棺속에서 살아난 한 軍人의 이야기

워커힐 호텔 초대이사장 임병주 씨
●눈을 떠보니 연락병이 울고 있더군요. 왜 우냐고 했더니 「인민군이 들이닥쳤다」는 겁니다. 총과 수류탄을 찾는데 아무 것도 없었어요.
임병주 회장
팔순을 바라보는 한 군인(軍人)의 일생을 들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나라를 만들고, 지키고, 일으킨 주역들. 기자는 건국, 호국, 산업화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임병주(林炳柱. 79세) 「韓國데지마」 회장을 만나 인터뷰했다.

林회장은 한국현대사에 족적을 남긴 육사8기생 중 한 명이다. 6·25를 전후에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고, 실제 죽어(?) 관(棺) 속에 눕혀지기도 했다. 5·16직후엔 초대이사장 자격으로 워커힐호텔을 건설했다. 이후엔 『한국 장신구(裝身具)업계 대부』로 불리며, 수출산업을 주도했다. 회사가 쓰러지고, 감옥을 오가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났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회사에서 만든 샘플들을 보여주며, 세계시장을 석권할 의지에 불타있었다.

「소대장님 피가 흐릅니다」

林회장은 1927년 함경북도 회령 생이다. 서울로 유학을 와 1949년 5월23일 육사 8기로 졸업했다. 이날 졸업생은 8기와 9기 합쳐 1200명. 육사 8기는 건국 후 최초의 정규 육사생도로서 10대1의 경쟁률을 거쳐 선발된 엘리트들이었다.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쟁쟁한 인물들을 배출했고, 이들은 훗날 5·16군사혁명의 주역이 된다. 전쟁 통에 3분의1이 전사했지만, 살아남은 이들 중엔 장관이 10명이나 배출됐다.

林회장은 육사 졸업 후 공비(共匪)소탕 부대였던 광주 5사단에 자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온갖 수단을 동원해 건국 방해공작을 폈다. 1948년 4월3일에는 제주도에서 4·3폭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10월20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국군이 반란 진압에 나서자, 공산주의자들은 전라도 산악지역에 숨어들어간다. 이들이 소위 빨치산, 즉 공비들이다.

『1949년 7월23일로 기억합니다. 「소를 끌고 갔다」는 신고를 받고, 새벽 2시에 영암 월출산으로 출동했습니다. 소를 끌고 갔다는 건 공비들이 나타났다는 것이죠. 소대장인 저는 맨 앞에 서서 절벽을 기어올랐습니다. 그러다 총성이 몇 번 났고...그래도 계속 산을 타는데 뒤에서 부하가 그러더군요. 「소대장님 피가 흐릅니다」고요』

林회장, 당시 林소위는 손으로 허리를 훔쳐보곤 혼절해 버렸다. 복부관통상이었다. 카빈탄환이 배를 뚫고 엉덩이를 꿰뚫은 것이다. 부하들은 새끼를 꼬아 들 것을 만든 후 소대장을 싣고 내려왔다. 트럭에 실어 간신히 광주에 있는 한 병원에 도착했다. 새벽에 총을 맞았는데 도착한 시각은 해 질 무렵이었다.

『피를 너무 흘려 「이젠 다 죽었다」고 했다는 군요. 물론 저는 도착과 동시에 의식을 잃었습니다. 군의관들은 「총구멍이나 꿰매주자」며 인턴들에게 제 몸을 맡겼답니다. 인턴들은 연습 삼아 상처를 드러내 내장을 자르고 잇고, 그렇게 대충 구멍을 막고는 관 속에 넣어버렸습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와서 「가족들이 오기 전엔 관 뚜껑을 못 덮는다」고 못질은 안 한 모양입니다. 그러다 누님, 누이가 왔죠.』

신비(神秘)로 가득 찬 게 세상이다. 林회장 친척들이 모두 모이자 「기적」이 일어났다. 관이 덜컥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침상이었다. 林회장은 의식을 잃은 지 72시간 만에 눈을 떴다. 살아난 것이다.

『탄환이 카빈이 아니라 M1만 됐어도 장이 모두 파열됐을 것입니다. 탄환은 몸 안에 들어가 있지만, 끄집어 낼 수도 없고, 독성도 이미 몸 안에서 사라진 상태죠』

좌익, 양민 협박해 앞장세우기도

林회장은 3개월 만에 병원을 나와 5사단으로 복귀했다. 공비토벌에 다시 참여한 것이다.

