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人의 눈으론 영웅을 알아볼 수 없다
一流엔 一流의 논리가 있어야 한다. 一流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엘리트는 애국심, 전문성,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광복 이후 지난 62년간 한국인은 조국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하여 근사한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경제력, 군사력, 과학기술력에서 이 나라는 세계 10위권에 들었다. 삶의 질 부문에서는 세계 30위권이다. 이런 國力을 바탕으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 내지 해체시킨 뒤 북한동포를 해방하는 자유통일을 이룩한다면 국가선진화를 통해서 一流국가를 만들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지금이 우리 민족사의 두 번째 황금기이다. 7세기말 삼국통일을 성공시킨 新羅는 그 뒤 약250년간 세계의 문명중심지에서 富國强兵한 一流국가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면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했다.
非서구-非기독교 국가로서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선진국이란 共認을 받고 있다. 한국, 대만, 이스라엘이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서서 안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자유통일을 성공시킨다면 한국이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一流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이는 세계사적인 업적이자 最速 기록이다.
一流국가는 一流 국가엘리트가 이끄는 一流국민과 함께 간다. 一流국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一流국가를 만드는 길이다. 一流국민 이전에 一流의 국가엘리트층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한국의 기적적인 발전에는 국가엘리트층의 역할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李承晩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 엘리트, 朴正熙로 대표되는 군대엘리트가 약30년간 유능한 관료집단을 만들어내고 세계적 기업인들을 키워냈다. 이들은 實事求是하는 마음으로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사물을 판단하고 정책을 집행했다.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 시절의 엘리트들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성격이었다. 1993년 이후 소위 민주투사들이 집권하면서 국가엘리트층이 해체되었다. 대신 들어선 집권세력은 패거리처럼 되어 國益을 해체해갔고 일류국가로의 進軍은 잠시 멈춰야 했다.
金泳三, 金大中, 盧武鉉 대통령은 우선 본인들이 국가엘리트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측근과 참모들도 그러하였다. 金泳三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文民정부라고 규정했다. 그는 근대화 세력을 부정하는 파당적이고 분열적인 國政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文民을 앞세우고 軍人을 무시하는 식의 분열적 생각은 역사관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좌파적이고 분열적 시각에서 평가하고 깎아내렸다.
국가엘리트는 긍정적인 역사관과 이에 기초한 긍정적인 국가관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 비판을 하더라도 긍정과 代案을 모색하는 차원이라야 한다. 金泳三 이후 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建國과정부터 부정하고 들어가면서 60년간의 근대화를 북한정권의 야만화보다 더 혹독하게 비방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 패거리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파당적 엘리트일 뿐이다”고 선언한 셈이다.
李承晩 대통령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은 金庾信-金春秋-金法敏이 주도했던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민족사의 2大 쾌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서 三國의 주민들은 韓民族으로 통합되었다. 이 통일은 민족 집단의 출범이었다. 이 민족집단은 한반도를 무대로 삼고 같은 언어, 같은 종교, 같은 정치체제를 공유하는 모듬살이를 해가다가 서서히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1민족1국가의 전통이 한국 역사의 한 원리로 굳혀졌다. 韓民族이 후삼국 시대의 분열, 몽골의 침략, 왜군의 침략, 청군의 침략, 일본의 강점을 극복하고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7세기 말 삼국통일 이후 양성된 한국 민족주의의 저력에서 나왔다.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들이 국가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그 권리와 의무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의 국민국가 건설이었다는 점에서 고려, 조선의 開國과도 다른 고귀한 의미가 있다. 韓民族은 대한민국을 매개로 하여 노예적인 백성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진 국민으로 재탄생했다.
신라에 의한 민족통일국가 수립이 없었더라면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탄생도 불가능했고 우리가 목표로 삼는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의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指向하는 대한민국의 국가엘리트는 가장 먼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자신의 신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의 조종간을 잡고 일류국가라는 착륙지점을 향해서 비행기를 몰고가는 사람은 대한민국호가 離陸한 최초의 출발지가 통일신라였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航路를 정확하게 잡아갈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이는 국가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민족과 국가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민족적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질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뿌리를 뽑아버리려는 暴擧이자 자기부정이다.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은 민족탄생의 역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없이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체성과 합리성이 부족하고 자존심 또한 약하다. 한국인으로서 정신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이후 한국인들은 억압과 정체 속에서 살아오면서 저항과 비판을 숭배하는 기질을 갖게 되었다. 일종의 피해의식이다. 이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시기에 아주 有用한 에너지였다. 그러나 이 피해의식, 저항과 비판의 체질이 대외적으로, 敵을 향해서 제대로 발산되지 않고 내부로 향해지면 內紛과 自害로 이어진다. 同族을 異民族보다 더 원수로 삼고, 대한민국 건국과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민족사의 2大 쾌거에까지도 저항과 과잉된 비판의식을 표출시켜 영광을 치욕으로 만든다. 파멸적이고 自虐的인 역사관이다.
좌파는 저항과 피해의식이 강한 나라에서는 쉽게 뿌리를 내린다. 공산주의는 그런 저항의식에 사명감과 전략전술을 공급한다. 공산주의가 가진 증오의 논리가 저항의식과 결합된다. 대한민국과 통일신라에 대한 공격의 논리에는 이런 守舊性(비합리성)과 좌경성(무조건적 부정과 저항)이 다 들어 있다.
종합국력이 세계 10위권에 든 나라의 정신과 魂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국가엘리트이다. 이들이 60여년 이전 식민지 시대, 100년 이전 약소국 시대의 피해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21세기의 富者나라에 사는 가난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 피해의식이나 노예근성을 가진 인간은 고마움을 모른다. 도움을 받으면 고맙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하니까 의심하고 이유를 단다. 미국이 김일성의 남침을 당하여 瀕死상태에 빠진 한국을 지켜내기 위하여 미국 청년들을 보내 5만 명이나 죽게 한 것에 대해서도 “그때 미국이 오지 않았으면 통일이 되었을텐데”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피해의식이 病的으로 악화되면 敵과 同志를 혼동한다.
피해의식과 저항의식은 弱子의 논리, 백성의 논리, 추종자의 논리이다. 따라서 무책임 논리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 입장에서 모든 것에 저항하고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보는가 하면 모든 권력에 맹종한다. 저항의식은 노예근성으로 돌변하기 쉽다. 이는 二流, 三流의 논리이다. 一流엔 一流의 논리가 있다. 一流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엘리트는 애국심, 전문성,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긍정, 세계에 기여해야 할 의무, 민주국가시민으로서의 교양과 관용을 인격으로, 신념으로 만들어 가져야 한다.
2007년 大選과 내년 總選을 통해서 우리는 一流국가에 어울리는 一流의 국가엘리트를 뽑아야 한다. 유능하면서도 줏대가 있고 겸손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국가의 조종실을 차지하여야 승객들은 비행중에도 안심하고 잠잘 수 있다. 國力에 걸맞는 一流국민의식은 우리를 짓누르는 피해의식, 노예근성, 무책임성에서 탈피하여 책임, 명예, 조국애를 지닌 당당한 민주시민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들 것이다. 二流 한국의 낡은 껍질을 깨어부수어야 一流 한국인이 탄생한다.
'下人엔 영웅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영웅이 없어서가 아니다. 下人 수준의 눈으론 영웅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金庾信과 李承晩의 위대성, 삼국통일과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적 측면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에게는 절대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의 중책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下人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1. 대한민국의 짧은 자서전
“나는 罪人이 아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국민국가의 간판을 달자말자 南侵전쟁으로 얻어맞아 國土는 초토화되고, 위대한 건국 대통령은 학생혁명으로 쫓겨났다. 민주당 정권은 1년만에 군사쿠데타로 무너지고, 朴正熙 정권이 등장했다. 제2의 월남화를 노린 김일성의 지령으로 청와대가 북한특공대의 기습을 받았다. 그 6년 뒤 대통령의 부인은 김정일이 보낸 자객의 총을 맞아 죽고 그 5년 뒤 근대화의 기수는 자기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군사變亂으로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미얀마로 출장갔던 대통령 일행을 노린 김정일의 테러로 17명의 장관급 엘리트가 죽고,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김정일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는 바람에 중동근로자 등 115명이 죽어갔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고 무역 흑자국을 만들고 민주화 약속도 지킨 두 전직 대통령이 내란죄로 몰려 2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멀쩡한 국립박물관을 친일파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여 때려 부순 대통령의 失政으로 국가不渡 위기로 몰린 나라는 IMF에 구조를 요청해야 했다. 어리석은 국민들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북한에서 300만 명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민주세력으로 위장한 좌파정권을 2代에 걸쳐 등장시켰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反美선동과 對南적화전략에 동조하니 국가는 분열되었다. 그 틈을 타고 김정일이 핵실험을 해도 韓美동맹은 반신불수 상태이다. 좌파정권은 각종 위원회를 통해 간첩을 애국자로 만드는 등 국가이념을 바꿔치기 하고 사법부의 권위를 파괴하고 있다. 민족반역자에게 영혼을 판 두 좌파 대통령이 김정일과 한 패가 됨으로써 올해 大選은 내전적 상황에서 치러질 것으로 예측되는 아, 대한민국!
그런데 어찌하여 이 나라는 지금 세계 약200개 국가중 삶의 질이 26위로서 선진국 수준에 진입해 있고, 사람들은 살빼기에 목숨을 걸고, 미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가 하면, 남자의 평균키가 아시아에서 가장 큰 키가 되고, 공업에서 세계 4강, 경제력 및 군사력 부문에선 8강을 노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간 成人인구의 약3분의 1인 1200만 명이 비행기나 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는가? 이것이 기적인가, 꿈인가, 현실인가?
한강의 기적은 공짜가 아니었다.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라면 국민수준보다 너무나 위대한 李承晩, 朴正熙가 대통령이 된 것이 기적이요, 1950년 6월25일 남침 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내뱉으면서 30초만에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구하려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 기적이다. 이 결단으로 약5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었다. 근면성실한 국민성, 머리 좋고 강건한 민족적 자질, 李承晩 대통령이 간판을 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자율과 경쟁 원리, 朴正熙가 도입한 능률적인 군사문화, 그리고 미국의 결정적 지원이 합쳐져서 우리의 실력보다 월등한 성취를 이룩했다.
