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씨왕조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차례의 경제 계획을 실시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경제파탄이 자신들의 과오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answers.com
1945년 한반도가 분단된 후 북한의 신의주에서는 동중학교를 비롯한 7개 학교의 학생 3천명이 소련군이 약탈해간 ‘쌀을 돌려 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가로 나와 행진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이에 소련군이 전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막고 기관총 사격을 가해 23명을 살해하고 700명이 부상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배가 고파 식량을 달라는 학생들에게 식량대신 총탄을 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한반도의 38선 이북을 점령했던 20만 명의 소련 공산군은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북한 주민들의 양식을 강탈해 조달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946년 소련군이 강탈해 간 쌀은 1백 40만 석(20만 톤)이나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군은 식량만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윤상환저, 폭정의 대해부-김씨왕조의 진상, 도서출판 메드라인)
그들은 청진·성진 등의 지역에서 발전소설비, 제철소의 기계설비, 공작기계, 각종 원자재를 강탈해갔다. 이에 분노한 쌍포인민위원장 김채준은 “기계를 빼앗아 가려거든 나를 죽여 달라”고 항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소련군을 앞세워 20일 만에 끝낸 북한의 토지개혁
이처럼 스스로를 조선해방군이라고 자처했던 소련군은 쌀을 빼앗아 북한주민을 굶겨 죽이고 생산 공장의 기계를 탈취해 해방 후 초기 북한 경제를 마비시켰다. 그러던 중 1946년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건설하겠다는 스탈린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북한은 급속도로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1946년 2월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소련군 점령사령부는 가장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이어 3월에 토지개혁법이 공포되면서 사원을 비롯한 개인소유의 농지를 모두 몰수해 과도적인 조치에 따라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분배했다. 이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소련점령군의 무장군인을 앞세워 불과 20일 만에 끝냈다.
이어 8월에는 산업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제정해 일본인, 조선인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던 1,034개의 산업·공장·광산·철도·수송통신·금융기관·문화기관 등을 국유화했다.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단행한 소련군과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1947년부터 적극적으로 스탈린식 사회주의 개조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소련군과 인민위원회는 1년 경제계획(47~48년)을 세우고 생활필수품과 식량생산을 위해 증산 돌격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1949년부터 스탈린은 북한을 극동의 위성국으로 건설하기 위해 본격적인 원조를 시작했다. 그래서 6.25전쟁 이전까지 식량생산은 3백만 톤, 공업생산은 일제 강점기 수준에 약간 못 미치는 90%정도가 회복됐다.
중공업 우선 정책을 반대해 숙청당한 최창익 부수상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이 무력적화통일의 야심으로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모든 경제적인 성과는 파괴됐다. 3년에 걸친 전쟁을 통해 8,700개의 공장을 비롯한 학교·사원·공공시설 등은 모두 파괴되고 농경지의 41%가 황폐화되었으며, 도시나 농촌 등 모든 생활터전이 폐허화되는 참화를 입었다.
1953년 7월 전쟁의 총소리는 멈추었지만, 남북한 동포 640만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은 초토화된 국토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노동력까지 빼앗아 가고 말았다. 그리고 잿더미가 된 참혹한 전쟁의 폐허 위에서 남북한은 제기를 시작하게 된다. 특히 북한은 전쟁비용의 대부분을 소련으로부터 빌렸던 것이기에 이 빚을 갚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북한은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경제재건 3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주민들이 절망적인 빈곤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경제건설의 중점을 군사력 건설에 두었다. 이에 최창익 부수상은 “기계에서는 쌀이 나오지 않는다”며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정책에 반대했습니다. 이에 김일성은 그를 수정주의자로 낙인찍어 숙청했다.
김일성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57년~1961년 기간 동안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세웠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스탈린식 강제 대중동원으로 ‘천리마운동’이라는 생산독려 운동을 추진했는데 이는 1958년 중국의 모택동이 추진했던 ‘대약진운동’과 유사한 것이었다.
실패한 ‘대약진운동’을 모방한 북한의 ‘천리마운동’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에서 철강생산량 2억 톤과 곡물생산량 5억 톤을 생산해 급진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인민공사’를 만들어 야심에 찬 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일례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당시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를 쫓기위한 모택동의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 소름이 끼친다.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문제는 경제에 문외한인 김일성이 모택동의 야심 찬 생산운동을 모방하면 경제건설의 목표가 쉽게 달성될 것으로 믿고 천리마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그리고 기계와 장비도 없이 단순히 노동력만으로 경제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커다란 오판이었다. 결국 천리마운동은 집단이익을 위해 주민들의 희생만 강요한 운동이라는 오명을 낳았다.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끝으로 끝날 것 같았던 북한의 경제 실패는 이후 1961년~1967년 사이 진행된 제1차 7개년 계획에서 또 다시 나타났다. 19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이후 이념대립을 계속해왔던 중국과 소련은 이 시기 적대적인 관계로까지 대립을 했다.
