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9 선언 20년-노태우 육성 회고록(2)/서울 올림픽 秘話

서울 올림픽 성공이 동구 공산권 붕괴의 기폭제였다.
2. 국가대전략-서울올림픽 秘話

원조 주고도 미움받은 美國

<올림픽은 내 재임 중 가장 신경을 썼던 여러 가지 정책 중 북방외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의 북방정책은 그 기본구상이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6·23 선언이 발표됐을 때 軍에 있던 나는 국가안보에 관여하는 입장에서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곤 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총체적인 국력에서는 우리가 북한에 뒤졌다. 면적은 비슷하지만 인구는 우리가 많고, 공산주의보다는 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경제가 발전되는 속도가 더 빠르니 우리가 열심히 하면 1960년대 말쯤에는 남북한 국력(國力)에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갖기도 했다.

나는 이런 점에서 남한의 수준을 서독(西獨)처럼 올려놓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급선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비경쟁은 더욱 심해져 북쪽에서는 4대 군사노선이라는 것을 내걸고 총체적인 국력의 격차를 우리보다 더 넓히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 군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朴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대 초 혼란의 와중에 보안사령관에 취임하게 됐다>

1973년에 발표된 6·23 선언은 「우리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는 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국가들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한다」는 내용이었다. 학자들간에는 이 선언을 북방외교의 태동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이 적극적으로 북방외교 정책을 추진할 대내외적 여건이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이 계속된다.

<나는 생각했다. 7·4 공동성명, 6·23 선언이 있었지만 남북한 관계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판문점에서 양쪽 대표들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도 평행선만 달릴 뿐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주변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유엔에서의 표를 압도적으로 많이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애는 썼지만 이것을 못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제3세계 국가들, 특히 아시아·아프리카의 비동맹국들은 대부분 저개발국들이었기 때문에 물자가 풍부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진영에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서방측 원조방법에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분석을 해 보니 이 사람들이 원조를 하면서 물건을 주면 상대방이 고맙다고 느ː途?마음도 줘야 하는데, 물건만 던져주고 마음은 주질 않았다. 도와주는 방법이 졸렬했던 것이다. 이 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金日成이었다. 金日成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적은 비용으로 저개발국가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사로잡았다.

『북한을 양파껍질 벗기듯 벗겨 나가자』

그러던 것이 내가 보안사령관을 맡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가 좋다 해서 서방을 차버리고 공산주의쪽에 접근해 한 속(屬)이 되고 보니 사회를 뒤집어놓고 국가를 전복시키고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들 제3세계의 기성세대들이 「공산주의 하면 사람도 죽고 나라도 뺏긴다」고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특히 남북한 대치상태에 대해서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썼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생각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구사했던 이 전략은 「멀리 있는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힘을 얻은 뒤에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해 때려 부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전략을 남북한 관계에 원용(援用)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북한의 문이 안 열리니 저 먼 데로 돌자고 판단한 것이다.

『제1차로 비동맹국, 그 다음에 북한과 관계가 있는 나라들, 즉 동구권, 소련과 중국까지 우리가 친밀해지자』고 작정했다. 어차피 남북통일이라는 것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개방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나의 통일에 대한 기본개념이었다.

『그러니 (북한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저 둘레서부터 벗겨 나가자. 그래서 완전개방이라는 여건만 되면 통일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을 피하고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좋은 방법이다』

나의 북방정책을 간단히 정리하면 당면목표는 통일이지만, 최종목표는 우리의 생활 문화권을 북방으로까지 넓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같은 구상을 내 나름대로 현실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절호의 기회가 서울올림픽이었다. 나의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고 해야 할지, 우리 외교관들이 비동맹국들을 열심히 껴안은 결과 金日成에게 갔던 표가 우리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힘이 되어 1981년도에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6共을 출범시키면서 민족의 자존(自尊)을 특히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내가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한 것이 바로 자주(自主)외교였다.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남의 눈치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하고 자문(自問)하곤 했다. 북방외교에 내재되어 있는 나의 기본철학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우리 스스로가 자주권을 갖는 외교는 당시만 해도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만했다>

