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포드에 대한 기억
제럴드 포드 전 미국대통령이 26일 서거했다. 향년 93세.
그는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1974년 가을,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의 방한(訪韓)기념 우표를 사기 위해 우체국 앞에서 오랫동안 줄을 섰던 기억이 새롭다. TV에서는 연일 그의 방한의 의미를 열심히 보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월남 패망 후 안보위기가 고조되는 상황 속에서 그의 방한과 대한(對韓)방위공약의 재확인은 당시로서는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를 보면, 포드는 보통 중간 정도로 평가받는다. 이것은 그의 재임 기간 중 일어났던 일들을 되돌아보면 이해가 간다.
우선 포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치욕스럽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리처드 닉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됐다. 그는 재임 기간 중은 물론이고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워터게이트의 악몽에 발목을 잡혔다.
월남전에 막을 내린 것도 그가 대통령 자리에 있던 시절이었다.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주재 미국대사관 옥상에서 황급히 이륙하는 미군 헬기의 모습은 미국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경제성적표도 시원치 않았다. 제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당시 미국 경제는 극심한 인플레에 시달렸다. 사회적으로는 1960년대 중-후반 미국을 휩쓸었던 진보와 보수의 갈등의 여파가 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 1970년대는 ‘우울한 시절’이었다. 그 우울함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의 대통령이 제럴드 포드였다. 그는 ‘잘해야 본전’ 정도가 아니라, ‘아무리 잘해도 본전치기도 힘든’ 시절에 대통령을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제럴드 포드의 품성이나, 재직 시 대통령으로서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이다. 역사학자 에드먼드 모리스는 “제럴드 포드는 현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그 업적이 가장 과소평가된 사람”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제럴드 포드에 대한 이런 긍정적 평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성실함’과 ‘신뢰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그에 대한 재평가의 근거도 바로 이 ‘성실함’과 ‘신뢰성’이었다.
부모와 미식축구를 통해 성실함-정직 배워
제럴드 포드는 1913년 7월,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직후, 그의 부모는 이혼했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었던 포드의 아버지 레슬리 킹은 거짓말, 절도, 음주, 가정 폭력 등 갖은 야비한 품성을 두루 갖춘 인간이었다.
한때 레슬리의 번듯한 외모에 눈이 멀어 그와 결혼까지 했던 포드의 어머니 도로시는 이혼이 흔하지 않던 당시, 단호하게 이혼을 결행했다.
그녀는 이런 시련을 거치면서 결연한 의지, 자기 확신, 낙관적 태도로 무장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했고, 그런 품성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제럴드 포드가 두 살 때, 어머니 도로시는 정직하고 성실한 그림판매상과 만나 재혼했다. 제럴드 포드의 이름과 성은 양부(養父)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머니와 양부로부터 포드는 인간에 대한 신뢰, 정직과 공평함과 독립심, 공동체에 대한 참여의식과 애국심, 삶에 대한 낙관 등을 배웠다.
포드는 고교 시절부터 미식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미식축구를 통해 포드는 감독의 명령을 경청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법, 협동정신과 자기희생 등을 배웠다. 대학 시절 한때 주전(主戰)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조차 그는 '늘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과 인내심을 배웠다.
고교 시절, 포드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식당으로 생부가 찾아왔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됐다. 자칫하면 엇나갈 수도 있는 인생의 위기였다. 포드는 어머니와 양부의 사랑에 힘입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무렵 프로 미식축구팀들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포드는 예일대 법과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 시절 그는 미식축구부 코치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예일대를 3등으로 졸업한 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포드는 미시간 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 직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해군에서 항공모함 근무를 포함해 47개월간 복무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치렀다.
부통령이 되다
1948년 포드는 미시간주 제5선거구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출마, 당선됐다. 이후 그는 1973년 부통령이 될 때까지 이 선거구에서 12선을 기록했다. 하원의원 제럴드 포드는 성실하고 근면한 정치인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65년에는 하원 공화당 원내 대표를 맡았다.