그 결과 소련은 대(對)중국원조협정을 파기시켰으며 69년에는 국경에서 무력충돌까지 빚었다. 이에 북한의 김일성은 어느 편에 서야 되나 고민하다 중국과 소련간의 등거리 외교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등거리 외교였지만 김일성은 내심 중국 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김일성을 비판하게 되면서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게 됐다. 그 결과 북한은 중소양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지 못하게 됐다.
기대했던 경제원조가 불가능하게 되자 제1차 7개년 계획의 목표달성은 실패로 이어졌고, 북한은 궁여지책으로 자력갱생을 경제 건설 노선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무런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다. 전군의 현대화를 위한 첨단무기 개발은 물론 부족한 기계설비와 원재료를 보충하는 데도 실패했으며, 국내자원개발에 있어서도 노후화된 채광 설비를 개선할 수 없어 철광과 석탄 생산도 목표달성에 실패했다.
김씨왕조, 1977년 대외부채만 30억 달러 달해
이와 함께 에너지 부족으로 생산 공장의 가동에 차질을 가져와 기간을 3년씩이나 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했던 경제 목표를 전혀 달성할 수 없었다. 제1차 7개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김일성은 ▲중노동과 경노동의 차이해소 ▲농업노동과 공업노동의 차이해소 ▲여성의 가사노동 해방 등을 목표로 한 제1차 6개년 계획(1971~1976)을 내세우게 된다.
이 계획의 실행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대중동원을 위한 ‘백일전투’라는 슬로건이었다. 자본과 기술이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경제계획수행에 대중동원 이외에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놓은 궁여지책이었다. 이 계획기간에 7·4남북공동선언(1972년)이 합의되면서 남북고위관리가 남과 북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북한은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보고 초조해진 나머지 자본주의국가들로부터 플랜트 수입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북한 수출품의 주종인 아연 등의 국제가격이 폭락해 자금 조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중동의 오일쇼크로 극도의 에너지 부족과 원자재가격의 상승 등 불리한 여건이 조성되면서 북한은 외화부족으로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외채상환과 수입대금의 지불이 곤란하게 되어 국제사회의 신용을 잃게 됐다. 1975년 북한은 5억 5천만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1977년에 이르러서는 대외부채가 30억 달러에 달했다.
김씨왕조, 3번에 걸친 북한경제 재건 모두 실패
그러나 북한은 수출산업 육성 실패로 외화획득 방법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김일성은 1977년 신년사를 통해 철강, 시멘트 등의 생산목표는 달성되지 못했으며, 수송부문의 부진 등으로 6개년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서당 개 3년 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김씨왕조는 풍월은커녕 3번의 경제 계획을 연달아 실패했다.
그러나 김씨 왕조는 1978년부터 1984년 기간 동안 또 다시 제2차 7개년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서 수립된 계획으로 목표는 경제의 자립 및 과학화, 운송부문의 현대화와 더불어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인민들의 소득을 1.9배로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서 농산물 생산목표는 1천만 톤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임야의 개간과 간첩사업 등을 통해 경지면적의 확대를 추진했다. 이 계획의 슬로건은 ‘속도전’이었는데 이는 목표의 초과달성을 위한 것으로 김정일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은 김일성의 70세를 기념하기 위해 거액을 투입해 170미터 높이의 주체사상탑을 비롯한 초대형 건조물을 건립하는 등 비효율적인 부문에 자금을 집중함으로써 경제적 곤란이 더욱 가중됐다. 즉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업에 비용을 들인 것이다.
이 시기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은 외자도입을 위한 ‘합영법’의 제정이다. 이 법안은 1984년 공포됐으나 자본도입은커녕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결국 북한은 1985년 2월에 이 계획의 성과 발표도 없이 제2차 7개년 계획의 종료를 선언했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북한 경제에 치명타 날려
사정이 이쯤 되면 포기할 줄 알았던 김씨왕조.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김씨 왕조는 또 다시 제3차 7개년 계획(1987~1993)을 세워 인민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 계획은 경제의 주체화, 현대화 그리고 과학화를 계속 추진한다는 것을 과제로 정한 것으로 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고, 중국의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본격화한 시기에 수립됐다.
