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공영방송 기자의 북한 취재일기 번역
제1일 - 11월19일 토요일
‘평양행 항공편은 16번 게이트에서 탑승해 주십시요.’
우리는 베이징공항 커피숍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게이트로 향했다.
동승할 승객들을 보니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리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
섞여있지나 않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냥 편집광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된 (러시아제) 일류신 기내에 들어서니
하얀 장갑을 끼고 말쑥한 제복을 입은
고려항공 여자승무원들이 점심을 나눠주고나서
1주일 전에 나온 평양타임스 영자신문을 돌렸다.
톱기사는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이
오리농장을 방문하여
많이 발전해서 기쁘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발행일에 주체 94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 연대는 근대 북한을 세운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생일로부터
계산된 것이었다.
통상적인 일기예보 대신에
평양관광 안내방송과 함께
방문기간 중에 주체탑과
위대한 지도자가 혁명을 역설했던
고지를 보게 될 것이는 말을 들었다.
비행기 트랩을 처음 내려간 그룹은 베이징에서 구입한
알루미늄호일에 싸인 꽃다발을 든 대표단이었다.
그들은 김일성 동상으로 직행해서
참배할 준비가 돼 있었다.
짐 검사를 받은 다음
억지로 휴대폰을 맡기고
인수증을 받아야 했다.
여하튼 이 나라에선 보다폰 로밍이 안되지만
짐작컨대 당국자들이
우리가 내국인에게 휴대폰을 줘서
남한이나 중국측과 연락할 것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국제구호단체) 콘선 대표와
(외교부에서 배정한) 현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시내로 들어가면서 내가 놀란 것은
장작, 가구 또는 쌀이나 다른 식료품을
자루에 넣어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사방에 지천으로 깔린 것이었다.
교통체증은 전혀 없고
버스만 몇 대 긴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광고판과 네온싸인은 안보이고
회색과 흰색 고층단지가 계속 나왔다.
평양에는 신호등이 없고 여자 교통순경이 있었다.
교차로마다 바지와 모피 깃이 달린 깔끔한 청색 정장에
모자를 쓴 여성들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바톤을 들고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외교구역에 있는
콘선직원 아파트에서 묵는 것이 허용됐다.
이것은 큰 특혜로 간주된다.
평양에서 받아들이는 소수의 언론인들은
대개 호텔에 갇혀 지내기 마련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디플로에 갔다.
외교관들과 원조단체 직원들을 위한 클럽으로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록 멋진 카라오케 음악이
산악풍경을 배경에 깐 비디오반주에 맞춰 나온다.
제2일 - 11월20일 일요일
지난 밤 우리는 외교부 안내원에게
미사를 드릴 수 있는지 물었다.
촬영허가가 나올 것으로 별 기대는 않았는데
뜻밖에도 평양의 유일한 성당
앞자리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매그너스(카메라기자)는
미사진행을 조감할 수 있는 명당에 앉았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낯설지 않았으며
할렐루야와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의
번역곡은 알 수 있었다.
북한에선 20세기 초에
개신교 교회의 영향력이 더 컸기에
찬송가집이 그때부터 내려온 것 같다.
개신교 교회, 불교사찰, 러시아정교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미사고 뭐고 다 쇼처럼 보인다.
성가대는 핑크빛 복장, 피아니스트는
목 주위를 핑크빛 장미들로 두른 초록색 복장이다.
여성들은 미사포를 썼으며 모두가 힘차게 (성가를) 불렀다.
주임신부가 없어 축성이나 영성체 비슷한 것도 없다.
매그너스는 북한의 현 지도자 김정일 이름이
한 번이상 나오는 걸 들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카메라 앞에 설려고 하지 않지만
나는 성가집을 가방 속에 슬쩍 집어넣고
우리가 서울에 와서 이 성당이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지
콜럼번 신부들에게 문의하기 위해 메모를 했다.
그쪽 신부들 가운데 한 명이
한국전쟁중 대장정(1-4후퇴인듯) 길에 사망했다.
많은 한국인 사제들이 그때 피살됐다.
미사가 끝나고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
종종 자립이라고 번역되는, 기념탑으로 간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대개 김일성의-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우리가 듣기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며,
김일성 탄생 70주년을 위해 건설됐다.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깊다는 것이
이 나라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식어로서-
다음에 갈 개선문은 파리에 있는 것보다
분명히 5미터가 높다.
