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대통령은 李承晩의 對美 자주, 金庾信의 對唐 자주 路線, 그 연장선에서 金正日을 상대해야 한다
許文道 前 통일원 장관 (asadalmd@hanmail.net)
실패한 통일전쟁 6·25
6·25는 실패한 통일전쟁이었다. 이같은 시각에서 50주년을 맞아 6·25를 들여다본다. 전문학자가 아닌 보통 독서인의 경우, 너나 할 것 없이 6·25를 객관화하기는 상당한 기간 어려웠을 것이다. 6·25는 남쪽의 우리 모두가 당한 전쟁이고, 압도당한 전쟁이다. 적어도 개인의 心像(심상)체험에서 그렇다. 그을리고 폭파당한 건물잔해, 폐허, 전망없는 피난행렬, 폭격·포격의 천지를 찢는 굉음, 신경을 쪼아대는 따발총 소리, 참혹한 살상과 떼죽음의 현장, 하늘을 긁는 함포의 비상음, 하꼬방, 넝마, 허기, 꿀꿀이 죽, 할로 추잉 껌….
그러나 외면하고 싶은 생각마저 풍화될 정도로 시간이 갔어도 6·25가 남긴 남북간의 무력대결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전쟁만큼 다음 시대를 향한 역사과제를 압축해서 끌어안고 있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6·25의 正視(정시), 객관화는 오늘도 교훈을 주고, 무감각해져 있는 역사숙제 앞으로 우리를 붙들어 앉힐 것이다.
6·25 전쟁의 기원을 두고서는 이른바 수정주의자들이 학문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선전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뭐라고(북침이라는 등) 떠들었든지 간에, 지금은 金日成이 미리 준비하여 공산대국인 소련과 중국의 지원하에 일으킨 전쟁이라는 데 異論(이론)이 없는 것 같다.
6·25는 우선 金日成의 통일전쟁이었다
한국 쪽에는 대응火器조차 없는 T34 전차를 앞세워,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시키는 미니 전격전을 벌일 만큼 그 준비는 좋았다. 그러나 金日成은 미국의 개입을 예상치 못했고, 그 미국은 중공의 개입을 예상치 못했다. 전쟁은 밑에다 불칼을 단 롤러로 남북 3000리를 1년 남짓한 사이에 한두 번 아래위로 밀어대는 기동전이었고, 휴전 얘기가 나오고서부터 2년간은 전선이 38선 주변에 교착된, 주로 陣地戰(진지전)이었다.
金日成의 통일전쟁의 결과는 통일이 아니라 전쟁前 원상태 부근에의 분단 회귀였고, 민족성원 500만(남한 200만 - 전사 14만7000 등 군·민 사상자, 실종자 등 취합, 북한 300만 - 전사 52만 등 … 「한국전쟁」 김학준)의 손실로 나타났다. 가공할 전쟁범죄라 할 것이다.
1950년 10월 중공군의 개입은 대한민국이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일거에 앗아갔다. 50주년인 지금 상기해 본다. 대륙과의 관계조정, 결착 없이는 반도의 통일이나 아이덴티티 유지가 어려웠던 지정학적 숙명을 상도하게 된다.
美 국무부 엘리트들의 어설픈 전략관리
중공군의 침략으로 서울 아래로까지 내려갔던 전선은 1951년 3월 말쯤에는 다시 38선 주변으로 올라가 교착하기 시작한다. 중공이 반도의 전쟁에 뛰어든 순간부터 미국이 자기 확신의 부족 때문이었는지, 전력에 별 도움이 안되는데도 한국전에 끌어들였던 영국 등의 참전국들은 한국의 통일전쟁을 위해서는 장애가 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지극히 밀접한 관계이면서 강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한 영국이,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는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정면이 소련 앞에 허술한 것을 우려하여 미국이 중공과의 전쟁에 발이 묶이는 것을 저지하려 들었던 것이다.
어느새 국제사회는 휴전론이 대세가 되어 버렸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는 중공과의 전면전도 각오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李承晩 대통령과 한국 정부한테는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분단의 원점회귀 수준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태도는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행중인 전쟁에 패배하지 않으려면 적의 병참원을 봉쇄·파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UN군사령관 맥아더의 이같은 주장은 對중공 확전론으로 치부되어 트루먼의 방침과 맞지 않는다고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를 전쟁목적으로부터 배제하는 명백한 표시였던 것이다.
