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 아들, 美軍 폭격 맞고 戰死
워커 장군 교통사고死, 밴플리트 장군 아들 戰死, 軍隊 기피하는 한국의 지도층, 교훈으로 삼아야
중공군은 한국군 2군단을 무너뜨린 후 바로 청천강을 따라 원리-개천-영변쪽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으며 이것이 계속된다면 결국 신안주를 점령하여 서해안까지 완전히 후방봉쇄를 할 태세였다. 청천강을 넘은 유엔군 전체가 위기 일발의 순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워커가 중공군의 대 포위작전을 어렴풋이 감지하면서 등골에 땀이 배기 시작한 바로 그 시간에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평안북도 폐광촌인 대유동의 작전지휘소에서 벽면에 걸린 작전지도를 들여다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드디어 세계 최강의 미군을 망태기에 쓰러 담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모택동 주석에게 그렇게라도 사죄를 하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군이 공격한 이튿날, 중공군의 총공격령이 내려진 11월 25일 아침 팽덕회 사령관의 러시아어 통역관 겸 부관으로 따라왔던 모택동 주석의 아들 모안영 중위가 미군 폭격에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날 오후 늦게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안영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는 안영의 시신을 본국으로 갖고 오지 말고 현장에 묻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모안영은 러시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후 모택동의 비서로 있는 한 여성과 결혼했다. 비판적 시각에서 ‘모택동 전’(The Chinese Revolution and Mao Zedong in World History)을 쓴 말라스피나와 안에 의하면 모안영의 결혼을 두고 모택동은 왜 하필 그의 비서와 결혼하느냐며 아들의 뺨을 후려쳤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안영의 죽음이 알려진 후에도 그의 아내는 전혀 슬픈 기색을 띠거나 남편의 전사 현장을 찾는 일이 없었다.
안영은 한국전쟁이 나자 러시아어 통역관 겸 팽덕회 사령관의 부관이 되어 조선에 파견되었다. 중공군 사령부는 김일성 사령부가 있는 대동의 금광 폐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폐광촌 대유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미군 폭격이 심해지자 민가 건물에서 나와 새로 판 동굴로 자리를 옮겼다.
홍학지의 회고록에 따르면 팽덕회는 민가 건물에 사령부를 차려놓고 있으면서 미군비행기가 위에서 웡웡 거려도 그까짓 비행기소리 갖고 뭘 그리 겁내느냐며 자리를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를 본 부하들이 사령관의 신변을 걱정하여 민가의 뒤편 언덕에 큼지막한 동굴을 뚫고 그곳으로 사령부를 강제로 옮겼다는 것이다.
동굴이 거의 완성된 것이 11월 24일이었다. 그날 따라 마침 미군 비행기들이 사령부 근처로 날아와 약간의 기총소사를 하고 돌아가 아마도 내일이면 큰 폭격이 있을지 모른다며 25일 아침 일찍 이사를 서둘렀다. 팽덕회는 사령부 이전을 매우 싫어해 그대로 있겠다고 했다는 것인데 밤중에 홍학지 부사령관이 벽에 붙어 있는 작전지도를 떼어 동굴로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팽은 이른 아침 밥을 먹자마자 동굴로 이사를 했다. 모안영도 같이 이사를 했다가 ‘무슨 일로’ 민가의 구 사령부로 잠깐 내려 왔다가 그대로 미군 폭격을 맞았다.
마침 당시 사령부에는 후방참모부의 요원 겸 조선어 통역관으로 파견된 조선인 출신 조남기가 와 있었다. 조남기의 증언에 따르면(돌아보는 력사, 연변문사료 제10집, 료녕민족출한사, 2002) 사령부에 파견되어 현장에 갔을 때 안영은 통역장교 자격으로 미리 숙소를 잡고 있었는데 조남기가 들어서자 먼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전쟁터에서 같이 지내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조남기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것 같아 안영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모안영은 자신이 모 주석의 아들임을 고백하면서 그러나 절대로 전쟁기간 동안 이런 사실을 밖에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나이도 같은 20대 후반으로 비슷했고 또 통역장교라는 특기도 같았기 때문에 둘은 처음부터 매우 친하게 되었다.
안영은 러시아 유학으로부터 막 돌아왔기 때문에 현장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사령부 요원들은 병사들이 길어다 주는 물을 갖고 세수도 하고 방 청소도 하고 약간의 빨래도 했는데 안영은 처음에는 물을 매우 충족하게 썼다.
그러나 조남기가 하루 종일 물 한 버킷 이상를 절대 쓰지 않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금방 이유를 알아차리고 그도 하루에 조그만 물통 하나 이상을 절대 쓰지 않았다고 한다. 안영은 지갑에서 아내 사진을 꺼내 조남기에게 보여주면서 “나는 아내를 매우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조남기는 당시 미군 전폭기의 끊임없는 공습에도 불구하고 조선 지형을 잘 이용하면서 보급선을 개설하고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3성장군까지 올라갔는데 만일 모안영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 모택동의 후계라도 되었더라면 상당한 정치적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8군 사령관이었던 존 워커는 크리스마스 공세가 실패한 후 의정부의 한 비탈길에서 교통사고를 만나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밴플리트 장군도 함께 한국전에 참전했던 아들 밴플리트 공군 중위가 북폭 중 적의 포격에 맞아 전사하는 아픔을 겪었다.
미군은 2차대전의 영웅들이었던 패튼 장군, 아이젠하워 등 이름 있는 장군의 자식들이 모두 한국전에 참여했다. 돈 있고 빽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말이 한국에는 오랫동안 나돌았는데 이 말이 사실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이 많았던 것이 사실인 이상 모안영의 전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한다.
鄭逸和·편집위원
6.25 때 모택동, 밴플리트 아들 戰死
- 鄭逸和(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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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1, 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