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나?

한국계 미국인이 잘 했을 때는 환호하고, 잘못했을 때는 나 몰라라 할 수 있는가?
시국강연 차 LA 체류 중이던 기자는 오늘(17일) 아침 라디오코리아방송에 불려나가 두 시간 동안 토론회에 참여했다.

1992년 이른바 4·29사태(LA흑인폭동)를 당한 바 있는 교민들은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의 학생들을 사살하고 자살한 조승희 사건이 미칠 파장에 대해 긴장하고 있었다. 한 교민은 토론 도중 전화를 걸어와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이 다른 학생들로부터 침 뱉기를 당하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는 연락을 화장실에서 해 와, 학교에 달려가서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전화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이 이 사건을 한국인의 범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승희라는 한 개인의 범행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교민들이 자격지심을 가지고 과민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이날 토론의 쟁점을 정리하면 대강 이러했다.

1. 현대법치주의의 원칙은 범죄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므로 조승희 군의 가족이라든지 한국교민사회 또는 한국인들 전체가 책임을 질 문제는 아니다.
2. 그러나 도덕적인 면에서, 한미관계의 특수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인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특별한 애도를 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국상(國喪)을 맞은 것 같은 이 기간에 교민사회와 한국정부가 적절한 유감을 표시하고 자중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작년에 미국 프로축구 슈퍼볼 게임에서 맹활약했던 워드라는 한국계 흑인선수를 청와대로 초청하여 격려하고 다과를 베푼 적이 있다. 한국민들은 한국인의 피가 섞인 외국인이 스포츠·연예 분야 등에서 활약을 하면 그들을 동족시하면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기도 했다. 다소 극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한국인이 한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조승희의 잔인한 총격집단살해에 대해서 “그것은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고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인다면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열정은 일종의 편의주의로 경멸을 받을 것이다. 같은 동족이라면 그 빛과 그림자를 함께 받아들이면서 기뻐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아주 냉정하게 이 사태를 보도하고 있다. 미국 공직사회에서도 한국 또는 한국인에게 범행의 책임을 묻는 따위의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총기난사 사건과 달리 이번 조승희의 범행은 조준사격, 확인사살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이 잔인한 수법이 더욱 보통 미국사람들을 흥분시켜 한국교민들을 불안에 떨게 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 LA한인회에서는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하나 걱정되는 것은 미국언론이 9·11 테러수준으로 집중보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의 친북좌파 철부지들이 미국인을 자극하는 야비한 글을 올리는 것이다. 스스로 자폭하는 것은 좋으나 대한민국 전체에 먹칠을 가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 텔레비전 자막에는 조승희는 “외톨이(loner)이었다”는 보도를 했다. 기자는 경찰기자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살인범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직접 만나 본 살인범들은 대체로 내성적이고, 말이 없고, 수줍기까지 한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짐승으로 돌변시키는가? 그것은 대체로 소외감이고 외로움이다. 살인자에게는 인생최대의 결단이다. 이 결단을 하기 전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만한 단 한 사람의 상대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막가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 그의 편지집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이 살인자도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상대로 ‘외로움의 복수’를 한 셈이었다. 그가 의지할 만한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아들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조승희의 범행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거론될 수 있다. 기자는 살인사건이 날 때마다 일부 도덕군자들이 그 책임을 사회 전체에 돌리는 위선적 논리를 펴는 것을 보고 분노한 적이 많았다. 사형폐지론자들도 살인현장을 보면 태도가 바뀐다고 한다. 이 사건의 핵심적인 사항은 한국인이 미국에 가서 성공하고, 좋은 대학교에까지 들어가 32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이유 없는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사실이다. 한 인간의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고 한다면 어제 버지니아에서는 한 한국인 때문에 32개의 지구가 날아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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