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금고 돈의 행방(1)

10·26사건 때 朴正熙 대통령집무실에 있던 금고 돈과 차지철(車智澈)실장의 비자금은 어디로 갔는가

<1990년 3월 월간조선>

집무실과 내실의 비밀

朴正熙대통령 시절에 이 나라의 운명에 관계된 결단과 구상이나 토의가 주로 이루어진 곳은 청와대본관 1층의 대통령집무실과 2층의 내실이었다. 대통령의 생활공간인 이 두 방은 따라서 국정과 관련된 최고급정보와 비밀스러운 자금이 모이거나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한국의 가장 중요한 보안지역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예컨대 朴 대통령이 오기를 갖고 추진하였던 핵 개발 계획서나, 야당의원 매수공작 관계자료, 고위공직자 비행보고서 등이 집무실 서류함 속에 있었을 것이며 집무실 금고에는 적지 않은 비자금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돈과 대통령극비파일은 그의 사후(死後)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한 취재를 하다가 기자는 마치 살인사건 현장의 감식계장이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사건현장에 남은 시신과 유류품과 돈지갑과 소지품과 공간배치를 잘 연구하면 사건의 성격과 피살자와 범인의 윤곽을 그려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朴대통령의 주 공간이자 18년 장기집권의 사령탑이었던 대통령집무실 및 내실의 상황과 10·26사건 뒤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연구하면 인간 朴正熙의 생리와 그 정권의 단면을 드러낼 수 있다. 죽음의 연구를 통해서 삶을 알아볼 수 있다는 얘기다.

朴대통령 시절 청와대 본관에 들어서면 입구의 경호데스크에서 금속탐지봉 등으로 몸과 소지품 수색을 받아야 했다. 오른편 복도를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붙은 면담자 대기실, 소접견실, 영부인 접견실을 지나 대통령 집무실 앞에 당도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무실의 전실(前室)이다. 부속실 근무자 3명이 왼쪽 책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0·26사건 때는 이광형(李光炯)부관, 그리고 이혜란(李惠蘭)양이 근무자였다. 전실 데스크 맞은편 별실에는 대통령전용 이발소와 변소가 있었다. 이발소 입구 바로 맞은편에 대통령실 문이 있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60평쯤 되는 큰방이다. 흰색 카피트가 깔려 있었다. 들어서면서 바로 보이는 맞은편 창 너머에는 청와대 정원, 왼쪽 벽 쪽에 朴대통령의 집무 책상이 있었다. 책상을 바라보면서 왼쪽으로 회의용 긴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어 수석비서관회의나 당정회의가 열리곤 했다. 대통령 책상 오른쪽 앞에는 응접소파들이 있었다. 왼쪽 벽은 서가로 꽉 차 이 방은 대통령 서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직접 서류정리

대통령 책상 뒤쪽 벽을 따라서는 붙박이 단이 있었다. 창 쪽에는 한반도지도가 걸이에 비스듬히 펼쳐져 있었고, 바퀴 달린 큰 지구의도 있었다.朴대통령이 앉았을 때 오른쪽이 되는 붙박이 단에 바짝 붙어 높이가 1m 쯤 되는 금고가 놓여 있었다. 朴대통령은 직접 보고서나 기밀서류를 분류하여 집무실 서류함에 차곡차곡 넣어 두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79년 봄부터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수시로 집무실을 정리했다. 부속실 직원이 불려 들어가 보면 대통령이 손수 책이나 서류를 정리하고 남은 것들을 수북히 쌓아 두고 치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집무실의 정리가 거의 끝나 있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메모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2층 침실에 있는 목욕탕에서 목욕하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천장에 매달린 줄 끝의 부저 보턴을 눌렀다. 1층에 늘 대기중인 부속실 직원이 뛰어 올라가면 목욕탕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구술을 시켰다.