(주체탑)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는
평양시내 전망은 놀라웠다.
이 도시는 한국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났다.
안내인 말로는 40만개의 폭탄이 평양에 투하됐는데,
2차대전 때 독일 전체에 떨어진 것보다 많다고 한다.
그 다음엔 위대한 기념비로 갔는데
시내를 굽어보는 20m 높이의
시대착오적인 김일성 동상이다.
신혼부부들이 오랜 전통에 따라 화환을 놓는다.
좀 초현실적인 첫날 일정은 황혼에
여러 지도자들의 흉상이 평양을 내려다 보는
혁명열사묘지에서 끝났다.
기념탑의 연속에 다소 식상한 우리는
촬영에 적합한 노출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좀 빨리 진행하자는 뜻을 전달했지만
안내원은 우리의 열성 부족과
의무적인 화환 구입에 소극적인 것에도
아랑곳않는다는 분명한 인상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빈민가를 통과할 때
주민들이 몸을 구부리고
땅에서 부지런히 주어담는 걸 보았다.
약초나 풀을 뽑는 것처럼 보였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한 것인지 불확실하나
차를 세우고 물어볼 수 없었다.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변경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마음 내키는대로 서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것은 우회해서 시도해야 한다.
제3일 - 11월21일 월요일
아침 일찍 시골로 떠났다.
평양 밖 취재를 허락받은 TV취재진은 몇 안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뼘의 땅도 놀리지 않으며
기계화된 수송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사실.
수송수단이 있다면
군용과 민수용 혼용밖에 없는 것 같다.
개인소유가 없어
트럭이나 버스는 군대나 작업단위 소유이며
늘 만원이다. 정상 가동하는 트럭보다
고장난 트럭이 더 많았다.
오늘은 군대가 히치하이킹하는 것까지 보았다.
이게 세계 최대의 상비군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짐 싣는 가축으로 전락하여,
먼 길을 걸어다니면서
쌀 옥수수 배추나 꼴(가축사료) 장작을 짊어지고
등이 굽어 있었다.
추수가 끝날 무렵이라
겨울이 닥치기 전에 일을 마치기 위해
서두는 것이 분명했다.
갈색소파 현상도 있다.
북한에 도착한 후에 내가 본 것만 3개인데
모두 자전거 뒤에 실려 있었고
그 중 하나에는 작은 아이가 걽어앉아 있었다.
오늘 상태가 나쁜 사람을 3명 만났다.
한 남자는 발을 헛딛여 무거운 짐 밑에 깔렸다.
다른 한 남자는 도로변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 노파는 수레에 실려 가는데
지쳐서 기절한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1990년대 후반
3백만명이나 굶어죽었으며
영양실조가 아직도 큰 문제이다.
앞서 우리는 콘선이 지원하는 묘목장을 방문했다.
콘선의 산림전문가 마이크가 설명하기를
90년대 후반의 기근은 사람들이 산의 경사지에서까지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무를 마구 베었기 때문에
땅을 지탱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산사태와 홍수가 나서 황폐해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제는 산림녹화 경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콘선은 연말에 떠나야 하며
정부는 인도적 원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렸다.
묘목장에서 일하는 현지인들은
마이크와 좋은 인관관계를 맺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당국자들을 설득하여
묘목장 관리자 몇 명을 에디오피아에서 열린
콘선 웍샵에 데리고 가서 신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나누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게에서 우리를 대접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두 남자가 불판 위에 조개들을 얹어놓고
인화성 액체를 붓더니 불을 붙였다.
조개구이 바비큐였는데
몇 분만에 익자 현지 소주와 함께 내놓았다.
그건 애피타이저에 불과하여
점심 한 상이 따로 나왔다.
이것은 이번 주 내내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맞이하는 환대의 신호였다.
북한에는 속담이 있다.
수수죽을 먹더라도 손님에겐 쌀밥을 대접한다고.
그들은 마이크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이 분명했으며
여기서 이루어진 일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이 다시 외국인과 접촉하기까진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제4일 - 11월22일 화요일
오늘 우리는 산으로 올라가서
처음으로 눈이 쌓인 곳까지 갔다.
