語錄/노태우의 전환기 大戰略

"북한은 지휘체제가 무너져야 끝난다" "한반도 문제를 놓고 북한이 미국과 직접 대화하도록 하면 안된다"
*북한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나는 특히 남북한 대치상태에 대해서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가 썼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을 생각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구사했던 이 전략은 「멀리 있는 나라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힘을 얻은 뒤에 가까이 있는 적을 공격해 때려 부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전략을 남북한 관계에 원용(援用)해야겠다고 작정했다. 북한의 문이 안 열리니 저 먼 데로 돌자고 판단한 것이다.

『제1차로 비동맹국, 그 다음에 북한과 관계가 있는 나라들, 즉 동구권, 소련과 중국까지 우리가 친밀해지자』고 작정했다. 어차피 남북통일이라는 것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도 개방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개방=통일」이라는 것이 나의 통일에 대한 기본개념이었다.

『그러니 (북한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저 둘레서부터 벗겨 나가자. 그래서 완전개방이라는 여건만 되면 통일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우리가 전쟁을 피하고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르고 좋은 방법이다』

나의 북방정책을 간단히 정리하면 당면목표는 통일이지만, 최종목표는 우리의 생활 문화권을 북방으로까지 넓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같은 구상을 내 나름대로 현실화하기 시작했는데, 그 절호의 기회가 서울올림픽이었다. 나의 전략이 맞아 떨어졌다고 해야 할지, 우리 외교관들이 비동맹국들을 열심히 껴안은 결과 金日成에게 갔던 표가 우리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것이 힘이 되어 1981년도에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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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감사해야 할 고르비

<고르바초프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서울에 강의하러 온 그를 두어 차례 만났다. 그렇게 세계를 변화시킬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한 지도자였는데도 자신이 뿌리를 박고 있는 나라가 잘 되지 못하니 결국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자신의 사상, 자신의 논리가 바탕이 되고 뿌리가 돼서 소련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이 되고, 그것이 온 세계에 칭찬의 대상이 됐다면 고르비가 오늘과 같이 초라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인상,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그런 초라한 꼴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평가를 깎아 내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평가는 더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므로 지금은 단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고르비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소련이란 나라가 해체되어 대단히 어려움에 빠져 있지만 만약 고르비와 반대되는 사람이 나타나 군사패권국가로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면서 자유진영과 패권을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면 인류는 재앙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고르비는 경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여 정치개혁을 하면 경제도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믿은 것 같다. 또 한 가지 고르비는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고르비는 고수(高手)였다.

고르비가 『경제 참모를 바꿉시다』제의

고르바초프는 머리도 샤프하고 순발력도 있고 여러 가지 보는 안목이 지혜스런 점이 많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경제에 대한 지식만은 그 수준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족한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시장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가졌더라도 소련 경제가 그렇게 엉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고르바초프는 정상회담을 하면서 내게 『나의 경제참모 수백 명이 아무 소용없으니 당신 참모 한 사람과 바꾸자』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 역시 농담으로 『그럽시다. 우리 金鍾仁 경제수석을 여기에 남겨놓을 테니 잘 활용하시오. 그러나 당신쪽 참모는 안 데리고 가도 됩니다』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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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을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나는 대만측이 서운해하면서도 우리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대만에서 온 특사(特使)들을 만났을 때 나는 이런 심정으로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대화했다. 특히 충분한 시일을 두고 사전통보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더욱 마음이 아프지만 중국측이 북한과의 관계를 내세우며 우리측에도 강력하게 보안을 당부했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비밀협상과정에서 중국측은 『우리도 북한에 사전통보를 안 하겠으니 한국측도 어느 나라에건 알리지 말아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때문에 대만이나 일본측에 알려주지 못했다. 만약 사전에 알려지게 되면 북한이 난리 쳐서 중국 내에서도 문제가 생기게 되고, 특히 대만측에 알려주면 비밀을 지킬 리 없는 것은 물론 크게 말썽이 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는 중국과 수교하면서는 경제협력에 대해 전혀 거론한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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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주도권과 자주성


<북방정책에 있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야 할 점은 우리 외교가 능동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건국 이래 우리의 외교정책은 줄곧 수동적이었다. 어떤 사태, 예를 들면 駐韓 미군이 철수한다, 북한이 비동맹국 회의에 들어간다고 해야 움직이는 그런 외교였다. 그러던 것이 우리가 동구권 국가나 소련 중국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맺고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회담을 해서 기본합의서를 끌어내게 한 것 등이 우리가 처음으로 선수를 치고 나간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는 우리 정부 입장에서 꾸준히 외교적인 노력을 경주해 온 결과 얻어진 것이다. 게다가 우리 기업들의 중국진출이 상당한 촉매작용을 했다. 특히 서울올림픽은 우리와의 관계개선에 있어 중국측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중국은 86 아시안 게임 때 서울에 와서 1등을 차지했다. 그 두 행사를 우리가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해 친근감을 표시하고 그것이 1990년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도 연결돼 수교하지 않으면 안될 여건이 완전히 성숙된 것이다. 서로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상황이 되었는데 그것을 일부러 늦출 이유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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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박은 미군이란 말뚝