통상 朴대통령은 손바닥만한 메모책을 썼다. 1주일분의 메모를 모아 집게로 집어 보존시켰다. 이 메모야말로 朴대통령의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 있던 구상과 고뇌와 책략이 솔직하게 표현된 것으로서 朴대통령 연구의 기본자료이다. 朴대통령은 오전 9시에 2층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와 1층 집무실로 출근했고 오후 6시가 되면 거꾸로 퇴근하였다. 출근하기 전에 부속실 직원이 집무실 문을 열어 놓으면 청소부가 경호원의 입회하에 실내를 청소하였다. 朴대통령이 출근하여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비서실장이었다. 비서실장은 오전 8시부터 자기 방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여 보고사항을 종합, 출근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비서실장은 정보부의 1일보고가 든 밀봉된 노란봉투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직접 이 봉투를 잘라 꺼내 보고 분류, 보존하였다.

침실의 「효자손」과 칼빈총

「朴대통령과 가족이 사용하는 본관 2층은 바닥이 마루로 돼 있어 사람이 다니는 삐거덕 소리가 1층에서 들릴 정도였다. 朴대통령은 퇴근 때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복도 오른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발장과 냉장고가 있는 전실을 지나면 서재를 겸한 거실이었다. 책상과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었고 한쪽에는 대통령이 지압을 받을 때 누웠던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검도용 목도(木刀)와 헬스클럽에서 볼 수 있는 자전거·벤치프레스·철봉 겸용의 운동기구도 있었다. 서재 안쪽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침실. 한 20평쯤 되는 침실의 바닥은 연분홍 카피트였다. 문쪽 벽에 붙은 침대는 더블. 朴대통령이 잠자리에 들 때나 일어날 때 자동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맞은편 벽 중간에 붙은 죽은 아내의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는 붙박이 단, 그 위에는 두 개의 화병 사이에 책이 놓여 있었다. 朴木月시인이 쓴 「陸英修여사」란 책이 목재함에 들어 있었다.

침대 옆에는 옷장, 발끝 쪽으로는 화장실과 목욕실이 있었다. 침실에는 아주 상징적인 물건이 두 개 있었다. 머리맡에는 「효자손」이 늘 놓여 있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줄 사람이 곁에 없었던 대통령에게 효자손은 밤중의 반려자였다. 더구나 朴대통령은 노인성 소양증세를 갖고 있었다. 온몸, 특히 등이 가려운 증세였다. 주치의가 미국에서 알파케일이란 약품을 수입, 목욕물에 타서 온몸을 적시는 치료를 시도했으나 별 무효과였다.

한때 朴대통령은 발끝 쪽에 총가를 놓고 거기에 칼빈총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탄창은 총가 밑부분의 서랍에 넣어두었다. 金桂元 당시 비서실장에 의하면 朴대통령은 군인시절부터 칼빈을 좋아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의 키가 작은 탓도 있었겠지만, 직업군인들은 가볍고 고장이 잘 안 나며, 어둠 속에서도 분해·결합이 가능한 칼빈을 긴급상황에서는 M1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소총으로 생각하고 있다.」

朴대통령 시신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에 청와대 본관을 나서 궁정동 식당으로 갔던 朴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에는 시체로 변해 본관으로 돌아왔다. 국군서울지구병원이 내준 앰블런스에 실려온 朴대통령의 시신은 군용 들것으로 본관 소접견실에 운반되었다. 비보를 접한 朴槿惠씨가 동생 槿暎양에게 갈아 입힐 속옷과 양복을 안겨 병원으로 보냈는데 총무비서관 전석영(全錫濚)씨가 동행하였다. 아버지의 시신이 실린 들 것을 앞세우고 근영(槿暎)양이 옷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는 모습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뇌리에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찍혀 있다. 청와대 직원들은 식탁을 붙여 받침대를 만들고, 陸英修여사 장례식 때 썼던 시트를 다시 꺼내 깔고는 거기에 대통령의 시신을 눕혔다.