미국은 중공의 UN 대표권 문제를 회피할 심산으로 휴전회담을 군인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휴전선 확정이나 포로교환 문제의 결론 수준은 회담 초기부터 떠올랐던 선인데 교섭에 2년 걸렸다. 교섭이 진행되던 2년 내내 고착된 전선에서 참호를 뺏고 뺏기는 陣地戰만 계속되었다. 공산군은 제공권·제해권을 뺏긴데다, 이 이유로 병참선을 유지하기 힘들어 궁지에 몰리고 있었으나 상대가 승리를 원치 않기 때문에 패배할 염려는 없는 것이었다. 마냥 버티었다.
이 얄궂은 2년간에 단장의 능선, 펀치 볼,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에서 수없이 산화한 젊은이들에게 세계전략을 관리한다는 美 국무부의 엘리트들은 어떤 上位가치를 부여할 것인가. 金日成의 오판을 부른 1950년 1월 애치슨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 제외」 언급과 함께 국무부 엘리트들의 어설픈 전략관리의 표본 같다 하겠다.
지금은 어떤가. 1993년 北이 NPT 탈퇴선언을 하고 나서, 국무부 엘리트들이 달려들어 제네바 합의라는 게 있었고 高價의 경수로를 지어 바치게 되어 있지만, 지금와서 北의 핵 의혹은 오히려 커져 있고(페리 보고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때는 없던 대양을 건너뛰는 핵탄두 운반 수단까지 北은 갖게 되고 말았다. 그동안 北에서 6·25가 한번 더 난 것 만큼이나 생겨난 수백만 餓死者(아사자)는 세계전략을 관리하는 국무부 엘리트들의 관심대상이 안된다는 건가(페리 보고서를 보라). 영웅적 외교 전략가는 발 붙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국군 통수권은 강압에 의해 넘어갔다
한국전쟁이 한국化되지 않았었다는 말은 이러하다. 즉 한 나라가 할 수 있는 의사표시가 전쟁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 한국전쟁은 대한민국의 땅 위에서 대한민국의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수많은 병사와 국민이 목숨을 바치면서도, 友軍과 함께 이기기도 하면서, 한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가의지를 표상할 수 없었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한국화 문제이다.
한국은 그동안 북한에 대화를 애걸해 왔지만, 한국이 한국 마음대로 交戰權(교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싶으면 그 순간에 북한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과 대화하려 들 것이다. 비록 핵이나 대륙간 미사일이 없다 해도 그럴 것이다. 이것이 전쟁의 의미 아니겠는가. 이 얘기가 전쟁을 일으키자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는 알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한국전쟁을 통해서 자기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던가. 무엇보다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총 한 방 쏠 수 없는 전쟁 수행능력의 절대적 결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국에다 손을 내밀면서 미국은 가차없이 大國의 논리부터 들이댔던 것 같다.
美 극동군사령관 맥아더가 戰線(전선) 시찰에 나선 것은 6월29일이었다. 이틀 전에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투입 결정이 있었다. 도쿄로부터 수원 비행장에 내린 맥아더를 이미 서울을 뒤로 한 李承晩 대통령, 美 무초 대사 등이 맞이했다. 일행은 미 극동군 전선지휘소가 자리잡았던 수원 농업시험장으로 향했다. 이 자리서 李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은 위급존망의 때를 맞게 되었다. 미국의 구체적 원조를 기대한다」고 인사했다. 이어서 참모총장인 蔡秉德(채병덕) 소장의 전황 브리핑이 있었는데 요령 부득으로 맥아더의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곧장 영등포 전선을 돌아보고 오후에 수원비행장을 떠나면서 맥아더는 李대통령에게 참모총장의 교체를 요청했다. 다음날로 蔡소장은 해임되고 미국 참모학교에 유학하고 갓 돌아온 丁一權(정일권)이 참모총장 자리에 앉는다.
