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친위대 '대남공작조직' 해부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공격을 개시, 전국적 총파업과 동시에 도처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
김정일 친위대 ‘대남공작조직’ 대해부
[기획연재] 김정일 정권을 해부한다-7.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


김필재 기자 2007-01-09 오후 11:16:34

[1]“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만 한다. 전국적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의 도처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발전소·방송국 등 중요한 공공시설을 점거함과 동시에 전력의 공급중단과 함께 통신·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北)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한다” <김일성 교시, 1974년 12월 대남 공작원들과의 담화>

북한의 대남공작기관 소속 인원들은 1970년대 초 이래 대략 15,000명 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후로 큰 변화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북한이 운영하고 있는 대남전문공작부서로는 당 중앙위원회 산하 ‘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5호실’ 등 4개의 공작부서와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 ‘정찰국’, ‘국가안전보위부’ 등이 있다. 이들 조직은 각자 독립성을 유지한 채 독자적인 대남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중요 공작사안에 대해서는 각 부서에서 특급 공작요원을 차출해 특별팀을 구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남공작조직 목표 “미군 축출-남조선 혁명-사회주의 통일”

특히 북한 대남공작기관의 목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통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의 통일전선부는 “북조선은 1945년 공산화와 더불어 식민지배와 모순된 자본주의의 질곡에서 일거에 벗어났으나, 남조선은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이러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미군을 축출하고 남조선 해방과 혁명 그리고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을 동시에 이루는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통일전선부(통전부): 조선로동당 산하의 4개 대남부서 가운데 ‘수석’은 통전부로서 김정일이 추진하는 대남공작의 기본 골격이 이 조직에서 만들어진다. 통전부는 1977년 김일성의 직접교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통전부는 선전, 대남방송, 삐라배포, 해외교포들의 포섭 및 남한 내 친북조직 관리 등 공개적인 선전·선동공작을 펼친다. 이부서는 직할부서로 직접침투과, 남북회담과, 해외담당과, 대남심리전 및 정보자료를 분석하는 조국통일연구원 등이 있으며 다른 공작부서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이다.

통전부의 외곽단체로는 지난 2004년 4·15 총선 당시 ‘반(反) 한나라당 투쟁 지침’을 내려 국내친북세력을 지도하기도 했던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전)을 비롯하여, 범민련과 범청학련(이적단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 등은 모두 통전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

대부분의 통전부 소속 대남공작 요원들은 공개적인 행사나 회담 때 주로 가명(假名)과 가직위(假職位)를 쓴다. 남북대화나 교류 등으로 낯익은 전금진(본명 전금철), 안병수(본명 안경호), 이종혁, 94년 3월 남북실무접촉에서 ‘서울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해진 박영수(사망) 등 대남전위기구 간부들의 실제 소속직책과 직급도 통전부의 부부장 급이다.

통전부장, 대남공작 총괄하는 최고 실무책임자-김정일 최측근

그동안 통전부의 최고 책임자는 지난해 8월 사망한 임동옥 제1부부장이었다. 통전부장은 대남공작을 총괄하는 최고 실무책임자로, 김용순(2004년 9월 사망)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해 역대 부장이 김정일의 최측근이었다. 대북전문가들은 통전부장으로 기용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현재 부부장으로 활동 중인 이종혁·최승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꼽고 있다.

40대 후반의 최승철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적십자회담 북측 단장으로 모습을 드러낸 뒤, 남측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짧은 기간에 과장에서 부부장으로 고속 승진했으며, 현 제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한 대북전문가는 “임 부장과 달리 최 부부장이 제1부부장이라는 보도에 대해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그동안 보여준 모양새로 미뤄 제1부부장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만 하고 있다”면서 “북한이 세대교체 생각이 있다면 그를 임명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직책에 비해 경력이 너무 짧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지난해 6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의 화염 속에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던 안경호의 기용 가능성도 나오고 있지만 남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그가 임명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이종혁 역시 남북관계에 오랫동안 종사했고 미국과 일본 등 국제관계에도 매우 밝지만 그동안의 활동경력으로 볼 때 비중은 떨어진다는 평가다. 이와 함께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 노동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이나 김기남 노동당 비서의 기용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장성택은 종전 남북관계와 관련 없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있으면서도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남한의 산업시설을 참관하는 등 남북 관계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대외연락부, 남한내 친북조직-정당-사회단체 조직원 관리

▲대외연락부(사회문화부): 통전부가 북한의 통일방안을 만드는 ‘두뇌’라면 대외연락부는 통전부가 만드는 통일방안을 실행하는 ‘수족’이다. 특히 대외연락부는 남한 내 친북 조직을 유지·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대남사업을 관장한 후 대외연락부는 남한지역을 관장하던 10개 지역 담당과를 4개 지역과로 통폐합하고 그 대신에 4개의 남조선 지도층 고위인사 포섭당담과를 신설했다.