김일성, 김정일 일당과 이들에게 넘어간 반역자들의 집요한 공작, 암살, 침투, 선동, 배신, 훼방에도 끄떡 않고 대한민국은 전진했고 국민들은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총을 들고,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고마움을 모르는 김대중, 노무현 세력은 이런 기적을 만든 대한민국의 歷代 지도자와 기성세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조국의 과거와 약점을 캐기 위하여 공권력과 예산을 집중 투입하였다. 이들의 주장이 맞다면 지난 60년간 한국의 우파세력은 국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만 했는데 기적적인 대한민국은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만들어서 땅위로 내려 보냈단 말인가? 북의 김일성 김정일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남한으로 선물했단 말인가? 아니면 김대중씨가 혼자서 땀을 흘려 만들었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면 노무현씨가 그 말 많은 입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기적 같은 대한민국은 있는데 애국자도 영웅도 보이지 않고 온통 독재자, 守舊세력, 냉전세력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반역자들이 만든 나라란 결론인가?
대한민국은 이제 사과할 것도 미안해 할 것도 변명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罪人이 아니다. 이런 나라를 만든 주인공들은 역사 앞에, 세계 앞에, 무엇보다 김정일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자랑한다. 우리는 현대사를 긍정한다. 우리는 선배세대의 노고에 감사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를 다 쓸어안고 싶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땅과 이 하늘을 사랑한다. 당당한 대한민국 만세!
2. 한 장으로 요약한 한국 現代史의 흐름
挑戰과 應戰
한국은 1948년 건국 이후 근대화를 성공시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으나 1998년 이후 守舊좌파 정권이 등장하여 안보위기를 불러오는 바람에 자유통일을 넘어서 一流국가 건설로 가야 하는 길목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올해에 친북좌파정권을 종식시키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50년이 될지 모른다. 아르헨티나 등 많은 中進國이 선진국 문턱에 걸려 넘어져 一流국가 건설의 꿈을 접었다. 한국도 그런 반열에 들 것인가? 국민들이 선동에 속지 않고 자유와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 자세가 되어 있어야 一流국민-一流국가가 가능하다.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라는 월계관은 무능한 반역守舊세력과 싸워 쟁취하는 것이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배부른 돼지가 일류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투지만만한 야윈 늑대가 온순한 양떼를 지휘해야 一流국가를 세울 수 있다. 지금 한국인에게 부족한 것은 지능지수도 아니고 國富도 아니다. 용기이다.
日帝 때의 독립운동가, 6·25전쟁 때의 학도의용군, 근대화 시기의 산업전사와 민주투사들은 피, 땀, 눈물을 흘려 대한민국이란 금자탑을 쌓았다. 그런 집단적 용기를 발휘하여 권력을 사기적 숫법으로 차지한 얼치기 좌파정권을 정리할 수 있다면 一流국가로 가는 길은 넓게 열릴 것이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국민들은 좌파의 밥이 되어 자유도 재산도 미래도 빼앗기고 말 것이다. 선배들의 惡戰苦鬪(악전고투)에 비교하면 지금 좌파의 도전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화장한 그들은 본질적으로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무장한 좌파‘를 물리쳤던 우리가 '입밖에 없는 사이비 좌파'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재발견
*발전방향: 建國-護國-산업화-민주화의 4단계 발전과정은 조국 근대화 및 국민국가 건설과정이었다. 富國强兵한 國力을 바탕으로 자유통일이란 관문을 지나 조국 선진화, 즉 일류국가 건설로 나아가야 하는 道程에 있다.
*대한민국의 4대 再발견: 해양정신, 기업가정신, 尙武정신, 自主정신
*4대 기여 집단: 장교단, 기업인, 기독교, 과학기술자
*國力의 양적 규모로는 세계 10위권, 삶의 질로서는 세계 30위권
*선진국 進入을 다투는 세 나라 한국, 대만, 이스라엘은 모두 안보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 非서구-非기독교 국가로서는 일본만이 일류국가가 되었다.
前史: 신라통일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다. 신라는 對唐결전으로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이곳을 韓民族의 생존공간으로 하는 민족통일 국가의 터전을 잡았다. 韓民族은, 삼국통일로 싹이 튼 同族의식을 딛고 장구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대한민국은 민족사의 정통이며 金正日 정권은 이단이다. 민족사의 정통성은 신라통일에서 비롯된다. 신라통일의 정당성을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설 자리가 없다. 민족통일 국가가 있었기에 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 1945년 광복과 分斷의 의미
·해양화: 38선 분단에 의해서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서 해양세력과 손잡고 해외 지향의 산업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미국 일본 서구 등 해양문명권의 일원이 되었고 이 先進문화권의 위대한 유산들-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과학과 합리정신을 받아들였다.
·봉건적 전통과의 결별: 한반도 분단은 자유 對 독재의 이념형 분단이다. 자유 선진 진영에 줄을 선 한국은 큰 저항 없이 대륙 및 朝鮮朝의 봉건적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화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미동맹: 해방군으로 진주한 미군은 일단 철수했다가 김일성의 남침전쟁 때 구원자로 다시 왔다. 전쟁은 동맹관계를 맺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 동맹은 한국인에게 울타리도 되고 우산도 되어주었다.
2.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
·국민국가 건설: 주체적 근대화(산업화, 민주화)의 시작이었다.
·국가이념: 헌법의 基調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설정됨으로써 「脫대륙, 脫후진적 전통, 脫주자학적 이데올로기」의 근대화 혁명이 발진하는 틀이 갖추어졌다.
·국가 정통성: 건국과정이 유엔의 공인하 총선거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였다.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지도력: 그의 정치철학은 반공 기독교적 민주주의였고 통치행태는 「對外 개방적·실용적 권위주의」였다. 그는 『공산주의는 호열자와 같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반도에서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실용적 집권자였다.
·군대의 主力세력화: 국민국가의 생존 조건인 富國强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공산주의자들의 위협 속에서 건국하고 護國하는 과정에서 朝鮮朝 개국 이후 처음으로 군대가 중추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대치상황의 본질: 1민족1국가의 정통론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의 金日成 정권을 반란집단, 북한땅을 한국의 영토, 통일을 미수복지구의 수복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그 뒤 남북관계의 본질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善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으로 굳어진다.
3. 李承晩과 그의 시대
-건국과 호국의 구심점으로서 근대화의 礎石을 놓았다.
·李承晩이란 축복: 아인슈타인이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된 격이다. 동서양의 최고 교양을 아우르고 사명감으로 무장한 한국 최초의 박사. 한국인의 주체성과 魂을 견지한 自主 자존의 지도자였다.
·국군의 창설: 북한의 위협으로 강력한 상비군을 갖게 되었다. 국군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하여 다음 시대를 주도할 능력을 키워갔다. 강력한 국군장교단의 등장은 朝鮮朝 500년간 잊혀졌던 尙武정신과 그에 수반되는 실용정신, 효율성, 과학과 합리정신을 우리 역사에서 되살림으로써 진취적이고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민족성과 기풍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농지개혁: 地主계급을 없앰으로써 그 뒤 산업화와 민주화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회갈등의 소지를 축소시켰다. 농지개혁으로 한국 赤化가 저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日帝 관료의 활용: 親日 경찰과 헌병들까지 이용한 부작용도 있었으나 근대국가 운영에 참여했던 경험자가 대한민국 건설 과정에 동원되었다.
·6·25 전쟁 지도: 그의 카리스마는 후퇴하는 국군에게 저항과 반격의 의지를 심어준 구심점이었다.
·6·25 전쟁의 의미: 한국은 자유세계의 선봉으로서 국제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미국이 본격적인 對蘇 봉쇄에 나서고 일본과 독일의 경제부흥, 대만의 적화 저지가 이뤄졌다. 東西냉전은 한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공산주의의 붕괴도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은 전쟁을 통해서 남한내 좌익세력을 일소하여 체제수호와 근대화의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 전쟁을 통하여 거대한 군사집단이 생겼고 이는 근대화 주도세력이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휴전협상에서 소외된 李承晩 대통령은 단독 北進, 반공포로 석방을 카드로 미국정부를 압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끌어냈다. 한미동맹 덕분에 산업화 시기 국방비의 증액을 최소화하면서 국가자원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민주 교육의 강화: 1950년대에 양성되고 온존된 젊은층이 60년대 근대화의 人力으로 쓰여졌고 4·19 혁명의 주도층이 되었다. 李承晩은 언론자유와 야당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대에 양성된 민주세력이 자유당 정권 타도의 선봉이 되었다. 李承晩도 모든 성공한 지도자처럼 「자기 성공의 실패자」였다.
·애국적 기업인의 등장: 유교적 실용주의, 한국적 상업정신(개성상인), 기독교적 직업윤리, 그리고 애국심으로 무장한 창업주群이 자본주의의 전도사 내지 개척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李承晩은 좋은 후원자였다.
·헌법과 현실의 갈등: 민주주의의 경험이 全無한 후진국이 선진 민주주의 헌법체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현실과 법의 괴리를 권력으로 메울 것인가. 선진 자유민주주의의 기준으로 후진 조국의 현실을 평가할 때의 부정적이고 자학적인 결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는 後發국가의 숙명이다.
·李承晩 정권의 붕괴: 자유와 복지를 다 같이 갈망하는 국민들, 특히 젊은 군인들과 학생들의 커지는 에너지를 충족시켜주기에는 노쇠하고 경직된 정권이 부정선거를 했다가 저항을 불렀다. 李承晩 대통령의 下野 결단이 최소한의 流血로 정권 이양을 가능하게 했다.
4. 張勉 정부: 善意의 실패
·朋黨정치 再現: 4·19 혁명 후 李承晩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정치풍토에서 내각제를 실험하자 한국의 전통적인 朋黨정치 행태가 再演되었다.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新舊派 분당 사태는 정치 지도력의 약화를 가져와 4·19로 촉발된 국민들의 욕구를 감당할 수 없게 했다. 이 틈을 탄 좌익세력의 발호는 반공정신과 개혁의지에 불타던 장교단에 심각한 체제불안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때는 6·25가 끝난 지 불과 7년이 흐른 때였다.