對美(대미) 종속이라고 입질에 오르는 국군통수권의 유엔군(실제는 미군)에의 이전은, 흔히 막다른 골목에 몰린 李承晩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유엔군에 헌납한 것으로 막연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질은 美 행정부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밝혀놓은 연구가 있다. 고려대와 독일 뮌헨대학에서 공부하고 대전 한남대학교에 교수로 재직중에 일찍 타계한 고 梁大鉉(양대현) 박사의 주장이다. 그는 휴전회담 관련 연구인 「歷史의 證言」(형설출판사)에서 『미 행정부는 주한 美대사 무초를 통하여 모든 한국군에 대한 통수권을 「강탈적 방식」으로 대전에서 李承晩으로부터 빼앗아 미군에 이관시킴으로써…』라고 해 놓았다. 양 교수가 논거로 든 것은 ▲무초 대사의 증언 ▲美 대사관 일등서기관 해롤드 노블의 증언 ▲1950년 6월26일 트루먼 대통령이 張勉 駐美대사에게 한 이야기 등이다. 그 과정은 『美 행정부가 맥아더로 하여금 무초대사에게 公翰(공한)을 보내는 형식으로 李承晩 대통령에게 통수권 이양에 대한 승인회신 요청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신라 김유신 같은 기개와 전략이 필요했다
한국전쟁의 한국화의 문제를 앞에 하면, 아득히 거슬러올라가서 오늘날 한민족 성립의 모반을 만들어 낸 통일신라의 선조들이, 김춘추·김유신 체제가 새삼스럽게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의 對(대) 백제 통일전쟁. 신라는 세계제국 唐(당)과 동맹하고 있었다. 당은 蘇定方(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수륙 13万 대군을 거느리고 경기 남양만 앞의 덕적도로 왔다. 태종 김춘추는 대장군 김유신, 태자 법민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남양만-수원선의 동쪽인 南川停(이천)에 와 있었다. 태자 법민이 6월21일 병선 백척을 거느리고 덕적도로 가서 소정방을 만났다. 떠받드는 포즈도 취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사비성) 남쪽에서 羅唐 양군이 합류하는 작전기약을 소정방이 일방적으로 7월10일로 통고하지만, 작전회의가 있었을 것이다. 金庾信이 5만군을 거느리고 계백 장군과의 그 유명한 황산벌 싸움을 거쳐 소정방과 만나게 된 것은 약속에서 하루 늦은 7월11일이었다.
소정방은 대뜸 金庾信軍이 기약일에 뒤진 것을 이유로 신라 督軍(독군-김유신軍의 제2인자) 김문영을 軍門에서 목 베려 하였다. 史記(사기)에는 이것말고 다른 언급이 없지만, 대국의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소정방은 현지 소국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맥아더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한국에 와서 참모총장부터 갈고 통수권을 접수했던 일을 상기해 본다.
이에 대해 金庾信은 감연히 맞섰다.
「김유신이 여러 군사 앞에서 『대장군(소정방)이 황산의 싸움은 보지 못하고(단지) 기일에 뒤진 것을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唐군과 싸움을 결한 후에 백제를 파하겠다』면서 군문에서 큰 도끼를 집으니, 소정방의 右將(우장) 동보량이 발을 구르며 가로되 신라 군사가 장차 변하려 한다 하매, 소정방이 곧 김문영의 죄를 놓아 주었다」(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 실력에 뒷받침된 신라인 김유신의 기개와 지략, 전략적 주체의식은 1000년을 뛰어넘어서도 하나의 不動의 교훈이다.
唐이 어떤 나라였던가. 중국사상 최강의 세계제국이란 것이 史家들의 평인 것 같다. 당이 융성할 때는 그 위세가 파밀 고원 서쪽에까지 미쳤고, 이슬람과 유목의 諸(제)민족과 문화를 품에 안았다. 그 唐이 최고로 융성했던 시기는 『657년 서돌궐 제압에서 시작하여,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74년에 사산朝 페르시아의 망명왕자가 당에 내도한 무렵까지』(「유목민으로부터 본 세계사」, 杉山正明)로 하고 있다.
신라는 상대적으로는 오늘날의 미국 이상인 당제국의 바로 극성기에 당과 국익이 서로 충돌했으며, 그와 맞서 스스로의 의지를 실력으로 관철해 낸 것을 우리는 안다.
