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더라 - 盧在鳳 전 국무총리의 [盧泰愚 대통령을 위한 변호]
대통령 정치특보, 비서실장, 국무총리를 역임하면서 盧대통령을 지근에서 보좌했던 노재봉씨는 『정치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반 발을 떼기 어렵더라. 두 발을 모두 딛고 있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다 떼버리면 허공의 정치가 돼 버린다』고 했다.
<1992년 12월 월간조선>
의식이 상황을 못 따르는 시대
―盧의원께서 지금까지 대통령 정치특보와 비서실장 그리고 국무총리로 일하시면서 인터뷰한 기사들을 읽어보니 국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개 정치인들은 국민을 신성불가침의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해온 것에 비해서 盧의원께서는 [이제 시대가 바뀌고 대통령의 역할도 변했다. 그런데 국민들이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대통령에게 해달라는 식으로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고 국민들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朴正熙 대통령이 국민들을 계도하는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일은 있지만 그 이후 정치인으로서는 처음 하는 비판인 것 같은데…. 청와대로 들어가신 후에 그 입장에서 본 국민은 학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던 국민과 달랐습니까.
『문제는 객관적인 상황의 변화와 주관적인 인식간의 차이가 메워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민들의 의식이라는 것이 지난 반세기 동안의 정치체제를 경험하면서 일정방향으로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의식이 빨리 변하지 않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체제는 민주체제란 것인데, 이건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국민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노력이 수반돼야 성공할 수 있는 체제입니다. 빠르게 그리고 정부가 다 맡아서 해달라면 그건 권위주의 체제를 원한다는 얘기가 되지요. 민주체제를 원한다면 국민이나 시민들이 엄청난 부담을 감당하겠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가 해서 고통스러운 건 남이 해주기 바라고 좋은 건 내가 하겠다고 한다면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자율성은 어디서 찾겠습니까』
―의식의 변화는 상황의 변화보다 항상 늦습니까.
『사회학적으로 보면 일단 사람이 어떤 상황에 적응하게 되면 마음 속에 고정된 유형의 공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단 한번 성립된 공식이 변화되려면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아주 느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국민들이 [강력한 정부]를 원한다고 할 때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회에서 그런 정부의 개념은 각각 다른 것인 데도 마음속의 공식이 완전히 변하지 않으면 그것이 잘 파악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5년간의 盧대통령 집권기간은 그 공식을 바꾸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타율에서 자율로 가는 시기였지요. 민주화라는 것은 모든 부문에서 국민의 부담을 가중시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율은 어려운 거에요. 독재는 차라리 국민의 입장에서 편한 것입니다. 6공에 들어오면서 모든 사회집단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인해 상호 관계 설정에 어려움이 많았고, 새로운 이익집단 내부의 원칙조차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盧대통령, 시대의 변화를 간파
―盧대통령은 변화한 시대 상황에 따라 통치 스타일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정치특보가 됐을 때 처음 맡은 임무의 하나로 盧대통령이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시대가 변한 것을 잘 모르고 있으니 그것을 잘 인식시켜달라고 해서, 국회의원들을 모아 함께 식사도 하면서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던 일이 있습니다. 盧대통령은 근본적인 체제변화를, 과거와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상황변화로 인식하려는 경향에 부딛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소야대가 되던 날, 盧대통령은 崔秉烈 당시 정무수석의 보고를 듣고 『차라리 잘됐다. 이런 바탕 위에서 민주화를 한번 해보자』라고 했다는데….
『그날 새벽 盧대통령이 崔수석에게 전화를 걸어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자, 낙담하지 말고…. 역사적인 변화를 시도하는데 일이 그렇게 쉽게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합니다』
―여소야대가 아니었으면 盧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지금과는 달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盧대통령은 체제전환에 기여하는 대통령으로서 리더십의 형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청와대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대통령을 모시고 관계장관과 수석들이 모여 회의를 한 일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다 들으시고 나서, [여보시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나보고 권위주의로 돌아가라는 거요] 하며 심하게 질책했던 일이 있습니다. 다들 그 순간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盧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당대표를 하던 시절에 정치학자들과 모임을 가진 일이 있었는데 때가 처음입니다』
―6·29 선언을 전후해서 그와 관련된 충고를 하셨던 일이 있습니까.
『6·29 선언에 직접 관련된 충고를 한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 상황 전반에 관한 견해를 밝힌 일은 있는데 그것이 盧대통령의 견해와 일치했다고 봅니다』
―당 대표 시절의 盧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정치나 미래에 패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계속 권위주의로 갈 수는 없고, 한국 정치가 사회 자체가 가진 힘을 그대로 노출시켜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봤습니다. 사회가 가진 힘을 누르고 있으면 그 사회는 약화됩니다. 자연적으로 발전되어온 힘을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것이 사회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고 그것이 곧 정치의 밑바탕이 됩니다』
―사회가 가진 힘이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하고는 다릅니다. 구조변화에서 오는 부분들의 새로운 위상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까요. 어린애가 시간이 가면 성인이 되는 경우 그에 대한 대접도 달라져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지요. 단순사회에서 복합사회로 가면서 관료가 통제하고 지도하는 데도 한계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관료의 역할도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원사회의 자율적인 힘이 작동하도록 해주지 못하면 경제는 물론이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이 되셨을 때 盧대통령이 특별히 부탁한 어떤 역할이 있었습니까.
