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대필·병역기피로 점철된 김정일의 20대

김정일이 집필했다는 대학졸업논문의 숨은 저자는 그의 지도교수였던 경제학 박사 전용식이다.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김정일. 그러나 그는 군 복무를 하지 않은 병역기피자다.
김정일 정권을 해부한다-8. 거짓으로 점철된 김정일의 청년시절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은 북한에서 중세 봉건왕조 시대의 왕처럼 신격화돼 있다. 이 때문에 김 부자의 출생은 물론 가족관계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왔으며, 피비린내 나는 이들의 권력 장악 과정도 북한내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프리존뉴스>는 연재 기획 ‘김정일 정권을 해부 한다’의 여덟 번째 순서로 ‘거짓으로 점철된 김정일의 청년시절’에 대해 알아본다.<편집자주>

김정일은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김정일은 대학시절 특별대우를 받았다. 학생들도 그를 ‘김정일’이라 부르지 않고 ‘수상님 자제분’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 김정일의 대학생활 전반을 관리하던 인물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인 김신숙이었다. 김신숙은 김일성의 고종누이이자,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부인이다.

이와 함께 정치·경제·역사·철학·어학 등 주요과목별로 개인교사들이 김정일에게 한명씩 배정됐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의 총장이 지난 97년 4월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이다. 이처럼 김정일의 ‘가정교사’들은 대체로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 강좌장들이었다.

김정일 대학졸업논문, 지도교수 대필로 완성

‘김정일 전기’ 등에서 김정일이 대학시절 썼다는 논문들은 대체로 이들 개인교사들이 내준 과제물들을 후에 다시 정리한 것들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의 졸업논문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의 위치와 역할’인데, 내용은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없애고 농촌을 도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서 군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북한의 김정일 전기들은 이 논문이 대학졸업논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이 한달 남짓한 기간에 집필했다는 이 논문의 숨은 저자는 그의 지도교수였던 경제학 박사 전용식이다. 전용식 박사는 서울에서 대학교편을 잡다 월북한 남한 출신의 학자다. ('다큐멘터리 김정일', 김현식-손광주 저, 1997)

그는 1978년 북한이 남한 출신의 학자들을 내쫓을 때에도 김일성종합대학에 그대로 남았다. 물론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단순히 김정일의 졸업논문을 썼기 때문이었다. 거짓으로 점철된 김정일의 20대는 논문대필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김정일은 대학 2학년 말에서 3학년 초까지 두 달 간 평양시 용성구역 어은동에서 ‘야영훈련’에 참가한 적이 있다.

당시 김정일이 야영훈련을 받았던 곳은 현재 ‘어은동 혁명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이 사적지에는 ‘두 달도 안 되는 군사훈련 야영기간 동안 김정일이 주체전법을 배워 실제 전투에서 써 먹을 수 있는 군사지식과 지휘능력을 다른 학생들이 습득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이끌어 주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김정일, 대학시절 ‘군사훈련’ 불참했다 삼촌에게 구타당해

이는 김정일이 놀라울 정도로 군사지식을 갖추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모두 날조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김정일은 야영훈련을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본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정일의 계모인 김성애 집안과 가까웠던 한 탈북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이었던 삼촌 김영주는 늘 김정일의 뒤를 챙겨주고 있었다. 김영주는 어려서 생모를 잃은 조카를 측은하게 여기고 김정일을 돌봐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형수 김정숙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영주의 귀에 김정일이 야영소를 빠져나가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김영주는 당업무도 제쳐놓고 조카를 찾으러 다녔다. 김일성이 알면 큰일이었다. 김영주는 사람을 풀어 뒤진 끝에 중앙영화보급소에서 김정일을 찾아냈다. 김정일은 거기에서 하루 종일 외국영화를 돌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영화는 이 보급소에만 들어오게 돼 있었다. 김영주는 김정일을 자신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 호되게 두들겨 팼다. 그리고 야영소로 직접 데려가 군사교관에게 인계했다.”

젊은 시절 수상님 자제로 불렸던 김정일은 이처럼 북한 최대의 병역기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군대에서 밥 한번 안 먹어보고, 참호에서 총 한번 안 쏴보고, 유격훈련장에서 흙먼지 한번 안 뒤집어쓰고 국방위원장인 된 유일한 인물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어디서부터 군 생활을 했는지는 알려진 기록이 없다. 있다해도 그것은 모두 날조된 기록일 뿐이다.