(통일 신라의 唐軍 축출전쟁, 670~676년).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자리에 당은 準 직할령 성격의 통치를 실시하려 들었다. 상위 동맹군인 당의 군대를 신라는 「형님, 형님」 하면서 반도에서 쫓아냈던 것이다. 신라 통일전쟁의 결정판은 唐과의 전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가 普佛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해 낸 것과 닮은 데가 있다. 프랑스는 독일통일을 견제했던 것이다.
신라는 얼마 안 있다가 唐제국의 책봉(冊封·중국이 종주국 입장에서 주변 국가 王에게 중국식 벼슬을 주는 것)체제 안에 스스로 들어가 다시 唐과의 외교관계를 수복해 냈다. 통일 신라는 참으로 만세에 통할 국가전략을 구사해 냈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상변혁을 싫어하게 마련인 주변대국의 의지를 꺾거나 조정할 수단 없이 통일은 어렵다는 것을 통일신라는 깨우쳐 준다.
통일신라에서 하나만 더 눈여겨보고 넘어갔으면 하는 데가 있다. 唐이 백제·고구려가 망한 땅을 신라에 넘기지 않고 깔고 앉으려 들자 신라는 반도에 있는 唐軍을 무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문무왕 11년(671) 6월, 신라는 부여 林川(임천)에서 唐軍 5300급을 베었는데 그 다음날 7월에 당시의 唐 현지 사령관 薛仁貴(설인귀)가 문무왕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 왔다.
唐에 대해 신라는 당당했다
당과 신라의 관계는 위대한 태종 선황제와 왕의 부친인 무열왕의 깊은 교감으로 이뤄져 麗濟(여제)를 함께 평정하였는데 왕이 어찌 天軍(당군)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투였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문무왕의 答書(답서) 속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무왕은 당군과의 공동작전에서 신라군의 전공과 군량미 공급 등 병참상의 기여를 낱낱이 적고 있다.
백제땅의 웅진도독부를 지키는 唐軍의 병참은 신라가 댔다. 표현은 다음과 같다.
『一萬의 漢兵이 4년 동안 신라에 衣食하였으니 인원(劉仁願 사령관) 이하 병사 모두가 皮骨(피골)은 비록 漢地(한지)에서 출생하였으나 血肉(혈육)은 모두 신라의 기른 바이다』(삼국사기 문무왕조)
신라의 당당함이 드러나 있지 않은가. 21세기의 오늘에 있어서도 일본은 동맹군인 駐日美軍(주일미군)의 주둔비를 거의 대주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을 향해 NO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 흔했던 미·일본간 무역마찰에서 일본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 있는가. 한국전쟁의 한국화 문제는 군사문제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신라는 평양 주변에 얼씬거린 唐軍에게도 군량미를 댔다. 그 옛날 적진을 뚫는 장거리 輜重(치중)·군수품은 극난했을 것이다. 신라인들이 통일을 위해 치른 코스트(비용)는 심대한 바가 있다. 문무왕의 편지는 적고 있다.
『남으로 웅진에 수송하고 북으로 평양에 공출하여 조그만 신라가 두 곳으로 이바지하기에 인력이 極疲(극피)하고 牛馬가 死盡(사진)하여 田作(전작·농사)이 때를 잃고 年穀(연곡)이 잘 되지 못하였으며, 저축한 倉穀(창곡)은 수송에 바닥이 나 신라의 백성들은 草根도 오히려 족하지 못한다』
아직 對唐 전쟁이 남아 있는 시점에서 「전쟁이 이미 9년을 거치어 인력이 脫盡(탈진, 다하여 스러짐)하였으되」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오늘날 어느새 우리 주변에 번져버린 통일은 돈 많이 드니까 미뤄 놓는 게 좋다고 하는 쫄아든 심보를 상기해 보라).
오늘을 살고 있는 韓민족의 창세기라 할 신라의 통일기는 한민족의 반도 아이덴티티의 존망의 위기이기도 했다. 세계 제왕 唐太宗(당태종)이 이미 그의 선배격인 漢武帝(한무제)가 반도를 중국 郡縣(군현)화했던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資治通鑑 641年조), 당은 백제·고구려를 공파하고서 곧장 중국의 군현화 작업에 착수했었다. 신라가 이를 저지한 것이다.