이부서의 대표적인 공작원으로는 남한출신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오른 거물간첩 정경희를 비롯해, 92년까지 지하당인 남조선로동당을 만들어 김낙중(평화연대 평화연구소 고문) 등을 관리하다 북한으로 도주해 지난 2000년 사망한 이선실, 95년 10월 24일 부여에서 총격전을 벌이다 검거된 ‘부여간첩’ 김동식, 15대 대선직전 적발 체포된 ‘울산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자살), 98년 12월까지 반국가단체인 민혁당을 지도하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가다 해군 광명함의 포격을 받아 반잠수정이 격침됨으로써 사망한 대외연락부 5과장 윤택림 등이 모두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었다.

현재 대외연락부는 전 통전부 제1부부장이었던 김일성의 외오촌 조카 강주일(본명 강관주)이 총괄하고 있다. 강주일은 김정일의 ‘수족’으로 불릴 정도로 김정일과 밀착관계이며, 조총련과 평양을 연결하는 채널로서 조총련에서 김정일에게 전달되는 성금을 관리하고 있다.

▲작전부: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북한 인민군 대장)이 지휘하는 작전부는 평양의 모란봉구역 전승동 노동당 3호청사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남 및 대외공작부서로서 남한과 제3국에 비합법적으로 침투하는 공작요원을 일정한 장소까지 안내하는 임무와 요인암살 및 납치, 군사정찰 폭파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작전부 산하 ‘4·14연락소’ , 위성통신 전파 분석 및 독극물 제조

북한 간첩들을 두 가지로 분류할 때 전투원(무장간첩)과 공작원(고정간첩)으로 나누는데 이중 전투원은 바로 노동당 작전부 요원을 지칭한다. 작전부는 간첩을 비무장지대(DMZ)나 해안선을 통해 남한에 직접 침투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여러 공작기구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평양의 ‘3호청사’ 근처에 있는 4·14연락소는 노동당 작전부의 실무적인 지휘본부이다. 이 4·14 연락소에는 국외에 있는 북한 간첩에게 지령을 보내는 통신시설을 비롯해 각종 독극물의 제조소 등 간첩활동에 대한 지원시설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2미의 콘크리트 담장으로 둘러싸인 4.14연락소는 지난 76년경부터 자체 제작한 위성통신 안테나로 위성통신에서 나오는 전파를 잡아낸 뒤 이를 분석해 김정일에게 보고해 왔다. 물론 이 연락소는 국제위성통신기구(INTELSAT)에 가입하지 않았다. 4.14연락소의 통신기술은 북한의 다른 연구소나 전문기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최첨단의 기술력을 자랑하며 연간 수백만 달러를 김정일로부터 지원받는다. 4.14연락소는 역사가 35년 정도 됐다.

1965년 가을 김일성은 당시 대남사업을 이끌던 이효순에게 “대남사업에서 통신은 생명”이라고 강조하고 “통신을 정보조직의 골간으로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1965년 겨울에 창설된 4·14연락소는 현재 본사 인원 3천명, 지방근무인원 2천명 규모로 되어 있다.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 평양시 창광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35호실은 과거 대외정보조사부의 후신으로서 각종 테러 및 대남·해외정보를 수집하고 해외인사를 포섭·매수해 남한으로 투입시키는 등 대남 우회침투 활동을 주로 한다.

해외간첩공작, 국제·대남테러공작 등도 35호실의 주요 임무로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과 베를린, 파리 등 주요 도시에도 공작거점을 두고 있다. 35호실은 주로 제3국을 경유해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고 있다. 87년 대한항공 KAL 858기 공중폭파사건,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사건 등이 대표적인 35호실 작품이었으며 교수간첩 무함마드 깐수(본명 정수일·전 단국대 사학과 교수)도 35호실 소속이었다.

건국이래 최대 위기 직면, ‘연방제 적화 통일’ 배제할 수 없어

특히 잠비아주재 대사관 소속 정보원으로 활동하다 귀순한 차성근씨도 35호실 소속의 공작원이었다. 월간조선 최근 보도에 따르면 현재 35호실의 책임자는 부부장 중 한 명인 허명욱이 지난 2000년 3월에 이어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허명욱은 1978년에 발생한 영화배우 최은희 씨 납치사건과 1979년 4월의 고상문(당시 직업 교사) 납북사건을 지휘한 장본인이다.