『미국은 한반도에 미군의 말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외정책입니다. 해방 이후 애치슨 라인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 적이 있지만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반성하고 전략이 수정된 상태거든. 크게 나누어 대서양, 태평양이고 태평양의 중요 포스트가 東北亞인데,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는 것이 불변(不變)의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문제는 우리가 그 힘과 이해를 함께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해에 상치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불행해지는 거고.

그 힘이 우리의 국력증강과 번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해나간다는 것을 우리의 외교전략으로 구상해야 합니다. 예컨대 북방정책의 최종목표인 시베리아, 연해주에 발전권역을 크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 혼자 힘으로는 버겁고 또 불안합니다. 이것을 적절하게 미국과 콘소시움을 만들어서 가면 상호 이익이 보장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미국의 힘이 함께 있어야지요.

이북에서 주장하듯 미군철수다 뭐다 해서 떨어져 있으면 어렵게 될 겁니다. 또 미국이 자기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금세기를 마감함에 있어 어느 나라가 제일 침략적이고 상대방 나라에 불행을 안겨주었으며, 반대로 어느 나라가 우리를 돕고 혜택을 주었는지를 분석해 보면 역시 미국이라는 나라가 후자에 속한다 이 말이야. 東北亞를 위시한 태평양권의 안정과 번영도 미국이라는 힘이 주축이 됐을 때 보장이 되는 것이지요. 만약 미국이 빠지면 중국과 일본의 충돌, 인도와의 충돌 등 불안한 요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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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한국을 제치고 미국과 대화하도록 해선 안된다


6共 당시 金宗輝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당시 남북관계의 기본을 다음과 같이 추가증언한 바 있다.

『6共 시절에는 남북기본합의서 뿐만 아니라 비핵화선언까지도 우리가 직접 했다. 그런데 金泳三 정부에 들어와 핵협상문제에서 우리는 빠지고 미국과 북한이 직접 하게 됐다.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의논도 안한 채 다 결정을 한 다음 돈 청구서만 몇십억 불 한국에 내민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으로서는 한국 정부를 제쳐놓고 미국과 대화하고 돈까지 받았는데, 한국 정부와 대화를 할 리가 만무하게 된 것이다.

그때 미국이 제기한 것이 6者회담이란 것이다. 盧 전 대통령이 6者회담을 반대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6者회담을 하게 되면 어떤 문제는 남북한 당사자 회담에서 논의하고 해결하고 결정하면서, 어떤 것은 6者회담에서 논의하고 해결할 것인지 선을 그을 수가 없게 된다. 駐韓 미군이 됐든, 안보문제가 됐든 전부 얽혀 있는데 이해관계가 끼면 대화가 안되게 마련이다. 6共에서는 북한이 한국을 제쳐놓고 다른 나라들과 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의 國力과 군사력이 강해지고 韓美, 韓日관계가 강화되면서 미국 일본은 한국과의 대화 없이는 북한과 만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북한으로서는 자신들이 믿어온 중국, 소련의 연결끈마저 끊어지는 상황에 몰리고 무역마저 감소했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측이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겠다고 하니까 한국 정부와 얘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對北 고삐를 놓친 金泳三 정부

盧 전 대통령은 對北관계에서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움직이려면 모든 면에서 한국을 통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어 놓은 것인데, 金泳三 정부에 와서 그 고삐를 놓치는 바람에 상당히 힘들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잠시 침묵하던 盧 전 대통령이 다시 육성증언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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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對北 접근을 막은 이유

일본 부총리를 지낸 가네마루 신(金九信)이 金日成을 만나 감복해 눈물까지 흘리고는 서울에 왔다.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지 보름쯤 지난 1990년 10월8일 오후, 나는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일이 고약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평양에서 했던 일을 인정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가네마루는 그때 이미 76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북한에 가서 본인이 한 활동에 관해 실상을 말씀드리고 이해를 구하고자 직접 온 것』이라고 말을 꺼냈다.