신라가 반도의 오늘에 이어진 한민족 아이덴티티의 터전을 지켜내고, 극성기의 세계제국 唐을 상대로 시민권을 확립해 낸 것이다. 당시 중국 대륙의 동서남북 인접지역에서 오직 신라만이 성공 사례였던 것의 의미는 크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주도권 잡은 李承晩
6·25가 남긴 한국전쟁의 한국화의 과제 앞에서 오늘 우리한테 통일신라보다 더한 교사가 있을까.
李承晩 대통령은 기회만 있으면 북진통일을 외쳤으니까, 한국전쟁의 한국化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총알 한 방 만들어 낼 수 없는 갖난 애기 같은 대한민국의 대통령한테 수단이 있을 수 없었다. 그 기회는 긍정의 형태가 아니라 부정의 형태로 왔다. 先知者的, 순교자적 지도자들이 흔히 사명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휴전을 통일기회의 소멸로 볼 수밖에 없는 李承晩 대통령은 온 국민들의 열화같은 휴전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한국군을 UN군 사령부로부터 빼내어 비록 집단자살이 될지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거듭 밝혔다.
한편에서 李대통령은 휴전회담의 포로교환 교섭이 자유·공산 兩진영의 이데올로기의 전장인 것에 눈이 가 있었다.
회담의 양측 대표가 군사분계선에 합의하여 조인 절차만 남겨놓고 있던 시점인 1953년 6월 17일, 李대통령은 全세계 앞에 카드를 제꼈다. 회담 양측간에 밀고 당기던 반공포로 2만6000명을 일방적으로, 기습적으로 석방해 버린 것이다.
자유라는 상징이 갖는 전략가치를 李대통령만큼 절묘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휴전을 빨리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세계의 頂上 아이젠 하워, 처칠, 毛澤東으로 하여금 李承晩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그들의 다급한 목표인 휴전을 파기할 가능성을 가졌음을 현실로서 절감케 해버렸다.
국면전환의 열쇠가 일거에 李承晩 손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이 순간 한국전쟁은 한번 한국化됐던 것이다. 당시 소련의 한 잡지가 反語的으로 그 정도를 일러주고 있다.
당당하게 받아낸 한미상호방위조약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서 지난 3년 동안은 도대체 李承晩이란 이름을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문제는 미군 사령관에 의해서만 지시되고 李承晩은 부산의 한 모퉁이 미군 병사의 뒤뜰 안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李承晩은 너무도 강대·강력하기 때문에 유엔군사령관이나 美대통령도 그리고 미국 의회도 그와 겨룰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꼴불견의 연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歷史의 證言」에서 재인용)
金日成과 중공군사령관 팽덕회가 美측에게 李대통령으로부터 휴전보장을 받아 내도록 요구해 왔다. 공산측까지 나서서 李承晩 대통령의 對美협상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것이다.
아이젠하워 美대통령이 워싱턴으로 李承晩 대통령을 초청했으나 시간이 없다고 거부했다. 미국은 대통령 특사를 서울로 보냈다. 월터 로버트슨 美대통령 특사는 6월26일부터 이후 보름 동안 매일 경무대로 출근하다시피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그동안 미국이 소극적이던 한미 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로 시작되는 전후 복구 원조개시, 20개 사단으로 한국군 증강 등의 틀을 잡게 된다. 전쟁기간중 몇 번이나 버릴 생각을 했던 한국한테, 쫓아낼 생각을 했던 李承晩한테 미국은 한국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7·27 휴전협정 조인이 있고 나서 일주일 만에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델레스 미 국무장관이 서울로 와 李대통령과 회담하고, 8월8일 변영태 외무와 더불어 한미 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李대통령은 이 만족을 성명으로 표시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
李承晩은 휴전의 묵인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맞바꾸어 놓았다. 이후의 경과를 보면 거인 李承晩은 전화에 휩쓸려 초토와 폐허만 남은 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울타리를 주문해다 쌓아 올려 번영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하겠다.
