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순(예비역 중장) 자유수호국민운동 명예의장.ⓒ 프리존뉴스
“김정일 정권이 핵으로 무장하고 남한을 인질 삼아 위협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가장 심각한 대한민국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자유애국세력에게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절대 절명의 사명이 있다. 바로 지금이 친북수구좌파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모두가 나서야 할 때이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 후, 해방과 함께 광복군으로 귀국, 6.25 전쟁 참전, 박정희 장군과 함께 5.16군사혁명참여, 주한미군 감축저지를 위한 비선 외교 등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인물이 있다.
바로 장경순(86세·예비역 육군 중장) 자유수호국민운동 명예의장이다. 여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린 18일 <프리존뉴스>는 5.16군사혁명 47주년을 맞아 당시 혁명의 주체였던 장경순 전 장군을 만나 일평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해 온 그의 인생 여로(旅路)를 들어봤다.
‘신의 경지’ 다다른 국내 유일의 ‘유도 10단’ 최고수
일반인들에게 ‘장경순 전 장군’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의 출중한 유도 실력일 것이다. 실제로 장 전 장군은 지난 2004년 대한유도협회로부터 유도 9단, 명예유도 10단으로 추대되어 세계 유도계에서 ‘최고수’로 인정받아 화제가 된 바 있다. 신의 경지로 알려진 유도 10단은 그동안 국내에서 4명이 배출됐지만 생존자로는 장 전 장군이 유일하다.
1922년 전라북도 김제 만경 화포에서 태어난 장 전 장군은 배재중을 거쳐 배재고 2학년 때인 16살 때 처음 유도에 입문했다. 당시 그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에서 유도로 이름을 날렸던 이경석 선생의 조선연무관에서 수련을 받았는데, 그는 늘 제자인 장경순에게 “우리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문약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개인과 나라 모두 문무를 겸비해야 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철칙”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과 접목된 유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립했다. “유도의 요체는 내가 가지고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가장 보람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운동의 차원을 넘어선 순수한 인간완성의 수단이자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딪힌 수많은 고난과 위기, 갈등과 충돌을 그런대로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유도를 오래 하면서 다진 건강한 육체와 정신 덕택이었다.”
장 전 장군은 1941년 일본으로 유도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유도 달인이었던 미후네 규조(三船久藏)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정진하던 중 고국으로부터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했다가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됐다. 이후 그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와해된 일본군에서 쏟아져 나온 학도병·지원병·군속 등을 규합, 광복군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조직해 박시창 장군을 보좌하며 참모조장의 중임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5.16,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토양 제공”
귀국 후 전주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장 전 장군은 1948년 8월 육군사관학교 특별반으로 군문(軍門)에 투신,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5월 1일 소령으로 진급, ‘피의 능선(김일성 고지) 전투’ 등에 참여해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육군정보학교 교장 등으로 군인의 길을 걷던 장경순 전 장군은 1961년 5.16군사혁명에 가담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육군본부 교육처장으로 있으면서 시국에 대해 박정희 장군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던 그는 거사 전날 박정희로부터 “장 장군, 내일 거사야”라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혁명에 가담했다.
그는 5.16을 결행하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4.19의거가 일어 난 뒤 장면 내각이 들어섰지만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78달러였고, 국가예산 613억원 가운데 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240억원에 달했다.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일부 대학생을 비롯한 세력들은 ‘북한과 통일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사회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판단해 5.16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장 전 장군은 북한을 비롯해 남한의 친북좌익 세력이 5.16을 군사독재의 원흉, 또는 쿠데타로 폄하하는 것에 대해 “누가 뭐래도, 무슨 비판을 하더라도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5.16을 결행한 것이다. 한 점의 부끄럼도 없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치·경제·사회적 현실을 빼놓고 5.16을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쿠데타라 칭하든 혁명이라 칭하든 5.16은 빈곤과 실업, 정치사회적 혼란에 대한 타개책이었으며, 공산화를 막고 근대화의 발판을 이룩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5.16은 우리 경제를 세계 10위권에 올려놓는 바탕이 됐으며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2002년 나라사랑 지킴이 ‘자유수호국민운동’ 조직
한편, 장 전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간 동안 국가재건최고위원, 농림부 장관을 지내면서 농어촌 고리대 정리, 농업협동조합 개편, 산림녹화사업 등을 추진해 조국 근대화의 기수역할을 담당했다. 1963년 민정이양과 함께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이후 정계로 진출, 공화당 사무총장, 6~10대 국회의원, 공화당 중앙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1963~1973년까지 장장 10년 동안 국회 부의장을 지냈는데, 이는 역대 국회부의장 가운데 최장 재임기록이다. 그는 또 이 기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 혈혈단신 비밀리에 미국으로 건너가 의원 외교를 통해 주한미군철수를 저지하기도 했다. 장 전 장군은 1980년을 기점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뒤 기업가로 변신해 (주)코리아내추럴미네랄워터즈 회장, 삼호실업 회장 등을 지냈으며, 전직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헌정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장 장군이 중심이 돼 창설된 ‘자유수호국민운동’은 지난 2002년 4월 이대용·장동운·정래혁·함명수·김창규를 비롯, 고인이 된 김성은 전 장군 등이 ‘호국7인위원회’를 결성, 정계·학계·실업인·군인 등 각계 인사 100인의 발기인을 구성해 동년(同年) 5월 27일에 발족한 시민단체로 각종 안보강연회 등을 통해 나라사랑과 정치질서 바로세우기 운동을 이끌고 있다.