나는 그가 金日成과 합의했다는 8개항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따져 그를 납작하게 만들까 생각도 했지만, 그보다는 점잖게 『이것은 가네마루 선생 당신의 뜻이 아니다. 저쪽이 그렇게 교활하게 해서 이렇게 한 것이다. 그렇지 않느냐』하고 되물으니까 가네마루가 『맞습니다, 맞습니다』그랬다. 순진한 가네마루가 다 속은 것이다. 가네마루와의 면담이 끝난 후 그 자리에 배석했던 누군가가 내게 『심문이 너무 심합니다』라고 했다. 내가 가네마루를 심문했다는 뜻이었다.

하여튼 나는 일본측이 우리를 제쳐놓고 북한과 만난 데 대해 가네마루에게 『당신이 왜 나쁘게 그 따위 짓을 했느냐』고 하지 않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인데 저쪽에서 유혹해 그렇게 된 것이다』고 하며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 한국을 제쳐놓고는 어느 누구도 북한과 교섭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가네마루는 내 얘기를 다 들은 후에 『본인의 訪北으로 인해 발생한 오해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 북한에게 이용당한 점이 있다면 깊이 되새겨서 금후 한국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머리 너머로 거래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으며, 韓日관계가 한층 긴밀한 협력관계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때 외교적인 주도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일본은 당시 우리가 북방정책을 펴는 것을 보고는 뭔가 위축되는 듯했다. 그래서 자신들도 북한과 만난다는 것을 갖고 한번 건드려봤다가 우리 지적을 받고는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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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6.25를 일으킨 죄를 갚아야'

盧 전 대통령은 金日成이 6·25의 전범(戰犯)이란 의식을 확고히 하고 있었던 점을 육성증언을 통해 밝혔다.

<나는 북한의 연형묵(延亨默) 총리가 서울에 왔을 때 대충 이런 뜻으로 이야기를 했다. 『金日成 주석이 6·25를 일으킨 사람이다. 6·25가 민족을 그렇게 많이 죽였고, 피를 흘리게 했으니까 그만큼 그 죄의 당사자다. 나는 그 당시 학생이었다. 나 자신도 전쟁터로 나가 싸우고, 또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죽었다. 피해자다. 이 엄연한 비극의 역사가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지워지겠느냐. 안 지워진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뉘우치고 무언가 죄값을 해야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양극으로 대립하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런 비극이 더 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남북 협력관계가 이루어져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안긴다면 죄를 벗는 큰 일을 할 것이다. 앞으로 金주석이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이렇게 했을 때 큰 보상을 치르는 효과가 있는데, 나는 아직 젊다. 나는 앞으로 누구와도 만날 기회가 있다. 그런데 당신들 金日成 주석은 기회가 없지 않느냐. 노령이 됐으니까. 우선 다른 누구를 위해서보다도 정상회담은 당신들 주석을 위해서도 백번 좋은 일이다. 그러니 이 뜻을 솔직하게 그대로 전하세요』

나는 그 때 延亨默에게 이야기하면서 「6·25 전쟁에 대한 범죄자」라는 표현은 쓰지 않은 것 같다. 延총리는 아주 진지한 입장이 되어 『예 알겠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겠습니다』고 했다. 내가 본 延亨默은 착하고 무던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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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호주의 원칙

『지금 정부도 전에 내가 했을 때처럼 남북관계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겠지요. 하지만 한 번 벗어난 것을 다시 잡기는 힘들지 않나 생각해요. 그게 참 안타까운 일이야. 또 한가지 있죠. 당사자 해결원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상호주의 원칙입니다. 북한보다 유연하게 대응하고, 더 너그러울 수는 있지만, 남북관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상호주의 원칙은 꼭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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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北 직접 대화 불용, 한반도 문제는 남북이 해결해야.


<당시 북한은 우리를 제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회담하려고 했다. 그것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우리가 주도해서 하는 것으로 강하게 밀어붙인 것이다. 핵문제든 뭐든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모두 다 내가, 한국이 주도한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지원한다는 원칙을 여러 차례 다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金宗輝 수석은 이렇게 보충 증언했다. 『북한의 일관된 정책은 한국을 제외시키고 미국과 직접 駐韓 미군 문제를 이야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정 못하면 남한, 북한, 미국 3者회담을 해서 한국은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가 직접 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역시 북한과 대화하고 싶어했다. 우리는 시종일관 「안된다. 한반도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해결한다. 너희는 이 해결을 위한 긍정적 영향을 미칠 여건조성에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직접대화 제안에 미국이 응하려는 것을 우리가 못하게 한 것이다. 단 한번 예외가 있었다. 캔터 국무부 차관-김용순 회담이었다. 처음에 미국은 캔터 차관과 북한 외교부 강석주 차관과의 회담을 갖고 싶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해 왔다. 나는 盧대통령에게 보고한 후 양해를 받아 「좋다, 단 한번이다. 그러나 상대는 강차관이 아닌 김용순으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한 차례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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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우산과 전술핵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한다고 했을 때 구체적인 조건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경우에 핵무기를 쓰게 됩니까.
『兩國에서 합의한 구체적 조건은 없을 거구만.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적이 사용해선 안될 무기를 사용한다든가 그랬을 때 이걸 친다는 것이지요』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쓸 때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조건은 당연히 있는 것 아닙니까.
『그건 당연하지요』

―한국內 미군의 핵 배치 상황에 대해서는 대통령에 취임하신 직후 미국측으로부터 보고 받으셨죠.