중국에는 우물물을 마실 때 우물 판 사람들의 勞苦(노고)를 한번쯤 생각해 봐야 물이 잘 넘어간다는 속언이 있다 한다.
6·25는 우리 심상의 풍경에서 내리는 눈처럼 멀어져 있다. 단장의 능선을 뛰었던 용사의 세대도 반쯤은 발이 저 세상에 가 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판도에서 밥술깨나 먹는 사람들은 6·25 반세기를 맞아 한번쯤 「우물 판 사람들」의 勞苦를 생각해 보지 않을 것인가. 두 사람의 巨人이 떠오른다. 한 사람은 부산 앞바다에 빠져가고 있던 대한민국을 기사회생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주재자 맥아더 원수, 한 사람은 全세계 모든 힘있는 거물들의 의표를 찌른 반공포로 석방으로 이후 대한민국의 방벽을 만든 李承晩, 이 두 사람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쓸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서울이 함락된 다음날인 6월29일 맥아더는 한강에서 400m 떨어진 영등포의 어느 언덕에서 서울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비온 뒤라 한강은 탁류였고 서울 하늘은 알 수 없는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이때 맥아더의 머리 속에 뒷날 인민군을 말아 올릴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天啓(천계)처럼 떠올랐다 한다. 그날밤 도쿄의 숙소로 돌아왔던 맥아더는 자기 전에 서가에서 옛날에 훑은 적이 있는 퀘벡戰記(전기)를 끄집어내 읽었다.
그때로부터 190여 년 전 英·佛군이 캐나다의 퀘벡에서 싸웠을 때,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세인트 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간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배후에 상륙하여 승리한 작전을 서술해 논 전기이다. 「퀘벡戰記」에 빠졌다가, 낮의 발상을 가다듬은 맥아더는 「이것말고 한국을 건질 작전은 없다」고 自答(자답)하고 자리에 누웠다고 회상록은 적고 있다.
기구로서 상부에 있는 워싱턴 본부의 참모총장들, 합참의 참모들과 의장이 하나같이 상륙작전案에 반대했다. 어느 조직에서나 흔히 있는 독창적 아이디어나 신념이 다수의 똑똑한 상식인들에게 밀리고 마는 그런 경우이다.
다행히도 巨人 맥아더의 不動의 신념 앞에 그들은 물러섰다. 중공군의 침략 후에 맥아더는 한국전쟁에 승리할 책략을 내어 놓았다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해임당한다. 당시 정신 없었던 한국사람들은 두고라도, 누구보다 6·25를 유심히 들여다본 일본의 전사가들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쓸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고 평한다.
李承晩, 할 얘기를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다. 압축한다면 조국에의 헌신적 일체감, 선지자적 사명의식, 예언자적 통찰력, 독수리 같은 전략안을 가진 지도자이다. 李承晩의 존재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의 축복이었으되, 우리 민족이 그를 알아볼 만큼 자라지 못했었다는 느낌을 피할 길 없다. 하기야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 손에 죽었다고 하지만.
李承晩, 맥아더 두 巨人이 다음 세대한테 넘겨준 과제가 한국전쟁의 한국화 문제이다.
남북頂上회담을 하겠다는 북의 金正日이 지금 뭘하고 있을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국제정치의 박사학위 숫자가 이 세상 평화와 정비례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벌써 극락이나 천당이 되었을 것이다. 북이 한반도 문제의 유일한 맞상대로 생각하는 미국, 세계전략을 관리하는 입장을 자임하는 미국이 정부 내외의 엘리트들을 끌어모아 클린턴 정권의 對북한 정책으로 내놓은 것이 페리 보고서인 것은 다 아는 얘기다. 건의 형식이라도 그렇다. 이 보고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은 북의 핵·미사일 사업이다.
