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김정일' 사담 후세인의 죽음

눈알 뽑기, 혀 절단, 전기고문 등 만행 저질러
후세인, 쿠르드족 18만명 학살한 '중동의 김정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에 대한 교수형이 지난 30일 오전 6시(현지시간) 전격 집행됐다. 그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언론은 후세인을 ‘국제깡패’, ‘악의 축’, ‘중동의 히틀러’ 등으로 묘사하기를 주저 하지 않았다. 이라크 공격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독일과 프랑스도 후세인이 악(惡)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의 경우 지난 2003년 7월 공개된 육성 녹음테이프에서 후세인을 ‘이슬람의 원칙을 무시한 폭군’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1937년 4월 28일 바그다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티크리트 지방의 농촌마을 알 아우자에서 태어났다. 후세인은 아버지 없이 태어나, 계부 밑에서 자랐다.

젊은 시절 나치즘-사회주의-민족주의 심취

그는 아홉 살 때 가출해 외삼촌 카이르 알라를 찾아갔다. 카이르 알라는 당시 반영·반유대인 아랍 민족주의자 이었으며, 당시 이라크에 퍼져있던 히틀러의 나치즘에 빠져 있었다. 카이르 알라는 “알라께서 만드시지 않았어야 할 세 가지로 이란인, 유태인 그리고 파리들이 있다”고 후세인에게 가르쳤으며, 이것이 훗날 후세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후세인은 18세 되던 해 카르크 고등학교에 진학해,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시킨 ‘이라크 바트 아랍사회주의당’의 암살 행동대원으로 가입·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후세인은 1958년 압둘 살람 아레프 대령이 압둘 카림 카심 총리를 제거 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투옥·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내 탈옥해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63년 바트당이 카심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후세인은 다시 이라크로 돌아온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사담 후세인은 별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티그리트 출신들이 바트당을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66년 바트당 사무부총장에 선출된 후세인은 후견인인 아흐마드 하산 바르크 장군이 68년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자 혁명평의회 부의장에 임명돼 바트당의 2인자에 올랐다.

지하당 활동시절 “이라크를 스탈린 국가로 만들 것” 주장

후세인은 1979년 7월 바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권을 이어받아 대통령이 됐다. 후세인은 늘 스탈린을 추종했으며, 실제로 스탈린처럼 억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지하당 활동 시절부터 후세인은 그의 측근들에게 “나는 이라크를 스탈린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으며 권력을 잡자마자 반역죄로 60여명의 혁명평의회 의원을 처형했다.

후세인은 측근 장관들과 보좌관들로 하여금 그에게 반대한 정치범들을 총으로 직접 쏴 죽이게 하기도 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당시 전쟁을 반대한 수많은 측근 장교들이 원인 모를 헬기 추락 사건으로 죽어갔다.

후세인은 1984년에는 자신의 측근이던 오마르 알 하자 중장이 후세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오마르 중장과 그의 아들의 혀를 자른 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평화조약 체결 조건으로 후세인의 퇴진을 요구했을 때 이브라힘 보건장관이 “각하께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협정 체결 후 다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다음날 이브라힘 장관은 토막 살해된 채 발견됐다.

후세인은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관대하지 않았다. 1995년 그의 두 사위가 요르단에 머물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폭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사위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두 사위가 귀국하자 후세인은 72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을 살해했다.

대통령·친인척 비방시 ‘혀 절단형’ 법안 공포

1991년 걸프전을 틈타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시아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후세인은 탱크를 몰고 도시를 쑥대밭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약 14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죽었다. 반군 부상자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15개의 병원이 파괴됐고, 시민들은 산 채로 헬리콥터 위에서 던져졌다.

바스라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도 투옥 후 살해됐으며, 반군에 동요한 수많은 군 장교들은 즉결 처형됐다. 이 당시 바스라를 비롯한 이라크 남부에서 죽은 사람은 약 5만 명에서 30만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후세인의 철권통치하에서 이라크 비밀경찰들은 전기고문, 눈알 뽑기, 강간, 등을 자행했으며, 친인척을 체포하여 강간하는 등 정신적 고문등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2000년에는 대통령과 친인척을 비방하거나 욕할 경우 ‘혀 절단형(刑)’에 처한다는 법안을 공포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휘해 정치적 성격이 강한 국책사업을 과도하게 벌여 전 세계 석유 매장량 2위 국가인 이라크를 1천억 달러의 빚더미에 올려놨다. 후세인의 대통령 궁(宮)은 바그다드에만 32곳 등 전국에 걸쳐 약 70여개나 된다.

후세인 집권 기간 동안 총 4백만명 해외 도피

후세인 통치 하에서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가운데 약 400만 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탄압과 가난을 피해 해외로 도피했다. 특히 유능한 석유 기술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석유산업도 사양길에 접어들게 됐다. 후세인은 개인적으로 석유 밀매를 통해 연간 30억 달러를 챙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당국은 이를 미국의 경제제재 탓으로 돌렸다.

이와 함께 후세인은 ‘아랍의 맹주’를 자처하며 1980~88년 이란과의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을 주도했고 1970년대 후반부터 대량파괴무기(WMD) 프로젝트를 시작해 이란과의 전쟁에서는 독가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1987년 쿠르드족이 이라크 북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운동을 벌이자 독가스를 사용, 약 18만 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WP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후세인 사형은 정당”

이처럼 이라크의 독재 체제는 처음부터 수천 명의 반(反) 후세인 인사들을 처형하면서 공포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이러한 독재체제의 붕괴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인 워싱턴 포스트(WP)는 후세인의 사형 확정을 다룬 29일자 사설에서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아마도 김정일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은 피를 손에 묻힌 후세인이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면 어떤 범죄에 대해, 어디에서든 사형제도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고 논평했다.

WP은 “후세인에 대한 재판은 불완전했지만 이는 이라크의 불안정한 현실 때문으로 완벽한 재판이 이뤄졌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기사출처: 프리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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