이 질문에 孫柱煥 전 장관이 답했다.

『戰術核이 남쪽에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것을 정식으로 확인한 것은, 金宗輝 수석의 증언에 의하면 대통령 취임 며칠 후 메네트리 美8군 사령관실에서 金수석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메네트리 美8군 사령관과 릴리 대사가 「매우 중요한 사항에 대해 盧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리겠다. 여기에는 金수석이 통역을 하고 일체 다른 배석자를 두지 말아달라」고 연락이 왔답니다. 그래서 메네트리 美8군 사령관과 릴리 대사가 와서 「대한민국에 전술핵무기가 어디에 있습니다」하고 보고했습니다. 국방부장관에게도 공식으로 남한에 핵무기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해주지 않고, 대통령에게만 보고를 합니다』

―돈 오버도퍼가 쓴 기사를 보면 한반도에 전술핵무기가 1972년에 7백63기가 있다가 1989년에 1백개로 줄었고, 마지막에는 폭격용 90개만 군산에 남아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사실이 맞습니까.

『숫자는 내가 확인하기 어렵구만. 군산 한 군데에만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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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와 친했다.

부시 대통령과는 인간적으로 잘 통했습니까.

『그런 폭이지요. 자연히 그렇게 되더구만. 1987년에 내가 후보 때 미국 방문해서 부시 후보를 처음 봤지. 나중에 둘 다 당선되어 부시 대통령이 먼저 한국을 방문했어요. 특히 안보문제는 뭐 어짜고 할 것 없이 둘이가 척척 맞아갔지요. 미국은 자유진영이 지도국 아니냐. 혈맹(血盟)의 입장에 서게 되면 우리가 모자라고 부족해도 취약점은 묻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골치 아픈 것은 통상문제였어.

단독회담 할 때는 통상문제가 전혀 안나오는데 확대회담 할 때 장관이 이걸 가지고 나온단 말이야. 심지어 미국 농업장관이 문제를 엄청나게 갖고 확대회의에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부시 대통령에게 「농업장관 참석시키지 맙시다」하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나중에 뺐더라고.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인사도 하고. 그래서 둘이서 조크도 하는 사이가 되었지. 점심 먹고 난 뒤에 내 귀에다가 「2층에 올라가보자」그래요. 2층을 덮쳐서 부인네들 깜짝 놀라게 하자고 해서 둘이 살금살금 올라가 놀래키기도 했지. 이렇게 되니까 나중에 테니스 같이 치고 그렇게 친밀도가 두터워지더라고요』

―부시 대통령도 외유내강(外柔內剛) 한 분이죠.
『그렇지요. 통상문제에 대해서 부시 대통령이 많이 카버를 해주었어요』

―金宗輝씨 이야기를 들으니까 통상문제가 정상회담 주제였던 것을 안보문제로 바꾼 경우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런 일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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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지휘체제 무너지면 끝장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 독재국가도 마찬가지지만 통제하는 수단, 지휘체제가 있는 한은 절대 안 무너져요. 이라크도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휘체제가 무너지면 질서가 없어 보이는 자유진영보다도 더 약해져 버립니다. 그걸 6·25때 우리가 목격했어요. (인민군은) 국군이 북진(北進)할 때 와르르 무너져 버렸어. 헌병 둘이서 7백여 명의 인민군 포로를 이끌고 2백리 떨어진 포로 수용소로 가는데, 헌병이 다리가 아파 절룩절룩 절고, 총을 포로에게 맡기고, 포로에게 교대로 업혀서 2백리 행군해서 포로수용소로 갔어요.

그 강했던 인민군대가 그 모양이 돼버린 것은 지휘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여러 가지 전례에서도 볼 수 있어요. 2차대전 때 독일군대와 미국군대가 싸울 때 지휘체제가 확립돼 있으면 독일군이 강하고, 지휘체제가 무너지면 미국군이 더 강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났어요. 북한 인민군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金正日을 중심으로 하여 지휘체제에 놓여 있는 간부들이 북한체제가 무너지면 자기들이 완전히 죽으니까 공포심을 조장시켜 분위기를 만들어간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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