『학자로서 전반적인 상황을 관찰하고, 분명한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분석해서 그 정치적 의미 등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조직 속에 묻혀서 일을 하다보면 전체를 보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특보는 그러한 일상에서 떠난 자리이므로 전체를 보고 보좌하라는 뜻이었습니다. 盧대통령과는 일주일에 한번씩 독대했고 수석 비서관회의에도 참석했습니다. 수석 비서관 회의를 할 때는 비서관들이 모두 발언하고 나서 실장이 마지막에 발언을 하는데 제가 그 직전에 발언하는 순서였습니다. 주로 대통령에 관계되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규정된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스스로 정해야 했습니다』
―정치 특보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셨습니까.
『체제가 완전히 변화하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리더십의 발현방법이 문제였습니다. 국정 전반을 보면서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련하여 순간순간 문제되는 게 무엇인가를 포착하는 것이었습니다』
―1989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시위와 노사분규가 최고조에 달했었지만 학생운동권의 실수로 부산 동의대 사건이 터졌고 서경원 문익환 방북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보수세력이 반격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요. 그 이후에 우리 사회가 안정 기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되는데…. 그 당시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부산 동의대 사건의 기억
『정말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거의 무정부 상태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지요. 경찰이 수행해야 하는 업무의 성격도 변했고 역할도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과거의 이미지 때문에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민생치안 문제가 부각되었지요. [물대통령]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 무렵입니다. 여론도 권위주의적인 과거에 향수를 느끼며 회귀하는 듯했습니다. 역사적인 체제변화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있게 마련인 변증법적인 반동이 심히 우려됐습니다. 대통령의 침묵에 담긴 고뇌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요.
그 때 저는 盧대통령에게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 역사적인 큰 흐름이 지나가는데 국민들이 강한 대통령을 원한다고 해서 그 흐름을 차단시키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큰 흐름이 지나가는데 어떻게 골을 잘 파서 정상적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해주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이 권력에 대해 갖고 있는 과거식의 [강력한] 통치력의 발휘는 자제해야 한다는 충고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질서를 위해 스스로 노력하자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 참자고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치안력이란 시민의 질서의식을 근간으로 하는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물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대통령께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 치안을 일시에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좀더 기다리다가 계기를 잡자]고 했습니다.
부산 동의대 사건 때는 대통령을 비롯해 내무장관 수석 비서관들 모두 다 우울해했습니다. 盧대통령은 그 사건이 지금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힘을 잃지 말고 이 기회를 활용하자고 했지요. 당시에는 군이라도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어요. 그러나 민주화라는 것은 이념이라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절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군에 가서 강연을 한 일도 있습니다. 군은 이제 정치적 부담에서 해방됐으니 본연의 임무만 다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또 옛날과 달라서 군이 나온다고 해도 시민들이 바라는 정상적인 사회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군부의 분위기가 격앙되어 있었지요.
『군은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군의 위상을 잡아가느냐 하는 것도 고민거리였고 또 이러다가 나라가 다 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경찰과 학생의 폭력이 같다니…』
―당시 盧대통령의 태도는 앞으로 쟁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총장들을 모아놓고 이제는 당신들이 학생시위를 직접 막아라, 학교에서 요청하지 않으면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공권력 사용을 자제하면서 민주주의를 교육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또 한 편으로는 법치의 원칙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경찰력만으로 물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는 노사분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경찰력을 투입할 경우 그 부작용이 엄청날 것이었습니다. 시위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무단 점거해도, 그것은 의당 경찰이 개입해야 할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경찰의 이미지가 워낙 나빴고 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어서 모든 사건에 다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제는 타율이 아닌 자율의 시대다. 정부 역할도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1989년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야당은 국민들에게 자제를 요청하는 발언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때 야당 3당 당수 합의 문서 중에 [경찰의 최루탄과 학생들의 폭력이 같은 종류의 폭력]이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니 아연실색해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고 절망도 했었습니다』
―1989년 전반기에는 중간 평가 연기가 결정되어 金泳三씨가 강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동해 선거 매수사건이 일어나 김영삼씨가 타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서경원씨가 방북을 하는 바람에 金大中씨도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부산 동의대 사건이 일어났고, 검찰과 안기부, 경찰은 공안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습니다. 1989년 5∼6월은 변혁세력과 보수 안정세력간의 대결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는 4당체제가 움직이는 아주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가장 큰 위험은 같은 기반을 딛고 있는 정치세력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기 분열 현상입니다. 여소야대의 경우처럼 정치적으로 합리적인 결합구조를 결여한 상태에서는 헌정을 제대로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최소한의 수단은 행정수단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관계기관의 효율적인 공조를 위한 공안합동수사본부였습니다. 우리의 구질서에서 그와 유사한 기관을 보았던 경험이 있어서 우선 이름부터 거부감을 유발했던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변혁세력과 보수안정세력의 대결로 보는 데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가 무정부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정부로서는 당연히 민주체제를 옹호해야 할 의무를 지녔던 것입니다. 그걸 위해 만들어졌던 기관이 어떻게 달리 평가되어야 합니까.
