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北여성의 충격르포/'공포의 시체 제작소'

5000여명 수용의 '증산교화소'(한국의 교도소)에서 2005년 한 해에 5분의 1인 1000명이 넘는 죄수들이 사망했다
[ 충격르포 ] 北 공포의 시체 제작소 [2007-03-22 ]

'보습날을 조금만 깊이 박아도 사람의 뼈가 무더기로 나온다. 그러나 농부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소잔등을 후려갈긴다. 이곳은 늘 비료 부족으로 농사를 망치는 북한에서 국가의 비료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도 대풍작(大豊作)을 거두는 농장 중의 하나이다. 인원이 약 5000명 정도 되는 '증산교화소'(한국의 교도소)에서 2005년 한해 6개월 동안에만 전체의 5분의 1인 1000명이 넘는 죄수들이 사망했다.

'개천교화소'를 거쳐 '증산교화소'에서 3년간 탈북 죄로 복역한 탈북여성의 생생한 충격증언을 소개한다.

-'3인공개감시체계”의 평남 개천 교화소-

북한의 평안남도 개천시에 위치한 “개천교화소”는 북한의 여성죄수들을 수감하는 교화소이다. 이곳은 여성들이 많은 조건으로 하루 10시간 정도 일하며 노동강도가 다른 교화소에 비해서는 약한 것으로 밝혀졌다. 여성죄수들은 이곳에서 군복과 군화를 생산하는데 약 1500명 정도의 인원이 수감된다.

그러나 노동강도가 약한 데 반해 엄격한 규율생활로 죄수들을 통제하고 있다. “개천교화소”에서는 3인이 한 조가 되어 상호 감시하는 “3인공개감시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1일생활총화를 진행해 죄수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통제 한다.

-그 이름도 유치한 “급식처벌”과 “반영문”-

“개천교화소”에서는 죄수들을 상대로 김일성,김정일 위대성 학습과 강연회, 교화소내 생활준칙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며 배운 내용에 대한 암송통달 여부를 일주일마다 조별로 경쟁시킨다. 이때 수령의 어록 통달경연에서 실적이 낙후한 조에 대해서는 그날 하루의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노동만 시키는 소위 “급식처벌”을 가한다.

그러면 한 개 조에 포함된 20명의 죄수들은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하고 노동에 나가야 하며 하루일이 끝난 후 취침시간에도 잠을 못자고 그날의 학습과제를 암송 통달해야만 한다. 죄수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주범은 열흘에 한 번씩 써내는 “반영문”이다. “반영문”이라는 것은 모든 죄수들이 반장이나 조장을 포함하여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 대한 잘못을 무조건 한 가지씩 적어서 담당 보안원에게 바치는 일종의 고발장이다.

담당 보안원은 반영문에 올라온 내용들을 종합한 후 반 전체 60명의 인원을 집합시켜 놓고 “반영문”에 씌여진 매 사람의 잘못에 대해 집중 추궁한다. 지적된 사람은 일어나 보안원이 지적한 내용이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문”을 쓴다. 만약 보안원이 잘못이 엄중하다고 사료되는 죄수에게는 일주일간 “독방처벌”을 가한다. 이밖에도 교화소 내에서 노래를 불러도 “독방처벌”을 받는다.

-선생님 앞에서는 무조건 꿇어라!-

교화소의 기상시간은 5시이며 여성죄수들은 눈떠서 첫 일과가 무릎을 끓고 보안원의 점호를 받는 것이다. 점호가 끝나면 코끼리 비스킷 같이 적은 양의 아침식사를 10분동안 진행하고 곧바로 작업에 투입된다. 작업시간에 담당선생(담당보안원)들은 사방이 유리로 된 ‘사감실’이라 불리우는 방안에서 작업하는 죄수들을 감시하며, 죄수가 일을 잘 못하거나 안한다고 판단되면 반장을 불러 죄수를 데려다가 무릎을 끓게 한 후 반장이나 조장에게 죄수를 구타할 것을 명령한다.