그의 꿈은 연방하원의장이었다. 하지만 1972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원내 다수의석을 차지하지 못함에 따라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정계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자리가 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미국 부통령 자리였다.
1973년 10월,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가 수뢰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사임했다. 수정 헌법 제25조에 따르면, 부통령 유고시 대통령은 상하양원의 인준을 받아 부통령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텍사스주 지사를 지낸 민주당 출신 정치인 존 커널리를 부통령으로 임명하려 했다. 커널리는 오래 전부터 닉슨이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던 인물이었다.
커널리는 닉슨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하지만 미국의 정치풍토는 ‘철새정치인’을 용납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그를 배신자로. 공화당은 그를 기회주의자로 간주했다. 양당 지도자들은 닉슨에게 커널리를 부통령으로 인준해 줄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미 워터게이트 사건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던 닉슨은 부통령 인준 문제를 놓고 의회와 싸움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닉슨은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의 두 지도자, 즉 칼 앨버트 하원의장과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백악관으로 초치해 부통령 후보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제럴드 포드를 추천했다. 앨버트는 후일 “우리는 닉슨에게 포드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의회가 포드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이 때 이미 물밑에서는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앨버트 하원의장이나 맨스필드 원내대표는 물론 닉슨 대통령조차 ‘이번에 임명되는 부통령이 머지않아 대통령직을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제럴드 포드가 정치적 경험과 리더십,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가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럴드 포드에 대한 검증은 가혹할 정도로 철저했다. 350명의 FBI요원들이 그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은행계좌, 선거비용, 교우관계 등 포드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의회도서관은 포드가 25년간 하원으로 있으면서 행한 모든 표결과 연설을 조사,분석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상원윤리위원회와 하원법사위원회는 포드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진행했다.
그 결과 포드는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479대 38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통령으로 인준되었다.
국민 화합을 위하여
1974년 7월24일, 연방대법원은 닉슨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 된 백악관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닉슨 앞에는 탄핵소추는 물론, 형사소추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비서실장 알렉산더 헤이그(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를 포드 부통령에게 보내 “대통령직을 승계할 포드가 닉슨의 사면에 동의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제안했다.
포드는 주변의 조언을 구한 끝에 그러한 ‘흥정’을 거부했다. 그런 ‘막후 흥정’의 결과 대통령이 된다면, 이미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추락할 대로 추락한 대통령직의 권위는 회복 불능으로 추락할 것이고, 그것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74년 8월8일 저녁, 닉슨은 결국 대통령직 사임을 선언했다. 다음날 포드는 백악관에서 대통령 취임선서를 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선거에 의하지 않고 부통령과 대통령이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포드의 아내 베티 포드 여사는 이를 두고 ‘우연히 대통령이 됐다’고 표현했다.
닉슨 대통령의 ‘거짓말’로 대통령직의 권위가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포드는 취임사를 통해 ‘진실’과 ‘정직’을 강조했다.
“저는 ‘진실’이란, 정부를 함께 묶어주는, 그리고 정부뿐만 아니라 문명 자체를 묶어 주는 아교와 같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정직은 항상 최선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데 공개적이고 허심탄회한 저의 본성이 바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 나라의 기나긴 악몽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취임사에서 말한 것처럼 포드는 정직과 ‘공개적이고 허심탄회한 본성’을 바탕으로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했다.
우선 그는 취임 한 달 만에 닉슨에 대한 전면적인 사면을 발표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검사인 리언 재워스키로부터 '닉슨에 대한 형사소추가 진행될 경우 최소 2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닉슨 사면을 결심했다. 그로서는 닉슨 재판이라는 ‘과거사’를 두고 국론분열을 야기하면서 씨름하느니, 오일쇼크,경제난, 월남전 뒷수습 등 현안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은 여론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닉슨과 막후 흥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까지 제기 되었다. 결국 포드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의회에 나가 증언하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이때 포드가 바란 것은 단 하나, “미국 국민들이 자신을 정치적 결과가 어떻게 되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용감하게 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보아 주는 것”이었다.
