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仁淑 피살사건 미스터리

의혹은 없다, 범인은 역시 오빠 鄭宗旭!
요사이 언론이 한 납치사건을 보도하면서 1970년 鄭仁淑 여인 피살사건을 의혹이 있는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1993년 5월호 월간조선 기사는 그 의혹을 부정했다.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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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仁淑 피살사건 미스터리

조선일보 사건기자의 결론적인 추적 보고서

담당 수사관, 부검의, 담당 판사는 한결같이 외압은 결코 없었다고 말하며 양심을 걸고 정종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21년이 흐른 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정종욱씨. 그러나 정종욱 자신이 목격했다는 범인, 범행에 사용된 권총, 자기 허벅지의 총상 등에 대한 그의 설명은 자체 모순으로서 오히려 자신이 범인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의혹은 없다, 범인은 역시 오빠 鄭宗旭!


젊은 사건기자의 鄭仁淑 사건의 의혹에 결론을 내리기 위해 한 달 동안 관련자들(담당 수사관, 부검의, 판사, 중앙정보부 부장, 鄭宗旭 등)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崔普植 조선일보 문화부(전 사회부)기자




都俊鎬 기자의 첫 정식 야근

1970년 3월17일. 조선일보 都俊鎬 사회부기자(현 북한부장)는 입사 6개월을 맞았다. 수습(修習)꼭지가 떨어진 날이었다. 이런 날이면 으레 술로 곤드레되는 부회식이 이뤄지는 법이었으나 이날은 새벽에 발생한 한 살인사건으로 사회부 경찰기자들은 모두 외근중이었다. 바로 이날 오전 3시30분 쯤 서울 남대문상가에 있는 「황금당」이라는 금은방의 종업원이 피살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연탄가스에 중독돼 숨져도 숨진 인물의 사진을 싣고 기사를 송고했던 시절이었던 만큼 금은방 종업원의 피살사건에 각 신문사 사회부엔 시상이 걸려 있었다. 서울 시내 경찰서에 출입하는 경찰기자들은 모두 사건이 발생한 관내인 남대문경찰서로 몰려들었다.
都기자는 이날 야근당번이라 회사로 들어왔다. 그는 이날부터 수습이 떨어진 정식기자의 신분이 됐기 때문에 그동안 선배기자의 뒤를 따라다니는 조수역할에서 벗어나 혼자서 야근을 돌게 됐다. 요즘도 거의 비슷한 시스팀으로 운용되지만 당시 경찰기자의 야근은 두 명의 기자가 각각 서울시내 지역을 동·서로 나눠 그 지역 안의 경찰서를 취재차로 돌며 사건발생 여부를 체크했다.
都기자는 서쪽 지역을 맡았다. 서쪽 야근을 돌 경우 통상 신문사(광화문)에서 출발해 적십자병원-서대문 경찰서-서부경찰서-세브란스병원-마포경찰서-용산경찰서-남대문경찰서 순으로 돌게 된다. 그러나 이따금 야근을 돌다 만나는 경쟁신문사 기자와 마음이 맞을 경우 경찰서를 끝까지 체크하지 않고 슬쩍 대포 한 잔을 마시러 옆길로 새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都기자는 금은방 살인사건이 발생한 직후였고, 게다가 수습기간이 끝나 처음 혼자서 야근을 도는 것이어서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참 기자들이 거리가 멀고 외진 탓에 야근코스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기 일쑤인 서부경찰서까지 그는 굳이 들렀다. 그가 서부경찰서를 체크하고 다음 코스인 연대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밤 11시40분쯤 (세월이 오래된 때문에 그는 정확한 시각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었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보다 야근의 진행속도가 늦었던 편이었다. 그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 빠져나와 다음 행선지인 마포경찰서로 막 출발하려는 순간, 기자생활 동안 결코 잊지 못할 문제의 정인숙사건과 직면한다.