·민심과 軍心의 이반: 張勉 정부는 우파 정권이었으나 좌익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군 장교단의 불안과 불신을 불식시킬 수 없었다. 일반 국민들도 민주화에 따른 사회불안에 진절머리를 냈으며 군인들의 등장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커갔다. 민심과 함께 물려 돌아가는 軍心도 張勉 정부에 등을 돌려 5·16 주체세력들은 거의 공공연히 쿠데타 모의를 할 수 있었다.
·善意의 실패: 張勉 정부는 경제개발계획 작성 등 나름대로의 국가 발전 계획을 세우는 노력을 하였으나 민주당의 분열에 기인한 지도력의 약화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張勉 정권의 실패로 내각제는 허약한 정치체제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강하게 주었고 대통령 중심제의 리더십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5. 5·16 군사혁명-700년만의 군인 主導 국가개조
·왜 혁명인가: 근대화라는 가장 큰 규모의 國家改造를 가능하게 한 주체세력이 있었고, 지도자 朴正熙의 뚜렷한 목표와 이념과 전략이 있었다. 1963년에 그가 제시한 비전은 초과 달성되었다. 그의 근대화 작업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항상 60% 이상이었다.
·군사문화의 확산: 13세기 고려 武臣정권 이후 최초의 군사정권이었다. 군사문화가 가진 실용성, 효율성, 과학과 합리주의, 자주성, 富國强兵의 철학 등 긍정적인 면이 획일성 등 부정적인 면을 압도하고 國家개조에 크게 기여했다. 그 뒤 30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군사문화는 민족문화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장교단의 개혁성: 당시의 군 장교단은 최강, 최선진 개혁 집단이었다. 10%가 미국 유학 경험자로서 그 비율은 외무부 직원보다도 높았다.
·商工農士로의 신분혁명: 박정희는 士農工商의 후진적 신분서열을 商工農士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대판 士자 계층인 학자, 언론인, 정치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기업인 군인 관료 과학기술자들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것이 근대화 혁명 이념의 핵심이었다. 기업인과 군인들이 사회의 주류층을 형성한 것은 우리 민족사상 처음이다. 근대화 혁명의 주체세력이 得勢하면서 한국 사회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實事求是的인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朴正熙의 혁명적 역사관과 자주적 민주주의觀: 朝鮮朝의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무능, 위선, 守舊로 비판했던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우상 숭배하는 야당과 지식인들을 사대주의로 인식했다. 그의 주체적 생각은 민족적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한국식 민주주의’로 확산, 정착시키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그의 한국적 민주주의론과 개발전략은 후발 開途國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빵 다음에 자유: 朴正熙는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는 경제발전과 물질적 토대를 딛고 설 때만 기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자기 정당성에 대한 확신: 그는 5·16을 일으킨 데 대해서 죄의식이 없었다. 그는 민주당과 자유당을 똑 같은 위선적 정치집단 또는 守舊세력으로 보았다. 1963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란 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 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
6. 朴正熙와 그의 시대
·朴正熙 리더십의 본질: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사명감과 서민성을 바탕으로 깔고서 일본적인 武士道 정신과 국가주의 및 미국의 합리적 경영법을 두루 종합한 韓日美의 합작품이었다.
·朴正熙 전략의 핵심: (정신적)自助-(경제적)自立-(국방과 정치의)自主의 3단계 발전론을 끝까지 유지했다. 일관성이 그의 체질이었다. 그는 국가 주도에 시장경제적인 경쟁개념을 도입했다. 새마을 사업의 원칙도 잘하는 마을을 집중 지원하고 못하는 마을은 방치하여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朴正熙의 비전: 민족중흥, 조국 근대화, 自主국방, 한국적 민주주의.
·동양적 실용정치의 계보: 朴正熙는 管仲-명치유신 지도자-鄧小平-李光耀로 이어지는 동양의 실용적 정치 지도자型에 속한다. 이들은 實事求是의 방법으로 富國强兵을 추구했다.
·결정적 선택-수출立國: 줏대가 있으면서도 유연한 朴正熙는 속 좁은 민족주의가 선택하기 쉬운 수입代替 전략을 폐기하고 수출入國 전략으로의 방향전환을 결단했다. 우리 기업은 처음부터 국제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先경제, 後민주: ‘先경제, 後자주국방 건설’, ‘先건설, 後통일’의 전략에서 보듯이 朴正熙 정권은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孟子)는 동양적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남북한 逆轉: 1960년대에 남한은 경제제일 노선, 북한은 군사제일노선 추구했다. 1970년대에 남한은 견실한 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自主국방을 추진했으나, 북한은 과도한 군사비 지출의 누적으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남북한 國力의 逆轉이 일어났다.
·세계화 전략: 수출입국 정책, 한일 국교정상화, 월남파병, 중동건설 시장 진출은 한국인의 활동무대를 세계로 확대시켰다.
·민족사 세번째의 국제화: 신라통일 前後, 몽골 지배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한민족은 세계사의 중심부에서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이는 唐, 몽골, 미국 등 당대 최대강국과 친선 및 동맹관계를 유지한 덕분이다.
·維新시대의 功過: 1972년부터 7년간은 國力의 조직화, 효율의 극대화에 성공한 권위정부가 중화학 및 自主국방 건설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언론 및 정치의 자유는 제한되었으나 고도성장으로 두 차례 석유위기를 돌파하고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북한 등을 추월하여 멀리 따돌리고 질적으로 다른 국가가 되었다. 정치의 코스트가 최소화되면서 공직자 부패도 최소화되었던 시기였다.
·轉禍爲福 선택: 1973년 석유쇼크가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중화학공업 전략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유신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1974년부터 본격화되는 중동건설시장 진출은 越南진출의 경험을 딛고 가능했다.
·국민국가의 기본시스템 구축: 軍의 현대화, 방위산업 진흥, 직업 공무원조직의 확립, 법령정비, 의료보험제도 도입, 고속도로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축적, 국책 연구기관의 창설, 특히 KIST와 원자력 연구소 설립 등 한국의 먼 장래를 바라다 본 투자와 제도정비가 이뤄졌다.
·민주화 세력의 저항과 미국의 압력: 미국식 민주주의를 하느님처럼 모시려는 세력이 先進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삼아 한국적 현실의 문제점을 과장했다. 朴正熙의 代案 모색은 다수 지식인과 국민들이 정치적 판단 기준을 先進 민주주의로 삼고 있는 大勢 속에서 실패했다. 그가 한국적 민주주의를 신념화한 엘리트 집단을 만드는 데 실패한 이유는 지식인을 설득하지 못하고 근대화 성공의 産物인 중산층을 의식화시키는 데도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韓美 갈등: 카터의 위선적 인권외교와 內政간섭, 그리고 무리한 주한미군 철수 추진이 朴 대통령의 반발을 샀다.
·중산층 이반과 釜馬사태: 釜馬사태는, 근대화 성공의 産物인 도시 중산층이 학생 야당과 손잡고 정권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정권에 충격을 주었다. 金載圭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 뒤 한국 정치 변동의 결정적 역할이 도시 중산층의 손으로 넘어간다.
·釜馬사태의 원인: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 민주화 운동,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물가고와 부가가치세 징수, 金泳三 의원직 제명 등.
·10·26 사건의 의미: 「朴正熙는 봉건적 잔재 및 사대주의와 싸우다가 戰死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그의 죽음은 適期에 피로한 旗手를 교체하여 한국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 朴正熙: 인정과 눈물이 많은 鐵人·哲人·超人. 가슴에 총을 맞고도 『난 괜찮아』라고 주변인물을 걱정하면서 죽어갔다.
7. 신군부의 재집권
·12·12 군사변란의 성격: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朴正熙 친위세력이 10·26 이후 박정희 格下 움직임이 일어나자 불만을 품었다. 시해사건 수사와 엮여서 일어난 군내 갈등 속에서 鄭昇和 계엄사령관 연행이 流血사태를 촉발시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집권으로 매진하게 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朴正熙의 지도이념을 신념화하지 못하고 권력기생 체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朴正熙가 사라지자 지리멸렬하여 주도권을 상실했다.
·중산층의 중립-군부 재집권: 1980년 봄 정치자유화를 계기로 야당은 분열하고 사북사태 등 혼란이 발생했다. 제2차 석유위기의 여파로 경제는 不況 국면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이 증대했고 학생시위에 대해 냉담한 중립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탄 신군부의 집권 시도는 광주에서 局地的 저항에 직면하였으나 다수 국민들의 非호의적 묵인 하에 성공했다. 10·26사건의 한 동기가 되었던, 釜馬사태 때의 중산층과 학생들의 합세는 이때에는 이뤄지지 않았다. 야당, 학생 등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고립되었다.
·미국의 중립: 미국은 정권 교체기에 있었고 카터는 이란 인질 사건에 매달려 신군부의 집권을 저지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8. 全斗煥 정권-流血 집권, 경제의 안정적 발전, 單任 실천
·3低시대의 경제약진: 朴正熙 시대 말기에 노출되었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의 부작용을 정리했다. 엘리트 경제관료들의 정책수행을 대통령이 뒷받침하여 물가를 잡고 국제 석유價 안정에 힘입어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등 견실한 성장세를 지속하고 對外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經濟好調가 민주화의 충격과 혼란을 흡수함으로써 평화적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었다.
·정보통신과 전자산업의 전략적 추진: 1990년대의 IT 붐을 예약하였다.
·韓美관계의 안정: 레이건 행정부가 對蘇압박정책을 쓰면서 ‘반미적인 전체주의’와 구별되는 ‘친미적인 권위주의’인 全斗煥 정권을 지원하여 朴正熙 후반기와 같은 큰 갈등이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의 전략적 추진: 한국 사회 선진화, 對北우위 확보, 對공산권 접근, 한국의 국제 이미지 提高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했다. 국내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부측의 강력 대응은 올림픽 개최를 무산시킬 수도 있었다. 올림픽은 민주화의 안전판이 되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북한정권과의 대결에서 승리: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 폭파사건 등을 일으킨 북한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고 대응카드로 써먹은 평양 세계청년축전은 예산 낭비를 가져와 1990년대 大飢饉 사태의 要因이 되었다.