이 당시 국제정세는 사회주의를 고집하는 북한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되면서 자유화의 시대가 전개됐고, 1991년에는 소련도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이 같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북한의 경제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물론 이 시기에 수립한 7개년 경제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대소무역의 격감과 무역결제방식의 변경에 있었다. 과거에는 우호가격에 의한 무역방식으로 거래를 해오다가 소련이 개방경제가 되면서 경화를 통한 결제방식으로 바뀌면서 외화부족으로 허덕이는 북한으로서는 소련과의 무역거래를 계속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제3차 7개년 계획은 1993년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종료하게 된다.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의 신년사에서 북한 경제상황의 악화를 보고했던 강성산 수상이 전력·철강·화학섬유 그리고 농산물 생산의 부진을 시인하고 3차 7개년 계획의 3년 연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씨왕조는 이 같은 연장계획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김정일, 등소평의 개혁·개방 ‘수정주의’로 폄하
이렇게 1961년 이래 한 번도 북한의 계획경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이후 북한의 경제악화는 더욱 심화되어 극도의 곤란에 직면하게 됐고, 주민들의 생활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83년 6월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정일은 6월 15일 노동당중앙위원회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에 대한 견학결과 보고를 통해 “중국공산당에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완전히 없게 됐다. 오직 있는 것은 수정주의 뿐”이라고 혹평했다. 김정일의 보고내용을 전해들은 중국의 등소평은 격노했다.
이유는 혁명 활동에서 비교상대도 되지 않는 김정일이 자신을 수정주의자로 매도해 중국 공산당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켰기 때문이었다. 등소평은 과거 수차례에 걸쳐 김씨왕조에게 경직된 북한의 경제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지난 1993년 5월 30일 등소평은 산동성 청도에서 북한의 강성산 총리와 가진 회담에서 “북한 경제가 발전하지 못하면 7, 8년 후에는 남한에 흡수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등소평은 또 “경제가 파탄나면 공산당은 집권할 자격이 없다”며 북한의 김씨왕조에게 개혁·개방을 권유했다.
등소평의 충고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지난 1994년 7월 김일성의 장례의식 조문사절로 장관근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장을 보내 상주인 김정일에게 또 다시 경제개혁을 권고했다.
김정일, 김일성 사후 권좌에 앉아 사리사욕만 챙겨
이와 함께 등소평은 자신의 비서인 왕서림을 북한에 보내 △경제발전과 국가건설 △조선반도의 비핵화 △휴전선에서의 군사 활동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대북정책 6개항을 김정일에게 전달했다.(1994년 7월 22일자 홍콩신보) 이 같은 중국 지도자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경제 개혁이 사회주의 왕조체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한 김정일은 자신의 논문을 통해 북한의 개방을 반대했다.
이와 관련 노동신문은 지난 1994년 11월 1일자 보도에서 김정일의 논문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동구권사회주의의 붕괴를 비난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으로서 사회주의의 실패는 아니고, 사회주의를 변질시킨 수정주의자들의 파산을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수정주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가슴 아픈 곡절을 겪고 있지만, 과학성 진리성에 의해 반드시 재생하여 최후의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
이처럼 북한 주민을 살리기 위한 개혁·개방을 말도 안 되는 수정주의로 치부해버린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권좌에 앉으면서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악의 근원’ 김정일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제창한 사업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다. 이 운동은 아사지경에 빠진 북한 인민들의 동요를 막고 체제 존속을 위한 대중동원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성격상 경제운동이 아니라 정치운동이었다. 그러나 정치운동으로 피폐한 북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위기와 빈곤이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경제, 현재보다 더 심한 나락으로 빠져들 것
중국의 등소평은 하얀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 했다. 이 말은 자본주의 돈이라도 중국에 들어와 중국 경제를 살찌우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뜻이다. 등소평주의자들은 모택동의 절대평등주의를 반대한다. 이유는 현대사회의 운영에는 조직의 관리자와 고도의 기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에는 차이가 있고 수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인식했는지 북한은 지난 2002년 7월 배급제 폐지, 물가·임금·환율의 현실화 및 기업의 자율권 확대 등을 골자로 한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추진했다.
북한이 이처럼 경제개혁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난으로 인해 공식 배급망이 사실상 붕괴되는 등 그동안 고수해온 ‘우리식 사회주의’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가격 및 임금체제의 개혁, 화폐경제 체제의 정착, 경제주체의 책임제 강화 등을 통해 사회전반에 경쟁체제의 활성화를 유도, 파탄상태에 이른 경제를 회생시켜 보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여전히 핵 폭탄을 부둥켜안고 경제회생을 해보겠다는 심사다. 이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김정일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핵을 포기하고 문을 여는 것이다. 이 선택마저 김정일이 마다한다면 북한 경제는 지금보다 더 심한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정리/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위 기사의 출처는 인터넷 프리존뉴스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