정인숙 방 안의 슈트케이스

세브란스병원의 응급실로 한 30대 사내가 허벅지에 피를 흘리며 급히 실려 들어왔다. 그는 바로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당시 34세). 그의 뒤로 마포경찰서 성낙희 형사과장, 이상학 시경 공보과장과 한국일보 최상태 기자가 헐레벌떡 따라 들어왔다. 이때 정종욱은 피는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남들에게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은 말짱했다고 都기자는 기억한다.
『어찌 된 거죠?』
都기자가 정종욱에게 물었다.
『괴한에게 총 맞았다』(정종욱)
『어디서?』(都기자)
『강변로다』(정종욱)
『무슨 총이었는가?』(都기자)
『칼빈인지 뭔지 모르겠다』(정종욱)
이렇게 몇 가지를 물은 뒤 都기자는 전화통을 붙잡고 회사에 있던 사건 데스크에게 1보를 보고했다.
『단순한 총기강도 살인사건 같은데요』
당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20판 신문의 사회면 톱에는 「한강 강변로에 칼빈 살인」으로 시커멓게 제목이 뽑혔다. 단순살인이든 아니든 간에 통행금지가 있던 군사정권 시절에 총기가 범행에 사용된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분할 만한 사건이었다.
신문사 안에 있던 야근 데스크의 억양이 높아졌다. 금은방사건에 매달렸던 사회부원들 중 한 명만 남고 모두 방향을 한강로 살인사건으로 돌렸다. 각자 역할을 분담해 취재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사건기자가 제일 먼저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피살자의 사진을 구하는 일로, 4, 5년 전까지만해도 사건기자의 철칙에 속했다. 비탄에 잠긴 유족으로부터 피살자의 사진을 구해오는 일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실상 부딪쳐보면 곤혹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사건기자를 지냈던 이들이 훗날 털어놓는 에피소드 중에는 절반 가량이 이 피살자의 「마루사진(얼굴만 나오는 둥근 형태의 사진)」을 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소재들이다.
새벽 1시쯤 都기자는 데스크로부터 정인숙의 마루사진을 구해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마포구 서교동 2층집. 都기자는 방으로 들어가 1시간쯤 정인숙의 모친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대 영문과를 나왔는데… 착실하고 남자를 몰라…』
딸인 정인숙에 대해 그다지 많이아는 것이 없다는 느낌을 都기자는 받았다.
방안에는 정인숙의 아들 성일군(당시 3살)이 누워 있었고, 한 쪽 구석에는 빨간색의 네모난 슈트케이스가 놓여져 있었다. 都기자는 그 슈트케이스 안에 세인들의 의혹을 불러 일으켰던 국내 저명인사 26명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이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리했다. 그러나 당시엔 사진을 구하는 데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슈트케이스를 무심히 넘겼다고 한다. 『사진이 신문에 나가야 보상금을 탈 수 있다』는 식으로 그는 모친을 설득했다. 그러나 집에는 정인숙의 최근 사진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겨우 정인숙의 중학교 시절 사진만 한 장 구해서 나왔다.

단순 총기 강도 사건으로 출발

都기자는 새벽 3시쯤 사건의 수사본부가 차려진 마포경찰서 노고산파출소에 있었다. 그는 경찰의 움직임 못지 않게 타사 취재팀의 동정을 살폈다. 한국일보팀이 차량이 주차된 파출소 뒷편 공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국일보의 안택수 기자는 뒷날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 두 시간 만에 경찰수사팀이 강변로 현장을 모두 치워버렸기 때문에 정인숙이 탄 승용차를 찾느라 각사의 기자들간에는 비상이 걸려 있었다. 현장보존이 수사상식인데 웬일인지 이번 사건에는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 친하던 경찰들도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이때 우리 동료 중 한 명이 시경 모 간부의 목소리를 흉내내 경비전화로 마포경찰서에 감춰둔 승용차의 위치를 알아냈던 것이다』
뒷편 공터에 주차된 차중에서 검은 색 서울 자2-262호 코로나 승용차의 뒷 좌석 오른 쪽에 검은 코트에 파란색 원피스 차림을 한 미모의 여인이 왼쪽으로 기운듯 앉아 있었다. 가슴과 목 부위에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즉사한 정인숙(당시 26세). 都기자는 현장을 찍은 사진부기자와 함께 새벽 4시쯤 회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날은 3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눈이 내려 노면이 얼어붙는 바람에 마감시간에 대기 위해 질주하던 취재차가 3백60도 삥그르르 돌아 거의 사고 직전까지 가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70년 벽두를 갈랐던 정인숙사건은 한 사건기자에게는 약간 특이하기는 했지만 「단순 총기강도사건」으로 출발했던 셈이다.

수사 종결과 남은 의혹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4일 경찰은 정종욱을 정인숙사건의 범인으로 구속했다. 정종욱이 동생 정인숙을 살해한 뒤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정종욱의 범행동기, 경위, 권총 출처 등을 담고 있는 당시의 수사발표문은 다음과 같다.
「정종욱은 평소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양 아래에서 한 달 동안 운전사 생활을 하는 동안 멸시를 당했으며 차안에서까지 난잡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고 가문을 생각해서 몇 번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슨 간섭이냐고 반발해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다. 셋방살이하는 鄭은 인숙양을 죽이고 소지한 금품을 빼앗으려고 사건나기 10여일 전부터 결심, 계획해왔다. 鄭은 지난 17일 오후 8시쯤 서울 자2-262호에 인숙양을 태우고 타워호텔에 가서 밤 10시55분에 나오는 인숙양을 뒷좌석에 태웠다. 신촌로터리~동교동로터리를 거쳐 집에서 5~6m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미리 운전대 방석 밑에 숨겨두었던 권총을 꺼내 두발을 쏘아 숨지게 했다. 鄭은 자신도 자살할 목적으로 권총을 옆구리에 대고 쏘았으나 실탄이 장전되지 않아 미수에 그쳐, 계속 차를 몰고 제2한강교 인터체인지 너머 당인리 발전소 부근에서 다시 실탄을 재어 오른쪽 허벅다리를 대고 1발을 쏘았다. 그리고 계속 차를 몰고가다가 1백80도 회전, 합정동 139 소재 강변3로 절두산 앞길에서 차를 세웠다. 여기에서 인숙양이 왼쪽 손에 끼고 있던 1캐럿 다이어반지 한개를 빼어 양복하의 앞쪽 시계 주머니에 넣고 왼쪽 손목에 차고 있던 로렉스손목시계를 풀어 운전석 속에 숨겨둔 후(경찰 22일 오후 발견) 권총을 조수석 차창을 열고 강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면서 강도당한 것처럼 구원을 요청했다. 범행에 사용한 미제 4·5구경 권총은 14일 오전 9시쯤 집주인인 신현정씨에게 빌린 것이다」
정인숙사건은 사실상 23년 전에 종결된 셈이다. 범인 정종욱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심에서 무기로 감형됐다가 결국 19년 형기를 치렀다. 이 흘러간 옛노래로 들릴지도 모를 정인숙사건이 여전히 항간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죽은 정인숙 주변에 대한 수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발표가 됐다는 점이다. 정인숙을 둘러싸고 소문으로 떠독고 있던 정치인들과의 관계와 그녀의 집에서 나온 2천 달러, 일본 수표 1백80만 엔 등의 외화 출처, 불법 발급된 회수(복수)여권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둘째는 정종욱의 범행동기 부분에서 앞뒤가 맞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가 재물을 탐내 범행을 저질렀다면 굳이 자신의 허벅지를 쏘는 자작극을 벌일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어릴 때부터 동생인 정인숙을 무척 귀여워 했고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셋째는 범행에 사용된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수사발표문대로 그가 권총을 한강으로 버렸다면 총상입은 몸으로 맞은편 도로에서 한강까지 권총을 던질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넷째는 수사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장훼손과 취재기자 등의 접근을 차단한 밀실신문, 공안검찰의 지휘 등이 당시의 정권분위기와 맞물려 수사결과 자체가 조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세인들에게 심어줬다는 점이다.

