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에리 운하

에리 운하의 역사를 보면 운하는 역시 ‘19세기의 産物’임을 알 수 있게 된다
-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미시시피 강, 오대호(五大湖) 등 바다처럼 넓은 강과 호수가 많은 미국에는 크고 작은 운하가 많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운하를 하나 뽑으라면 단연 에리 운하(The Erie Canal)이다.

유래

18세기 말 미국 동북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서양 연안과 북미 대륙 내륙을 잇는 물길을 만들 수만 있다면 중서부(mid-west)의 평원(平原)을 보다 쉽게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더구나 그때 영국에선 맨체스터 항(港)과 내륙의 탄광지역을 잇는 브리지워터 운하가 완공되어 미국의 기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몇몇 사람들이 뉴욕주 북부 아디론댁 삼림지역에서 발원해서 뉴욕시를 통해 대서양으로 흐르는 허드슨 강을 오대호와 물길로 연결시키면 중서부 곡창지대와 대서양 연안 인구 밀집지역 사이의 물류 이동을 빠르고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허드슨 강의 상류인 올바니(Albany)와 에리 호(Lake Erie)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면 중서부의 목재, 광물, 및 곡물을 배로 수송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 에리 운하 지형도

올바니에서 에리 호까지의 거리는 거의 360마일(약 500 킬로미터)에 달했다. 거리도 거리이지만, 올바니 보다 에리 호 수면이 600피트(183미터)이나 높다는 난점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갑문은 12피트(3.5미터) 정도여서 최소한 50개의 갑문을 세워야만 했다. 360마일이나 되는 운하를 파고 50개나 되는 갑문을 세우는 것은 당시로써는 재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대통령이던 토머스 제퍼슨은 이 계획이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면서 연방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드위트 클린턴 주지사

무모해 보이기만 한 계획은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드위트 클린턴(DeWitt Clinton : 1769-1828년. 상원의원과 뉴욕 시장을 지냈고, 191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한테 패배했고, 1817-1823년간 뉴욕 주지사를 지냈다.)의 관심을 끌었다. 운하 계획에 매료된 클린턴 지사는 주 의회를 설득해서 1817년에 드디어 예산 700만 달러를 얻어냈다. 공사는 곧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하도 무모해 보여서 사람들은 이를 ‘클린턴의 바보짓(Clinton´s Folly)’라고 불렀다.

- 1908년 버팔로(Buffalo)의 바지 운송모습

운하는 폭 12미터 깊이 1.2미터로 건설되었다. 파낸 흙은 주변의 제방 도로를 쌓는데 썼고, 운하의 측면은 돌을 붙였다. 독일로부터 석공 수백 명을 불러 와서 공사를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미국에 남아서 나중에 뉴욕의 많은 석조(石彫) 건물을 건축하는데 참가했다. 울창한 나무를 제거하고 도랑을 파는 어려운 일을 부지런히 해서 1920년에는 유티카에서 시라큐즈까지의 중간 부분이 먼저 완공되었다. 로체스터에서 올바니에 이르는 250마일과 챔플레인 호(湖)에서 북으로 운하와 이어지는 부분이 1823년에 준공되었다. 지반이 견고한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서쪽 부분에 도랑을 내고 갑문을 만드는 공사가 특히 힘들었다.

1825년 10월26일, 드디어 운하가 완공되어 드위트 클린턴은 버팔로에서 바지선(船)을 타고 9일간 항해를 거쳐 뉴욕 맨해튼에 도착했다. 뉴욕시민들은 클린턴을 마치 개선장군처럼 환영했다.

중서부 개발을 촉진시키다

에리 운하의 완공은 대단한 영향을 가져왔다. 중서부로 들어가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에리 운하와 허드슨 강을 따라 도시가 들어섰다. 뉴욕 항은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 다른 도시를 젖히고 미국 제1의 항구 도시로 부상했다. 에리 운하와 다른 호수를 잇는 운하 공사가 계속 진행되는 등 뉴욕주에 운하 건설 붐이 불었다. 1835년부터는 증가하는 물동량을 수용하기 위해 운하를 확장하는 공사를 했다.

1905년에서 1918년 동안에는 운하를 확장하는 공사가 다시 이루러 졌다. 이때에는 원래 운하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새 공법을 사용해서 1억 달러 예산을 들여 운하를 새로 건설했다. 이에 따라 원래의 운하는 ‘올드 에리 운하(The Old Erie Canal)’라고 불리게 됐고, 많은 부분은 버려지거나 매립되어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됐다. 1918년에 새로 준공된 에리 운하는 다른 운하와 함께 ‘뉴욕 바지 운하(New York Barge Canal)’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철도 및 고속도로와의 경쟁

1831년에 올바니에서 에리 운하를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되고, 1842년에는 버팔로에서 올바니에 이르는 전구간(全區間)에 걸쳐 철도가 완공되었다. 이제 에리 운하는 철도와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승객들은 보다 빠르고 편리한 철도를 택했지만, 아직도 운하는 철도보다 열 배나 많은 화물을 실어 날랐다. 이런 추세는 지속돼서, 1951년에 에리 운하는 520만 톤의 화물을 실어 날랐다.

- 에리 운하 관광 유람선

그러나 1951년 이후 운하를 이용하는 화물 물동량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철도뿐 아니라 2차 대전 후에 고속도로가 건설됨에 따라 운하는 경쟁력을 상실한 것이다.

레크리에이션 운하로 다시 태어나다

물동량이 점차 줄더니 1990년대 들어 에리 운하는 전적으로 관광 유람선과 자기용 보트를 타는 레크리에이션 목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운하 군데군데 보트 계류장이 만들어지고 물길을 따라 자전거 타는 길이 만들어졌다. 뉴욕 운하는 화물 바지가 시커먼 연기를 뿜고 다니던 옛날의 에리 운하가 아닌 것이다.

1992년, ‘뉴욕 바지 운하’는 그 명칭이 ‘뉴욕 운하 시스템’으로 바뀌고 운영권은 뉴욕주 유료도로 위원회로 이관되었다. 화물을 나르는 바지가 더 이상 다니지 않기 때문에 명칭에서 ‘바지’를 빼버린 것이다. 뉴욕주 정부는 이 운하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운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위락용 보트가 많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운하가 주로 레크리에이션 활동으로 쓰임에 따라 겨울이 되면 운하는 물을 빼고 보수를 했다. 2006년 뉴욕주는 운하를 사용하는 보트에 대해 운하 사용료를 면제했다. 따라서 운하의 관리는 유료도로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감당하게 되었다.

- 2006년 여름 대홍수로 피해를 입은 에리 운하 모습

2006년 여름에 뉴욕 북부에 대홍수가 나서 운하의 중간 부분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복구비용만 최소한 1,500만 달러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에리 운하의 역사를 보면 운하는 역시 ‘19세기의 산물(産物)’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에리 운하는 높은 지대인 에리 호와 낮은 지대인 허드슨 강을 이은 것이다. 에리 호 등 오대호는 물이 무진장으로 있어 운하에 흐를 물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또 이미 오대호에는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항구가 있었고, 수량이 풍부한 허드슨 강에도 화물선이 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물길을 이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에리 운하는 철도가 깔리면서 물동량을 잃어 버렸고, 2차 대전 후 고속도로가 거미줄같이 깔리자 화물 수송수단으로서의 용도는 폐기돼 버렸다. 오늘날 뉴욕-올바니-시라큐즈-버팔로를 잇는 유료 고속도로(I-90 하이웨이)는 허드슨 강과 에리 운하로 이어지는 지난날의 물길을 대신하고 있다.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