朴대통령이 조상제사를 모실 때 썼던 병풍과 제단과 제기는 그대로 자신의 소용이 되었다. 27일 오후 두 시쯤 주치의인 민홍기 서울대 내과 과장팀이 방부제를 갖고 와서 병풍 뒤에서 朴대통령의 사체처리를 시작하였다. 옷을 벗기니 金載圭의 제1탄이 관통한 등에는 피가 굳지 않고 흥건하여 세수대야로 받아내야 했다. 오른쪽 귀 위로 들어간 제2탄은 왼쪽 광대뼈 있는데서 정지하였다. 총탄이 들어간 곳은 약간 긁힌 듯했을 뿐이고, 살에 박힌 총알이 만져질 정도였다. 이 총알을 빼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유족들은 그대로 두도록 하였다.

이때 朴대통령의 시신을 만져본 박학봉(朴鶴奉)부속실장에 따르면 몸이 굳지 않았고 손이 아직 부드러워 꼭 잠든 것 같았다고 한다. 표정도 평온하였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朴대통령의 오른쪽 허벅지를 갈라 방부제주사를 놓았다. 피가 많이 빠져나갔기 때문인지 방부액체가 많이 들어갔다. 27일 밤 11시 30분에 대통령 시신은 수의를 입었고, 28일 새벽 2시에 관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모습을 우리 앞에서 영원히 감추었다.」 「朴대통령은 10월 초순에 분기별 정기건강진단을 국군 서울지구병원에서 받았었다. 그 결과는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의무관으로 2년 4개월, 국군 서울지구병원장으로 2년 10개월간 근무하면서 대통령의 건강파수꾼 노릇을 했던 김병수(金秉洙)씨는 『돌아가실 무렵의 대통령은 운동신경이 잘 발달된 단단한 몸집의 소유자였다. 한마디로 장수체질이었다』고 했다. 그때 朴대통령은 노인성 소양증 이외에도 궤양성 위장장애, 축농증의 일종인 부비동염(副鼻洞炎)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에 대통령은 부비동염 코수술을 받았으나 재발하였다. 1978년에 다시 수술했는데 성공적이었다. 골소에서 고름을 긁어내고 구멍을 뚫어주는 수술이었다.

적막한 내실, 쓸쓸한 노인

그래도 코호흡이 원활하지 못해 목구멍에 부담이 많이 가 편도선주위염과 목감기를 자주 앓았다. 79년 초에는 말을 못할 정도로 목감기가 심하게 들어 집무실에 가습기 같은 것을 갖다 놓고 입을 벌려 목구멍에 증기를 쐬기도 하였다. 10·26사건 며칠 전에도 목감기가 들어 金秉洙원장이 직접 대통령의 목구멍 속으로 소염제를 스프레이하기도 하였다. 「이런 간병에도 불구하고 朴대통령은 배드민턴, 줄넘기, 턱걸이, 철봉, 물구나무서기 등등 여러 가지 운동을 즐겼다. 만 62세의 나이에 턱걸이를 열두 번쯤 했고 물구나무를 서서 걷기도 하였으며 철봉에서 회전도 곧잘 하였다」

1978년에 朴대통령은 자다가 토사곽란을 만난 적이 있었다. 부저를 눌러도 옆방의 두 딸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1층에서 당직하던 부속실 직원이 뛰어올라왔다. 朴대통령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내가 변소에 십 수 차례나 다녀왔는데…』라고 했다. 의무관이 연락을 받고 달려와 진통제 주사를 놓았더니 朴대통령은 스르르 잠이 드는 것이었다. 부속실 직원은 이불을 덮어드리고 방을 나왔는데, 늙은 대통령을 그 넓은 침대에 홀로 남겨두고 나오기가 가슴 아프더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거실에서 혼자 텔레비전을 보다가 의자에 앉은 채 잠들기도 했다. 그 옆에는 「방울이」란 이름의 스피츠가 외롭게 앉아 있었다. 부속실직원이 이불을 덮어주면 대통령은 그때서야 눈을 뜨고 침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말년의 朴대통령은 그런 외로움을 잊기 위하여 몸부림친 듯한 흔적을 더러 남겼다. 朴대통령은 78년 12월에 金桂元씨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金씨는 『중앙정보부장도 적성이 맞지 않아 중도하차한 제가, 더구나 대만대사로 국내를 오래 떠나 있었던 사람이 비서실장직을 어떻게 수행하겠습니까』하고 사양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 나하고 같이 다니면서 이야기나 하자』고 강권하더란 것이다. 金씨는 군인시절부터 朴正熙와 친했고, 남을 편하게 해주는 성격으로서 대통령의 말동무가 되기엔 적격자였다.」 10월 27일 그날 오후에도 朴대통령은 삽교호 준공식에 다녀와서 車智澈 경호실장에게는 『쉬어!』라고 해 놓았다가 오후 4시쯤 갑자기 궁정동 만찬준비를 지시했었다. 모처럼의 농촌나들이로 상쾌해진 대통령은 그런 기분을 연장시켜 줄 장소로서는 적막한 2층 내실이 적당치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그의 쓸쓸함이었다.