정종욱 『나는 범인이 아니다』

당시 이 사건때 모 신문사의 취재팀장이었고 현재는 고위공무원 신분인 K씨는 조심스럽게 사건의 관전평(?)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이 사건의 수사발표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딱히 수사결과가 틀렸다는 반증을 내세울 만한 것도 없었다. 당시 정황으로 봐서 정종욱이 범인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수 있는 제 3의 인물이 없었다. 어쨋든 수사과정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취재진들은 전혀 당사자인 정종욱에게 접근해 확인할 수 없었고,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뿌리를 뽑는 쪽이라기보다는 한시 바삐 매듭을 지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수사결과가 과학적으로 나왔는지는 몰라도 의혹을 풀어주는데는 미흡했다.
의문은 의문을 낳는 법이다. 아무리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따끔 세인의 정서와 맞지 않을 때는 의문부호가 찍히는 경우도 없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의문은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부풀려지고 굳어져 의문이 정설로 탈바꿈하는 사태까지 발전한다. 정인숙사건에 대한 당시 수사발표가 과연 진실 쪽에 서 있는지 혹은 완벽한 허위인지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이 사건은 너무나 많은 소문 속에 가려져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것은 사안의 진위를 심판하는 법정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종욱씨가 재출현했다. 그는 자신이 정인숙을 쐈는지 안쐈는지를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양심만이 속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겠지만. 그런 그가 19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89년 출소했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매스컴에 얼굴을 내밀어 『나는 범인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비록 자신이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스포츠신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정인숙사건의 내막」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기도 했고, 이 사건을 픽션화시킨 영화제작(상영되지는 못했지만)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등장은 정인숙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소문을 걷어치웠다기 보다는 오히려 소문의 강도를 더 높인 감이 없지 않다. 이제 세인들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는 억울한 것이고 당시 수사는 조작된 것일까. 그가 20년 전 법정에서 했던 진술내용과 완전히 상반되는 지금의 주장 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 것일까.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양심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정종욱은 정치적 희생자인가?

그가 91년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장했던 사건의 「진상」을 먼저 살펴보자.
『사건 당일 밤 나는 인숙이를 뒷좌석에 태운 채 서울 마포구 서교동 동생의 집 앞 골목길에 들어섰다. 차를 후진시키며 집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골목길에 정장차림으로 서 있던 남자 두 명 중 얼굴에 흉터가 있는 한 명이 차앞으로 다가와 「급한 심부름이 있어 왔습니다」고 말했다. 의심없이 차문을 열어주자 그는 갑자기 동생에게 권총을 겨누고 두 발을 쐈다. 이들은 이어 조수석과 뒷좌석에 각각 나눠 타고 총부리를 옆구리에 댄 채 차를 한강변 절두산쪽으로 몰라고 요구했다. 차가 제2한강교 유엔참전기념탑을 돌아 절두산 성당 앞 강변도로에 들어섰을 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오른 손으로 범인의 총을 밀치며 달아나려다 오른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범인들은 부근에 대기중이었던 지프를 타고 달아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던중 면회온 아버지로부터 「아무 소리말고 네가 쏘았다고 말해라. 성일이 아버지(丁一權씨를 지칭하는듯)가 봐준다」는 말을 듣고 거짓자백했다. 사형, 무기징역이 선고됐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매제격인 당시 총리가 힘써서 풀려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내용이 진실이라면 그는 너무나 억울한 정치적 희생물이 됐던셈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보낸 그의 청춘을 되돌려 보상받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명예회복은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진술이 정직한 것이냐에 달려 있는 문제다. 과연 그는 쏘지 않았을까?
정종욱씨는 지난 3월 중순 기자가 조선일보에 쓴 「역사 속의 이 주일: 정인숙사건편」을 보고 기자가 지방출장을 가 있는 동안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연락처를 남겨 놓지 않았다. 기자는 수소문 끝에 그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 날 만나자고 했으나 갑자기 변심한 듯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 후로 13차례나 그와 통화하려 했지만 그는 대리인을 시켜 전화를 대신 받게 했다. 그 대리인은 『회장님(정종욱씨를 지칭)이 전혀 만날 의사가 없다』고 전해주었다.
기자는 4월5일 그 대리인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대리인은 정종욱씨가 최근 6개월 동안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있으니,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그와 통화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두 시간 동안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정종욱씨와 통화가 이뤄졌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기자들은 나를 이용만 해먹었지, 나의 진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며 한사코 만나길 거절했다. 그는 또 『이미 형기를 마치고 나온 마당에 당신들이 나를 다시 범인이라고 하든, 뭐라고 왈가불가 하든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청춘을 감옥소에서 보내고 60고개를 바라보는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할 일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겠는가』라며 읍소조로 나왔다. 하옇든 우여곡절 끝에 그는 약속시간과 장소를 제시했다.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인 채.
『혼자만 오라, 사진기자가 만약 동행하면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정종욱 인터뷰