닉슨사면에 이어 포드는 또 다른 사면을 단행했다. 월남전 징병기피자들과 탈영병들에 대한 사면이 그것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선서와 2년간의 대체복무를 조건으로 한 이 사면조치는 월남점 참전 군인들과 보수층의 분노를 야기했다. 하지만 포드는 이것 또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불가피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이런 조치들은 당시에는 물론, 1976년 대선 당시에도 포드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포드의 후임자인 지미 카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와 우리나라를 위해, 그리고 이 나라를 치료하기 위해 그가 했던 모든 일에 대해 나의 선임자에게 감사한다.”
겸손하고 실질적인 지도자
워터게이트 사건과 월남전의 후폭풍으로 인해 포드는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최고지도자로서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첫째, 그는 실수로부터 배우는 사람이었다.
25년간의 의정생활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직책은 그에게 낯선 것이었다. 때문에 대통령 취임 초기, 그는 신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보좌관이 ‘WIN(Whip Inflation Now)'라는 인플레 극복을 위한 시민운동을 제안했다. 포드는 그런 자발적인 시민운동에 선량한 미국인들의 동참을 이끌어낸다면 적은 비용으로 인플레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적극 찬성했다. 그는 ’WIN'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의회에 나가 ‘WIN'운동 참여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그와 함께 포드는 우스갯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기야 인플레와 같은 경제문제를 시민운동으로 풀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순진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포드는 여기서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그는 이후 유능한 보좌관들이 분석, 조사하고, 참모들과의 토론을 거치기 전에는, 어떤 아이디어도 즉흥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둘째, 그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질투심이라고는 없었다.
크건 작건, 국내문제건 국제문제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포드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경청하고, 질문하고, 다양한 의견을 구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간결하게 표현된 것이면, 어떠한 반대의견에도 귀를 기울였다. 토론이 끝난 후에는 잠시 시간을 갖고 다른 의견이 없는지를 반드시 확인했다. 그리고 집무실로 향한 후에는 지체 없이 결단을 내렸다.
셋째, 포드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우기보다는 실질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미국 정치에 대한 거대담론을 제시하거나, 시대정신을 운위하거나, 거창한 프로젝트를 제안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25년 동안 하원의원으로 있으면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포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내놓기 보다는 기존의 정책들을 차분히 검토하고 실천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다. 대통령 재임 중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연방정책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있는 정책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 알아봅시다. 그것들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효과가 없는 것은 버리도록 합시다.”
현란한 구호, 겉보기에는 고상해보이지만 공허한 정치적 수사(修辭), 위대한 비전의 제시-이런 것들은 포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을 과시할 줄도 몰랐다. 늘 조용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평범한 언어로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바로 제럴드 포드였다.
국가 자존심 수호, 동구 인권 문제 외면 안해
넷째, 포드는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희생을 감수할 줄 아는 대통령이었다.
월남 패망 직후, 미국 상선 마야게즈호가 캄보디아 연안에서 나포되었다. 월남전의 악몽이 생생하던 때였지만, 포드는 단호하게 행동했다. 유엔과 중국을 통해 추진하던 평화적 해결노력이 무산되자, 그는 지체 없이 군사력을 투입했다.
해병대가 마야게주호가 억류되어 있는 캄보디아의 한 섬에 상륙해 선원들을 구출하고 배를 접수했다. 이 과정에서 15명의 해병대원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됐으며, 50여 명이 부상당했다. 그밖에 작전 지원에 나섰던 헬기 추락으로 23명의 공군특공대원이 사망했다.
다섯째, 포드는 헬싱키 조약 서명을 통해 소련-동구권 해체의 초석을 놓았다.