35호실은 5명의 부부장 밑에 해외담당부서, 대남사업부서, 지원부서 등이 있는데 동남아 지역은 ‘35호실 3과’에서 담당한다. 최근 김정일 비자금 문제와 관련해 마카오에서 돈 세탁을 담당했던 ‘조광무역’이 대표적인 ‘35호실 3과’ 소속의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북한의 대남공작조직은 실재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공작활동의 위험성을 감지하지 못한다. 햇볕정책과 대북 포용론, 그리고 '우리민족끼리'로 위장한 '거짓' 평화공세에 대북경계심이 이완된 까닭이다.

김정일 정권의 대남공작 활동과 이에 부응해온 남한 내부의 친북좌경화 상황을 연결시켜 본다면 우리사회가 곧 ‘적화’ 되고 북측 통제에 의한 ‘연방제 통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건국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국가 원로들의 지적을 가볍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김정일 정권이 지난 반세기 동안 구축해온 대남공작조직이 지금도 '남조선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통일'을 목표로 활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2]북한의 간첩양성 기관(1)-‘봉화정치대학’
주요교육내용, 지하당건설이론·심리학·비합법활동전술

'우리 북반부에서는 민간단체는 없지만, 남조선에는 그 이름도 잡다한 민간단체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측이 만든 민간단체도 적지 않다. 남조선 당국자들을 반민족적 분열주의세력으로서 몰아붙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단체를 만들어 남조선인민 가운데서 통일의 열망을 쌓아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김일성 교시, 1972년 8월 제1회 남북적십자회담대표들과의 회담)

북한의 대남공작요원(고정간첩)은 사회문화부 소속의 ‘봉화정치대학’에서 양성되며 ‘전투원’ 즉 무장간첩은 노동당 작전부 산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양성하고 있다. 이 두 대학은 지난 1957년 이후 ‘686훈련소’. ‘금강학원’, ‘금성정치군사대학’ 등으로 변천을 거듭해오다 지난 1992년 이후 지금의 명칭으로 정착됐다.

고정간첩을 양성하는 봉화정치대학의 학제는 과정에 따라 1년 내지 3년이다. 입학대상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5년을 졸업한 ‘전투원’ 출신이거나 비밀리에 선발한 요원들로서 대상자의 출신배경에 따라 교육기간이 결정된다. 주요 교육내용은 지하당 건설이론, 정보학, 지형학, 적국활동 심리학, 외국어, 남한 및 국제정세. 비합법활동전술, 수영·잠수·운전 등이다.

남한과 해외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각종 정보수집과 지하조직 건설, 그리고 와해활동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최고의 환경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고령의 몸으로 맹활약한 이선실(2000년 사망) 등 공개·비공개 대남사업 종사자 거의 모두가 이 봉화정치대학 출신이다. 한편, 북한의 대남사업은 그 특성상 비밀보안 문제가 생명으로 그동안 김일성·김정일 이외는 어떤 인물도 이 분야를 건드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67년 1월 30일, 평양의 주요 기관과 기업소에 현지지도를 나왔던 김일성이 당시 연락부장이었던 이효순에게 “오늘은 동무들의 사업을 좀 알아보자”며 ‘686훈련소’(봉화정치대학)로 승용차를 돌렸다. 당시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 김창봉 대장을 비롯, 당 간부와 정무원 간부 수십명이 김일성을 수행했다.

김일성이 탄 차가 용성구역으로 들어서자 김일성은 갑자기 차를 세우게 했다. 그는 책임서기(비서실장)를 시켜 연락부장 이효순 외에는 누구도 동행시키지 마라고 지시했다. 이날 김일성은 무려 6시간 동안 학교를 시찰했다. 그동안 고위간부들은 용성구역의 도로 위에서 김일성이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김정일, 김현식·손광주 공저)》

80년경 김정일은 대남담당 4개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남사업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정보수집과 관련해 다른 나라의 교훈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그 모델로 2차 대전의 소련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944)가 있다. 앞으로 정보사업은 ‘조르게식’으로 해야 한다.”

이후부터 공작원들은 조르게를 많이 연구하게 됐다. 북한의 대남 공작원이라면 반드시 독파해야 할 ‘대외정보활동의 경험과 교훈 모음집 30권’이란 책의 각 권 첫장에도 “정보사업은 조르게식으로 하여야 합니다”라는 김정일의 말이 적혀 있다.

왜 김정일은 이처럼 ‘조르게’를 대남 공작원의 ‘모델’로 강조했던 것일까?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소련판 제임스 본드’라는 수식어가 붙는 리하르트 조르게의 면면을 잠시 살펴본다.