·학생운동권에 친북 좌익 이념 확산: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북한세력과 연계되거나 自生的인 좌익이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하여 당국의 단속을 탄압으로 몰아갔고 언론과 여론도 속아 넘어갔다. 여론과 야당에 밀린 정부도 적실한 대응을 하지 못함으로써 좌익 이념의 젊은층 침투는 大勢가 되었다.
·1985년 2·12총선과 민주화 운동의 大勢化: 이 흐름은 1987년6월 대시위로 폭발했고 全斗煥-盧泰愚세력은 6·29민주화 선언으로 대응하여 정면충돌 위기를 평화적인 민주화 과정으로 전환시켰으며 兩金의 분열로 盧泰愚후보가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요약: 全斗煥 정권은 유혈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7년간 대내외적으로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한국 사회를 긴장과 갈등과 성장이 교차하는 역동적 사회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9. 盧泰愚에서 盧武鉉까지: 민주화의 진통과 文民좌파정권 등장
·대중정치의 시대: 1988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언론 집회 시위의 자유가 확대되는 가운데 좌파가 주도하는 각종 대중운동이 강력한 조직력과 활동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공권력과 기성세력에 도전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 중에서는 친북적인 성격을 가진 단체도 많아 체제 불안 요인이 되었다.
·노사문제의 결정적 중요성: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기업이 정권의 보호 아래 노조운동을 누르고 생산과 판매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고 노조의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 노사문제가 경제발전의 결정 요인이 되었다.
·관념적 문민정치의 폐해: 1993년 소위 문민 정부의 재등장은 한국 정치가 예외의 시대(군인 주도 시대)가 끝나고 正常의 시대(문민 우위)로 복귀했다는 의미였다. 한국 정치의 정상복귀란 조선조 정치生理의 再現으로 나타났다. 정치인, 언론인, 학자, 법조인, 사회단체가 주도하는 위선적 명분론의 부패한 파당정치가 경제와 안보 및 외교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회의 좌경화-좌파 권력의 등장: 1980년대에 좌경화되었던 운동권 세력이 사회 중심부로 진입함에 따라 한국 사회의 권력구조도 좌경화되고 이런 바탕에서 金大中, 盧武鉉 좌파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계화속에서 좌초: 文民정부는 세계화 흐름에 한국 경제를 제대로 적응시키지 못해 1997-98년의 外換위기를 초래했다. 그 뒤에도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政經유착, 전투적 노조 등 문제점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치부패의 深化: 정치권력의 부패는 민주화에 따른 잇단 선거로 해서 오히려 더 악화되었고 이는 심각한 정치不信을 야기하여 정치 리더십의 약화를 초래했다.
·북한의 大飢饉과 北核문제: 흡수통일에 따른 책임과 부담을 두려워한 정부는 북한의 급변사태를 통일의 기회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1998년 이후 좌파정권이 등장하여 굴욕적 對北지원으로 金正日 정권을 강화시켜주는 한편 북한동포-국군포로-납북자-탈북자를 외면하고 韓美동맹을 약화시키고 國論분열을 주도하더니 드디어 북한의 핵무장을 허용했다. 이는 통일의 결정적 찬스를 놓치고 분단고착을 불러 북한동포의 고통을 연장한 민족사적 범죄이다.
·國論분열: 金大中 좌파 정권이 추진한 햇볕정책은 위기에 빠진 金正日 체제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남한내 친북좌익 세력의 강화로 이어져 체제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한편 북한의 내부개혁은 요원한 실정이다. 체제, 이념문제를 둘러싼 살벌한 대립은 대한민국의 존립기반을 뒤흔들 수 있는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남북한 親北反美 연합전선의 형성: 남북한에 걸쳐 대한민국의 핵심 가치를 파괴하려는 親北反美 연합 전선이 형성되고 있고 정권이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親북한정권 세력은 「북한공작원+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세력+대한민국의 공권력으로부터 제재를 당한 경험에서 생긴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무장한 세력+前근대적 후진세력의 집합체」로 되어 있다.
·근대와 前近代의 대결: 한반도에선 지금 前근대 봉건 세력이 金正日 정권을 핵으로 하여 남북한에 통일전선을 형성중이다. 대한민국이 지난 60년간 키워온 근대국민국가로서의 시스템(기업, 법치,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헌법 등등)과 중산층이 이에 저항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산층의 위기와 선동정치: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 변동기 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중산층이 外換위기를 계기로 자신감을 잃어 위기의 완충제나 균형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좌파세력의 양극화 선동, 가짜 민족주의 선동이 먹혀 들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 정통主流 세력의 위기: 1997년 및 2002년 선거에서 우파 세력이 분열하여 좌파 정권의 등장을 허용하였다. 두 차례 선거에서 대한민국의 챔피언이어야 할 우파 지도층은 이념무장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를 제대로 옹호하지 못하고 좌파선동에 守勢的으로 대응하였다. 이념이 가장 큰 전략인데 우파 후보가 선거 때 이념논쟁을 기피하는 바람에 좌파의 정체성을 폭로하지 못했다.
우파는 국가 엘리트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反美와 親中: 남북한의 좌파전선이 反美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는 사이 중국에 대해서는 호의적이고 때로는 굴종적인 자세가 굳어지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팽창은 한국에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끼치고 있고, 과거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의 再現이 우려되고 있다.
·해양문화권에서 대륙문화권으로 복귀 가능성: 1945년 이후 지속되었던 한국의 해양화, 세계화 추세는 1993년 金泳三 정권의 등장을 계기로 하여 미국 일본과는 不和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쪽으로 기우는 성향을 띠기 시작했다. 한국 내 두 흐름-해양화와 대륙화-의 대결은 국가를 분열시키는, 舊韓末 내분의 再版이 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도 있다.
10. 대한민국의 내일: 자유통일을 넘어서 일류국가 건설로
·한국의 國力 지표: 국내총생산은 세계 12위(인구 10억인 인도와 비슷하다). 수출은 세계 12위, 수입은 14위. 에너지 총소비량은 세계 10위, 1인당 소비량은 16위. 粗鋼생산량은 세계 5위. 선박 건조량은 1위.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6위. 전자제품 생산량은 3위. 인터넷 이용자수는 세계 3위. 개인컴퓨터 보유율은 7위. 인구는 세계 26위.
國力은 선진국이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國力에 걸맞는 지도층의 교양과 능력, 국민들의 애국심과 자신감, 반란집단인 북한정권에 대한 엄정한 자세와 북한동포들에 대한 동정심이 갖추어지면 자유통일도, 조국 선진화도 가능하다. 물질적 근대화 이후에 정신적 근대화(합리화, 과학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김정일 정권의 선동과 방해가 작동하고 있어 선진화가 늦추어지고 있다. 조국 선진화는 김정일 집단이란 방해물을 치우지 않고는 달성될 수 없다. 우리 민족사의 발전방향은 자유 복지 안전의 확보 등 인간의 존엄성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國政에 참여하는 계층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진보하여 왔다. 북한의 오늘날 생활 수준은 조선조 500년에서도 最惡이었던 철종 고종 시절보다 못하다. 민족사의 발전 원리는, 역사발전과 국민국가건설 과정에서 소외되어 있는 2천만 북한동포들을 구출하고 이들을 역사 만들기에 동참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꿈 꾸는 대한민국의 모습
히틀러는 국가주의자, 처칠은 애국자라고 구별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국가주의자는 국가의 적을 증오하는 마음이 기본이다. 애국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다. 正義를 독점하는 위선자들에게서 사명감(왜곡된)은 느낄 수 있지만 사랑은 느낄 수 없다. 한국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하고, 남북대치상황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숙명을 갖고 나온 셈이다. 이 경쟁과 투쟁이 인간애와 애국심을 바탕으로 하여 이뤄져야 한다.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관심, 북한동포에 대한 동정심과 김정일에 대한 분노,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인 국가. 이와 같은 국가가 존재해본 적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비슷한 국가를 우리 민족사에서 찾는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일 것이다. 唐將 蘇定方이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한 다음 귀국하여 唐帝 고종에게 신고를 하니 고종은 이렇게 물었다.
'왜 내친 김에 신라마저 정벌하지 않았는가.'
蘇定方은 이렇게 답했다고 三國史記는 기록하고 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忠義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감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신하, 즉 국가엘리트들이 忠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왕이 아니라 나라(즉 헌법)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짐, 사랑, 忠義, 받듬, 섬김-위의 짧은 문장 속에 등장하는 이런 키 워드가 충만한 신라였기 때문에 삼국통일과 對唐결전으로써 한반도를 지켜내어 민족의 보금자리를 가꿀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려고 하는 一流국가 대한민국의 모습도 이런 것이 아닐까.
3. 아홉 대통령 이야기
-두 위대한 대통령, 두 부지런한 대통령, 두 반역적 대통령,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 두 과도기 대통령.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이후 두 명의 위대한 대통령(李承晩, 朴正熙), 두 명의 부지런한 대통령(全斗煥, 盧泰愚), 두 명의 반역적 대통령(金大中, 盧武鉉), 한 명의 '좌파宿主' 대통령(金泳三), 그리고 군사변란을 묵인했던 두 과도기 대통령(尹潽善, 崔圭夏)이 있었다.
李承晩 건국 대통령은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이념 위에 세우고 6·25 휴전기에 미국을 압박하여 韓美동맹이란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그는 6·25 남침 직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좌익의 공격목표를 사전에 소멸시키고 민주주의 교육으로써 '不義와 不正에 저항할 줄 아는 젊은 세대'를 키웠다. 이 젊은 세대가 4·19 학생혁명으로써 李대통령을 몰아냈으니 그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미국의 名門 프린세턴 대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가 된 그는 동서양의 교양을 한 몸에 통합한 카리스마와 세계大勢를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으로써 한국을 해양세력권에 묶어놓고 세계사의 主流 속에 집어넣었다. 1948년 건국 당시 한국인중 知的능력이 가장 탁월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한국인의 축복이었다.