장 전 장군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며 늘 앞만 바라보고 줄기차게 달려왔다. 지금도 항상 한 시간 한 시간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살자. 그래서 죽을 때 내 인생의 미진한 부분을 조금도 남기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 혼신을 던져 추진하고 마감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내 신념에서 하는 말”이라며 이날 인터뷰를 마쳤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위 기사의 출처는 인터넷 프리존뉴스 입니다.
장경순 자유수호국민운동 명예의장 인터뷰 전문
(프) 유도 유단자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유도를 시작하셨는지요?
(장) 전북 김제가 고향인 나는 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로 유학해 배재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였는데, 내가 싸움을 꽤 많이 하는 편이었습니다. 이유는 내 전라도 사투리에 대해 조롱하는 학우들이 좀 있었기 때문이죠. 주로 휴식시간에 싸움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피묻은 얼굴로 교실로 돌아가는 일도 잦았습니다. 덕분에 학교 성적은 바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배재중 유도사범이었던 한병철 선생의 권유로 유도를 시작했습니다. 점차 재미를 붙여서 실력도 늘어갔고,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연무관의 수련생이 됐습니다. 조선연무관의 사범이던 이경석 선생이 비로 국내 유도계의 1인자였습니다.
어느 날 이 사범이 나를 불러서는 “사람은 동서를 막론하고 문무를 겸비해야 하며,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유도 조선조 500년간 공자왈 맹자왈만 했기 때문이다. 유도의 요체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가장 보람되게 사용하는 것이며, 이런 것을 분명히 알고 유도를 배워라”는 내용의 훈화를 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나는 감격했고, 그날부터 딴 사람이 됐습니다. 싸움도 더 이상 하지 않고 공부도 유도도 더욱 열심히 했습니다.
'5.16 혁명 결단,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프) 장군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 혁명을 함께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혁명 거사를 앞두고 고민이 되지는 않으셨는지요?
(장) 전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1950년대 후반기부터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정치권은 정부-여야 할 것 없이 하나같이 도덕적 해이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나라의 앞날이 암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4.19 민주혁명을 통해 집권한 당시 민주당은 밥그릇 싸움에 여념이 없었으며 수많은 학생들은 판문점으로 달려가 감상적 통일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박 전 대통령(당시 소장)을 만날 때마다 “각하, 우리나라 야단났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무슨 수가 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넌지시 하곤 했습니다.
1961년 5월 15일, 박정희 소장이 나보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내가 그날 오후에 박 장군의 자택을 찾아갔더니 ‘오늘 밤이 거사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각하, 그럼 저는 뭘 해야합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5.16 혁명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프) 가까이서 지켜보신 박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장) 제가 박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제 7기 특별반으로 막 군복을 입었을 때였습니다. 대단히 명석하고 치밀하면서도 사려깊은 분이셨습니다.
'좌익정권 종식, 쉽지 않을 것'
(프) 이번 대선에서 좌익정권이 종식될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시는지요?
(장) 쉽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지금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전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죠? 그게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그렇게 연극을 해서 노 대통령과 차별화하는 과정에서 경쟁력을 극대화하고 정권재창출에 나서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여론조사 등 판세분석에서 한나라당이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되는 상황입니다. 저들은 무슨 공작이라도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2002년 4월, ‘자유수호국민운동’ 창설
(프) 자유수호국민운동을 창설하신 계기는?
(장) 집안 일로 미국에 가 있던 2002년 4월, 재미교포 지인인 안교명 예비역 대령이 인터넷에 뜬 글을 보고는 나를 만나서 ‘이러다가 대한민국 망하는 것 아닙니까’라며 몹시 걱정했습니다. 문제의 글은 이대용 장군이 월간조선에 기고한 것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것으로, 우리나라가 패망 직전의 월남보다 더한 국가안보위기에 처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적화 직전의 월남에는 공산당의 비율이 5%에 불과했는데 우리나라는 친북용공세력이 9.7%였고, 좌파정권으로 인해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극도로 해이해져 있다는 것이 이 장군 글의 내용이었습니다. 큰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즉각 귀국했고, 이대용 장군을 비롯해 김성은 전 해병대 사령관, 정래혁 전 국방부장관,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 장동운 6.25참전소대장회의 전 회장 등과 ‘7인 호국위원회’를 결성해 결의문을 채택하고 ‘자유수호국민운동’ 발기인회를 구성한 후 결의문을 공표했습니다.