집무실 봉인되다

朴槿惠씨의 기억에 따르면 朴正熙대통령의 피묻은 양복에서는 아이스크림 껌, 시계, 열쇠, 돈지갑, 손수건, 수첩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그때 담배를 거의 끊은 상태였으므로 가끔 껌을 씹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열쇠는 집무실 금고 및 서랍열쇠였다. 이 나라의 가장 비밀스러운 방의 가장 비밀스러운 돈과 서류로 통하는 열쇠 ― 그 소유자가 된 것이 대통령의 큰딸이었다. 金桂元 당시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27일 새벽에 대통령 집무실이 어떻게 돼 있는지 가 보았더니 잠겨져 있고 열쇠는 槿惠씨가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당시 부속실장 朴鶴奉씨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퇴근하시면 집무실 출입문 열쇠는 부속실에서 보관했습니다. 朴대통령은 별도로 금고와 서랍열쇠를 갖고 계셨습니다. 부속실에는 금고열쇠가 하나 더 있었는데 사용하지는 않고 봉인하여 보관만 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저희들은 집무실 출입문 열쇠와 금고 열쇠를 본관 경호원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직접 槿惠씨에게 전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0·26뒤에는 槿惠씨만이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0월 27일 밤에 金桂元 실장은 가택연금 하에 놓였다. 며칠 뒤 피의자가 된 대통령비서실장 방을 수색하러 온 것은 계엄사합수본부 수사2국장 우경윤(禹慶允)대령과 한 수사간부(중령)였다. 두 사람은 권숙정(權肅正) 비서실장 보좌관의 입회 하에 비서실장실의 큰 금고를 봉인하였다.

대통령의 국장이 끝난 며칠 뒤 합수본부의 한 중령이 청와대로 와 비서실장실 금고 안에 든 돈의 처리지침을 통보하였다. 법률적으로는 아무리 계엄하라 하더라도 청와대 비서실이 합수본부의 지시를 받을 이유가 없었으나 그때 全斗煥 합수본부장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청와대에서는 그 중령이 하자는 대로 금고 안의 돈 9억5천만 원을 처분하였다. 權肅正 보좌관은 6억 원을 떼 내 朴대통령의 장조카 박재홍(朴在鴻)씨(당시 동양철관 사장)와 합수본부 중령의 입회 아래에서 槿惠씨에게 샘소나이트 가방에 현금과 수표를 넣어 전달하였다. 영수증도 받았다. 청와대측에선 이때 그 동안 비서실장실 금고에서 지출된 돈의 사용처를 적은 기록을 폐기하였다. 나머지 돈의 처리에 대해서 全斗煥씨는 지난 12월 31일 국회증언에서 『계엄사령관의 허가를 받아 1억 원은 합수본부의 수사비로 쓰고 2억 원은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 원은 국방장관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9억5천만 원 이외에 더 있었다