아시아에서 두 개의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용적인 중국사람들이 공산화된 것. 이는 毛澤東의 군사적 천재성에 기인하는 바 크다. 또 다른 기적은 관념론의 포로였던 한국인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1920년대에 이미 간파했던 李承晩의 지도력에 힙 입은 바 크다. 李承晩을 매개로 하여 기독교적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 헌법 속으로 들어와 건국이념이 된 것이다. 2007년의 한국이 세계 10大 경제력, 26위의 삶의 질을 가진 선진국 수준의 나라가 된 데는 李 대통령이 만든 자유와 동맹의 울타리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한국역사상 800년만에 처음으로 효율적인 군사문화를 도입하여 후진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린 '근대화의 旗手'이자 '시스템 운영의 鬼才'였던 朴正熙는 6·25 전쟁의 産物이다. 이 전쟁으로 한국 사회의 最强집단이 된 국군장교단이 무능한 文民지배층을 교체한 것이 5·16 군사혁명이었다. 朴 대통령은 '서구식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면서 민주주의를 한국식으로 변형하여 근대화를 성공시킨 진정한 주체사상가였다. 그는 富國强兵策으로써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계급적 토대를 만들었다.
이른바 유신독재로써 정치 코스트를 최소화하여 國力을 조직하고, 능률을 극대화해갔던 1970년대 朴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했고 이것이 성공하여 한국을 重量級 국가로 올려 세웠다. 1979년에 들어서서 朴正熙式 근대화의 産物인 도시중산층이 장기집권에 싫증을 느끼고 지식인 및 학생들과 손잡고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고 나섰고(釜馬사태), 이것이 朴정권의 실력자 金載圭 정보부장을 변심시켜 대통령을 사살하게 만들었으니 朴正熙 또한 자기 성공의 희생자였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이끄는 약5000명의 혁명군이 서울에 진입하였을 때 張勉 총리는 달아나 연락이 두절되었다. 군통수권자이던 尹潽善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의 진압군 동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內戰을 막고 군사혁명의 성공을 보장했다. 朴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군부의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全斗煥 장군이 12·12 군사변란을 일으키자 崔圭夏 대통령도 流血사태를 걱정하여 진압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尹, 崔 두 대통령은 이 조치로 해서 비판을 받았으나 북한군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국군을 동원하여 국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은 장교 시절부터 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그 後光으로써 혼란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12·12사건, 광주사태 등 流血사태를 통해서 집권했으나 민주화 약속을 지켰고 세계1위의 경제성장을 기록했으며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다. 盧泰愚 대통령은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으로써 기득권을 포기하고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요구를 수용했다. 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는 金泳三-金大中의 분열을 틈타서 당선되어 전면적인 민주화를 주도했다. 그는 공산권 총붕괴의 시기를 이용하여 중국, 소련, 동구국가들과 수교함으로써 북한을 후방에서 고립시켰다. 신도시 건설, 인천공항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적극적으로 했다. 盧대통령은 또 3당 合黨을 통해서 보수연합정당인 민자당을 만들고 金泳三씨를 후계자로 밀었다.
안정적인 보수연합구도의 지원하에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金泳三 대통령은 좌파적 영향하에 들어가 보수연합구도를 깨고 한국 현대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함으로써 좌파득세로 가는 카피트를 깔았다. 그는 보수를 자칭했으나 사실상 좌파적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의 분열적 정책이 金鍾泌의 충청도 세력과 대구-경북세력을 民自黨에서 이탈시켰고 外換위기를 불렀다. 이런 정책실패와 보수분열 구도하에서 金大中이 199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좌익활동가 출신 金大中은 대통령이 된 이후 좌경적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현대그룹을 통해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보낸 끝에 2000년 6월의 평양회담을 성사시켰다. 비밀송금으로 김정일에게 약점이 잡힌 신세가 된 그는 김정일의 對南적화전략지침을 그대로 수용한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한국을 赤化의 길로 내몰았다. 金大中의 노선을 이어받아 2002년에 당선된 盧武鉉 대통령은 金大中의 反헌법-反국가적 노선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위선적 평화론의 전도사가 되었고, 金正日의 對南赤化전략의 핵심인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한국을 북한 정권의 인질로 전락시킨 끝에 北의 戰犯집단이 핵무장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金日成이 일으킨 민족반역적 6.25 전쟁으로 약300만, 金正日의 사회주의 실패로 약300만 명이 죽음으로써 공산주의의 본성을 보여주었는데도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를 통해서 민주투사로 위장한 親김정일 세력을 정권담당자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이 선거를 통해서 히틀러를 뽑은 것과 같은 실수를 한 셈이다. 金泳三 이후 14년간 한국정치는 조선조의 朋黨정치 시대로 회귀했다. 국가엘리트層이 약해지고 지역, 계급적 이해관계로 國論이 분열되면서 국민들의 정신도 많이 망가졌다. 다행히 民間부문이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충실하여 기우는 나라를 버티고 있다.
각성하고 있는 한국의 유권자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반역적 좌파정권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어린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좌파종식에 성공한다면 한국은 자유통일을 너머서 一流국가를 건설할 것이고 이는 非서구국가로선 일본에 이어 두번째의 위업이 된다. 2007년은 민족사의 결정적 해이다.
4. 속느냐, 죽느냐
친북좌파 종식 3·1 국민대회(2007년 3월1일 서울시청 광장) 연설문
국민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참으셨습니까?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습니까. 남북한의 좌익들. 이 천하의 개망나니들이 우리가 세우고 가꾸어온 대한민국을 분탕질하고 난도질하고 헌법을 짓밟고 국가이념을 바꿔치기하고 간첩을 감싸고 국군포로와 탈북자들을 외면하고 韓美동맹을 사실상 해체하려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얼마나 속이 상했습니까?
국민 여러분, 그러나 이제 기회가 왔습니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던 대한민국은 오늘 이 자리에서 반격을 시작합니다. 국민들이 각성하고 여론이 바뀌자 겁을 집어먹은 친북좌익들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열린당은 政權사기단으로서의 역할이 끝났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부도를 내어놓고는 위장폐업한 뒤 야반도주하여 신장개업하는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국민들을 속이려는 계략입니다. 노무현씨도 어제 탈당하여 이 야반도주의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자기가 몰던 대한민국이란 배에 불을 질러놓은 선장이 승객들은 남겨놓은 채 구명정을 타고 달아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드디어 찬스가 왔습니다. 우리 손으로 이 불을 끄고 좌익난동을 진압하고 국가를 정상화시킨 다음에 자유통일로써 북한동포를 해방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류국가를 건설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지켜낼 때 흘린 피, 산업전사들이 흘린 땀, 민주화 시대에 흘렸던 눈물. 이 피 땀 눈물이 만들어낸 것이 자유통일과 一流국가의 꿈입니다. 이 꿈을 사기꾼들에게 빼앗기지 맙시다.
국민 여러분, 행동으로 새 세상을 만듭시다. 국가정상화, 자유통일, 조국 선진화로 달려가는 길을 막고 있는 저 장애물들을 우리 손으로 치워버립시다.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올해 대통령 선거,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신을 차리고 속지 않으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속으면 죽고, 정신차리면 삽니다. 속느냐, 죽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총반격이 시작된 오늘 맹세하고 다짐합시다.
“우리는 안 속는다” “우리는 다시는 안 속는다” “우리는 절대 안 속는다”
먼저 저들의 말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저들은 진보를 자처합니다. 세계적으로 진보란 말이 정치적으로 쓰이면 좌익 또는 공산당이란 뜻입니다. 저들은 진보로 위장한 퇴보세력입니다. 저들은 민족을 앞세우나 민족반역자이고, 평화를 노래하나 戰犯집단의 졸개들이고, 입만 열면 개혁을 설파하나 그들의 정체는 부패하고 무능한 守舊기득권세력입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개혁은 親北反美좌익들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친북좌파정권을 끝장내는 일이 최고의 개혁입니다.
천하의 개망나니 김정일에게 굴종해온 저들은 대한민국까지 끌고 들어가서 저 민족반역자 앞에 무릎을 꿇리려 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이 죽든지 친북좌익들이 사라지든지 兩者擇一뿐입니다.
저들은 지역감정과 계층갈등을 먹고사는 守舊반동세력입니다. 선거철을 맞아 저들은 또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 지방을 서로 싸우게 하고 분열시켜서 표를 얻으려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59년 전 국민국가로 출범했습니다. 지역, 계급, 종교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안에선 모두가 국민입니다. 전라도도 대한민국이요, 경상도도 대한민국이요,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이 다 대한민국, 우리 조국, 우리 겨레, 그리고 같은 국민입니다.
저들 친북세력의 지역감정 부추기기와 양극화 선동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敵과 同志를 분명히 가려야 합니다. 한반도에선 이념이 가장 큰 전략입니다. 김정일 편인가, 대한민국 편인가. 독재편인가, 민주주의 편인가, 학살자 편인가, 자유의 편인가, 압박과 설움의 편인가, 인권과 번영의 편인가. 태도를 분명히 합시다. 저들은 김정일 편, 학살자 편, 독재자 편, 전쟁광 편, 반역자 편입니다. 우리는 正義의 편이고 저들은 不義의 편입니다.
대한민국에 모처럼 기회는 왔지만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이 찬스를 놓칩니다. 모든 국민, 특히 애국세력, 한나라당, 그리고 李明博, 朴槿惠씨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과 대한민국의 敵은 김정일과 조총련과 친북세력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동지이고 친구이고 경쟁자들입니다. 친구를 敵처럼 공격하고 敵인 김정일을 친구처럼 감싸지 마세요. 이명박씨의 敵은 박근혜씨가 아니고 김정일입니다. 박근혜씨의 敵도 이명박씨가 아니고 김정일입니다. 민족공멸의 핵무기를 손에 든 김정일은 이명박씨, 박근혜씨, 그리고 대한민국의 主敵입니다.
남북한 무장대치상황의 본질은 민족사적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선과 악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입니다. 300만 동족을 굶겨죽이고, 40만 양심수를 강제수용소에서 때려죽이고, 서울을 겨냥한 핵폭탄을 개발한 김정일이야말로 대량살상무기 그 자체입니다.