당시 공비들의 횡포와 만행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소위 보급투쟁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물론 사람까지 끌고 갔다. 면장, 이장 등 공직자를 살해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양민(良民)들을 앞세워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뒤에서 총으로 위협하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쏴버리는 식이었다. 국군도 내막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양민과 공비가 뒤섞여 밀려오는 무리에 차마 총을 쏠 수 없어, 관공서가 점령당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한 수법은 6·25때 인민군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양민과 인민군이 뒤섞여 공격하는 상황에서, 당황한 미군들이 발포하거나 폭격하기도 했다. 최근 좌익들이 「미군의 양민학살」이라며 비난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런 배경을 안고 있었다.

눈 떠 보니 몰려 든 인민군들

공비토벌 현장에서 활동하던 林회장은 6·25가 발발하자 문산으로 출동했다. 그는 여기서도 다시 죽음 직전에 몰렸다. 박격포탄 파편에 카빈 소총이 터지면서 소총 파편이 왼쪽 가슴과 왼손에 파고들었다. 林회장은 적십자 병원으로 실려 갔다.

『눈을 떠보니 연락병이 울고 있더군요. 왜 우냐고 했더니 「인민군이 들이닥쳤다」는 겁니다. 총과 수류탄을 찾는데 아무 것도 없어요. 연락병이 내가 장교인 것을 숨기려고 화장실에 버린 것이죠. 1층 장교병동에서 3층 사병병동으로 침상도 옮겨져 있었습니다. 밖을 내다보니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그야말로 다급한 순간이었죠.』

林회장은 마침 6월에 받은 월급봉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청소부 아주머니에게 월급봉투를 통째로 집어주곤 말했다. 『도와주세요!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아주머니는 눈치를 보내 林회장과 연락병을 벽 쪽으로 데려갔다. 비상문이 있었다. 빠져나갈 통로를 찾은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 담을 넘었다.

『인가(人家)에 뛰어들자 겁에 질린 할아버지·할머니가 막아섰습니다. 다행히 젊은 아가씨 도움으로 옷을 빌렸습니다. 환자복과 군복을 갈아입고 급히 나가려는데 아가씨가 부르더군요. 신발도 고무신으로 갈아 신으라는 것이었어요. 마침 군화를 그대로 신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고무신을 신은 채 냅다 뛰었습니다.』

당시 적십자병원에 남아있던 군인들은 트럭에 실려가 산 채로 매장(埋葬)당했다고 전해진다. 林회장은 청소부 아주머니, 옆집 아가씨 그리고 월급봉투의 도움으로 또 한 번 목숨을 건졌다.

공비토벌시계 장에 내다팔려다 잡히기도

林회장은 당시 서울서 택시를 굴리던 외삼촌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날 무렵인 7월2일, 인민군이 삼촌 집에 들이닥쳤다.

외삼촌이 미리 짜낸 스토리를 둘러대야 했다. 마침 외삼촌이 모는 택시가 박격포탄을 맞았으니, 林회장은 운전사 조수로 옆에 있다 박격포탄을 맞았다고 하자는 것이었다. 18살이던 연락병은 삼촌 집에 왔다가 난을 당한 것으로 말을 맞췄다. 잘 짜인 스토리에 인민군들이 속아 넘어갔다. 또 한 번의 위기가 넘어갔다.

『인민군들에게 풀려난 후 연락병 친구는 동사무소에 취직을 했고, 저와 외삼촌은 장사를 벌였습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생계가 막막했거든요. 저희는 금붙이 등을 남대문, 동대문시장에서 팔아 다가 같은 해 9·28수복 때까지 서울역 근처 만리동 고개에서 꽈배기장사를 했습니다. 전쟁 통이지만 식대는 충당됐고, 팔다 남은 것은 밥 대신 먹을 수도 있었으니 괜찮은 장사였습니다.』

위험은 서울 생활에서도 계속됐다. 林회장이 월출산에서 공비토벌을 기념하는 「월출산공비토벌기념시계」를 팔러 장에 나가다 완장 찬 좌익들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좌익들은 林회장이 슬그머니 집어 준 시계와 만년필을 받곤 사라져 버렸다. 또 한 번 좌익들에게 잡혔을 때는 동사무소에서 일하던 연락병이 신분보장 서류를 만들어줘 풀려나기도 했다.

9·28수복이 되자 林회장은 임시 헌병사령부로 달려갔다. 군번과 이름을 밝히자 그 자리에서 헌병 병과 중위로 복귀했다. 그는 헌병 소속으로 전쟁을 치르며 1953년 휴전을 맞게 된다.

1억 달러 수입 노린 워커힐 호텔 건축

林회장은 5·16과도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그는 당시 중령 계급장을 단 상태에서 육군정보학교 무관코스를 밟고 있었다. 5·16이 벌어진 다음 날, 육사동기인 김종필(金鍾泌)씨로부터 『빨리 올라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林회장은 그 길로 서울로 달려갔고,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로 혁명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혁명정부가 벌인 사업은 자동차 산업과 함께 워커힐 호텔 건축이었다. 林회장은 이 워커힐 호텔 건축의 특명을 받고 사업을 책임지게 된다.

