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에 와서 여행을 해보면 많이 오해했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한국인은 시리아를 주로 성경, 이스라엘, 미국의 시각에서 보아 왔다. 그런 시리아는 反기독교, 親北, 독재, 테러지원국가이다. 그런 면이 있지만 과연 '惡의 축'이라고 불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 좋은 것은 잘못된 선입관을 바꿔주는 일이 종종 있다는 점이다.

사진 : 시리아의 두번째 도시 알레포의 호텔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옥상은 온통 위성TV수신용 접시이다. CNN, BBC 등 시리아에 비판적인 언론도 시청할 수 있다. 시리아는 독재국가이지만 북한과 비교할 나라가 아니다. '惡의 축'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이다.
시리아의 지난 100년 역사만 알아도 언론에서 얻은 선입관이 달라질 수 있다. 시리아(오늘의 레바논 포함)와 팔레스타인(오늘의 이스라엘) 지역은 1516년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독일 편에 섰다.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중동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아랍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영국의 정보장교 T.E.로렌스가 아랍 추장들을 설득하겨 反투르크 독립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 지원하는 아랍 군대는 파이잘 부족장의 지휘하에 투르크領 시리아를 점령하고 1918년에 정부를 세웠다. 파이잘은 大시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大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뿐 아니라 레바논과 이스라엘 땅을 포함했다.
1차 세계大戰 이후 국제연맹은 戰後 처리 차원에서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를 프랑스에 맡겼다. 프랑스는 아랍세력이 세운 파이잘을 쫓아내버리고 레바논을 大시리아에서 떼내어 다른 나라로 만들려 했다. 레바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들이 프랑스를 설득하여 분리 독립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인들이 봉기하자 프랑스는 다마스커스를 폭격하는 등 강경 진압했다. 프랑스 위임통치 기관은 또 시리아의 알렉산드리타市를 터키에게 떼어주는 공작도 했다.
1940년 프랑스 본국이 독일군에 항복한 뒤 시리아는 비시 정부(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남부지방에 설치한 괴뢰정부) 통치하로 넘어갔다. 1941년 6월 이후엔 영국군과 자유프랑스군이 지배하게 되었다. 레바논에서는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이 인구비율에 따라 권력을 나눠갖는 합의를 하여 독립국가를 만드는 준비에 들어갔다. 1943년에 합의된 것은 대통령은 기독교인, 수상은 순니파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의회 의석은 기독교가 6 이슬람이 5의 비율로 하기로 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물러난 1946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시리아에서는 독립 후 여러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시리아의 권력은 군대안의 바트당원들에게 넘어갔다. 바트당은 1940년 기독교도인 교사 마이클 아프크에 의해 創黨되었다. 汎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 바트당 세력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확산되면서 아랍통일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진 : 13세기에 십자군을 무찌른 이슬람 군대의 지휘자 살라딘은 쿠르드족 출신인데 시리아의 영웅이다. 다마스커스 도심부의 동상.
민족주의파 장교단을 대표하는 나세르가 쿠데타로 親英派 왕을 내어쫓고 이집트에서 집권한 직후인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종의 국가연합식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결성했다. 이집트는 그러나 시리아를 북부의 속주처럼 대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시리아는 主權을 되찾았다. 다시 이에 불만을 품은 汎아랍바트당 세력이 반격한 것이 1963년의 쿠데타였다. 이를 계기로 공군 장성인 아사드가 바트당의 핵심멤버로 등장한다. 같은 해 이라크에서도 바트당 군인들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세 나라를 통일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이라크에선 그해 11월에 바트당이 쿠데타로 失權했다.
시리아의 집권세력이 된 바트당은 사회주의 및 汎아랍정책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반발을 사고 黨이 분열되었다. 1966년 당내의 강경사회주의자들이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는 아사드가 주모자였다. 이 바트당 정권은 두 가지 큰 패배를 맛보았다.
1967년 6월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요르단과 연합하여 對이스라엘戰에 참전했던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빼앗겼다.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국내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인다. 이때 시리아는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했으나 이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아사드는 시리아 정부의 팔레스타인 지원정책을 반대했었다. 그는 1970년 11월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그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10월 사다트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기습하여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아사드의 시리아군도 참전하였으나 이스라엘의 반격에 무너졌다. 일시 수복했던 골란고원을 내어주고 다마스커스까지 빼앗길 뻔했다. 이스라엘군은 다마스커스를 35km 앞둔 지점에서 휴전했다.
아사드는 2000년 6월10일에 죽을 때까지 30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는 戰後 중동의 최장기 집권자였다. 아사드는 순니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리아에서 소수파인 시아파 중에서도 이단시되어왔던 알라위파 출신이다.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는 전체 인구의 11.5%에 지나지 않는다. 아사드는 군대, 관료, 정보기관에 알라위파 출신들을 많이 배치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 알라위파는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왔다. 프랑스가 위임통치할 때 우대를 받았다. 아사드 정권을 알라위파 정권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그는 소외된 소수파에 대한 배려를 많이 했다. 원리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서는 3만 명을 학살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아사드에 대한 개인숭배는 시리아를 여행해보면 실감할 수 있다. 자리 좋은 언덕, 산꼭대기마다 오른 손을 든 아사드의 石像이 있다. 그의 생전시부터 있었던 이 석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大兄을 연상시킨다.
그는 생전에 아들인 바시르 알 아사드를 후계자로 지명해놓고 있었다. 바시르는 런던에서 안과의사로 일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34세였다. 당시 헌법은 40세 이상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개헌이 이뤄져 제한연령이 34세로 변경되었다.
시리아는 레바논내의 反이스라엘 헤즈블라군을 지원하고 레바논의 國政에 간섭하며, 최근에는 전 수상의 암살에 관여했다고 해서 국제적 압력을 많이 받고 있다. 암살사건 이후에는 레바논으로부터 철군했다. 시리아 입장에서 보면 레바논은 원래 시리아 땅인데 기독교인들이 프랑스를 구워삶아 분리독립해나간 나라이다. 따라서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의식이 강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도 그렇지만 중동의 많은 문제는 이 지역을 400년간 지배했던 오스만 투르크가 무너지고 영국, 프랑스 세력이 일시 지배하다가 철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문명의 요람이었던 이곳이 지난 500년간 받은 역사적 수모가 오늘의 時事문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진 : 아기는 어딜 가나 가장 흐뭇한 구경꺼리이다. 항구도시 라타키아 호텔의 로비에서 만난 아기를 한국 관광객이 귀여워하고 있고 아기의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