《1895년 독일인 석유기사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르게는 1차대전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철십자 훈장도 받았다. 그런 조르게의 직접적인 변신계기는 부상으로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로부터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부터다. 의병제대와 함께 베를린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조르게는 이후 기자로 일하며 소련을 제발로 찾아가 간첩교육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차이퉁’지 상하이 특파원으로 부임(1930년)한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히고 아시아 농업사를 탐구하며 인맥을 쌓아나갔다. 소련의 지시로 도쿄로 가게된 조르게는 독일인 사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일본 문화에 대한 심층기사로 일본 권력층의 환심도 얻었다. 이를 통해 조르게는 일본 수상실을 비롯한 고위층에 일본인 첩자들을 심기도 했다.

1941년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진격할 위험성 때문에 소련은 시베리아 방면에 배치해 놓은 100만 병력을 대(對)독일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조르게는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극비정보를 모스크바로 타전한 후 일본 헌병에 체포된 조르게는 도쿄의 스가모(巢鴨) 형무소에 감금,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1944년 1월 20일 사형이 확정되고 동년 11월 7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조르게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던 소련은 그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베리아사단을 독소전에 투입·대대적인 반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조르게의 스파이 활동은 성공적인 공작활동의 모범적인 사례로 각국 정보기관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어쨌든 김정일의 지시 이후 세계 유명·무명의 정보원들에 대한 분석이 대남교육내용에 많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북한의 대남공작요원들은 이들의 정보수집 사례와 공작원 개인의 정보활동을 서로 비교해보기도 하고 실기토론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북한의 간첩양성기관(2)-‘김정일정치군사대학’
주요교육내용, 자폭론·혁명역사교육·게릴라전술


북한의 대남공작요원을 양성하는 5년제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의 교과과정은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를 비롯한 사상교양이 40%, 전투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체단련 사격·격술 등이 40%, 사진 운전 등 기술교육이 20%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bemil

‘봉화정치대학’과 더불어 김정일이 가장 신뢰하는 대남공작요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하 군사대학)에서 양성된다.

연간 100-200명의 대남침투 요원들을 양성해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대학은 지난 92년 학교 창립 35돌을 맞으며 북한의 교육기관 사상 처음으로 김정일의 이름을 사용했다.

5년제 군사대학의 교과과정은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를 비롯한 사상교양이 40%, 전투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체단련 사격·격술 등이 40%, 사진 운전 등 기술교육이 20%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우선 일상적인 정치사상교육 즉 당과 수령을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사고의식을 가진 친위전사로 교육시키고 있다.

실제로 김정일은 대남사업을 장악하면서 ‘자폭론’을 교과목에 집어넣도록 했다. 전투원이든 공작원이든 ‘자폭론’을 배워야 한다. 그 예로 ‘철학교재’를 들 수 있다. 전체 5장 21절로 된 이 책은 1장-철학이란 무엇인가, 2장-주체의 혁명적 세계관, 3장-주체의 혁명적 수령관, 4장-주체의 혁명적 인생관, 5장-혁명적 자폭관으로 되어 있다.

군사대학과 봉화정치대학에서는 이 같은 내용을 1학년 때부터 배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정보원들은 자폭을 ‘옆집에 물 길러 갔다 오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기초적인 훈련을 단련하기 위해 태권도는 평균 3∼4단 이상이며, 수영은 먹을 것만 있으면 바다나 강에서 수십 시간 이상은 살 수 있도록 육성하고 있다. 또 하루 저녁 약 1백50리 정도는 지형지물에 관계없이 5∼6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전술 및 비합법 훈련의 내용으로서 육상에서 이루어지는 유격전술훈련, 습격, 매복, 암살, 납치훈련, 전투조훈련, 각종 군사 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격전술훈련은 유사시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 산악 및 도시 게릴라전법을 말한다.

습격훈련은 일정한 목표물을 불시에 매복 기습하며 암살 납치 또는 소규모 인원으로 다수를 테러하는 것이다. 전투조훈련은 2∼3명이 한 개조를 구성해 중요시설폭파, 군사정찰, 고정간첩간의 연락공작 및 일정한 장소까지의 안내와 공작장비지원, 암살, 납치 등의 훈련을 말한다. 각종 군사 장비를 다룬다는 것은 육상에서 움직이는 각종 수송수단을 다루는 법, 아주 작은 권총에서부터 비반충포까지 발사할 수 있는 등의 기술을 말한다.