호텔 건축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美8軍 부사령관 멜로이 장군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멜로이 장군은 1961년 10월 혁명정부의 실력자 김종필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혁명정부가 성공하려면 경제를 안정시키고, 산업을 근대화해야 한다. 빨리 韓日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경제개발에 주력하라. 駐韓美軍이 7만5000명인데 이 사람들이 전부 휴가를 일본으로 간다. 美軍들을 비행기로 일본까지 보내줘야 하니 돈이 많이 든다. 한국에 좋은 휴양시설만 있으면 미군 장병들의 절반은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거다. 호텔을 열면 1년이면 1억 달러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의 수출액이 1000만 달러가 안 됐던 점을 고려하면 1억 달러는 천문학적 액수였다. 얼마 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김종필 씨 등과 워커힐 꼭대기에 있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여름별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때 김종필씨는 『이 자리에 국제수준의 호텔을 지어 처음 2∼3년은 美軍을 유치해 외화를 벌고, 그 다음에 국제관광대회 열어 달러를 벌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朴대통령은 곧바로 워커힐 호텔을 짓기로 결정했고,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현역 중령이던 林회장에게 임무가 내려졌다. 林회장은 산업화의 개시를 알리는 워커힐 호텔 건축의 책임자로 작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워커 장군을 추모하는 워커힐

워커힐 호텔은 워커 장군을 추모하는 언덕(hill) 위에 지은 호텔이라는 뜻이었다. 워커 장군은 1950년 12월 경기도 의정부 부근에서 북진 작전을 지휘하던 중 한국군 차량과 충돌해 현장에서 전사했다. 김종필씨는 맥아더 장군과 함께 한국전 영웅으로 추앙 받는 워커 장군을 기리기 위해 워커힐 호텔을 작명했다.

당시 서울에서도 5층 이상 건물은 지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처음 짓는 국제적 대형호텔인 만큼 워커힐 호텔 건설에는 모든 건설역량이 총동원됐다.

林회장은 물론 건설회사 사장들도 직접 나와 감독을 했다. 현대 정주영(鄭周永) 회장, 삼환 최종환(崔鍾煥) 회장을 비롯해 여러 회사 대표들이 매일 나왔다. 건설회사에서도 이윤을 안 남기고 실비로 지었다. 공사현장에서 실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군인들이었다. 공군·육군·특전대·공병장교 등이 와서 일했다. 심지어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던 군인들이 나와서 낮에 도로를 닦았다.

모든 역량 총동원된 워커힐 건축

『그야말로 낮 밤 안 가리고 만들었습니다. 朴대통령도 일주일에 2~3번은 밤에 와서 현장을 둘러보고 갔습니다. 「몰라도 배워가며 해 낸다」는 군인정신으로 만들어 낸 것이죠. 호텔은 앞으로 벌어들일 달러 이외에도 상징적 효과가 컸습니다. 외국인 체형과 구미에 맞추느라 미국가구를 들여오고, 외국상품을 수입했죠. 이런 선진제품들을 한국 업자들이 와서 견학하게 했고 또 자극제가 됐습니다.』

1961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으로 참여했던 애수근(艾壽根) 前한국선물협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가고, 사흘에 한 번씩 공중목욕탕에 가서 씻으면서 견뎠죠. 겨울에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데도 집에 안 가고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잤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신이 나서 했어요. 사심(私心) 없이 그냥 모두들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워커힐 호텔 공사는 62년 1월25일 시작해 같은 해 11월25일 완공됐다. 林회장은 워커힐 호텔이 만들어지자, 초대이사장으로 경영을 책임지게 된다.

朴대통령은 호텔 완공 후 또 다시 특명을 내렸다. 『앞으로 세계수준의 호텔을 경영해야 하니 세계를 일주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공식출장비 외 2만 불을 얹어 줬다. 당시 바닥상태인 대한민국 외환보유고를 고려하면, 2만 불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林회장은 비서 두 명을 데리고 출발했다. 주요 국가의 최고호텔에 투숙하며 서비스를 배워왔다. 비행장에 돌아왔을 때는 짐 하나 없었지만, 머릿속은 호텔경영의 노하우로 채워져 있었다.

反JP 세력이 제기한 4大의혹 사건

모든 일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林회장이 귀국하자 큰 일이 터져있었다. 소위 4대 의혹 사건이었다.