북한은 80%가 산지이기 때문에
식량자급자족이 늘 불가능하다.
또 다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마지막 수확물을
집으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산 고개를 넘어
회창 마을에 도착했다.
일부 눈에 띄는 경치가 정말 놀라웠다.
우리가 도착하자
현지 유치원에서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콘선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지어주고
추위를 막기 위해 유리창과 문을 새로 갈아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핑크 빛 옷을 입은 소녀들로서
한 시간까리 공연이 준비돼 있었지만
잠시만 머물다 떠나야 했다.
노래 자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곡조도 완벽했지만 무용은 매우 놀라웠다.
모두가 로봇 같은 방식으로 서로 손발이 착착 맞았다.
사실상 무서울 정도였다.
내가 가사가 뭔지 묻자 대답하기를
“유치원은 어머니의 품이고, 유치원은 당의 품이다.”
이게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의 말이라니.
다음에는 콘선이 상수도 설치를 도와준 마을을 방문했다.
마을 여성들이 신이 났다. 지금까지는
산에 올라가서 식수를 길어오고
겨울에 얼음같이 찬 냇물로 빨래하고
채소를 씻어야 했다고 한다.
김장철이어서 겨울에 먹을 배추를
소금에 절이노라 바빴다.
평양에 돌아와서 우리끼리 잠시 나가서
몇가지 거리 풍경을 미니 캠코더로 촬영했다.
수차에 걸쳐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시장개혁의 유일한 외형적 상징인
사설시장 방문 허가는 받지 못했다.
우리는 노점 하나를 촬영해냈다.
정권을 끌어내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설시장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보이기를 굉장히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떻게 하면 무역을 개선하고
아일랜드의 경제 모델에서 배울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제5일 - 11월23일 수요일
오늘은 색다르게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이 묵었던 초대소를 방문했다.
나는 그가 묵은 방으로 초대받아 기분전환을 했다.
관례대로 그의 방문을 경축하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고
대형 욕조에는 전기히터 장치가 된
빨간색 우단을 씌운 변기도 있었다.
이에 앞서 우리는 독촌 마을의 아파트지역에
콘선이 지어준 재래식 화장실을 둘러봤다.
맑은 물과 적절한 위생이 수천명의 어린이들을
불필요하게 죽이는 설사와 같은 질병을 예방하는
최선의 길이다. 코마요의 킬키마 출신 두알타 오루힌씨가 이 프로젝트를 18개월 동안 수행해 왔다.
그는 떠나는 것이 매우 섭섭하지만
북한의 절차 때문에 여기서 사귄 친구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추위가 모진 지역이었다.
바깥에선 주민들이 석탄 찌거기와 진흙으로
땔감 덩어리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북창으로 가서 북한의 광산지역을 둘러봤다.
북창에는 전국 최대의 석탄 화력발전소가 있어
심하게 오염돼 있었지만
이를 철거할 장비를 살 돈이 없었다.
가는 길에 콘선의 지원을 받고 있는 진료소를 방문했다.
이 아일랜드 기관은 재래식 분만실을 설치하고
작은 병실들을 새로 설치해 주었지만
우리가 둘러 볼 때 환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트는 청결해서 그날 아침 새로 깐 것 같이 보였다.
환자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완쾌되어 집에 갔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은 병상이 24개나 있는 산후조리실이 아닌가?’
나는 물었다.
'정말 산모 한 사람 애기 한 명도 없는 게 정말 가능할까요?’
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자기와 간호사 전원과 함께
계단에서 사진이나 같이 찍자고 졸라댔다.
우리는 진료소 다른 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짐작컨대 사라진 환자들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외국인들이 북한의 병원을 방문할 때의
표준 절차인 것이 분명했다. 엽기.
북창에서 우리는 단 하나 밖에 없는 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침실, 식당, 욕실과 사무실이 딸린
스위트룸을 배정받았다.
사무실에는 3대의 전화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초록, 하나는 베이지, 하나는 오렌지색으로
모두 작은 우단 깔개 위에 놓여 있었다.
어느 것도 작동되지 않았다.
난방이 안돼
영하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우리는 평양에서 전기히터를 가져 왔었다.