이어서 盧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게 된 과정과 배경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 한 표밖에 없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기 반년쯤 전인 그해 3월, 올림픽 관계 장관 회의가 열렸다. 내가 예편하기 전이었다. 체육부가 없을 때여서 문교부장관이 올림픽 주무 장관을 맡고 외무부장관, 안기부장 등이 관계 장관으로 꼽혔다. 朴대통령 시절인 1979년 9월19일에 정부가 유치키로 결정한 뒤 1981년 2월16일에 유치키로 결정한 뒤 1981년 2월16일에 유치신청을 끝낸 올림픽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회의의 주제였다. 개최 결정 6개월을 남겨 놓고 관계 장관들이 모여서 유치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그런데 결론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유치할 수도 없고, 유치한다 해도 그에 필요한 엄청난 재원을 어디서 조달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맡고 있던 김택수(金澤壽)씨는 이런 말을 했다.
『IOC 멤버는 모두 82명인데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하려면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위원장이 사회를 맡게 되므로 과반수는 41명이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표는 내 표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그렇다 해도 우리가 올림픽 유치를 취소하거나 반납하지는 말자. 이 티켓을 가지고 있다가 1986년도 아시안게임 유치를 결정하는 때에 일본에게 양보해주는 대신 일본이 우리의 아시안게임 유치를 도와줄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안기부장(兪學聖), 외무부장관(盧信永) 등이 『너무 한심하다. 우리가 한 표라니 무슨 말이냐. 노력도 안 해보고 백기(白旗)를 드는 것은 안된다』해서 상의한 끝에 IOC 위원이 있는 외국 공관에 전부 훈령을 내렸다. 『로비를 하라. IOC 위원들이 우리를 지원하도록 활동하라』는 강한 훈령을 내렸다.

내가 1981년 7월15일에 군복을 버고 외교·안보담당인 제2정무장관을 했을 때였다. 정무장관실이 지금은 헐린 중앙청내 외무장관실과 붙어 있었다. 나는 그간의 사정을 잘 모를 때였는데 9월 초에 노재원(盧載源) 외교안보연구원장(후에 외무부차관·초대 중국 대사)이 내 방엘 찾아왔다. 그는 상당히 흥분해서 『장관님,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올림픽을 할 겁니까, 안할 겁니까』하고 말을 꺼냈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외무부를 통해 여러 나라에 훈령을 내렸는데, 그 결과가 지금 들어왔습니다. 협조 가능한 나라가 한 20개국 되는데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하는 얘기였다. 과반수의 절반은 확보한 셈이다. 그는
『처음부터 백기(白旗)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지더라도 일본과 아슬아슬하게 지면 체면이 서지만, 압도적으로 지면 체면이 뭐가 됩니까. 아시안게임에도 영향이 있고, 우리 국정(國政)에도 영향이 있으니 이걸 하든 안하든 결말을 내야 되겠습니다』하고 열을 올렸다. 나는 비동맹국 사람들을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던 오래 전부터의 지론을 생각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내게 그 성과를 알려주던 외교관들의 모습도 떠올렸다.

나는 곧바로 全斗煥 대통령에게 『올림픽은 꼭 유치해야 하므로 대통령께서 결심해 주십시오』하고 건의서를 썼다. 그때가 9월 초였는데, 건의서를 올린 바로 다음날 아침에 全대통령이 관계 장관들을 소집했다. 그래서 그날 회의에서 유치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고, 그 책임자로 나를 선임한 것이다. 나는 비동맹국들에게 기울인 노력이 이렇게 성과를 올리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 우리 역량을 총집중하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에게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한다』는 식으로 나자빠져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이었는지 일본은 프레젠테이션이다 뭐다 하나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형도 만들고 프레젠테이션 준비도 했다. 심지어 스튜어디스와 미스 코리아들까지 동원해싸. 비동맹국들을 중심으로 IOC 위원들에게 유치홍보를 했다>

『전쟁 위험이 있기에 평화의 올림픽을 해야』

盧 전 대통령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일본은 아무 준비도 안한 채 바덴바덴에 왔고, 우리는 상상치도 못할 준비를 해서 갔어요. 미스 코리아와 스튜어디스들까지 동원해 IOC 위원들 손을 잡고 안내하니까 우리쪽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당시 외국에서는 『한국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화약고(火藥庫)라는 표현도 있었다. 『아시아의 화약고에서 올림픽을 해서 되겠느냐』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다. 우리는 이에 대응해 거꾸로 『맞다 화약고다. 때문에 화약고에 전쟁의 불을 붙이지 않고 오히려 평화를 심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올림픽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우리는 또 『올림픽은 선진국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된다. 개발도상국에서도 열려야 한다』면서 비동맹국 표를 공략했다. 이 두 가지 논리에 비동맹국을 중심으로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리가 이처럼 집중적으로 활동한 결과 52대 27, 일본에 압도적인 표차로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우리 북방정책의 기본전략, 기본철학을 구상했던 시발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당시 올림픽 유치에 표를 준 나라들은 주로 비동맹국이었고, 그 다음이 서방의 자유진영 국가들이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우리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북한이 서울올림픽을 격렬하게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뒤에도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에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서울올림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억지 논리를 펴대며 방해공작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는 비동맹국들을 1차적으로 안았으니까 이제는 동구권도 안을 수 있다며 동구권을 겨냥하자고 했다. 원래 자유진영은 스포츠와 정치가 분리되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이것이 분리가 안되고 모두가 정치에 귀결된다. 때문에 그들을 올림픽에 참여하도록 유치한다는 자체가 정치적으로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는 전제를 세웠다. 나는 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서 동구권을 참가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비롯해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협력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포츠를 중심으로 스폰서를 하는 기업들도 우리를 많이 도왔다. 예를 들어 독일의 유명한 스포츠 메이커인 아디다스社가 IOC의 스폰서를 맡았는데, 이 회사의 다슬러 회장은 동구권의 여러 지도급 인사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사람들의 협력을 얻고 해서 그 높은 벽을 넘었던 것이다>

「북한 개방=통일」이란 공식

여기까지 육성증언을 마친 盧대통령은 올림픽 유치에 대한 배경설명으로 화제를 돌렸다.