해상전술훈련에는 항해전술, 엔진운전법, 통신, 수중폭파, 수중잠수훈련 등이 있다. 항해전술훈련이란 배가 정확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항법, 즉 군사학적 측면을 접한 항해사 기술과 선박엔진 운전법 선박통신을 자유자재로 교신하여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5톤급 이상 2백 톤급 이하의 선박은 군사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단독으로 운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편, 김정일은 대남사업 지휘에 발을 들여놓은 79년 이후 전투원들에게 정신력과 함께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해에 전투원 3명이 남한에 침투했다가 나무꾼에 발각되어 10여 일간 국군 포로망에 걸려 있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3명은 그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들 전투원 3명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일은 “이번에 동무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또 무쇠 같은 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전체 전투원들이 훈련을 강화해 하룻밤에 40-80km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전투원들은 매일 20kg이상의 모래 배낭을 메고 혹독한 행군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작원들에게는 이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고정간첩 활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정보활동 환경 자체가 자유스러운 사회생활이기 때문이다. 또 주요 활동도 자료수집이나 인물 포섭이어서 행군을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84년부터 이들도 행군을 해야 했다.

이유는 그해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가을, 네팔 등지에서 활동하던 북한공작원이 노출되어 여권과 공작금을 챙겨 나오지 못한 채 북한으로 비상복귀하게 됐다. 이들은 40일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중국국경 등 3개국 국경을 행군으로 돌파하고 북한에 복귀했다. 이들은 이후 영웅으로 부각되어 김정일을 접견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공작원도 행군을 강하하도록 지시했다. 이 때부터 북한의 공작원들은 물론 해외로 드나들면서 잠시 쉬는 초대소 인원들에 이르기까지 매일 4km, 주말 20km, 월말 40km미터씩 뛰게 됐다. 이처럼 군사대학에서 혹독한 교육을 마친 북한의 대남 공작요원들은 100% 작전부 등에 취직한다. 건강이 나빠 퇴교한 학생도 워낙 신분과 실력이 좋기 때문에, 각 군(郡)에 있는 조선로동당 군당 위원회 지도원으로 채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노동당 작전부,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 ‘미사일’ 수출

지난 91년 걸프전 당시 북한의 노동당 작전부 소속 요원들은 다국적군의 봉쇄망을 뚫고 스커드 미사일을 이라크로 수송한 적이 있다. 전쟁이 터지자 이라크 정부는 비공식 루트를 통해 김정일 정권에 미사일 판매를 제의했고, 당시 미국 등 국제사회의 경제봉쇄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던 북한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경제적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걸프지역의 해상과 공중은 다국적군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고 있었다. 따라서 정상적인 해상수송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김정일은 당 작전부장 오극렬에게 당의 명예를 걸고 미사일을 운반하라고 지시했고 작전부는 이를 위한 비상작전 체제로 돌입했다.

작전부는 당시 4천 톤 급부터 4만 톤 급까지의 대형무역선 20여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침투활동을 비롯한 각종 비밀활동에 동원되는 선박으로 대외적으로는 그냥 무역선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이 지시를 내린지 3일후 작전부는 두 척의 배를 선정해 분해한 개량형 스커드 미사일을 선적한 뒤 원산항을 출발해 태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수출 첩보를 사전에 입수해 놓고 있었다. 다국적군은 이 선박을 저지하기 위해 군함과 항공기를 띄우는 등 대대적인 나포작전을 펼쳤다. 이에 작전부 공작선 선장은 원래 항로였던 이라크 항구로부터 직항노선을 버리고 시리아 쪽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택했다.

다국적군은 두 선박의 신속한 항로변경을 포착하지 못하고 결국 놓치고 말았다. 두 선박은 시리아에 미사일을 내려놓고 곧바로 북한으로 되돌아 왔고, 북한제 스커드 미사일은 시리아를 거쳐 이라크로 전달됐다. 최첨단 장비로 대대적인 나포작전을 펼쳤던 다국적군으로서는 어이없는 실책이었다.

김정일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온 두 척의 작전부 선원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역시 당의 결사대는 다르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이런 일은 오직 나만의 전위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작전부장 오극렬을 통해 이들에게 ‘영웅칭호’를 주라고 지시했다.

김정일 정권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분쟁지역에 대한 무기 수출을 계속하고 있다. 수십 년간 축적된 이 방면의 경험 때문에 북한은 미국의 감시망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북한의 무기 공장과 과학자들은 세계의 비밀무기거래상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정보기관은 김정일 정권이 이 같은 무기밀매 네트워크를 통해 북한의 핵 기술, 핵물질, 심지어는 핵폭탄까지 거래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출처: 프리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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