金正日의 「제2 한국전쟁 조선화」 계획
北정권이 국민들은 굶어죽고 있어도 모든 것을 바쳐 추진하려 드는 것이 핵·미사일 사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金正日의 모든 신경과 정력은 미국의 견제나 저지를 뿌리치고 그들이 설정한 핵·미사일 사업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오늘도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일은 핵·미사일 사업의 수단적 서열이 부여될 뿐일 것이다. 핵탄두를 실은 장거리 미사일을 만들어 어떡한다는 것일까. 한반도 유사시에 포항이나 창원을 때리려 들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에 군사개입이나 지원을 할 수 없게 억지 수단으로 쓰는 것, 그것은 전략의 상식 아닌가. 北체제는 한반도 유사시에 內戰(내전) 차원에서 통일전쟁을 끝장내는 조건 만들기에 모든 국력을 지금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만 국민의 아사를 방치하는 사람들이 이산가족문제 정도로 눈이나 깜짝하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金正日은, 북식으로 말한다면 장차 할 「조선전쟁」을 「조선화」하는 데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적 환상은 안된다. 알고 만나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화해나 협력을 누가 마다할까. 그러나 혼자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지금 미국이 한반도 문제의 최대의 현안으로 삼고 있는 北의 미사일 개발에 관한 미·북회담이 중단되고 있다. 한편에선 작년에 한번 들여다봤던 금창리 再사찰 문제를 미국이 다시 거론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시점에서 남북頂上회담이 북으로부터 받아 들여진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페리 보고서에서 간단히 얘기하면, 미국은 北이 미사일의 제작·실험·배치·수출 등의 사업에 있어서 미국이 제시하는 길 위에 들어와 주면, 처음부터 체제는 손대지 않을 것이고 먹고살게 해주겠다 하고 있다. 회담이 중단된 것을 보면 미국이 제시하는 규제수준을 北이 거부한 것 같은데, 경제가 급해도 미국으로부터 떡 얻기는 당장은 어려운 판에, 남쪽에서 베를린 선언 등으로 퍼 주겠다니까 우선 받아놓고 보자. 여유를 만들어 對美 협상입지를 강화해 보자. 이런 생각을 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지켜지는 것이 없는 19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냉전이 종식되어 동구의 공산체제들이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북한도 존망의 기로에 선 위기감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이 영변의 핵기지를 감지하여, 국제기구를 통해 증폭되고 있는 의혹의 해명 압력을 높여가고 있었고, 부시 정권은 선제공격이라도 할 것 같은 낌새를 보이던 시점이다. 金日成은 남북총리회담이라는 스탠드 플레이로, 미국을 향해 핵 의혹이 반도 내부의 문제로서 해결될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데 일단 성공한 것이다. 거기에 이용된 것이 실효성 있는 보장장치는 아무것도 없는 남북기본합의서 아니겠는가.
현실의 정책치고 역사적 인과의 연쇄 위에 있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문맥(콘텍스트)을 벗어나는 정책은 非현실적이고 성공의 조건을 스스로 포기하는 정책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인과를 생각할 때에, 그 역사적 콘텍스트를 생각할 때에, 한국전쟁의 한국化의 과제를 추구치 않는 한국의 대통령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지켜지는 것 없는 91년 남북합의서
서독의 브란트 수상이 동독으로 가서 양독 頂上회담을 한 이른바 동방정책 같은 것의 연장선상에서 독일이 통일된 것으로 아는 착각이 우리 매스컴 일각에 있는 것 같다. 독일 통일은, 동서냉전에서 그냥 종식이 아니라 서방이 승리하여 1) 패배한 소련이 동독을 떠받칠 의사를 철회하고 2)동독에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3)미국이 승리한 냉전의 戰後 처리를 독일 통일로 상정하고 4)EU(유럽연합) 국가들이 독일 통일의 용인 의지를 보이고 5)서독이 통일을 위해서 돈 같은 것 따지지 않겠다는 태세를 취하고 준비를 갖춰 놓았으니까 가능했던 것이다. 브란트 수상의 취향과는 다른, 서구 이웃 나라의 역사적 對獨 불신을 없애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경제 강국을 만들어 낸 아데나워나 에르할트 수상 등의 연장선상에 독일 통일이 있은 것 아닌가. 서방에 의한 냉전 승리의 戰後 처리가 독일 통일이라는 것을 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냉전도 하나의 전쟁이기에 승패가 있는 것이다. 냉전이란 유령이 배회를 하다가 천도제 잘 받아먹고 어디론가 사라져서 냉전이 종식된 것이 아니고, 승패가 나서 종식된 것이다. 미국·소련 양국이 전쟁은 못하고 핵경쟁을 하다가 소련 경제가 더 이상 군비경쟁을 커버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우주요격시스템(Space War) 案을 내놓게 되자 소련이 손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도 남북간에 전쟁은 하지 않고 군비경쟁을 하면서, 한편에서 체제경쟁, 경제경쟁을 하는 한반도 판 미니 냉전을 해왔던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반도냉전도 1990년대 들어 승패는 완연해졌다. 북의 체력이 감당 못할 군비 증강으로 북의 경제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1995년 北의 대홍수 이래 북에는 배급이 중단되었고, 각종 추계조사나 증언의 종합으로는 이 4, 5년간에 300만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한다(월간조선, 99.9, 現代 코리아, 99.11, 東京, 참고). 북의 300만 아사자는 말하자면 한반도 냉전의 전사자들이다. 핵 만들고 미사일 만들고 군비증강 하느라고 경제가 거덜나서 아사자가 생겨 났으니 말이다.