기자는 정종욱씨(58)를 다음 날인 6일 낮 12시 홍제동에 있는 스위스 그랜드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약속장소가 아닌 1층 로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신사복 차림이었고 1백75cm가 넘어보이는 훤칠한 키에 선 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며, 머리는 염색을 한 것 같았다. 그는 기자를 만나는 첫 자리에서 『1시 반에 천호동에서 다른 약속이 있으니, 10분간만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공들였는 줄 아는가. 떳떳하다면 이렇게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 고생한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O기자를 알지? 그는 한 때 내가 살던 곳에 일주일 이상 잠복했다. 그래도 내가 만나주지 않고 뒷문으로 피해다녔다. 기자가 취재하고 싶어해도 함부로 만나주지 않아』
―당신은 출소 한 뒤로 스포츠신문에 연재도 하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하고 영화도 찍으려 했지 않은가.
『워낙 그쪽 사람들이 간청을 해서 그랬던 것이고, 조카 성일이에게 아버지를 찾아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지』
―정인숙을 누가 쐈는지 당신만은 알 것이다.
『내가 억울하지 않다면 형기까지 마치고 나와 「난 아니요」라고 말하겠는가. 세상 부끄러워 아무도 찾지 못하는 데서 숨어살든지 할 것이지. 짐승도 제 핏줄을 알아보는데 하물며 내가 귀여워 마지 않았던 동생을 쐈겠는가. 수사발표대로라면 그것도 돈 몇 만원 때문이라는데…. 설령 그렇다치면 구태여 고속도로인 강변로에서 일을 벌이겠는가. 내가 범행을 하고 강도로 위장하려 했다고? 강변로에서 허벅지를 쏘면서까지 위장한다해서 누가 믿겠는가. 당시 인숙이 집뒤로는 인적 드문 야산이 천지였는데 대로상에서 그런 일을 왜 하겠는가』
―당신은 당시 경찰 진술에서 범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바로 옆 조수석에 탄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봤는가. 나는 운전대를 잡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생태로 앞만 바라보며 운전했다. 범인들은 조수석과 나의 뒷자리(왼쪽)에 앉아 범인은 오른쪽 옆구리에 바짝 총부리를 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경찰은 당신의 허벅지에 박힌 총알의 탄두 각도로 봐서 허벅지에 밀착해서 총을 쏜 것으로 판단했다. 이른바 접사(接射)인데, 거리가 떨어져있는 제3자가 쐈다면 그렇지 않을것이라는 점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도 이에 대해 검증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웃기는 소리이다. 범인이 옆구리에서 총을 대고 있고 나는 앞만 바라보면서 차를 몰았다. 절두산 앞쪽 반대편 차선에 짚차가 서있는 게 보였다. 범인은 「차를 세우라」고 했다. 순간 나의 머리에는 여기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나는 오른쪽 팔꿈치로 겨눈 총을 치고 왼손으로 차문을 열려고 했다. 오른쪽 허벅지로 밀려 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총이 발사됐다『(기자는 「가볼 시간이 됐다」며 일어나려는 그를 붙들었다. 그는 기자에게 「나도 먹고 살아야 되지 않는가」라며 화를 낸 뒤, 「이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풀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음모 주장하는 정종욱

