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관대함을 모르는 자들!"

좌익집안출신 정치인의 反대한민국적 행패를 지켜본 L씨: "나는 조국과 이렇게 화해했다"
오늘 70세의 캐나다 동포 분(L씨)을 만났다. 뱅쿠버에 살면서도 나라가 되어가는 모습에 화가 나고 걱정이 되어서 한국에 올 때면 국민행동본부가 주최하는 대중집회에 자주 참석하는 이였다. 이 분이 살아온 歷程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니 노무현 대통령처럼 좌파가 되어 대한민국을 미워해야 할 가족史를 가진 이였다.

그는 중학생일 때 대학에 다니던 兄이 아버지로부터 뺨을 한 대 맞는 것을 보았다. 兄이 대학교에 들어가서 좌익이 된 데 대해 아버지가 주의를 주다가 화가 나서 그런 것이었다. 兄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 남침 때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와 풀어주었다. 그 뒤 兄의 소식은 모른다고 한다. 월북했다고 해도 남로당 숙청 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당시 시흥군이던 지금의 반포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이 분의 부친은 북한군 점령하에서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敵 치하에서 失人心할 정도의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9.28 서울수복후 그의 아버지는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부인과 아들은 매일 私食을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당시 중학생이던 L씨는 동네 친구들로부터 '빨갱이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고 뺨도 얻어맞았다고 한다. 그때 뺨을 때린 친구의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오래 남더라고 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의 1.4후퇴가 시작되었다. 서울사람들이 한강을 건너와 피란을 떠나는데 L군은 어머니와 함께 파출소 유치장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경찰관이 '너희 아버지는 갔어'라고 이야기했다. 풀어주었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경찰이 후퇴할 때 부역자들을 데리고 가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두 총살해버렸고 거기에 아버지가 끼여 있었다. L씨는 어머니와 함게 아버지 屍身을 언 땅에 묻었다. 그런 뒤 피란을 가려고 하니 도민증이 없었다. 부역자의 가족에게는 도민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도민증이 없으면 피란도 갈 수 없었다. 이 가족은 또 다시 중공군 治下에서 몇 달을 살아야 했다.

L씨의 4촌 형은 李哲承씨와 함께 반탁운동을 한 우익이었다. L소년은 부역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때문에 마을의 동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했다. 반발심에서 그는 6.25 敵치하에서 배웠던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크게 불렀다. 다른 소년들은 이에 맞서 '태극기'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이런 소년시절을 보내다가 그는 서울대학교 법대에 들어갔다. 이 수재를 어느 기자가 인터뷰했는데 그때 L씨는 '나의 꿈은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결국 죽일 놈은 김일성과 모택동이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만약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없었더라면 아버지는 정상적인 재판에 넘겨져 기껏해야 몇년 징역을 살고 나왔으리라. 중공군이 개입하여 국군이 후퇴하게 되니 부역자를 풀어줄 수도, 데리고 후방으로 갈 수도 없어 총살한 것이다. 그러니 김일성 모택동을 원망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가벼워지더란 것이다.

그는 農協에 다니던 중 5.16 군사쿠데타가 난 뒤 군대에 들어갔다. 비밀문서를 취급해야 하는 부서로 발령이 나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前歷으로 해서 비밀인가 취급 허가가 나지 않으면 고생하는 부서로 보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또 나라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이 생길 것 같아 미리 다른 부서로 보내줄 것을 건의하여 갈등의 요인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군에서 제대한 뒤 농협에 복직한 그는 하나를 맹세했다고 한다. 신문을 읽지 않겠다고. 특히 朴正熙 대통령이 싫었던 그는 그의 얼굴이 매일 나오는 신문을 보지 않고서 살기로 했다. 그렇게 한 4년 살다가 1960년대 중반에 비로소 신문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는 그 사이 세상이 바뀐 데 깜짝 놀랐다.
'아, 朴 대통령 이 분이 국민들을 도탄에서 구하셨구나'
그는 그동안 朴 대통령을 미워했던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국가를 도탄에서 구한다는 자신의 야망도 접어야 했다. 더 이상 한국에서 할 일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1997년 조국이 외환위기에서 시달리는 것을 외국에서 지켜보자니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대한민국을 저주하는 모습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특히 자신과 같은 부역자 집안 출신 정치인들이 그 私怨(사원)을 풀지 않고 대한민국과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는 것을 보면 '대한민국의 관대함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라고 생각한다.

'빨갱이 집안 아들이라고 욕하면서 내 뺨을 때리던 어릴 때 친구를 만나면 사과하고싶어요.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쟁을 일으킨 놈을 원망하지 않고 기습을 당하여 살기 위해서 무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과 대한민국을 한때나마 원망했던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지요. 6.25 때 중공군과 인민군이 비교적 軍紀가 엄정했다고 해요. 그야 당연하지요. 점령군으로 온 자들이니까 여유가 있어지요. 그에 반해서 국군은 기습을 받았고, 군경 가족들이 처형되고 있는 입장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처절한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저런 사정을 다 생략하고 국군과 미군이 잘못한 것만 들추어내어 과거사 조사를 한다니, 기기 막힙니다'

L씨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기록하여 꼭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제발 빨리 그런 글을 써서 젊은이들에게 읽힙시다'라고 재촉하면서 헤어졌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