정승화(鄭昇和) 당시 계엄사령관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어느 날 全본부장이 찾아와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조사하다가 청와대에서 아무 데도 기록되지 않은 돈 9억 원을 찾아냈습니다. 朴대통령께서 남긴 재산이 없어 그 가족의 생계가 어려울 것 같아 6억 원은 근혜양에게 주고 1억 원은 합수본부 수사비로 쓰도록 빼놓고 2억 원은 여기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총장님이 쓰시지요」 받아보니 수표 20장이었습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당장 9억 원을 전부 회수시킬까 하다가 대통령 유족에게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어서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고 받은 2억 원은 최인수 비서실장을 시켜 은행에 예금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며칠 뒤 이 사실을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더니, 그도 전두환 장군이 가져온 5천만 원을 받아서 해·공군참모총장에게 2천만 원씩 나누어주고 국방부에서도 1천만 원을 쓰도록 했다고 합니다』

지난 1월에 기자가 金桂元씨를 만났더니 그는 새로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9억5천만 원은 비서실장실에서 관리하던 돈이었고 朴대통령이 관리하던 돈은 따로 있었습니다. 車智澈실장도 별도로 돈을 많이 만졌습니다. 金씨는 車실장이 자신에게 『돈이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십시오』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했다. 車실장이 군 요직자와 정치인에게 돈을 건네준 적도 더러 있었다고 했다. 金씨는 『전두환그룹의 장군들은 車실장한테서 돈 받아 쓰던 아이들이다』는 표현도 했다. 즉, 9억5천만 원 이외에도 10·26사건 당시 청와대에는 비자금이 더 있었다는 것이 金씨의 주장이었다.

비서실장이 자금모집창구

『유신 바로 뒤인데 각하께서 저에게 「임자가 정치자금을 맡게」라고 하십디다. 어디에 얼마 정도가 소요되느냐고 했더니 공화당과 유정회의 최소운영경비, 추석·연말의 특별비용, 그리고 수고한 사람,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는 격려금 등에 드는 비용이라고 하셔요. 그래서 대강 필요액수를 정한 뒤 朴대통령집권 후의 경제정책으로 커진 기업 중에서 재무구조가 튼튼하고 국민지탄을 받지 않고 또 업종이 농민과 관계되지 않은 기업의 기업주를 청와대로 오라고 해 툭 털어놓고 부탁했죠. 1년에 총 얼마가 필요한데 과거처럼 교환조건 없이 기업주의 판공비 중에서 일부를 떼어 두 차례씩 나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모두 기꺼이 응하더군요. 대통령이 워낙 검소해 액수는 정말 최소한도였어요. 대통령께서는 신세진 걸 늘 부담스러워 하셨지요. 돈 낸 이들은 영수증 같은 것도 없었으니 세금공제도 못 받았고요』

金桂元 실장이 취임한 뒤에도 비서실장이 대통령 정치자금의 모집창구 역할을 계속했다. 거두는 방법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현대, 삼성, 럭키, 대우 등 20개 안팎의 대기업들이 추석과 연말, 때로는 봄에 연(年) 2∼3회씩 돈을 냈다.

대그룹의 경우 한해에 7억∼8억 원 정도를 부담했을 것이라고 한다. 비료, 농약 등 농민들과 관계 있는 기업체를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정치자금을 받을 경우 그 원가부담이 결국은 농민에게 떠넘겨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체 대표들은 이 정치자금을 金桂元비서실장을 찾아와 놓고 갔다. 金실장이 朴대통령에게 이 돈 봉투를 갖다 드렸다. 정치자금을 직접 받았던 全斗煥대통령과 다른 점이었다.

『한번은 어느 대그룹에서 10억 원에 가까운 큰돈을 가지고 왔어요. 朴대통령은 그 봉투를 받더니 「다른 말은 없던가」라고 물으십디다. 「없었습니다」고 대답했더니 대통령은 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에요. 그 집무실을 물러 나와 있는데 대통령이 저를 불러요. 「이 돈을 원호처에 갖다 주고 영수증을 받아 그분에게 부쳐 주라」는 지시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그룹이 이권문제로 정부와 걸려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이권과 결부된 정치자금이 혹시 들어오지 않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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