지방 관리들은 우리를 데리고 나가서
얼어붙은 식당에서 매우 맛있는 돼지 불고기를 대접했다.
그들이 나에게 밀주를 먹여 취하게 만들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6일 - 11월24일 목요일
오늘 아침에는 북한 괘종시계 소리에 잠이 깼다.
7시에 당직자가 모든 사람을 깨우러 다닌 뒤
얼마 안 있어 확성기를 단 미니밴이 돌아다니며
혁명가요를 틀어대면서
모든 사람들이 직장이나 학교에 가도록 재촉하였다.
평양외국어대학에 약속이 돼 있어서
곧장 길에 나섰다.
대학 과정이 있는데
언어집중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중학교도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15살짜리 교실에 들어갔다.
컴퓨터에 관한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가상현실, 모뎀, 컴퓨터에다 월드와이드웹까지
막힘없이 술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교실에서 무슨 웹사이트들을 방문하는지 묻자
침묵에 빠졌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곤
북한주민들은 인터넷사용을 허락받지 못했다.
북한에서 하나 뿐인 사이트가 있지만
나라 밖의 자료에 접속할 수 없다.
북한정권이 어떻게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영원히 차단할 수 있을지는 알기 힘들지만
그네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제7일 - 11월25일 금요일
우리 일행은 수퍼트루퍼의 음악 볼륨을
최고로 높여놓고 비무장지대를 향해
통일고속도로를 전속질주했다.
(콘선 현지 직원이 가장 좋아하는 테입은 아바!)
난데 없이 오렌지 작업복을 입은 여인들이
중앙분리대에서 낙엽을 쓸어내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실업 같은 것이 없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어서
아시아의 베를린장벽,
남북한을 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2차대전 후 소련과 미국이 38도선에서
한국을 갈라 놓았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세워 집권했다.
남한에서는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가 장악했다.
1950-1953년 사이의 한국전쟁에서
약 5백만명이 사망했지만
그 경계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때부터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긴장된
대치지역으로 남아 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양쪽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중이다.
큰 바위들이 한줄로 길게 늘어선 것이 보일 때까진
군사력이 그다지 증강된 것 같지 않다.
일종의 대전차 장벽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서울 70Km 표지판을 지나갔지만
물론 거기까지 갈 길이 없다.
내일 우리는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날아가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울로 갈 것이다.
북한 장교 한 명이 비무장지대를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수수한 건물에 도착해서
북한군 중령에게 소개됐다.
그가 우리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이 수년간에 걸쳐서
도발적 행동을 했다는 걸
우리에 주지시키려고 애썼다.
사실은 북한이 여러차례에 걸쳐서
남한까지 터널을 뚫어 침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비무장지대까지 차를 몰고 갔다.
4km 폭의 지역인데
허리에 차는 무기 이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실제 경계선에는 북한 병사들과
유엔 글자가 빛나는 군복을 입은 남한 병사들이
불과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남한 병사들은 미군 스타일 군복에다
광선차단용 선글래스를 쓰고
그곳 주변을 걸으면서 망원경으로 우리를 지켜 보았다.
북한 병사들은 차렷자세로 똑바로 서 있었다.
경계선에 걸쳐 있는 유엔막사에
북한군을 배치할 차례여서
중령은 자신과 우리들이 남한 쪽에 서 있다는 걸
말하면서 흐뭇해 했다.
여기서는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억제된 느낌이다.
핵위협이 상존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아무 가치없는 협상용 칩일지라도
일단 사용되면 정권이 소멸되는 댓가를 치를 것이다.
제8일 - 11월26일 토요일
휴대폰을 돌려받고 탑승수속을 마쳤다.
일이 잘못 될 경우에 대비하여
테입은 내 핸드백 속에 넣어 두었다.
북한은 매혹적이면서 좌절감을 느끼게 했지만
또한 아주 우호적이었다.
짧은 기간에 우리가 흘깃 목격한 것 이면에
정치범수용소와 보이지 않은채 진행되는
억압의 구조 또한 존재하는다는 것을
기억하기가 이따금 어렵기도 하다.
제1일 - 11월19일 토요일
‘평양행 항공편은 16번 게이트에서 탑승해 주십시요.’