그런 김정일과 대한민국이 싸우는 데서는 중립도, 中道도 중간도 없습니다.
건국 대통령이 지금 지하에서 울부짖고 계십니다. 생전에 그분이 하신 말씀이 들려옵니다.
“대한민국이 너희를 자유민으로 만들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말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렇습니다. 속으면 노예가 되고 정신차리면 자유를 얻습니다. 무릎 꿇으면 노예가 되고 싸우면 자유민이 됩니다.
대한민국은 죄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과 함께 전진합시다. 대한민국과 함께 돌격합시다. 대한민국과 함께 승리합시다. 대한민국 만세! 자유통일 만세! 국군만세! 한미동맹 만세!!! 감사합니다.
5. 왜 우리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나
한반도에서 정통국가는 하나뿐이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국가도 하나뿐이다.
1. 대통령들까지도 反헌법 발언
우리나라 識者層 인사들 가운데서, 또 대한민국 수호 세력 인사들 가운데서도,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동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7·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유엔 동시 가입, 6·15 남북정상 회담이 있었고 남북간 교류가 이뤄지고 있는데 어떻게 북한을 국가로 보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金大中 전 대통령도 그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고 지금 민주노동당은 당 강령을 통해서 국가연합-연방제 통일방식을 천명하여 북한을 국가로 본다고 명시하고 있다. 盧武鉉 대통령도 연방제식 통일방안을 언급했다. 헌법을 수호할 책임을 가진 이들까지도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우리 헌법의 가장 중요한 정신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더할 것이다.
2. 우리 헌법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말라고 명령
대한민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명문으로 규정한 것은 물론 헌법 제3조이다.
<제3조(영토):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附屬島嶼로 한다>
이 조항에 따라서 북한정권은 한반도의 북반부를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정부를 참칭하며 대한민국을 변란시키려 하는 反국가단체, 즉 반란집단이 된 것이다.
우리 판례는 '이 3조에 따라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부딪치는 어떤 국가단체도 인정할 수 없다. 비록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하나의 主權국가로 존속하고 있고, 우리 정부가 북한당국자의 명칭을 쓰면서 정상회담을 제의하였다 하여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고권을 침해하는 反국가단체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남북관계의 변화가 이 조항의 해석에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명백히 했다.
우리 헌법은 국민들로 하여금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언론은 북한 정권, 북한 당국이라 부른다.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북한 국민이라고 하지 않고 북한 주민이라고 하는 이유도 헌법 3조를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북한을 무엇으로 인정하는가. 대한민국은 북한을 정치권력의 실체, 즉 정권으로는 인정한다. 그래서 대화도, 교류도, 협력도 하는 것이다. 교류, 협력도 하는데 왜 국가로 인정해선 안 되는가. 국가는 역사적,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3. 민족 정통성은 무엇인가.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국제적 합법성,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담고 있는 우리 헌법의 뇌수와 심장이다. 우리 민족은 서기 7세기 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한 후 후삼국 시대와 남북 분단 시대를 빼고는 1민족1국가의 전통을 이어왔다.
우리 민족은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통국가는 1개 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독일 민족은 1871년에 프러시아가 통일할 때까지 많을 때는 수백개, 적을 때라도 수십 개의 도시국가를 갖고 있었다. 이런 독일 민족도 東西 분단 상태를 극복하여 통일로 나아갔는데 하물며 1민족 1국가가 민족의 체질이 된 한반도에서 1민족 2국가를 인정한다는 것은 민족의 전통 가치관, 즉 민족정신과 生理에 반하는 것이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당연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한민족을 대표하는 정통국가는 하나여야 한다는 1300년 걸려서 만들어낸 민족사의 합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남북관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남북한 어느 체제가 민족사의 정통국가인가, 즉 어느 쪽이 한민족을 대표하는 챔피언인가를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란 점이다. 이런 본질에 대해서는 한국뿐 아니라 북한 정권도 적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북한정권의 對南전략 핵심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온갖 전술과 전략이다. 그들이 우리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권력실체로는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식민지로 간주하고 있다든지,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든지, 금강산 관광객들이 한국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모두 민족정통성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4. 북한은 왜 국가 자격이 없나
민족 정통성 싸움이란 한 집안의 嫡者와 庶者를 가르는 싸움과 같다. 종교에서 正統과 異端을 가르는 것과 같다.
정통성을 부여받은 정권에게 씌어주는 월계관의 이름이 '국가'이다. 국가는 왜 정권이나 단체와 다른가. 국가는 고도의 도덕성을 지닌다. 국가가 국가의 자격을 지니려면 국민을 보호해야 하고 국제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북한정권은 태어날 때부터 소련 정보기관의 私生兒였다. 선거를 통해서 주권자인 국민이 만들어낸 대한민국과 달리 북한은 소련 정보기관이 시나리오를 쓰고 가짜 김일성을 주연배우로 내세워 제조한 괴뢰정권이었다.
북한은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자유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 과정을 거부함으로써 유엔의 승인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규범에 위반하는 침략전쟁, 납치, 테러, 위조지폐 유통, 마약 밀조 밀수출 등 온갖 범죄행위를 자행함으로써 국가의 자격을 실질적으로 상실했다. 현대 정치용어로써 '국가'라고 할 때 그것은 국민국가, 즉 국민이 主權을 가진 민주체제를 想定한다. 북한정권은 그 속성이 수령국가, 마적단, 마피아이다. 국가의 조건을 원천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가장 결정적 결격 사유는 1995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북한 정권은 식량이 모자라자 체제 충성분자들 약500만 명에게만 식량을 공급하고 나머지 1700만 명에게는 배급을 중단하여 이 계층에서 약3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이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학살을 능가하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인종학살, 계급학살이었다. 식량의 생산과 공급을 독점하고 있는 사회주의 정권이 평양사람, 군인, 노동당 간부, 국가보위부원, 사회안전부원 등에게만 식량을 공급한 것은 체제 유지에 필수요원이 아닌 사람들은 굶어죽어도 된다, 또는 이 기회에 굶어죽는 것이 낫다는 정책의 반영이었다.
金正日은 대기근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역이용하여 체제유지에 짐이 되는 계층을 청소해버리려 한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통계도 있다. 북한 정권이 분류한 성분별 인구에서 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餓死者와 영양불량자가 집중적으로 발생했고 충성분자들은 안전했다는 통계가 그것이다(나치오스가 쓴 ‘북한의 대기근’, 아래 자료 참조).
북한정권은 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임무를 포기하였을 뿐 아니라 조직적인 饑餓학살을 자행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자격뿐 아니라 사회주의의 자격도 상실했다(배급을 포기하는 사회주의는 없다). 이 기간에도 金正日은 호화 식단을 유지하여 일본인 전속 요리사는 김정일 곁에 있었던 12년간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김정일의 요리사’). 그의 食單은 중앙 아시아, 동남마, 일본, 파리에서 공수된 포도, 참치 뱃살, 아이스크림, 수박, 떡으로 채워진다. 그는 24일간의 기괴한 시베리아 철도 여행중에도 평양에서 공수해온 요리를 먹었다.
이런 김정일 정권에 대해 '국가'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물론이고 사실적으로도, 정치학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5. 그러면 왜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자는 말이 나오나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하자고 하는 세력은 남한의 좌파들과 일부 우파세력인데 의도는 물론 다르다. 좌파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합법국가인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마적단 정권 수준으로 격하시키기 위하여 북한을 남한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자고 한다. 盧武鉉 대통령은 대한민국 수립을 金日成 정권과 같은 ‘분열정권 수립’으로 본 사람이다. 그런 그가 연방제를 수용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한국의 공식 통일방안은 남북 연합이지 ‘국가연합’이 아니다. 남북 연합은 남한도 북한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상호 협의체를 만들어 교류하자는 정도의 통일안이다.
국가 연합은 상호간에 국가로 인정한 뒤 연합체를 만들어 평화공존하면서 최종적인 통일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되는 발상이자 反통일적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한 다음에는 武力통일이 아니면 통일을 '의무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국가연합 발상은 평화통일의 의무를 규정한 헌법 4조와도 충돌한다. 국가연합 발상은 통일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정도의 事案으로 격하시킨 사실상의 통일 포기 논리이다.
이 국가연합을 주장하는 사람이 내세우는 구체적인 안을 보면 북한정권이 주장해온 對南적화전략으로서의 연방제안에 가깝다. 대한민국 정부를 지방정부로 격하시킨다든지 민족 정통성의 말뚝이 박힌 서울을 수도로서 포기하고 개성 근방에 새 수도를 만들겠다는 식의 발상이 국가연합이란 간판 아래서 진행된다면 이는 진정한 국가 연합도 아니고 위장된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이라고 보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당수 보수세력 인사들은 그 이유로 유엔 동시 가입과 동서독 사례를 든다. 유엔에 가입했으니 남북한 모두 국가로 인정받은 것이란 논리이다. 이는 남북 관계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는 유엔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남북한 상호간의 문제이다. 남북한 어느 쪽도 통일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국가로 인정할래야 할 수가 없다. 유엔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고 해서 한국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님은 남북한 기본합의서의 前文이 잘 정리해 둔 대로이다. 이 前文은 남북한 관계를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정리한 것이다.
체제대결에서 밀린 東獨은 흡수통일을 두려워하여 西獨에 대하여 兩獨 관계를 국가간의 관계로 설정하자고 졸랐다. 서독은 이를 거부했다. 동서독간에는 수상끼리의 회담은 자주 있었으나 국가 원수간의 회담은 없었다. 兩獨간에는 대사 교환도 없었다. 서독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서독은 동서독 관계의 업무를 외무부가 아닌 총리실과 내무부가 맡아 했다. 서독은 또 기본법(헌법)에다가 '1937년 현재의 독일제국 영토하의 독일국적 소유자는 독일국적자로 간주한다'고 하여 동독주민들을 自國民으로 대우함으로써 東獨을 독립된 외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동방정책을 추진한 브란트 정부는 동독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동서독은) 서로에게 외국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서독은 동독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을 흡수 통일할 때 국제법의 제한을 받지 않았고 기존의 서독 헌법을 고치지도 않고 그 헌법체제안으로 동독을 통합할 수 있었다. 동서독은 상호간 평화공존하면서 서로를 권력실체로서 인정했을 뿐 서독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이 점을 놓치면 독일 통일의 핵심을 잃게 된다. 우리가 북한을 국제법상의 국가로 인정한다면 북한에 急變사태가 발생했을 때에도 통일을 추구할 수가 없고, 탈북자를 自國民으로 간주하여 구출하는 데도 어려움이 생긴다.
