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 의원을 위한 변론

그는 애국 진영의 아이콘 같은 존재, 세계의 지도자들이 부쩍 젊어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전여옥(田麗玉) 의원이 한나라당 최고위원직(職)을 사퇴하고 박근혜 전 대표의 주변에 쳐진 ‘인(人)의 장막(帳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전 의원이 박근혜를 배신했다는 비난이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해 제기됐다. 심지어는 전 의원이 이명박 캠프에 줄을 섰다는 등 인격살인(人格殺人)에 가까운 비난마저 떠돌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자신을 밝히지 않은 채 밑도 끝도 없는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 자체가 비겁한 일이다. 하지만 전 의원의 과거 발언까지 끄집어내서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경우도 있으니, 그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의원은 이명박씨가 책을 몇 권씩 내고 출판기념회를 여는 등 구태의연한 정치를 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이 있다. 이명박씨의 이런 행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한 한나라당 의원은 전 의원뿐이었는데, 이런 전 의원에 대해 “이명박 쪽으로 넘어갔다”고 악담을 하는 것은 터무니없을뿐더러 대단히 악의적이다.

전 의원과 박정희 대통령

전 의원은 작년 말에 펴낸 저서 ‘폭풍전야 1, 2’에서 자기가 전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박 대통령의 업적임을 인정하고 결국 ‘화해’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을 우상(偶像)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수의 전사(conservative warrior)’인 전 의원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전 의원의 그런 생각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전 의원은 서울의 중산층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 점에서 나와 똑 같다.) 전 의원이 중학교 시절에 ‘10월 유신’이 있었는데, 당시 서울의 중산층이나 대학생 중에 ‘10월 유신’을 ‘구국의 결단’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5`16 혁명 후 공화당은 전 의원과 내가 자란 서울의 중심부에선 단 한번의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6.25 전쟁 당시 ‘적치(赤治) 90일’을 경험한 서울의 중산층은 확고한 반공주의자이었지만, 동시에 시민적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민주주의 세력이었다.

전 의원 같이 박정희 대통령을 나중에 발견하고 평가하는 것이 정상이다. 무조건적인 숭배와 향수(鄕愁)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시대착오’일 뿐이다.

전 의원과 박근혜 대표

정계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전 의원은 저술가로 활동했다. 특히 조선일보에 발표한 신선한 칼럼으로 명성을 얻었다. 전 의원은 차떼기와 탄핵 후폭풍으로 초토화된 한나라당에 영입되어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침몰 직전의 난파선 같은 한나라당을 박근혜 대표와 전여옥 대변인이 구해 낸 것은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하나의 장(章)이다.

전 의원은 한나라당 대변인이 되기 전에 박근혜 의원을 폄하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대학 졸업 후 방송사 주일(駐日) 특파원을 거쳐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얻은 전 의원으로는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내가 당시에 생각하기에도 표현이 조금 지나쳤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전 의원을 박 대표가 대변인으로 발탁했다.

전 의원을 선택함으로써 박 대표는 대단한 포용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 포용력이 있었기에 박 대표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을 구한 것이다. 전 의원이 2004년 총선과 몇 차례의 재보선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것도, 박근혜 대표에 대해 빚진 감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전여옥 투톱 시스템의 마력(魔力)은 2006년 5월31일 지방선거에서 피크를 장식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표는 대표직을 내어놓았고, 전 의원은 최고위원이 됐다. 이 즈음부터 두 사람은 각각의 길을 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반노(反盧) 투쟁에 앞장선 전 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의 승리 외에 박 대표의 업적으로 뽑을 것은 사립학교법 개악에 항의하면서 추운 겨울에 가두(街頭) 투쟁에 나선 것이다. 2002년 대선 직전에 평양을 방문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적이 있었음에도 보수 진영이 박 대표를 지지하게 된 계기는 개악 사학법 반대투쟁이었다. 박정희의 딸이 추운 겨울에 장외(場外)투쟁을 한다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 보았던가 말이다. 그런 박 대표를 몇몇 소장파 의원들은 비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5.31 지방선거 후에 그냥 쉬어 버렸다. 테러로 인한 충격도 있었기에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시 작전권 문제, 북한 핵실험 등 심각한 사태가 줄줄이 일어났다. 그런데, 박 대표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반면 전 의원은 시청 앞 등 여러 곳에서 열린 대중집회에 자주 참여했다. 백발이 성성한 참가자들은 젊은 전 의원의 사자후(獅子吼)에 열광했다. 전 의원 같은 국회의원 열 명만 있으면 노 정권을 벌써 갈아 치웠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박근혜의 대실수

박근혜씨가 2006년 여름에서 가을에 이르는 시기에 한미 연합사 폐지 등 국가안보 문제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박 대표는 그러지 못했다. 5.31 선거의 영광에 가려져 있던 이명박씨는 여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운하보다는 페리’라는 식으로, 한중 열차 페리를 도입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한나라당은 ‘운하.페리당(黨)’이 되고 말았다.

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집권 초에 독일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 총리이던 에르하르트는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젊은 대통령을 차에 태우고 독일의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다. 박 대통령은 쭉 뻗어나간 고속도로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울창한 산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그때부터 고속도로 건설을 마음에 두게 되었고,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고속도로가 거미줄 같이 깔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명박씨가 난데없이 운하를 건설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박 대표는 운하 구상이 터무니없다고 정면으로 대응했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고속도로는 바로 부친의 업적이 아니던가. 그런데 박 대표는 엉뚱하게 열차 페리를 들고 나왔다. 열차 페리로 경부 운하를 잠재워 보겠다는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참으로 한심하고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지사(當然之事)일지도 모른다. 박 대표 주변에는 이회창 후보를 떨어뜨린 ‘패배 전문가’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자

정치인이 되기 전에 전 의원이 쓴 글을 보면 오늘날의 전 의원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꽤 있다. 그러나 전 의원이 과거에 쓴 글은 대체로 ‘문화’에 관한 것이거나, 사회현상을 문화적 시각으로 풀어 쓴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갖고 오늘날의 전 의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치인이 된 후의 행로(行路)가 몇 배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여옥 의원은 애국 진영에 있어 아이콘 같은 존재이다. 같은 당의 공성진 의원은 애국 진영의 집회에 참가한 예비역 시민들을 나치스 친위대에 비유했지만, 전 의원은 그런 집회에 몇 번씩 나와 노무현 정권을 질타하는 연설을 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수호해야 할 애국세력이 누구를 지지해야 하는지는 분명할 것이다.

세계의 지도자들이 부쩍 젊어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사르코지가 당선됨에 따라 프랑스에도 50대 초의 젊은 대통령이 나왔다. 작년 12월에 취임한 멕시코의 우파 연합 소속 칼데론 대통령은 45세이고, 영국 보수당의 카메론 당대표는 41세이다.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후보이던 73세의 봅 돌 상원의원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맥없이 지고 말았다. 공화당의 원로 그룹과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대는 큰손들은 2000년에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찾아 나섰고, 결국 50대 초의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를 발굴해서 2000년 선거에 후보로 내세워 승리했다. 대통령 선거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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