―당신은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 내가 세들어 살던 집주인인 신현정씨(그는 이 사건과 관련해 총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필자 주)에게서 4·5구경 권총을 빌려 소지하고 있었다.
나는 권총을 다시방(조수석 서랍)에 넣어 다녔고 사건 당시에도 그 자리에 들어 있었다.
―그 권총은 사건이 난 뒤로 어떻게 됐는가.
『총 맞고 혼미한 상태인 내가 어떻게 아는가. 범인이 갖고 갔던지…(그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당신에게 왜 심문을 받아야 하나」며 다시 일어서려 했다). 경찰이 숨겼을 수도 있겠지. 당시 경찰은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사건 발생 한 시간 만에 승용차를 치워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내가 범행을 저지르고, 그리고 나의 허벅지를 자해한 뒤 권총을 차 밖으로 던졌다면 총상 입은 상황에서 과연 얼마를 멀리 던질 수 있겠는가. 사건이 나고서 군부대를 동원해 한강 속까지 샅샅이 수색했는데도 권총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그는 「이 사건의 진상을 알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 여관방에 앉아 한 달 동안 이야기해도 모자라. 당신이 나하고 그럴 자신이 있으며 몰라도 안 그러면 포기해」라고 말했다).
―당신은 경찰조사에서 당신 입으로 정인숙의 행실에 불만을 느껴 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인숙이 식모에게 너무 야박하게 대하고 돈에 인색하게 굴어 말두툼을 벌이다 쐈다고 했다. 그런 진술이 경찰에 의해 조작되거나 강요된것이 아니라고 본다. 혹 당신이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앞뒤가 들어맞는 범행동기를 단순히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잠 안재우는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는가. 총을 맞고 혼곤해 있는 상태로 입원해 있는 동안 경찰은 계속 신문을 가했다. 부친의 설득도 있었고, 이렇게 된 바에야 이들의 주문대로 맞춰 주자고 했지』
―당신은 법정에서도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법정에서 진실을 말했다면 난 보복을 받고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그는 기자에게 「당신이 이 사건의 진상을 조금이라도 알려면 몇 날 며칠을 더 들어야 해. 어마어마한 정치적 음모가 감춰져 있어」라고 말을 한 뒤 일어섰다. 45분간의 면담이 끝난 셈이다).

中情, 간첩 관련 사건인지 수사

이제 본격적으로 정종욱의 진술에 대해 검증할 순서가 온 것 같다. 첫째로 이 사건이 과연 그의 주장 혹은 일부에 퍼져 있는 소문처럼 정치적인 음모가 연루된 사건인지부터 파헤쳐보자. 여기서 정치적 사건이란 아마도 두 가지 성격으로 정의될 수 있을 듯하다. 정인숙이 정계 로비스트였기 때문에 알아서는 안될 정치적 비밀을 알게 됨으로써 제거됐다는 설(아들인 정성일의 주장)과 정인숙과 관계한 정치인들 중 누군가가 청부살인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당시 국내의 정치적 사안에 가장 민감했던 권력기구는 중앙정보부였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실제 중정이 정인숙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수사에 착수했던 증거는 뒷날 관련자의 증언에서도 흘러나오고 있다.
정인숙사건이 발생한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金桂元씨. 중정의 위상을 감안했을 때 김씨는 정인숙사건의 진상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을 수 있는 생존인물로 꼽혔다.
기자는 4월 초 김계원씨가 장로로 있는 서울 인사동 S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중정이 독자적으로 정인숙사건을 조사한 사실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 고령에도 불구, 여전히 건강한 편인 그는 『내가 모셨던 분이나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 누를 끼치게 될 사안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겠다』는 조건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는 『말하기 곤란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좋으나, 대신 사실이 아닌 내용은 말하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정인숙이를 죽였는가.
『왜 그걸 나에게 묻는가』
―중정은 당시 이 사건을 나름대로 조사했고, 또 경찰수사에도 개입하지 않았는가.
『중정이 나름대로 조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경찰수사에 압력을 넣은 적은 결코 없었다. 중정이 20여일 간 이 사건을 조사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오열(五列: 간첩)과 관련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치적 사건 절대 아니다』

―朴正熙대통령이 자신과 연루되었다는 풍문이 떠돌자 역정을 냈다는데, 중정의 수사착수는 그런 연유로 비롯된 게 아닌다.
『그렇지 않다. 아마 정인숙사건을 朴대통령에게 처음으로 보고한 사람은 나였을 것이다. 발생 다음날(18일) 아침에 청와대에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끝 부분에 이 사건을 추가했다. 대통령도 가볍게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사건이 발생한 순간부터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말인가.
『아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그것은 단순 강도 살인사건 쪽 아닌가. 내가대통령에게 보고한 이유는 단지 사건의 성격이 흥미로웠고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들릴지모르겠지만 당시로는 사람들 입에 오를 만한 소재를 다분히 갖고 있는 사건이었다. 우선 총기살인사건이 극히 드물었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통금이 가까운 자정 무렵에 고속도로인 한강로변에서 미모의 여자가 피살됐다는것은 그 자체로 보고거리는 되지 않는가』
―정인숙이가 밀실에서 벌어지는 정치모임에 자주 불려나가, 알아서는 안될 정치적 비밀을 많이 알게 됨으로써 제거됐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당시에도 나름대로 룰이 있고 도덕도 있었다. 접대하는 여자를 곁에 두고 정치적인 중대사를 논의할 수준은 아니지 않겠는가. 유감스러운 것은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그 시절을 얕잡아 본다는 점이다』
―그러면 그녀와 접촉한 어떤 정치인이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고 보는가.
『차마 그럴 수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분명히 자고 나면 세상이 떠들썩해질 텐데 밤중에 총을 쏘면서까지 노상에서 그녀를 죽이겠는가. 이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다분히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본다』
―가령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 그렇게 했을 경우 중정의 입장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은폐시키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고위인사가 그렇게 했을 경우 중정의 정보망으로 금방 들어온다. 맹세코 단언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사건 발생 전부터 정인숙을 알고 있었는가.
『정인숙이라는 이름자는 누구에겐가 들었던 것 같다』
―정인숙은 어떤 여자였는가.
『술집 여자 아닌가』
―일설에는 정인숙이 외국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특별히 선발된 통역요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런 요원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또 뽑았다는 소릴 듣지도 못했다』
―범인은 정종욱이라고 믿는가.
『그 당시 경찰수사와 재판이 그렇게 엉터리일 리 있겠는가』
―정종욱이 그래도 한 핏줄인 동생을 굳이 죽여야 할 만한 이유가 있겠는가.
『그 점에서는 내가 대답할 입장이 못 된다. 그러나 살인하는 순간의 심리상태는 제3자가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기자는 김계원씨와의 인터뷰가 있은 뒤 열흘 쯤 뒤에 다시 그와 통화를 해 인터뷰 내용을 재확인했다. 김씨는 『그 사건에 대해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정치적인 사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 사건은 집안일』