반장과 조장은 보안원의 말에 따라 죄수를 사정없이 구타한 후 다시 작업장에 투입한다. 여성죄수들은 보안원이 부르면 언제든지 그 앞에 나가 무릎을 끓고 말을 경청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보안원에 대한 도전과 항의로 간주되기 때문에 비 오는 날에도 무조건 진흙땅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만드는 기계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의 모든 감옥이나 단련대 교화소의 위생환경은 불결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함의 극치를 이루는 곳이다. “개천교화소”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국평수로 12평 남짓한 방에 40명의 죄수들이 수감되며 잠을 잘 때는 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히 신체를 서로 마주 붙이고 자는데 이것이 바로 “이”가 창궐하는 근본 원인중의 하나이다.

교화소 측이 각종 농약과 살충제를 감방 안에 뿌려 가면서 “이”를 박멸시키려고 하지만 워낙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 “이”가 창궐하는 두 번째 원인은 교화소 감방안의 화장실들에 물 부족으로 인해 제때에 오물을 처리하지 못한 결과 악취가 진동하는 것이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을 하지만 비누가 공급되지 않아 물로 몸을 씻어야만 하는 관계로 몸에 붙은 때를 제대로 씻어 낼 수 없다는데 있다.

“개천교화소”는 2005년 3월에 해체되여 전문적으로 ‘여성무기징역자’들만을 수감하는 “무기징역 교화소‘로 바뀌였다. ’무기징역자‘를 제외한 나머지 1300명의 여성 죄수들은 같은 해 3월 초 평안남도 증산군에 있는 ”증산교화소“로 이감되였다. 몇 년씩 조롱 속의 새마냥 산골에 갇혀있던 여죄수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감 간다는 소식에 바깥세상을 볼 수 있다는 즐거운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고개넘어 큰 산이라고 그들의 기대와 기쁨은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기간의 잠시 일뿐 자신들이 상상하기도 힘든 공포의 구천지옥문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안남도 “증산교화소”는 원래 “노동단련대”시절부터 악명이 자자한 “지옥단련대”였다.

-살인적인 노동강도-

“개천교화소”에서 이감된 여죄수들은 ‘증산교화소“에 도착한 첫 날부터 그곳의 험악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의 교도관들은 전부가 ”노동단련대“시절부터 그곳에서 근무하던 자들로서 수많은 ”단련대“생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피눈물을 흘리게 한 악종(惡種)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련대’생들을 다루던 방식을 그대로 ‘교화생“들에게도 적용했다.

여죄수들이 2005년 3월 증산에 도착하여 시작한 일은 농사일이었다. 남한에 비해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한에서 3월이면 아직도 두툼한 겨울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춥고 변덕스러운 날씨가 계속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여죄수들은 그 추운 날씨에 맨 발로 물을 채운 논에 들어가 벼 모판 자리를 정리해야 했다.

정방형의 일정한 면적의 논밭을 삽으로 파서 흙을 뒤집고 그 자리에 물을 채운 후 다시 막대기나 손을 이용하여 바닥을 고르게 펴야 한다. 사실 장화만 신으면 별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죄수들을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취급하는 교화소에서 장화를 줄 리가 만무했다. 여죄수들은 신발이 젖을까 맨 발로 얼음 물속에 들어가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13시간 이상을 허리 한번 못 펴고 고된 노동을 강요당했다.

보안원들은 논두렁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여 죄수들이 작업하는 현장을 감독하며 하루 계획을 못한 죄수가 있으면 그가 속한 조의 전체 성원들에게 밥을 안주는 “급식제제”를 가했다. 죄수들이 논에서 일하면 점심식사는 담당보안원이 책임지고 자기 집에서 만들어 오는데 인간이기를 포기한 탐욕스러운 교도관들은 교화소에서 죄수들의 식사용으로 공급한 옥수수 가루를 자신들이 착복하고 순 시래기만 삶아서 죄수들에게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다.

- 구덩이 전담조, 전멸되는 여죄수들-

“개천교화소”에 비해 노동강도가 살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증산교화소”에서 한달이 지나자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린 여죄수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2~3명씩 죽어 나가더니 다음날부터는 3~4명씩 숫자가 불어났다. 교화소 측은 여자죄수들이 매일 죽어나가자 아예 남자들로 조직된 “구덩이 전담조”를 만들어 시체 처리를 하도록 했다.