우리는 베이징공항 커피숍에서
카푸치노를 마시고 게이트로 향했다.
동승할 승객들을 보니 그들 중 누군가가
우리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
섞여있지나 않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냥 편집광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된 (러시아제) 일류신 기내에 들어서니
하얀 장갑을 끼고 말쑥한 제복을 입은
고려항공 여자승무원들이 점심을 나눠주고나서
1주일 전에 나온 평양타임스 영자신문을 돌렸다.
톱기사는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이
오리농장을 방문하여
많이 발전해서 기쁘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발행일에 주체 94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 연대는 근대 북한을 세운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의 생일로부터
계산된 것이었다.
통상적인 일기예보 대신에
평양관광 안내방송과 함께
방문기간 중에 주체탑과
위대한 지도자가 혁명을 역설했던
고지를 보게 될 것이는 말을 들었다.
비행기 트랩을 처음 내려간 그룹은 베이징에서 구입한
알루미늄호일에 싸인 꽃다발을 든 대표단이었다.
그들은 김일성 동상으로 직행해서
참배할 준비가 돼 있었다.
짐 검사를 받은 다음
억지로 휴대폰을 맡기고
인수증을 받아야 했다.
여하튼 이 나라에선 보다폰 로밍이 안되지만
짐작컨대 당국자들이
우리가 내국인에게 휴대폰을 줘서
남한이나 중국측과 연락할 것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국제구호단체) 콘선 대표와
(외교부에서 배정한) 현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시내로 들어가면서 내가 놀란 것은
장작, 가구 또는 쌀이나 다른 식료품을
자루에 넣어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사방에 지천으로 깔린 것이었다.
교통체증은 전혀 없고
버스만 몇 대 긴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광고판과 네온싸인은 안보이고
회색과 흰색 고층단지가 계속 나왔다.
평양에는 신호등이 없고 여자 교통순경이 있었다.
교차로마다 바지와 모피 깃이 달린 깔끔한 청색 정장에
모자를 쓴 여성들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바톤을 들고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외교구역에 있는
콘선직원 아파트에서 묵는 것이 허용됐다.
이것은 큰 특혜로 간주된다.
평양에서 받아들이는 소수의 언론인들은
대개 호텔에 갇혀 지내기 마련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디플로에 갔다.
외교관들과 원조단체 직원들을 위한 클럽으로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록 멋진 카라오케 음악이
산악풍경을 배경에 깐 비디오반주에 맞춰 나온다.
제2일 - 11월20일 일요일
지난 밤 우리는 외교부 안내원에게
미사를 드릴 수 있는지 물었다.
촬영허가가 나올 것으로 별 기대는 않았는데
뜻밖에도 평양의 유일한 성당
앞자리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매그너스(카메라기자)는
미사진행을 조감할 수 있는 명당에 앉았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낯설지 않았으며
할렐루야와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의
번역곡은 알 수 있었다.
북한에선 20세기 초에
개신교 교회의 영향력이 더 컸기에
찬송가집이 그때부터 내려온 것 같다.
개신교 교회, 불교사찰, 러시아정교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미사고 뭐고 다 쇼처럼 보인다.
성가대는 핑크빛 복장, 피아니스트는
목 주위를 핑크빛 장미들로 두른 초록색 복장이다.
여성들은 미사포를 썼으며 모두가 힘차게 (성가를) 불렀다.
주임신부가 없어 축성이나 영성체 비슷한 것도 없다.
매그너스는 북한의 현 지도자 김정일 이름이
한 번이상 나오는 걸 들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카메라 앞에 설려고 하지 않지만
나는 성가집을 가방 속에 슬쩍 집어넣고
우리가 서울에 와서 이 성당이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지
콜럼번 신부들에게 문의하기 위해 메모를 했다.
그쪽 신부들 가운데 한 명이
한국전쟁중 대장정(1-4후퇴인듯) 길에 사망했다.
많은 한국인 사제들이 그때 피살됐다.
미사가 끝나고 북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
종종 자립이라고 번역되는, 기념탑으로 간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대개 김일성의-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우리가 듣기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며,
김일성 탄생 70주년을 위해 건설됐다.
가장 크고, 가장 높고, 가장 깊다는 것이
이 나라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수식어로서-
다음에 갈 개선문은 파리에 있는 것보다
분명히 5미터가 높다.