정인숙의 외사촌 오빠인 전무웅씨(55)도 정치적 사건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한다. 그는 정인숙 집안과 친형제처럼 지내 그 사정을 손바닥 들여보듯 했다고 전제를 달았다(정종욱도 그가 사촌인 점을 인정했다). 그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인숙이가 정계 로비스트라는 말은 자다가 배꼽이 웃을 소리이다. 스물서너 살 짜리가 정치를 알면 무얼 알겠는가. 사건이 난 직후 고모부(정인숙의 부친)가 종욱형을 만나보고 온뒤 「그놈이 두번째 총탄만 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라고 흐느꼈다. 그 사건은 집안 일이었어. 당시 항간에서는 인숙이가 미국에 살었던 게 무슨 정치적 배경이나 있는 것처럼 풍문이 돌았지만, 성일이를 조용히 미국에서 키우려고 그랬던 것이다. 미국에서 세 살난 아들을 데리고 혼자 사는 여자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정치 로비를 하겠는가. 인숙이가 석 달쯤 체류하다 귀국한 것은 가정부도 구하고, 가족 이민수속도 밟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불쌍하게 죽은 것이다』
정인숙사건이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아면 왜 검찰 공안부에서 맡아 수사를 지휘했을까 라는 점이 두번째 의문점이 될 것이다. 또 경찰이 세간의 의혹을 무릅쓴 채 피해자인 정인숙의 주변 인물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두 시간만에 현장에 있던 문제의 승용차를 치웠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러한 수사과정상에서 아직 해명되지 않았던 대목들이 이 사건에 정치색을 더해준 결과를 가져왔던 셈이다.
당시 신문도 서울지검 강력부가 아닌 공안부에서 사건지휘를 맡았다는 점에 대해 강력하게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때 공안부장인 崔大賢씨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므로 이렇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 정인숙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는한 법조인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안부장인 최검사가 그 사건을 맡게 된 것은 정인숙과 관계한 정치인들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건자체가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뜻은 아니다. 법조계에서도 공안부에서 그 사건을 담당하는 게 옳으냐는 내부적인 논란이 있었다. 당시 최검사가 이 사건을 맡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출세지향적인 그 양반의 스타일로 보아 골치아픈 사건을 해결해 주목받겠다는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기자는 지난 4월8일 당시 사건의 수사본부장이었던 마포경찰서 서장 이거락씨(69)와 전화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李씨는 그때 주일대사였던 이후락씨의 동생으로, 한강로변 현장에 나가 승용차를 재빨리 치우도록하는 등 수사를 총괄했던 인물이다. 그는 정인숙사건이 있은 뒤 경무관까지 진급했다가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부정축재자로 몰린 그의 형과 함께 강제로 옷을 벗었다. 그뒤로 그는 매스컴의 접촉을 일절 피한 채 일정한 직업없이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단 둘이 살고 있다.

『현장서 정종욱이 범인임일 직감』

―당시 현장을 보존하지 않고 2시간만에 승용차를 다른 곳으로 옮긴 이유가 뭔가.
『나는 사건 발생 직후 부하직원과 함께 곧바로 달려나가 충분히 범행현장을 확인했다. 범인이 누구일 것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세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초동수사가 잘못됐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문제의 승용차를 치우라고 내가 지시했다. 고속도로상에 한없이 차를 방치해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당신도 알다시피 수사를 위해 취재진을 따돌릴 필요도 있었다. 자신의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돼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는 경찰책임자가 있겠는가』
―현장의 유류품을 옮기려면 사전에 검찰의 지휘계통을 밟아야 하지 않는가.
『수사책임자의 현장판단에 달린 문제다. 검찰에 보고를 하고서 현장을 치울 수도 있지만 치우고 난 뒤에 사후보고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그러한 판단이 나중에 그렇게 말이 많을 줄은 몰랐다』
―당신은 왜 정인숙의 주변에 대해서는 수사하지 않았는가.
『그들을 수사할 필요가 없었다.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라 현장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정종욱이 범인이라는 심증이 갔다. 그리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했고, 그의 자백대로 승용차 안에서 굳이 정인숙의 관계인 주변인물에 대해 수사를 해야 했을까. 그들이 혹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범행 그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이상 나의 소관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그들의 사생활문제이다』
당시 수사관계자의 증언을 섣불리 1백%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진술은 한 가지 점에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즉 세상의 소문속에 방치해둔 정인숙사건의 의혹에 대해 수사를 했던 당사자 입장에서 처음으로 해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부터는 보다 사건의 핵심부로 들어가보자. 당시 수사본부장 이거락씨는 사건현장에서 정종욱이 범인이라는 직감을 느꼈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까. 다음의 일문일답은 3월 중순경에 전화통화로 이뤄진 내용이다.