6.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우월성을 지켜가는 짐이 아무리 무겁다고 해도 내려놓을 수는 없다.
7·4 공동성명, 6·15 공동성명에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 담겨 있다고 해도 그 말들이 한반도의 조건과 대한민국 헌법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방향으로의 헌법 개정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과 유일합법성, 그리고 통일의무를 포기하는 國體변경에 해당하므로 헌법개정으로써도 할 수 없는 원천적 무효라고 보는 헌법학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보수인사들마저 북한정권을 국가로 인정한 다음 남북관계를 국가간의 관계로 설정하여 分斷상황을 평화롭게 관리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먼저 포기하는 쪽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남북관계의 역사적 본질을 간과한 것이고 패배주의적인 발상이기도 하다. 망나니 짓을 하는 金씨가 있다고 하자. 집안의 어른이, 그 金씨의 버릇을 고쳐놓기가 괴롭고, 힘도 부치니 '내가 먼저 姓을 갈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그 어른은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여 망나니를 교화하거나 단속할 수 없게 된다.
북한정권을 상대로 하여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국가 정통성을 지켜가는 일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 짐을 내려놓는 즉시 우리는 역사적, 도덕적 우월성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자유통일의 주도권을 놓치게 된다. 우리 헌법이 규정한 자유통일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국제법적, 도덕적 우월성이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그 우월성의 핵심은 대한민국은 국가, 북한정권은 反국가단체라는 인식이다.
국가란 존재는 국민들에게 죽음을 요구할 합법적 권한을 가진 유일한 단체이다. 살인범이나 반역자에게는 사형을, 전쟁이 났을 때는 군인들에게 死地로 갈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이 국가이다. 때문에 국가는 어느 조직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한다. 북한 정권은 동족에 대한 민족반역적인 학살행위의 주체로서, 또 국제평화를 파괴한 反인류범죄행위로써 스스로 국가가 아님을 선언한 조직이다. 이런 집단에게는 정권이나 당국이란 호칭도 과분하다. 대한민국만이 한민족의 챔피언이고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합법국가임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자부심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는 가장 큰 에너지源이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왜 敵對계층에서 주로 죽었나
金正日이 일으킨 餓死살인-계급살인
북한의 飢餓(기아)사태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종합적인 분석과 자료를 담고 있는 것은 구호단체 월드 비전의 부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앤드류 S. 나치오스(ANDREW S. NATSIOS)가 쓴 '북한의 대기근'(The Great North Korean Famine: Famine, Politics, and Foreign Policy. 2001.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Press)이다.
이 책에서 필자는 1994-1998년의 大飢饉 때 수백만 명이 굶어죽어가고 있는데도 북한내에서 활동하던 외국의 구호활동가들은 『우리는 굶어죽은 시체도 보지 못했고 꽃제비도 보지 못했다』면서 언론의 보도를 부인하였다고 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연구자들이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한 조선족 사람은 1998년5월 북한을 여행했을 때 본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거리는 이상하게도 깨끗했습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사람들을 향해 나오지 말고 건물 속에 있으라고 했습니다. 교통경찰관들이 행인들을 건물안으로 들여보내느라고 바빴습니다. 내가 왜 저러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중국과 한국의 적십자 표시가 붙은 자동차가 지나갔습니다. 나는 거리에서 한 노점상 아주머니가 어린이를 구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말리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내 아이 다섯 중 둘이 굶어죽었습니다. 내가 팔고 있는 이 옥수수는 나에겐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걸 훔치려고 했습니다. 무의식중에 너무 화가 나서 두들겨 패게 된 것입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외국 구호 단체가 방문하는 날이면 시민들은 건물 안에 있어야 하고 좋은 옷을 입지 않고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외국인에겐 절대로 말을 해선 안 된다는 지시를 당국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이 大飢饉 사태 초기에 솔직하게 참상을 알리고 국제적인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의 필자는 20세기의 5대 기근은 모두 전체주의 국가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1930-33년의 소련 우크라이나 대기근, 1958-62년 중공 대기근, 1984-85년 이디오피아 대기근, 1975년의 캄보디아 대기근, 1990년대 말 북한의 대기근이 그것이다. 이들 전체주의 국가는 대기근이 발생했는데도 정치적인 이유를 중시하여 신속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아를 해결하는 자유까지도 속박했기 때문에 수많은 인명 손실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著者 나치오스씨는 의미 심장한 통계표를 하나 제시했다. 북한의 계층구조와 영양불량 상태와의 상관 관계이다. 金日成 시절 북한의 계층은 충성분자들인 핵심계층이 전체 인구의 25%, 동요계층 55%, 불만 계층 20%로 분류되었다. 유엔이 1998년에 조사한 북한인구의 영양상태를 보면 약32%는 영양이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약62%는 중간 정도의 영양부족이었다. 약16%는 극심한 영양 부족이었다.
이 통계는 25%(핵심 계층) 對 32%(영양양호), 55%(동요계층) 대 62%(중간정도의 영양불량), 20%(불만계층) 대 16%(극심한 영양불량)의 대응을 보인다.
이 통계를 보고 하기와라 료(전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 평양특파원. 「조선전쟁」의 著者)같은 일부 인사들은 金正日이 불만계층을 정치적으로 숙청하기 위하여 대기근 사태를 이용했다는 견해를 보였다. 「북한 대기근」의 저자는 이 주장을 배척하면서도 정치적 영향력의 强弱과 餓死者(아사자) 사이엔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우선 金正日은 핵심계층만이 사는 평양주민들과 당간부 및 군인들한테는 식량을 공급했고 나머지 주민들한테는 식량 공급을 해주지 않았다. 식량배급이 끊겨버린 사람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백성들이었다. 餓死者는 주로 정치적 배경이 약한 이 계층에서 발생했다. 결국 金正日 정권의 계급차별이 힘 약한 사람들을 집단적 餓死로 몰고 갔다는 이야기이다. 집안에서도 힘이 약한 어린이와 노인들이 주로 굶어죽었다. 弱肉强食의 정글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지옥의 세월이었다는 이야기이다.
하기와라 료씨는 이렇게 말했다.
『계급차별 사회에서 식량이 모자라게 되면 힘 있는 사람은 식량을 많이 차지하고 힘 약한 사람은 몫이 작아져 굶든지 죽게 된다. 여기에 지배층이 이들을 고의로 내팽개쳐버리면 敵對(적대)계층에서 집중적인 아사자가 발생한다. 함경남북도와 자강도에서는 敵對계층 사람들이 많이 살고 운송수단도 취약했다. 여러 가지가 겹쳐 餓死者가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이는 체제의 구조적 생리와 金正日의 의도가 합쳐서 발생한 餓死살인으로 봐야 한다』
참고자료/“아버지, 아 하세요”
한 북한주민의 手記(月刊朝鮮 1999년 7월호에서 뽑음)
기울어져 가는 저녁해처럼 이제 이 家門(가문)에 살아남은 자가 누구냐? 아니-이번에는 지옥에서 누굴 데려갈 거냐? 정말 시간문제였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두 딸애와 내가 우리 가문의 유일한 재산이었으니 그때 나의 심정은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찬장 서랍에 있는 쥐약봉지를 생각했다. 평양시 용성구역에서 쥐약을 풀어 집안 식구를 먹이고 자기는 목을 매 죽은 ○○이가 떠올랐다. 그럼 나도?? 아이들과 함께 먹어버리고 다 함께 죽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파리한 얼굴에 눈확이 꺼져 들어간 흐릿한 눈길로 행여나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딸들을 보니 차마 내 손으로 죽이자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범도 제 새끼는 안잡아 먹는다는 말이 그날처럼 나에게 공감을 주어보기는 일생 처음이다.
우리 셋 중에서 죽으려면 내가 죽게 하고 저애들은 살아남게 해 주십사 하고 생각하였다. 그후 우리의 목숨은 끈질기게도 붙어 있었다. 죽을 날을 기다려도 그날까지 살아 있었으니 그날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1995년 11월15일이었다.
막내딸 ○○이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변소에 가겠지 하고 혼미상태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막내딸이 방긋이 웃는다.
『아버지, 아- 하세요』 하길래 멋도 모르고 입을 벌리는데 딸애의 고사리같은 작은 손이 펴지는 순간 쌀알 20 여알이 손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쌀알을 보고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니 저 건너집 돼지우리 옆에 볏짚이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나서 펼쳐보니 벼알이 몇 알 있더라는 것이었다.
딸애는 그 벼알 한 알 한 알을 손톱으로 까서 모아 가지고 나를 깨운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걸 잡숫고 일어나야 우리가 산단다. 나는 딸애의 그 말에 심한 가책을 느끼며 그 귀여운 딸애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이의 딸애가 정말 이 미련한 아버지보다 나았다. 나는 그 쌀알을 막내가 큰딸과 함께 나누어 먹게 하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기살기로 거부하고 나섰다. 내가 먹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쌀알을 아이들에게 먹일 수가 없었으니…. 그날 이 지구촌 위에서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쌀알 나누어 먹는 신기한 장면이 우리 집에서 연출되었다.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생겼다. 종전에 죽기만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죽는 날까지 아이들을 위하여 무슨 짓인들 다 해보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곰곰 누워서 생각하니 아파트 어느 1층집에 쥐이빨 강냉이종자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아파트 골목을 누비다가 끝내 그 집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창문을 만져보니 다행히도 유리가 아닌 비닐방막이였다. 허기에 지쳤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먹이를 구했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설다.