(주체탑)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는
평양시내 전망은 놀라웠다.
이 도시는 한국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났다.
안내인 말로는 40만개의 폭탄이 평양에 투하됐는데,
2차대전 때 독일 전체에 떨어진 것보다 많다고 한다.
그 다음엔 위대한 기념비로 갔는데
시내를 굽어보는 20m 높이의
시대착오적인 김일성 동상이다.
신혼부부들이 오랜 전통에 따라 화환을 놓는다.
좀 초현실적인 첫날 일정은 황혼에
여러 지도자들의 흉상이 평양을 내려다 보는
혁명열사묘지에서 끝났다.
기념탑의 연속에 다소 식상한 우리는
촬영에 적합한 노출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좀 빨리 진행하자는 뜻을 전달했지만
안내원은 우리의 열성 부족과
의무적인 화환 구입에 소극적인 것에도
아랑곳않는다는 분명한 인상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빈민가를 통과할 때
주민들이 몸을 구부리고
땅에서 부지런히 주어담는 걸 보았다.
약초나 풀을 뽑는 것처럼 보였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한 것인지 불확실하나
차를 세우고 물어볼 수 없었다.
일정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변경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마음 내키는대로 서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것은 우회해서 시도해야 한다.
제3일 - 11월21일 월요일
아침 일찍 시골로 떠났다.
평양 밖 취재를 허락받은 TV취재진은 몇 안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뼘의 땅도 놀리지 않으며
기계화된 수송수단이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사실.
수송수단이 있다면
군용과 민수용 혼용밖에 없는 것 같다.
개인소유가 없어
트럭이나 버스는 군대나 작업단위 소유이며
늘 만원이다. 정상 가동하는 트럭보다
고장난 트럭이 더 많았다.
오늘은 군대가 히치하이킹하는 것까지 보았다.
이게 세계 최대의 상비군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짐 싣는 가축으로 전락하여,
먼 길을 걸어다니면서
쌀 옥수수 배추나 꼴(가축사료) 장작을 짊어지고
등이 굽어 있었다.
추수가 끝날 무렵이라
겨울이 닥치기 전에 일을 마치기 위해
서두는 것이 분명했다.
갈색소파 현상도 있다.
북한에 도착한 후에 내가 본 것만 3개인데
모두 자전거 뒤에 실려 있었고
그 중 하나에는 작은 아이가 걽어앉아 있었다.
오늘 상태가 나쁜 사람을 3명 만났다.
한 남자는 발을 헛딛여 무거운 짐 밑에 깔렸다.
다른 한 남자는 도로변에서 고통스러워하면서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한 노파는 수레에 실려 가는데
지쳐서 기절한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1990년대 후반
3백만명이나 굶어죽었으며
영양실조가 아직도 큰 문제이다.
앞서 우리는 콘선이 지원하는 묘목장을 방문했다.
콘선의 산림전문가 마이크가 설명하기를
90년대 후반의 기근은 사람들이 산의 경사지에서까지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무를 마구 베었기 때문에
땅을 지탱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산사태와 홍수가 나서 황폐해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제는 산림녹화 경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콘선은 연말에 떠나야 하며
정부는 인도적 원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렸다.
묘목장에서 일하는 현지인들은
마이크와 좋은 인관관계를 맺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당국자들을 설득하여
묘목장 관리자 몇 명을 에디오피아에서 열린
콘선 웍샵에 데리고 가서 신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나누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은 가게에서 우리를 대접했다.
우리가 도착하자 두 남자가 불판 위에 조개들을 얹어놓고
인화성 액체를 붓더니 불을 붙였다.
조개구이 바비큐였는데
몇 분만에 익자 현지 소주와 함께 내놓았다.
그건 애피타이저에 불과하여
점심 한 상이 따로 나왔다.
이것은 이번 주 내내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맞이하는 환대의 신호였다.
북한에는 속담이 있다.
수수죽을 먹더라도 손님에겐 쌀밥을 대접한다고.
그들은 마이크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것이 분명했으며
여기서 이루어진 일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이 다시 외국인과 접촉하기까진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제4일 - 11월22일 화요일
오늘 우리는 산으로 올라가서
처음으로 눈이 쌓인 곳까지 갔다.