『물증은 너무나 완벽했다』

―당신은 현장을 둘러본 뒤 무슨 근거로 정종욱이 범인일 것으로 추리했는가.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 나갔을 때 운전사가― 그때까지는 그의 오빠인줄은 몰랐지만―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앉은 시트 밑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가 총상을 입은 채 상당한 시간 동안 차를 몰았다는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현장에서 괴한에게 총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지나가는 아리랑택시 운전사에게 발견되고 경찰이 출동한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고일 만큼 피를 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는 두꺼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죽은 정인숙에게 반항한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범행의도를 전혀 예상하기 어려운 면식범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처음엔 괴한이 칼빈총으로 쐈다고 하다가 또 권총으로 쐈다고 하는 등 빠져나가려고 횡설수설했다』
―최근 출소한 정종욱은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법이 있는 한, 무고한 사람에게 형(刑)을 살게 했겠는가. 당시 수사는 범행에 사용된 권총을 찾지 못했을 뿐 30여 가지 증거물이 나왔다. 권총을 찾으려고 군부대까지 동원했으나 실패했다. 솔직히 이 점에서는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가 범인이라는 점은 하늘에 걸고 맹세할 수 있다. 가령 그는 사건이 있기 사흘 전에 정인숙을 태우고 인천에 가 주차장에 대기하면서 범행을 계획했다가 오발하는 바람에 포기했다는 진술을 했다. 수사관들은 그의 진술대로 운전석 시트를 조사해 그때껏 몰랐던 탄환구멍을 찾아내었다. 그가 이제 와서 떠드는 것은 주변사람들 보기에 뭐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취재진의 접근을 막은 채 거의 병실에서 이뤄진 수사가 아닌가.
『정종욱이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해 애를 먹은데다, 상부로부터 사건처리가 늦다고 수 차례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어쨋든 수사는 내 소신껏 했다』

고위층 압력은 없었다』

당시에 정인숙 사건을 재판했던 판사는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당시 정종욱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李範烈 부장판사(61). 그는 정종욱이 천륜을 범하는 계획적인 살인을 저질렀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인 71년 이른바 「사법파동」으로 알려진 정권의 사법부 장악기도에 맞서 법복을 벗게된다. 공교롭게도 李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던 이는 정인숙사건을 지휘했던 崔大賢 공안부장. 운명의 장난치고는 고약한 셈이다. 李씨는 그뒤로 변호사로 활동해오고 있으며, 현재 언론중재위 위원직도 맡고 있다. 그는 「의심스러우면 무죄」를 재판신조로 삼을 정도로 강직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자가 4월초 전화로 근황을 물었을 때 그는 『법조생활에서 겪었던 경험 중에서, 피고인이 강요에 의해 자백했던 사례를 글로 쓰고 있다』고 말했다. 강요된 자백? 정종욱씨의 주장이 떠올랐다.
―당시 정종욱의 자백은 신빙성이 있었는가. 혹 강요된 자백은 아니었던가.
『그때 나는 15년의 법정 경험으로 재판기록을 검토했다. 그의 진술은 결코 강요된 게 아니었다. 그의 범죄사실은 명확했다』
―고위층으로부터 압력은 없었는가.
『나는 지금껏 법조인으로서의 지조와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당시의 군사정원에 밉보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압력이라는 것은 없었다. 당시 최대현 공안부장이 기소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고인이 된 양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평한다는 게 내키지 않지만― 나는 그를 사꾸라 같은 인간으로 여겼다. 그는 사법인의 지조를 내팽개쳤다고 본다. 하지만 그도 정인숙사건을 조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권에 충성했지만 그렇다고 사실까지 조작할 만한 인물은 못되었다』
―정종욱은 과연 범인이었는가.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오판할 수도 있다. 내가 한 재판이 모두 완벽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혹 오판이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지금도 자신하고 있다. 내가 이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됐을 때 주위에서 걱정해주는 이들이 많았다. 잘못하면 오점을 남길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재판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법정에서도 모든 걸 시인했다』
―그는 지금 와서 재판이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다』
기자가 만난 정인숙사건 관련자들(정종욱을 빼고)의 공통된 증언은 당시의 소문이나 신문보도와는 달리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권력층의 개입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들이 사건수사를 했거나 재판을 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얼마간 진실성에서 결격사유는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정인숙을 부검했던 의사는 보다 중간자적 입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부검의였던 尹重鎭씨는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정인숙을 부검하던 자리에 최대현 공안부장이 입회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에게 부검소견을 말했던 것 같다. 학자적 양심을 걸고 말하지만 그때 외압은 없었다』