동서 진영 국가들이 서명한 헬싱키 조약은 유럽 각국의 국경선 보장, 내정 불간섭, 인권 존중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헬싱키 조약은 강경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얄타 체제의 영속, 다시 말해 소련의 동구지배의 합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널드 레이건 같은 보수파 공화당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같은 소련으로부터의 망명객들, 헨리 잭슨과 같은 반공적인 민주당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포드는 헬싱키 조약에 서명하면서도, 공산정권들을 향해 일침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헬싱키 조약에 서명하면서, 소련측을 향해 동구 위성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간섭 자제, 인권과 민족자결의 존중, 사상의 자유 보장 등을 강하게 촉구했다.
그가 추구했던 ‘평화’는 ‘평화를 위한 평화’,‘언어의 유희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공산정권 아래서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한 평화’, ‘서구 사회가 당연히 누리는 자유와 인권을 동진(東進)시키기 위한 평화’였던 것이다.
그의 노력은 후일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소련-동구 붕괴 후 많은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 제국의 붕괴는 헬싱키에서 시작되었다.”고...
진실과 성실로 헌정 위기 극복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포드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진실됨과 성실함을 통해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야기된 미국의 헌정 위기를 극복했다는 점일 것이다. 포드의 국내문제보좌관을 지낸 작가 겸 정치인 제임스 캐넌은 이렇게 말했다.
“포드는 남북전쟁 이후 미국에서 가장 위험했던 헌법적 위기 상황 후에 대통령직을 넘겨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정직함과 솔직함으로 겁에 질리고 화가 나 있던 미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정상적인 나라로 돌려놓았다. 뿐만 아니라 포드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단 한 사람의 정직하고 성실한 정치인이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포드와 노무현
글이 무척 길어졌다. 한국인들에게는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특별한 기억을 남기지 못한 한 평범했던 미국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길게 글을 쓴 이유는 단 하나, 그런 대통령을 갖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위험한 ‘헌법적 위기’를 맞고 있다.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다가 탄핵까지 당했던 노무현은 ‘제 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폭언과 망언을 쏟아 붓고 있다. 대통령이 한 마디 할 때마다 국가는 사분오열되고, 나라의 체통은 땅에 떨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게 된 좌익정권은 남북정상회담과 반미친북 분위기 조성을 통해 국면을 타개하려 꾀하고 있는 것은 우리 헌법질서에 대한 우회적인, 간교한 도전이다.
헌법질서 유지의 한 축인 국가안보도 말이 아니다. 노무현은 북한 핵실험의 위험성을 외면하면서, 한미연합사 해체-한미동맹 파괴를 일관되게 추진하는 한편, 소위 국방개혁법을 통해 감군(減軍)을 제도화하고, 복무기간 단축-모병제 강화 등을 통해 국방의 근간인 국민개병제를 와해시키려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대통령과 그 참모, 관료들이 만들어낸 부동산값 폭등과 세금폭탄, 이제는 일상화된 불황과 청년실업, 구조조정으로 국민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 아래서 국민들은 ‘겁에 질리고 화가 나 있다’. 그런데도 국민들을 보듬어 안아야 할 대통령이라는 자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언동만 되풀이하고 있다.
헌정위기와 ‘국민들이 겁에 질리고 화가 나 있는 상황’ 아래서 정직과 성실, 상식, 건실함으로 그 위기를 극복해 낸 제럴드 포드의 존재가 새삼 커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포드가 한 인간으로, 정치인으로, 대통령으로 보여준 가치들은 노무현의 오만과 독선과 무지와 허풍과 저열함, 그리고 국가안보와 북한인권에 대한 외면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내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대통령은 정말 할 일이 많다.
10년 좌익정권 아래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한미동맹과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고,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바로잡고, 경제를 재건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관료조직과 교육과 노조를 개혁하고, 국가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차기 대통령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지난 4년간 계속되어 왔고,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노무현의 폭언과 망언, 광언으로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이 밤, 그런 대통령의 등장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제럴드 포드와 노무현
- 강철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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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28, 17: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