당시 새나라자동차 설립과 워커힐 호텔 건설을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자, 야당의 반대가 거셌다.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유진산(柳珍山)씨 등 야당 인사들과 윤보선(尹潽善)씨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냐』, 『달러도 한 푼 없는데 무슨 워커힐 호텔이냐』고 공격했다. 공화당 안에서도 저돌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중앙정보부에 대해 견제가 많았고, 김종필씨를 반대하는 「反金세력」이 형성됐다.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호텔과 함께 증권, 슬롯머신을 묶은 「4大의혹」은 김종필씨를 비롯한 중앙정보부 관계자들을 궁지로 몰았다. 중앙정보부가 정치자금을 조달하려고 부정·불법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 중 워커힐 호텔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워커힐을 마련하면서 그중 상당한 액수를 횡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林회장 등 7명의 관계자들이 구속됐다.

『사건 내막은 이랬습니다. 워커힐 호텔의 고문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양반이 항상 자리를 비웠죠. 간장공장을 운영하는데 돈을 막으러 다녔던 겁니다. 이 사람에게 일을 제대로 시킬 요량으로 당시 2000만 원(화폐개혁 후 200만원)을 꿔줬습니다. 그런데 이사회의 동의를 얻지 않은 게 문제였죠. 여기에 JP가 워커힐 수익의 20%를 떼먹었네 하는 등의 루머가 떠돌면서 사건이 커져 버린 것입니다.』

林회장은 공금 횡령 혐의로 구속됐다. 돈은 동기생들이 변제해줬지만, 재판은 받아야 했다. 그는 구속된 사람 중 가장 오랜 기간인 5개월 간 수감돼 있었다.

민정이양 후인 1964년 야당 측은 워커힐 호텔 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의혹 이상의 사실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4大의혹 사건은 여당 안의 김종필씨 라이벌과 야당이 합작으로 만들어 낸 사건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워커힐 호텔은 완공 후 대성공을 거뒀다.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워커힐 호텔을 개관한 지 3년 만에 공사비를 다 벌어들였다. 외국인만 싣고 다니는 택시는 300대가 운행됐다. 외화를 벌기 위해 만들어 낸 워커힐 호텔이었지만 외화 이외에도 서구(西歐)와 한국(韓國)의 사람, 정보, 문화를 이어지는 창구가 됐다.

「장신구업계의 대부」로

林회장은 감옥에서 나온 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 장신구(裝身具) 사업이었다. 철사를 꼬아 목걸이를 만드는 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한 뒤 미국에 상품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일본회사가 고물상에 버린 기계를 50만 엔을 주고 산 뒤, 분해해서 들여왔습니다. 수출제한 때문이었죠. 기계를 전부 들여오는 데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5000대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한 대를 들여온 뒤 2000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12시간을 돌릴 때 한국은 24시간을 돌렸죠. 값을 30%까지 다운(down)시켜 미국에 수출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일본을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일본회사의 모든 기계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 버렸죠.』

林회장이 설립한 「삼영금속」은 장신구를 수출해 월100만 불의 매출을 올렸다. 1년이면 1200만 불에서 1500만 불. 당시 외화수입이 조립가공업 수준에 머물었던 것에 비하면 이 100만 불은 순수한 외화가득이었다. 林회장은 직원을 1200명까지 고용하며 10년 넘게 수출효자기업을 이끌었다. 林회장에게는 『장신구업계의 대부』라는 별명까지 따라다녔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

『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과로가 겹쳐서인지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미국에 뉴욕지사를 만들어 5년을 쉬면서 보냈죠.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 회사가 흔들거렸습니다. 그러다 79년 10·26사건이 터지고, 수출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회사는 다음 해 구정을 못 넘기고 맙니다. 문을 닫았죠. 78년 상장법인이 된 후인데다 제 지분은 20%에 불과해 회사정리는 쉬웠습니다. 그런데 신군부가 횡령 등의 혐의를 적용해 1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1년 꼬박 실형을 살고 나왔죠.』

林회장은 두 번째 출감 후 다시 일어났다. 주사기 바늘 등 첨단제품을 생산하는 테시마(Tesima)라는 일본회사와 제휴해 「韓國테시마」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지금은 일선에서 떠난 상태지만, 아직도 활동은 왕성하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샘플 수십 개를 꺼내며 제품설명에 열을 올렸다.

『위기는 많았지만, 절망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워낙 우리 세대가 여러 일을 겪다보니 보통 일에는 동요하질 않아요. 장신구회사에서 일하던 부하직원들은 지금 중국 등지로 진출해 全세계 장신구업계를 이끌고 있습니다. 자식들도 잘 자랐고요. 저 역시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1920년대 생, 이들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세대」로 불린다. 그들이 이룬 영광은 몇 방울의 흙탕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것이란 의미이다.

북한에 네 형제를 두고 온 林회장은 『김정일이 죽는 것은 보고 죽어야 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젊은 세대의 사명은 무엇일까? 반세기 후 태어난 기자는 대한민국과 자신을 섞어버린 저들 앞에 북한의 해방, 자유통일, 일류국가의 속말을 되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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