앞뒤 안맞는 정종욱의 항변

그것은 정인숙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이 아니라 순수한 형사사건의 성격이며, 범행여부도 사건 자체의 울타리 안에서 판가름돼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당시 사건 현장의 정황과 남겨진 증거물, 진술 내용이 결국 단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판대 위에 정종욱씨가 최근 자신이 결백하다고 한 진술내용을 올려놓아보자.
(1) 범인: 그는 사건 발생 직후 40대 괴한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흉기는 칼빈이라고 했다가 권총으로 번복했다. 출소 한 지 2년 뒤인 91년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범인은 두 명이었고, 그중 한 명은 얼굴에 흉터가 있었다고 구체적으로 못박았다. 또 같은 해 모 스포츠신문에 연재했던 자신의 수기에서는 신장 1m75cm가량의 20대 남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93년 4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공포에 사로잡혀 앞만 바라보고 운전했기 때문에 범인을 본적이 없다고 다시 부인했다. 그는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어온 셈이다.
(2) 권총: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건 발생 당시 자신이 소지해온 권총은 차의 조수석 서랍에 들어있었다고 진술했다. 4·5구경이었고, 실탄이 4~5발 장전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술대로라면 그 권총은 문제의 승용차 안에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범인이 서랍을 뒤져 권총을 찾아갔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권총이 발견된 적이 없다. 그는 경찰이 그 권총을 숨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총을 찾지 못해 쩔쩔맸던 경찰이 그것을 숨겼다는 논리는 상식적으로는 맞지 않았다.
(3) 총상: 절두산 성당 앞 강변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오른 손으로 옆구리에 대고 있던 범인의 권총을 밀치며 달아나려다 오른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다고 진술했다. 옆구리에 대고 있던 권총을 밀치면 오른쪽 허벅지에 아래로 비스듬하게 탄환이 박히게 되는 것인지는 알 길 없다. 그러나 그의 진술대로 다른 범인의 소행이라면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살려두고 갔겠는가.
23년의 세월은 세인들에게 한 사건을 윤색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정종욱씨에게는 진술을 번복하는 데 필요한 기간이었던 것 같다. 이제 정종욱씨의 최근 진술을 떠올리면서 당시에 남겨진 사건의 기록을 들춰보자.
조선일보 1970년 3월24일자에는 그에 대한 임상(臨床)신문이 그대로 옮겨져 있다.

전설과 의혹은 없다

▲정종욱: 『내 동생이 뭔지 아는가. 너무 방탕했다. 오빠가 운전을하며 백밀러로 다 볼 줄 알면서도 뒷좌석에서 온갖 추잡한 짓을 다했다. 물론 그렇게 된 데 동정도 가지만…. 일종의 콜걸이었다. 항상 전화를 받고 나갔다』
▲수사관: 『전부터 죽일 생각이있었군?』
▲정종욱: 『그렇다. 14일(범행 사흘 전) 인천 오림프스호텔에 동생과 C전무가 같이 갔을 때 권총을 갖고 갔었다. 그때는 주차장에서 대기, 총을 만지다 오발, 총알은 시트 사이로 빠져나갔다(경찰은 이 진술에 따라 운전사석 시트 사이를 뚫은 자국을 찾아냈다). 총알은 네 발이 남았는데 기분이 언짢아 그날은 포기했다』
▲수사관: 『총은 어디서 구했나?』
▲정종욱: 『군에서 제대할 때 얻었다(그는 이날 오후 진술을 바꿔 자신이 세들어사는 집주인인 신현정씨로부터 14일 빌었다고 했다)』
▲수사관: 『어디서 동생을 쏘았나?』
▲정종욱: 『집 가까이 이르러 서교의원 뒷골목에서 쐈다. 처음에는 나도 함께 죽으려고 했다. 이웃에선 자가용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죽으면 쉽게 집에 알려주기 위해 그랬다』
▲수사관: 『차 안에서 말다툼은 안했나?』
▲정종욱: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와 함께 깨끗이 살자고 했다. 또 오는 24일 시집갈 식모에게 돈을 넉넉히 주라고 했더니 동생은 화를 냈다. 돈이 많은 동생이 17년간 같이 산 친동생같은 식모에게 3만원 준다는 데 나도 화가 났다』
▲수사관: 『왜 자살은 안했나?』
▲정종욱: 오른 손에 총을 잡고 허리에 바싹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미끄러져 허벅다리에 맞았다. 권총은 바른쪽 차창을 열고 방책 쪽으로 내던졌다』
▲수사관: 『범행을 감추려고 그랬나? 또 호주머니에서 동생의 다이어리 반지가 나왔고, 핸드백도 앞좌석에 있었는데?』
▲정종욱: 『다리를 맞자 만삭인 아내 생각이 났다. 그래 마음이 달라졌다. 다이어반지는 호주머니에 넣고 시계는 시트 밑에 감춰뒀다. 핸드백은 그때 정신이 없어 잘모르겠다. 지문을 보면 내가 그랬는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지 않는가』
23년 전 법정에서 심판이 내려졌던 정인숙사건에 대해 다시 똑같은 결론을 내려야 할 지점까지 와 있는 것같다. 이 지상(紙上) 결론은 당사자인 정종욱씨에게는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이미 당시의 죄값을 법적으로 치른 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무고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다닐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추적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면 전설과 소문속에 싸여 있던 정인숙사건을 사실의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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