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민족적인 결단을 결코 잊어선 안돼"

(이승만 탄신 132주년을 맞아)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승만의 功이다.
 3월 26일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1875∼1965) 선생이 태어난 지 132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한 평생을 대한민국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바친 애국지사였다.


  그는 황해도 평산에서 이경선(양녕대군의 15대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77년으로 서울 남대문 밖으로 이사해 이곳에서 살았다. 이승만은 20세 때인 1895년 배재학당을 2년 만에 졸업했다. 그는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그는 졸업생대표 연설을 맡게 되었다. 졸업연설의 제목은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었다. 그가 연설한 것처럼 생애의 3분의 2 이상은 국내 및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에 할애되었다.


  그는 1896년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독립협회에 가입해 개화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정부타도와 급진개혁을 도모했다는 이유(황국협회의 무고)로 체포돼 1904년까지 6년여의 옥살이를 했다. 러일전쟁 직후에는 구국의 사명을 띠고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는 조지 워싱턴대와 하버드, 프린스턴대를 거치며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5년만에 받았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쓴 박사학위(1910년) 논문은 ‘미국의 중립론’이란 것이었는데, 이는 ‘전시 중립법’에 관한 옥고였다.


  그의 논문은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에게 박사학위(그는 철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데, 실제 전공은 국제법이었다)를 수여한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우드로 윌슨 총장(나중에 미국 대통령에 취임)이었다.


  귀국해 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전국을 돌며 독립사상 고취에 주력한 그는 105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본 경찰의 체포대상 1호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후 하와이로 건너가 한인교포를 대상으로 교육과 언론사업에 주력한 그가 정치가로 떠오른 것은 3·1운동(1919년) 이후 생겨난 5곳의 임시정부에서 모두 그를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로 추대하면서부터였다. 그만큼 그는 독립운동가 중에서 유능한 인재였고, 또한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친북좌파들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폄하하기에 여념이 없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면, 그가 한국을 미국의 몇 번째 주가 되게 만들어 달라고 미 국무성에 청원을 냈다는 등 얼토당토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김구 선생 암살문제와 관련해서 좌파들은 이승만의 개입설을 기정사실화 한다. 하지만 안두희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주나 지시가 아니라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모모씨의 사주 혹은 결행의 촉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승만의 개입은 근거없는 의혹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사실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북한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좌파들은 1946년 6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들어 그에게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1993년에 공개된 소련측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 이미 북한에 친소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인민군 창군 등 실질적 정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진정 분단 고착화의 원흉은 소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 한 소련의 속셈과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한반도를 포기하려 했던 미국의 속내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길은 남한이라도 민주정부를 먼저 수립하는 것이었다.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미국이 아닌 유엔을 떠올렸고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로 탄생한 세계에서 드문 신생국이 됐다.


  김구 선생이 훌륭한 민족지도자임에 틀림없지만, 국제정세를 읽는 안목에 있어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뒤졌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승만은 5.10 총선을 통해 구성된 국회의 압도적 지지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막아내고 자유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오늘날 자유, 평화, 복지 및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곧 한․미동맹의 구축은 후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과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다. 곧 이승만 없는 박정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승만의 재임기간 후기는 안타깝게도 독재로 흘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도한 대한민국의 건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선택과 그에 대한 절대 다수 국민의 호응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만일 사회주의체제를 선택했거나 혹은 김일성과 야합적 통일을 서둘렀다가 후에 좌파들의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좌파들은 이승만을 ‘미제의 앞잡이’나 숭미주의자라고 매도한다. 하지만 미군정과 얼마나 이승만을 골치아픈 존재로 여겼는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승만은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과 갈등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휴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미국에 대해 막대한 경제․군사원조를 얻어냈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그는 노련한 전략가요 외교의 달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는 실리를 중시한 ‘용미(用美)주의자’였지 결코 숭미주의자가 아니었다.

 

  이 같은 사실을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올바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이승만의 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 4.3사건이나 여순반란사건 등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한 좌파들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이승만은 굴하지 않았다. 자유 대한인의 나라를 건국한 그의 민족적인 결단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선진통일한국은 바로 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주의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섞어 비빔밥을 만들겠다(연방제 통일)는 어설픈 좌파들의 발상은 국민을 속이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3월 26일 오전 11시 뉴라이트전국연합 산하 뉴라이트 청년연합과 대학생연합이 주축이 되어 국립묘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탄생을 기리는 추모식을 가지려고 한다. 많은 뜻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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