북한은 80%가 산지이기 때문에
식량자급자족이 늘 불가능하다.
또 다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마지막 수확물을
집으로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아름다운 산 고개를 넘어
회창 마을에 도착했다.
일부 눈에 띄는 경치가 정말 놀라웠다.
우리가 도착하자
현지 유치원에서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
콘선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지어주고
추위를 막기 위해 유리창과 문을 새로 갈아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핑크 빛 옷을 입은 소녀들로서
한 시간까리 공연이 준비돼 있었지만
잠시만 머물다 떠나야 했다.
노래 자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여서
곡조도 완벽했지만 무용은 매우 놀라웠다.
모두가 로봇 같은 방식으로 서로 손발이 착착 맞았다.
사실상 무서울 정도였다.
내가 가사가 뭔지 묻자 대답하기를
“유치원은 어머니의 품이고, 유치원은 당의 품이다.”
이게 다섯 살 짜리 아이들의 말이라니.
다음에는 콘선이 상수도 설치를 도와준 마을을 방문했다.
마을 여성들이 신이 났다. 지금까지는
산에 올라가서 식수를 길어오고
겨울에 얼음같이 찬 냇물로 빨래하고
채소를 씻어야 했다고 한다.
김장철이어서 겨울에 먹을 배추를
소금에 절이노라 바빴다.
평양에 돌아와서 우리끼리 잠시 나가서
몇가지 거리 풍경을 미니 캠코더로 촬영했다.
수차에 걸쳐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시장개혁의 유일한 외형적 상징인
사설시장 방문 허가는 받지 못했다.
우리는 노점 하나를 촬영해냈다.
정권을 끌어내릴 것 같지는 않지만
사설시장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보이기를 굉장히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떻게 하면 무역을 개선하고
아일랜드의 경제 모델에서 배울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묻는다.
제5일 - 11월23일 수요일
오늘은 색다르게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이 묵었던 초대소를 방문했다.
나는 그가 묵은 방으로 초대받아 기분전환을 했다.
관례대로 그의 방문을 경축하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고
대형 욕조에는 전기히터 장치가 된
빨간색 우단을 씌운 변기도 있었다.
이에 앞서 우리는 독촌 마을의 아파트지역에
콘선이 지어준 재래식 화장실을 둘러봤다.
맑은 물과 적절한 위생이 수천명의 어린이들을
불필요하게 죽이는 설사와 같은 질병을 예방하는
최선의 길이다. 코마요의 킬키마 출신 두알타 오루힌씨가 이 프로젝트를 18개월 동안 수행해 왔다.
그는 떠나는 것이 매우 섭섭하지만
북한의 절차 때문에 여기서 사귄 친구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추위가 모진 지역이었다.
바깥에선 주민들이 석탄 찌거기와 진흙으로
땔감 덩어리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북창으로 가서 북한의 광산지역을 둘러봤다.
북창에는 전국 최대의 석탄 화력발전소가 있어
심하게 오염돼 있었지만
이를 철거할 장비를 살 돈이 없었다.
가는 길에 콘선의 지원을 받고 있는 진료소를 방문했다.
이 아일랜드 기관은 재래식 분만실을 설치하고
작은 병실들을 새로 설치해 주었지만
우리가 둘러 볼 때 환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트는 청결해서 그날 아침 새로 깐 것 같이 보였다.
환자들은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완쾌되어 집에 갔다고 했다.
'그러나 이곳은 병상이 24개나 있는 산후조리실이 아닌가?’
나는 물었다.
'정말 산모 한 사람 애기 한 명도 없는 게 정말 가능할까요?’
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자기와 간호사 전원과 함께
계단에서 사진이나 같이 찍자고 졸라댔다.
우리는 진료소 다른 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짐작컨대 사라진 환자들이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외국인들이 북한의 병원을 방문할 때의
표준 절차인 것이 분명했다. 엽기.
북창에서 우리는 단 하나 밖에 없는 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침실, 식당, 욕실과 사무실이 딸린
스위트룸을 배정받았다.
사무실에는 3대의 전화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초록, 하나는 베이지, 하나는 오렌지색으로
모두 작은 우단 깔개 위에 놓여 있었다.