현재 각종 신문 광고, 성명서 발표, 집회, 기자회견 등으로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알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며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서도 각종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친북좌익 노선으로 가면 정권교체 의미 없어'
(프) 최근 봉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인데요, 한말씀 해주신다면?
(장) 참 한심한 노릇이죠. 애국시민들이 애국운동을 하는 건 적화통일을 저지하고 애국우파 정권을 출범시키기 위한 것이지, 이명박이나 박근혜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힘을 합쳐서 정권교체를 위해 매진해도 모자랄 판국에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걸 보니 참 답답합니다.
거기다가 최근 한나라당이 대북정책 수정을 운운하며 좌파적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더욱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친북좌익 노선으로 변모한 한나라당이라면 정권교체에 성공한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미국 의회 인맥 총동원해 미군철수 저지
(프) 1970년대에 의원외교를 통해 미군철수를 저지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신다면?
(장) 1970년 어느날,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 주한미군이 조금씩 철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미군부대에서 병력이 들어오고 나갈때의 이삿짐 반출입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사업을 하던 한 예비역 인사로부터 구체적인 정보를 얻어 확인한 결과, 주한미군이 극비리에 감축도고 있으며 그때까지 총 7,000명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육사 7기 동기였던 정래혁 당시 국방부장관을 급히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정보 자체가 너무 막연했기에 정 장관은 끝내 보고하지 못했고, 내가 직접 보고를 하기로 결심하고 박 대통령을 찾아가서 가세한 경위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당신이 알아냈으니 책임지고 해결하시오’라는 특명을 내리시더군요. 그래서 나는 미국 의회를 움직여서 의원외교를 통해 해결해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1970년 8월 초순에 극비리에 출국했고, 미국 도착과 동시에 절친한 사이였던 칼 앨버트 민주당 원내총무를 만났습니다.
그러자 앨버트 원내총무는 ‘미군 주둔의 상징성 자체가 전쟁억지력을 가지는 것이지 병력의 많고 적음은 큰 의미가 없다’는 논리로 나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울진-삼척에 무장공비가 침입할 정도로 안보위협이 심각한 대한민국인데 남의 나라 일이라고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이냐’며 항의했고 ‘당신들은 한국이 진정한 의회민주주의국가가 되기를 바라겠지만 너무 자기위주의 상식선에서 우리를 보고 있다’고 반론했습니다.
앨버트 총무는 내 열변에 결국 설득당했고, 하원 중진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만나도록 해줄테니 지금 한 것처럼 그대로 하면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제럴드 R. 포드를 비롯해 E. 로스 아더, 윌리엄 S. 브룸필드, 리처드 T. 해머, 칼 앨버트 등 15명을 만났고, 그들은 모두 주한미군 철수반대 건의서에 사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원 설득에 성공한 나는 상원 설득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미세스 센너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분은 공산화 직전 중국에 주둔했던 미국공군 사령관 센너트 장군의 부인으로, 나와 안면이 있었습니다. 미세스 센너트의 도움 덕분에 나는 상원 주요 인사들을 접촉하는 데 성공했고, 모두 설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군철수는 저지됐습니다.
농림부장관 시절 ‘장경순 공법’ 착안
(프) 농림부장관을 지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 1959년에 내가 준장으로 영천에 있는 정보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때 경주 불국사를 지프차로 올라간 적이 있는데, 군데군데 흘러내린 토사 때문에 길이 끊겨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그때 ‘딱 5년만 농림부장관 해서 저 산을 푸르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혁명 이후였던 1961년에 내가 정말로 농림부장관에 임명됐습니다. 가장 먼저 시도한 농정과제는 산림녹화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사방사업 할 땅에 20*20*20cm 깊이로 구덩이를 파서 논흙을 채우고 풀씨, 싸리씨, 아카이사씨 등을 파종하는 ‘장경순 공법’을 착안해서 37만 7,000정보 가운데 27만 정보의 녹화사업을 사업 첫해인 1962년도에 해냈습니다.
(프) 우파적 시각에서 김구 선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장) 대단히 좋은 질문입니다. 그분의 독립운동 업적과 민족을 위한 열정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말년에 평양을 방문한 것은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만 당했다는 점에서 그분의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애국심은 있었으나 좀 순진하신 면이 있었죠.
(프) 귀한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프리존에서 활동하는 네티즌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주년 기자 (daniel@freezonenews.com)
*위 기사의 출처는 인터넷 프리존뉴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