北의 아사자 300만은 冷戰의 전사자들
미국은 왜 승패가 난 한반도 냉전에 끝내기를 하지 않는가. 그 냉전을 자기들이 주도해 놓고서는. 한국 정부는 왜 미국이 장기간 세계 정치에서 내걸었던 원칙을 한반도에서만 거두어 들이는 것을 보면서 묵종만 하는가. 미국은 6·25 때는 이기지도 않을 전쟁을 결론도 안 내고 끌어 사람만 죽이더니, 이번엔 승패가 결정난 냉전에 끝내기를 하지 않아 또다시 전사자(아사자)만 늘어나게 하는가.
베트남은 열전으로 통일했고 독일은 냉전으로 통일했다. 우리는 민족성원 500만(사상자)이 희생되는 열전을 치르고도 통일을 못하고 300만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냉전을 치르고도 통일을 못한다는 말인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여! 다 이겨 놓은 바둑을 끝내기 못해서 던져 버린다는 말인가. 지금 퍼주는 것은 끝내기 안하고 판을 헝크는 짓이다. 그 善心이 북한동포를 더 상하게 하는 구조를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페리 보고서는 줄여서 말하면 전쟁 날까 두렵다 하는데, 당신들의 의지와 억지력이 있는데 누가 전쟁을 하겠나. 망하려고 전쟁할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전쟁이 두려운 줄 누가 모를까. 그런데도 전쟁공포를 강조하면, 전쟁공갈의 밥이 될 뿐이다.
6·25의 교훈은 남의 힘만 가지고는 통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감추어 놓고 싫어하는(그것은 한반도 평화정착의 열망으로 표출되고 있다) 주변 대국의 지정학적 전략관심까지 이제는 관리해야 하는 미국한테, 타이밍을 놓친 감이 있는 한반도 냉전의 끝내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한국化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조선전쟁의 조선화」에만 몰두하고 있을 金正日과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한국전쟁의 한국화말고 뭐가 있겠나. 한국전쟁의 한국화, 그것은 평화의 전략이기도 하다.
좀 원경에서 보면, 20세기 후반의 한반도는 분단은 되었으되 상황은 유동하면서 그래도 통일의 문은 열려 있었다. 시작된 21세기 전반은 통일의 문은 영영 닫히고 분단 영구화가 확정되는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정부가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일·북 수교 교섭의 결론은 북으로 일본돈 100억 달러 전후가 가는 것일 테고, 남쪽에서는 북에 인프라를 깔아 주겠다 하고, 미국은 북의 체제는 끄떡없을 것이라(페리 보고서-그 말은 北체제 안 건드리겠다는 보장이다) 하고 있다. 배타성과 독점성을 본질로 하는 주권이 두 개 한반도에 탄탄하게 자리잡게 되면, 통일은 영 문을 닫는 것 아닌가.
7세기가 한반도서 韓民族의 正體性이 유지되느냐 안되느냐의 위기였다면, 21세기 전반에는 통일 민족국가의 영구분단 위기가 닥쳐 온 것이다. 7세기에는 신라가 극복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을 만난 결과로 인해 우리 역사에서 통일의 문을 닫은 대통령으로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李承晩의 對美자주, 金庾信의 對唐자주
- 許文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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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01, 0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