“구덩이 전담조”는 사망한 여죄수들을 헌 마대자루에 담아서 메고 교화소 농장 부근의 야산과 밭에 대충 묻어 버렸다. 이렇게 매일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어가는 죄수들의 인원수는 날이 갈수록 줄어 드는게 아니라 점점 늘어만 가 6개월째 되는 9월 달에는 60명이던 1과 2반의 여죄수들 중 42명이 죽고 18명만이 살아남게 되였다.

2005년 3월부터 9월 초까지 6개월 동안“증산교화소”11개과 중에서 '여성작업반'인 1,2,4,6과에서만 약 800명의 여죄수들이 사망했으며 '남자작업반'인 7,8과에서도 400명이 훨씬 넘는 죄수들을 포함해 전체 교화소적으로 1200여명의 죄수가 사망했다. “개천교화소”에서 이감 올 당시 1300명이였던 여 죄수들은 6개월 동안 무려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여죄수들도 장기간의 영양실조로 죽기 직전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곡식이 여무는 9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생명을 연장할 비상구를 찾을 수 있었다.

살아남은 죄수들은 밭으로 작업 나가서 보안원들의 눈을 피해 벼이삭을 후려 옷으로 감싼 다음 손으로 비벼 껍데기를 벗기고 생쌀을 먹었다. 옥수수 밭에 가도 역시 옥수수수를 날것으로 먹었다. 만약 가을이라는 계절이 오지 않았다면 교화소의 죄수들은 아마 한명도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미 “단련대” 시절부터 사람 많이 죽기로 악평이 나있던 “증산교화소”주변의 논과 밭에서 자라는 곡식은 다른 고장의 2배이상 크며 해마다 대풍을 이룬다.

“증산교화소”에서 이루어진 집단살육만행은 입소문을 타고 번져 나갔고 마침내 그해 12월 “교화국”의 집중검열을 받게 되였다. 약 한 달간 이루어진 “교화국”의 집중검열이 끝난 2006년 1월 천여명의 죄수들의 죽음을 조장하고 방치한 책임을 물어 “증산교화소”소장으로부터 보안원에 이르기까지 전원이 교화소에서 쫓겨나고 새로운 인원들로 교체됐다.

또한 교화소에서 죄수들의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줄이고 사망하는 죄수가 있으면 담당교도관이 책임지는 규칙을 새로 만들었다. 그 후 교도관들은 자신이 담당한 죄수가 영양실조에 걸리면 집에서 도시락이라도 만들어 먹여야 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은 북한의 “교화소”내에서도 잘 통하는 말이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급격히 부패하고 타락한 북한사회와 관료들의 치부를 잘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교화소”내 교도관들은 면회를 자주오고 뇌물과 현금을 많이 찔러주는 죄수들은 내부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규정을 위반해도 눈감아 주지만 돈 없는 죄수들이 저지르는 사소한 부정이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한 독재의 칼날을 들이댄다.

원래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면서도 사회전체에 무수한 차별과 소외계층을 만들어 관리해온 북한사회의 모순적인 구조 속에서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교화소”죄수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무전죄수들이 유전죄수들의 잘못을 교도관에게 보고하면 오히려 역으로 보복이 들어 올 정도로 북한의 교도관들은 돈에 환장을 했다.

나는 살육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 탈북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에 주린 악마의 소굴’을 ‘지상낙원’으로, 악의 화신이며 우리민족 5천년사의 희대의 폭군을 ‘통이 큰 지도자’라고 찬양하는 진보의 탈을 쓴 무리들에게 이글을 읽어 볼 것을 권고하고 싶다.

오늘은 굳이 그네들의 말을 빌려 한 마디 하련다. “증산을 지나는 사람들이여! 부디 삼가 길가에 놓인 돌 함부로 차지 마시라. 억울하게 죽은 어느 형제의 유골이 그 돌 밑에 묻혀 있는지 어이 알겠는가? 증산의 농부들이여 부디 삼가 나무를 베이지 마시라! 독재의 칼날에 스러진 동포의 사무친 원한이 그 나무에 스며 있는 줄 어이 알겠는가?”

박금철 기자 pakchol21@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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