어느 것도 작동되지 않았다.
난방이 안돼
영하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우리는 평양에서 전기히터를 가져 왔었다.
지방 관리들은 우리를 데리고 나가서
얼어붙은 식당에서 매우 맛있는 돼지 불고기를 대접했다.
그들이 나에게 밀주를 먹여 취하게 만들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6일 - 11월24일 목요일
오늘 아침에는 북한 괘종시계 소리에 잠이 깼다.
7시에 당직자가 모든 사람을 깨우러 다닌 뒤
얼마 안 있어 확성기를 단 미니밴이 돌아다니며
혁명가요를 틀어대면서
모든 사람들이 직장이나 학교에 가도록 재촉하였다.
평양외국어대학에 약속이 돼 있어서
곧장 길에 나섰다.
대학 과정이 있는데
언어집중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중학교도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15살짜리 교실에 들어갔다.
컴퓨터에 관한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가상현실, 모뎀, 컴퓨터에다 월드와이드웹까지
막힘없이 술술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교실에서 무슨 웹사이트들을 방문하는지 묻자
침묵에 빠졌다.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곤
북한주민들은 인터넷사용을 허락받지 못했다.
북한에서 하나 뿐인 사이트가 있지만
나라 밖의 자료에 접속할 수 없다.
북한정권이 어떻게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영원히 차단할 수 있을지는 알기 힘들지만
그네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제7일 - 11월25일 금요일
우리 일행은 수퍼트루퍼의 음악 볼륨을
최고로 높여놓고 비무장지대를 향해
통일고속도로를 전속질주했다.
(콘선 현지 직원이 가장 좋아하는 테입은 아바!)
난데 없이 오렌지 작업복을 입은 여인들이
중앙분리대에서 낙엽을 쓸어내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실업 같은 것이 없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어서
아시아의 베를린장벽,
남북한을 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2차대전 후 소련과 미국이 38도선에서
한국을 갈라 놓았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세워 집권했다.
남한에서는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가 장악했다.
1950-1953년 사이의 한국전쟁에서
약 5백만명이 사망했지만
그 경계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때부터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긴장된
대치지역으로 남아 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양쪽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중이다.
큰 바위들이 한줄로 길게 늘어선 것이 보일 때까진
군사력이 그다지 증강된 것 같지 않다.
일종의 대전차 장벽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서울 70Km 표지판을 지나갔지만
물론 거기까지 갈 길이 없다.
내일 우리는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날아가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서울로 갈 것이다.
북한 장교 한 명이 비무장지대를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수수한 건물에 도착해서
북한군 중령에게 소개됐다.
그가 우리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이 수년간에 걸쳐서
도발적 행동을 했다는 걸
우리에 주지시키려고 애썼다.
사실은 북한이 여러차례에 걸쳐서
남한까지 터널을 뚫어 침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비무장지대까지 차를 몰고 갔다.
4km 폭의 지역인데
허리에 차는 무기 이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실제 경계선에는 북한 병사들과
유엔 글자가 빛나는 군복을 입은 남한 병사들이
불과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서 있다.
남한 병사들은 미군 스타일 군복에다
광선차단용 선글래스를 쓰고
그곳 주변을 걸으면서 망원경으로 우리를 지켜 보았다.
북한 병사들은 차렷자세로 똑바로 서 있었다.
경계선에 걸쳐 있는 유엔막사에
북한군을 배치할 차례여서
중령은 자신과 우리들이 남한 쪽에 서 있다는 걸
말하면서 흐뭇해 했다.
여기서는 3차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억제된 느낌이다.
핵위협이 상존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아무 가치없는 협상용 칩일지라도
일단 사용되면 정권이 소멸되는 댓가를 치를 것이다.
제8일 - 11월26일 토요일
휴대폰을 돌려받고 탑승수속을 마쳤다.
일이 잘못 될 경우에 대비하여
테입은 내 핸드백 속에 넣어 두었다.
북한은 매혹적이면서 좌절감을 느끼게 했지만
또한 아주 우호적이었다.
짧은 기간에 우리가 흘깃 목격한 것 이면에
정치범수용소와 보이지 않은채 진행되는
억압의 구조 또한 존재하는다는 것을
기억하기가 이따금 어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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