다만 1983년 5월 처음으로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었고, 1993년 7월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로동신문에 ‘탁월한 군사전략가, 강철의 영장’이라고 김정일을 칭송했으며, 김일성이 죽고 난 97년부터 ‘장군님’으로 불렸다. 군사계급으로 공식 등장한 것은 92년 공화국원수로 추대되면서 부터로 소장·중장·상장·대장 과정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원수’ 계급을 달았다. 김정일은 줄곧 “나의 힘은 군대에서 나온다”고 했다.

북한 형법, 병역기피자에게 2년 이하의 징역형 내려

최근에는 “선군혁명노선은 나의 신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총대우선주의’의 김정일이 만들어낸 문구 중 하나이고, ‘총폭탄이 되자’, ‘고난의 행군’, ‘70일 전투’ 등 모든 용어를 군대식으로 표현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그는 군복조차 입어보지 않은 병역기피자이니 2천만 북조선 동포들은 속아도 한참 속고 있는 것이다.

북한 형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군사복무동원을 기피한 자는 2년 이하의 노동교화형에 처한다고 하는데 김정일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김정일과 함께 북한 최대의 병역기피자가 한명 더 있다. 바로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다. 김정남의 현재 군사계급은 대장이다.

일반적으로 북한 인민군의 승진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최고사령관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국방위원회 결정’인데 ‘최고사령관 명령 제00140호’, ‘당 중앙위, 중앙군사위, 국방위, 중앙인민위 공동 결정’하는 식으로 불린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대장급 이하의 인사는 최고사령관 명령에 의해 결정되지만 원수-차수급 인사는 국방위원회 결정에 의해 공개된다. 그러나 김정남이 북한인민군 대장이 되었다는 ‘최고사령관 명령’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정남이 현재 인민군 보위국에서 근무한다고 하니 보안차원에서 비밀리에 진급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김정남의 비대한 몸집으로 볼 때 유격훈련 한번 안 받아보고, 구보 한번 뛰지 않았음은 틀림없다.

김정남 생일선물구매액으로 매년 100만 달러 지출

김정일은 자신의 아들을 처음부터 군대에 보낼 생각이 없었다. 김정남은 어려서부터 김정일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인물이다.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남이 서너 살 때 쉬하고 싶다고 하니, 내의 바람의 김정일이 우유병을 들고 아들의 오줌을 직접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혼자 밥을 먹을 때 대여섯 살 때까지 김정남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식사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시 식탁 위에 앉은 김정남은 “빠빠 맛있니?” 하는 등의 애교 있는 말투로 김정일의 혼을 빼놓았다고 한다. 김정남의 생일 행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정남의 생일은 5월10일인데 매년 4월 중순에 호위사령부 2국9부에서 김정남의 생일선물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한다는 것이다. 이한영씨는 그 선물구매액이 100만 달러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김정남이 태어난 1971년부터 스위스 유학을 떠날 때까지 홀아비처럼 김정남만 끼고 자면서 ‘15호 관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집을 비울 때는 출장 간다며 아들 정남에게 못 들어오는 사연을 알리곤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김정남이 세 살 되던 무렵부터 김정일에게는 김일성이 정해준 여자(김영숙)가 있었고 또 고영희 같은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장남 김정남이 있는 15호 관저를 와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축 보수하고 호위 병력도 증강 배치했다.

병역기피자 김정일을 후계자로 추대한 빨치산 원로들

김정남이 열 살 때인 1980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김정일은 딸 시집보내는 어머니보다 더 슬퍼했다고 한다. 김정남의 가정교사였던 성혜랑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술을 마시고 아이처럼 울었다는 것이다. 1980년 3월 김정남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뒤에 김정일은 매일같이 김정남에게 전화를 해 댔다고 한다.

한편, 북한 최대의 병역기피자인 김정일은 어떻게 김일성의 후계자가 됐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대학시절 김정일이 야영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두들겨 팬 김영주가 병 치료를 위해 외국 휴양지로 떠나면서 부터인 70년대 초이다. 당시 김일, 최용건, 오진우, 최현 등 소위 빨치산 원로들은 김영주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들어 그의 지위를 김정일에게 이양해 정치훈련을 본격화 하는 것이 좋겠다고 김일성에게 진언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김정일 후계 문제’는 71년 4월 하순에 열린 제5기 제2차 전원회의 후 당정치위원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 같은 제안을 했던 인물이 바로 와병중인 김영주였다. 이와 함께 김일성이 72년 4월 환갑을 맞게 되자, 김정일 후계문제를 71년 11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3차 전원회의와 72년 7월의 제4차 전원회의에서 재차 논의하게 됐다. 이렇게 되자 ‘김정일에게 대를 물려주게 하자’는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조직적이며 집단적인 추대 결의를 바탕으로 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은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결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위 기사의 출처는 인터넷 <프리존뉴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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