나는 준비해 가지고 갔던 칼로 비닐을 째고 옥수수종자를 움켜 쥐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흥분으로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의 그 쾌감을 나는 적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艱難辛苦(간난신고) 끝에 옥수수종자를 떼내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은 비칠거리기는 했어도 가벼웠다. 이것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짚은 도적생활이었다. 성공하고보니 나도 꽤 노력하면 훔쳐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그때부터 나는 어디에? 무엇을? 하며 손에 닿는 대로 가능성이 있는 대로 훔쳐내어 자식들을 먹여살리는 도적무리의 한 일원이 되어 버렸다.
이날 밤 우리 집에서는 근간에 보기 드문 성대한 연회가 벌어졌다. 「눈물은 내려오고 밥술은 올라간다」는 격언이 틀리지 않았다. 연달은 초상으로 푹 꺼져 들어갔던 생기가 옥수수종자 다섯 이삭이 생기면서 집안에 和氣(화기)가 돌았다. 죽은 건 죽은 것이고 산 놈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요구가 우리들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나는 옥수수종자 한 이삭을 아이들에게 날 것으로 먹도록 배려해 주었다. 음식이 익는 동안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해서 그렇게 하였는데 두 딸애는 그 돌덩이 같은 옥수수알을 맛있게 씹어먹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긍지로 오랜만에 웃고 떠들었다.
이때부터 우리 세 식구는 빌어도 먹어 보고 훔쳐도 먹어보고 땅에서 주워도 먹어보면서 신성천~고원, 원산~단천 등지로 방랑하면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민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직접 목격하면서 파리 목숨 같은 인생을 유지하였다.
이 길 위에 고원에서 맏딸이 숨을 거두었고 그후 순천역의 쓰레기장에서 막내딸애의 시체가 발견되어 나를 질식케 하였다. 막내딸은 마지막까지 나의 곁에 남아 아버지께 충직했던 나의 혁명동지였으며 이 세상에서 나를 고아로 만들어 버린 유일한 마지막 혈육이었다. 그의 屍身(시신)을 집에 가져다 헤쳐보니 그의 가슴속에는 깨끗한 비닐봉지에 정성 들여 골라놓은 배 껍질과 배 송치(편집자 注:씨가 들은 속), 명태껍질, 돼지뼈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아마도 나를 만나면 함께 먹으려고 그렇게 먹고 싶은 것도 참고 건사했을 딸애를 생각하여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양지바른 산기슭에 딸애를 안장하고 그 비닐봉지를 입가에 얹어 주었다. 그때 나의 막내딸의 나이가 12세였다.
6. 一流국가는 强者의 논리를 가져야
弱者의 논리, 즉 피해의식과 저항의식만으로는 조국 선진화를 이룰 수 없다.
광복 이후 지난 62년간 한국인은 조국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하여 근사한 국민국가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경제력, 군사력, 과학기술력에서 이 나라는 세계 10위권에 들었다. 삶의 질 부문에서는 세계 30위권이다. 이런 國力을 바탕으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 내지 해체시킨 뒤 북한동포를 해방하는 자유통일을 이룩한다면 국가선진화를 통해서 一流국가를 만들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지금이 우리 민족사의 두 번째 황금기이다. 7세기말 삼국통일을 성공시킨 新羅는 그 뒤 약250년간 세계의 문명중심지에서 富國强兵한 一流국가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면서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이바지했다.
非서구-非기독교 국가로서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선진국이란 共認을 받고 있다. 한국, 대만, 이스라엘이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서서 안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자유통일을 성공시킨다면 한국이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一流국가로 도약할 것이다. 이는 세계사적인 업적이자 最速 기록이다.
一流국가는 一流 국가엘리트가 이끄는 一流국민과 함께 간다. 一流국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一流국가를 만드는 길이다. 一流국민 이전에 一流의 국가엘리트층이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한국의 기적적인 발전에는 국가엘리트층의 역할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李承晩으로 대표되는 독립운동 엘리트, 朴正熙로 대표되는 군대엘리트가 약30년간 유능한 관료집단을 만들어내고 세계적 기업인들을 키워냈다. 이들은 實事求是하는 마음으로 국가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사물을 판단하고 정책을 집행했다. 全斗煥, 盧泰愚 대통령 시절의 엘리트들도 기본적으로는 그런 성격이었다. 1993년 이후 소위 민주투사들이 집권하면서 국가엘리트층이 해체되었다. 대신 들어선 집권세력은 패거리처럼 되어 國益을 해체해갔고 일류국가로의 進軍은 잠시 멈춰야 했다.
金泳三, 金大中, 盧武鉉 대통령은 우선 본인들이 국가엘리트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측근과 참모들도 그러하였다. 金泳三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文民정부라고 규정했다. 그는 근대화 세력을 부정하는 파당적이고 분열적인 國政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文民을 앞세우고 軍人을 무시하는 식의 분열적 생각은 역사관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좌파적이고 분열적 시각에서 평가하고 깎아내렸다.
국가엘리트는 긍정적인 역사관과 이에 기초한 긍정적인 국가관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다. 비판을 하더라도 긍정과 代案을 모색하는 차원이라야 한다. 金泳三 이후 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建國과정부터 부정하고 들어가면서 60년간의 근대화를 북한정권의 야만화보다 더 혹독하게 비방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 패거리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파당적 엘리트일 뿐이다”고 선언한 셈이다.
李承晩 대통령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은 金庾信-金春秋-金法敏이 주도했던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민족사의 2大 쾌거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서 三國의 주민들은 韓民族으로 통합되었다. 이 통일은 민족 집단의 출범이었다. 이 민족집단은 한반도를 무대로 삼고 같은 언어, 같은 종교, 같은 정치체제를 공유하는 모듬살이를 해가다가 서서히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1민족1국가의 전통이 한국 역사의 한 원리로 굳혀졌다. 韓民族이 후삼국 시대의 분열, 몽골의 침략, 왜군의 침략, 청군의 침략, 일본의 강점을 극복하고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7세기 말 삼국통일 이후 양성된 한국 민족주의의 저력에서 나왔다.
대한민국 건국은 국민들이 국가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그 권리와 의무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의 국민국가 건설이었다는 점에서 고려, 조선의 開國과도 다른 고귀한 의미가 있다. 韓民族은 대한민국을 매개로 하여 노예적인 백성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진 국민으로 재탄생했다.
신라에 의한 민족통일국가 수립이 없었더라면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탄생도 불가능했고 우리가 목표로 삼는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의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을 指向하는 대한민국의 국가엘리트는 가장 먼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자신의 신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의 조종간을 잡고 일류국가라는 착륙지점을 향해서 비행기를 몰고가는 사람은 대한민국호가 離陸한 최초의 출발지가 통일신라였다는 점을 알고 있어야 航路를 정확하게 잡아갈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민족사적 의미를 모르거나 부정하는 이는 국가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민족과 국가의 뿌리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민족적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질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민족사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뿌리를 뽑아버리려는 暴擧이자 자기부정이다. 한민족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은 민족탄생의 역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없이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체성과 합리성이 부족하고 자존심 또한 약하다. 한국인으로서 정신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이후 한국인들은 억압과 정체 속에서 살아오면서 저항과 비판을 숭배하는 기질을 갖게 되었다. 일종의 피해의식이다. 이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시기에 아주 有用한 에너지였다. 그러나 이 피해의식, 저항과 비판의 체질이 대외적으로, 敵을 향해서 제대로 발산되지 않고 내부로 향해지면 內紛과 自害로 이어진다. 同族을 異民族보다 더 원수로 삼고, 대한민국 건국과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민족사의 2大 쾌거에까지도 저항과 과잉된 비판의식을 표출시켜 영광을 치욕으로 만든다. 파멸적이고 自虐的인 역사관이다.
좌파는 저항과 피해의식이 강한 나라에서는 쉽게 뿌리를 내린다. 공산주의는 그런 저항의식에 사명감과 전략전술을 공급한다. 공산주의가 가진 증오의 논리가 저항의식과 결합된다. 대한민국과 통일신라에 대한 공격의 논리에는 이런 守舊性(비합리성)과 좌경성(무조건적 부정과 저항)이 다 들어 있다.
종합국력이 세계 10위권에 든 나라의 정신과 魂을 관리하는 책임자가 국가엘리트이다. 이들이 60여년 이전 식민지 시대, 100년 이전 약소국 시대의 피해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21세기의 富者나라에 사는 가난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만다. 피해의식이나 노예근성을 가진 인간은 고마움을 모른다. 도움을 받으면 고맙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자존심이 상하니까 의심하고 이유를 단다. 미국이 김일성의 남침을 당하여 瀕死상태에 빠진 한국을 지켜내기 위하여 미국 청년들을 보내 5만 명이나 죽게 한 것에 대해서도 “그때 미국이 오지 않았으면 통일이 되었을텐데”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정신병이다. 피해의식이 病的으로 악화되면 敵과 同志를 혼동한다.
피해의식과 저항의식은 弱子의 논리, 백성의 논리, 추종자의 논리이다. 따라서 무책임 논리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 입장에서 모든 것에 저항하고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보는가 하면 모든 권력에 맹종한다. 저항의식은 노예근성으로 돌변하기 쉽다. 이는 二流, 三流의 논리이다. 一流엔 一流의 논리가 있다. 一流국가를 지향하는 국가엘리트는 애국심, 전문성,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긍정, 세계에 기여해야 할 의무, 민주국가시민으로서의 교양과 관용을 인격으로, 신념으로 만들어 가져야 한다.
2007년 大選과 내년 總選을 통해서 우리는 一流국가에 어울리는 一流의 국가엘리트를 뽑아야 한다. 유능하면서도 줏대가 있고 겸손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국가의 조종실을 차지하여야 승객들은 비행중에도 안심하고 잠잘 수 있다. 國力에 걸맞는 一流국민의식은 우리를 짓누르는 피해의식, 노예근성, 무책임성에서 탈피하여 책임, 명예, 조국애를 지닌 당당한 민주시민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들 것이다. 二流 한국의 낡은 껍질을 깨어부수어야 一流 한국인이 탄생한다.
'下人엔 영웅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영웅이 없어서가 아니다. 下人 수준의 눈으론 영웅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金庾信과 李承晩의 위대성, 삼국통일과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적 측면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에게는 절대로 자유통일과 一流국가 건설의 중책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下人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 버리고 强者의 논리 가질 때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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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19, 19: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