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委의 '6·25 뒤집기'

조사사건 82%, 국군·미군 가해사건
대선을 앞두고 좌파세력의 6·25사변(事變) 등 「역사뒤집기」가 가속될 전망이다.

정부는 15일 국무회의를 통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과거사委)의 조사 기구를 확대하기 위해 32명의 직원을 충원키로 의결했다. 과거사委의 올 해 예산은 119억 원이며, 새로운 직원 충원 시 약 23억 원의 예산이 더 들어간다.

과거사委의 소위 「진실규명」 대상은 6·25관련 사건이 대부분이며, 전체 조사건수의 88.6%인 9609건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인권침해사건(5.6%), 항일독립운동(2.5%) 등이다.

6·25관련 사건의 82.4%는 가해자가 국군·미군 등 우익(右翼)인 경우(전체 조사 대상 중 73%)이며, 인민군·빨치산 등 좌익(左翼)이 가해자인 경우는 17.6%(전체 조사 대상 중 15.6%)에 불과하다.

6·25 당시 「인민재판」 등의 형태로 자행된 좌익의 양민학살은 덮어둔 채 소위 좌익의 피해규명에만 치중돼 있는 셈이다.

과거사委는 신청된 사안의 대부분이 좌익의 피해사례여서 조사 역시 이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접근은 6·25 당시 양민학살이 인민군·빨치산이 아닌 국군·미군 등에 이뤄진 것이라는 식의 역사왜곡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게 일반적 지적이다.

살상명령 안 내렸지만 사실상 살상명령?

과거사委의 활동과 맞물려 좌파단체의 6·25 역사왜곡도 거세지고 있다.

지난 달 20일 「노근리평화연구소」라는 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국군과 미군이 6·25사변 당시 민간인 학살명령을 내린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가 공개한 문서는 1950년 7월25일 「韓美 양국이 피란민 처리에 대해 회의한 내용을 기록한 美정부문서의 번역문」이다.

이 문건에는 한국 내무부 차관, 미8군 대령 등이 △도시ㆍ마을ㆍ지역으로부터의 피난민의 이동은 사령관의 허락 없이는 금지 △밤 시간 한국인의 이동에 대해 통행금지 엄격 집행 등을 논의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단체는 출처불명의 번역문건을 제시한 뒤 『문서들은 직접적으로 「살상 명령」에 관한 부분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피난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 방침을 포함하고 있어 사실상 정부 차원에서 민간인에 대해 살상 명령을 하달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살상명령을 담지 않았지만, 사실상 살상명령을 하달한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한미조사委 『노근리, 불가피한 오발사고』

좌파세력이 국군·미군의 양민학살로 주장하는 사건 역시 대부분 교전 중 일어난 오폭(誤爆)·오발(誤發)사고 내지 정당(正當)행위로 알려져 있다.

가령 대표적인 미군의 양민학살로 운운돼 온 「노근리 사건」은 2001년 한미양국합동조사에 의해 『전쟁과정의 불가피한 오발사고였음』이 밝혀졌다.

백 만 여건에 달하는 문서와 자료·증언을 종합한 뒤 내려진 조사결과에 따르면, 『6·25 당시 북한군은 흰옷의 헐렁한 민간인 복장으로 변복(變服)해 후방에서 미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주고 있었고, 이로 인해 당시 미군은 한국의 전통적인 흰옷을 입은 피난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며 『1950년 7월26일, 미군은 노근리 피난민들에 경계심을 품고 이들을 통제하고 있었고, 당시 피난민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미군에 의해 數 미상의 피난민이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사단은 미군의 사격 이유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려 결론을 내리지 않았었다. 다만 『당시 미군의 경고사격 등으로 두려움을 느낀 민간인들이 미군통제지시를 어기고 이탈하는 과정에서 적성행위로 오인 받아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미군 측 참전 장병들은 피난민 대열에서 선제사격이 가해져 대응사격을 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6·25당시 좌익, 양민 앞세워 관공서 습격

노근리 사건의 정황에서 설명됐듯, 6·25당시 인민군·빨치산이 양민을 위협해 총알받이처럼 삼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6·25 직전에는 5사단 소속으로 빨치산 토벌에, 사변 후에는 1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던 기업인 임병주씨(육사8기)는 이렇게 증언했다.

『6·25사변 직전 빨치산들은 소위 보급투쟁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은 물론 사람까지 끌고 갔고, 면장·이장 등 공직자를 살해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공비들은 양민(良民)들을 앞세워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뒤에서 총으로 위협하면서, 전진하지 않으면 쏴버리는 식이었다. 국군도 내막을 알고 있다 보니 양민과 공비가 뒤섞여 밀려오는 무리에 차마 총을 쏠 수 없어, 관공서가 점령당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한 수법은 6·25때 인민군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양민과 인민군이 뒤섞여 공격하는 상황에서, 당황한 미군들이 발포하거나 폭격하기도 했다. 최근 좌익들이 「미군의 양민학살」이라며 비난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런 배경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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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6.25사변 기 13만 주민 학살

6·25당시 양민학살의 주범은 좌익세력이었다. 6.25사변 당시 빨치산들은 인민군 치하에서「바닥빨갱이」로 불리며 양민학살을 주도했고, 북한 인민군 퇴각 이후에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우익인사 살해 등을 벌여왔다.

빨치산들이 6.25사변 당시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한 양민의 수는 13만. 남경대학살, Warsaw Getto의 유태인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빨갱이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했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전쟁사학자들은 6.25사변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13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잔혹성(殘酷性)에 있다고 지적한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바닥빨갱이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사변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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