환 교수의 약력
학력: 경남 마산중학교,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외교학과 졸업-정치학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졸업-정치학 석사
미국 Tufts대 플레처 국제법ㆍ외교대학원 졸업-MALD
한양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경력: 해군사관학교 국제법ㆍ정치학 교관(중위)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참가
청와대 정무비서실 외무부・통일원 담당관
주유엔 대표부 공사 및 유엔 총회 대표
주미대사관 정무공사
국가안전기획부 해외정보실장
충북대학교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역임
2002년 이래 명지대 사회과학대 북한학과 초빙교수
상훈: 홍조근정훈장
저서: 북한협상행태의 이해』(서울: 오름출판사, 2002)
* 2003년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 추천
『북한총람: 1993-2002』(서울: 북한문제연구소, 2003)의 정치편
『남북회담: 7. 4에서 6. 15까지』(서울: 극동문제연구소, 2004) 외
남북한 관계, 국제관계와 국가정보기관 개혁 관련 국, 영문 학술 논문
과 조선, 중앙, 동아, 국민일보, 월간조선, 신동아, 월간 북한 기고 컬
럼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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