『내가 보안사령관 시절에 외교관이 20∼30명이 바뀌었는데 (그들이 부임하기 전에)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요. 보안사령부에 와서 보안교육도 받고. 그때가 계엄령하였거든. 그때만 해도 김재규(金載圭)가 죽고 해서 안기부의 역할이 좀 약했어요. 보안사 역할이 강했다고. 그때 (외교관들이) 교육받으러 왔을 때 내가 뭘 강조했느냐.
「여러분이 나가서 할 일은 훌렁 벗어라. 훌렁 벗고 (현지 사람들과) 얼굴을 부비고 껴안고 뒹굴어라. 우리도 이보다 더 어려울 때도 있었다. 우리도 이렇게 하니까 살게 되더라. 우리가 겪은 경험을 함께 나누자. 이런 식으로 정을 주고 안고 뒹굴면 우리에게 올 것이다」이것을 강조했거든.

그리고 진척되는 상황을 나에게 연락해 달라고 했어요. 두어 달쯤 되니까 연락이 와요. 어떤 대사는 수지침을 배워서 주재국 사람들이 말라리아, 소화불량 걸리면 수지침을 놔주었어요. 이렇게 넥타이 풀고 몸을 던지니까 비동맹국 표가 우리 편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북방문제도 그래. 판문점에서 (남북대화를) 수십 년을 해도 안 되거든. 그래서 방법을 바꿔야 한다, 북한을 통일하는 개념은 개방이다, 어떤 공산주의 국가도 개방만 되면 변한다. 그래서 멀리 돌자.

첫째는 비동맹국이다. 그 다음이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이다. 마지막이 중국이다. 이렇게 전략 개념을 세워서 가능성의 길을 닦고 연계를 시킨 것이 올림픽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올림픽만 준비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북방정책, 통일정책과) 다 같이 했다고요.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요. 그중 한 분이 고인(故人)이 된 다슬러 회장이야. 이 사람이 내게 모든 협력을 아끼지 않았어요. 「당신 소련에 가서 스포츠 장관 만나서 이것을 좀 해달라, 동구권 가서 좀 해달라」하면 다 해줬어요. 북한이 필사적으로 방해했잖아요. 처음에는 살기가 있었다고요. 북한이 하도 드세게 나오니까 나를 만나주지도 않아요. 소련 체육상이 북한 눈치 보느라고 비밀리에 간첩 만나듯이 나와 만나고 그랬다고』

서울올림픽이 동구권 붕괴시켰다

盧 전 대통령은 다시 자료를 꺼내 육성증언을 시작했다.

<올림픽 추진과정에서는 우여곡절도 많았고 무산될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동구권을 열심히 회유하느라 애쓰는 중에 제일 믿었던 미국쪽에서 문제가 튀어나왔다. 『서울올림픽 안된다』라고 LA타임스, 뉴욕타임스 등이 주장하고, 상원의원들은 의결까지 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 일로 굉장한 고통을 받았다. IOC 본부 로잔느에서도 집행위원들이 『정말 서울에서 올림픽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장소를 바꿔야 하는가』하고 쑥덕거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그 어려운 벽을 필사적으로 뛰어 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盧 전 대통령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만약 IOC 집행위원회가 개최지를 변경하면 잠실 메인스타디움 한 가운데 사마란치 위원장의 무덤을 만들고, 나머지 81명의 IOC 위원 무덤을 만들어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겠다. 그 비석에 무슨 내용을 새기려 했냐면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을 망친 장본인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이곳에 묻혀 있노라」하는 것을 보면서 모든 관광객들이 침을 뱉게 하겠다고 독설을 했습니다. 이 내용을 다슬러 아디다스 회장에게 말하면서 「사마란치 위원장에게 그대로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올림픽 유치는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보면 동서(東西)의 벽을 그때부터 허물기 시작한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아온 사회주의 국가들이 올림픽에 참여해서는 현실이 1백80도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방의 최전선(最前線)에 놓여 있는 「형편없는 미국의 앞잡이 나라」라고 생각했던 한국이 실제로는 자신들이 듣고 배운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충격이 동구(東歐)가 붕괴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올림픽은 나의 북방정책에 직접적으로 연관되기도 하지만 東西화해, 동구권 붕괴 등에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토로이카와 함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엇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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