그리고 그 기관도 정책의지의 수단인 것입니다. 그 의지는 바로 대통령의 의지며, 대통령은 민주화를 위한 확신에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갓 탄생한 새로운 민주체제를 교란시키려는 검은 세력에 대해 대처한다는 것은 표면상으로 흑백을 가리기 어려워서 고통도 많았습니다만 밑에서 일하던 우리들도 분별의식은 분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바람정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요즘 간첩사건을 보면서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 정치는 물론 세력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중간평가 포기의 논리
『13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민정당 의원들을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미 사회가 아닌 다른 나라의 대통령제 하에서 여소야대의 상황이 생겼을 때 쿠데타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이 된 예가 없다. 만일 13대 국회 기간이 쿠데타 없이 끝난다면 그것은 세계 헌정사상 최초의 일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중간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정치, 사상적인 용어로 [치유]와 [예방]이란 게 있습니다. 당시 중간평가는 [치유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수술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수술을 하다가 환자가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이렇습니다.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이 이기면 그때는 민주적 독재가 된다. 그러나 지면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긴다고 해도 그 후에 어떤 조치를 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습니다. 이기면 권위는 강화되겠지만 그것을 제도적으로 보완할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고 그것은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는 사태가 됩니다. 그러나 일단 국민들이 잠잠해지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문제는 이기든 지든 간에 상관없이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수하더라도 중간평가는 하려고 했었습니다. 만일 야권의 의견이 일치 됐었더라면 했을 겁니다.
야권 내에도 이견이 있었고 그래서 중간평가는 후퇴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상황은 나아진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 [예방]방법으로서 [합당]이었습니다. 3당 합당을 하고 나서 배신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같은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그룹의 결합이 헌정 중단의 위기를 막았고 그 결과 6공이 지금까지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89년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저도 잘 기억합니다만 여소야대가 지속되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좀 과장된 인식 아닙니까.
『당시의 치안은 경찰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헌병을 동원해서 우범지대에 보내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었습니다. 그러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정당성이 워낙 큰 의미를 가진 것이어서 3년의 혼란을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1차 안전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부분적으로나마 군의 힘을 빌렸다고 해 봅시다. 힘의 속성이란 묘한 것이어서, 그렇게 했더라면 한 조직의 힘이 다른 조직으로 자연스레 이동해 갔을 겁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야심가의 쿠데타가 아니라 그런 자연스러운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3당 합당을 준비하는 과정에 참여하셨습니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치구조를 재편성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저는 이론적으로 그 의미를 보강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합당] 이외에 [정책연합]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처음에는 [연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지요. 선진국의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라면 으레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가지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되질 않아요. 이유는 상당히 감정적인 것인데 우리나라의 정당이 워낙 감정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민정당과 공화당은 연립해도 과반수를 넘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쩐지 같은 세력들끼리 대동단결해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이미지를 주는 것 같아 피하기로 했습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더라 - 노재봉의 노태우 변호(2)
『공개적인 이단은 수용, 지하전복 세력은 차단해야』
―국가안전기획부의 역할은 대통령과 안기부장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5공과 6공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6공의 안기부가 상대적으로 정치개입을 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국민은 그 정도도 싫다고 하지만….
『모든 게 과거의 타성에 젖어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이 주는 문제점이 아주 많았습니다. 안기부를 비롯해 야당도 그렇고 사회의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인데, 과거의 체질이 불쑥 드러나곤 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터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안기부도 역사의 변화에 따라 엄청난 변신을 거듭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안기부가 다하고 있는 기능을 송두리째 없애고 싶어하는 의식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애기 목욕시킨 물을 애기와 함께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번 간첩사건도 보십시오. 제가 총리로 있을 때 연쇄분신자살을 기도하며 일어났던 점이기도 합니다만, 간첩들이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건,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다는 것인데, 그건 요인암살입니다. 안기부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ʼn樗萱?많이 겪었지만, 그 기능은 보강돼야 합니다. [연결 고리] [걸림돌] 등 레닌의 용어를 북한이 번역해 썼던 것이 언론에서조차 공공연히 쓰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참 걱정스럽습니다. 공개적인 이단은 수용해 나가되, 지하의 전복음모는 차단하고 가야 합니다』
―6공 들어서 언론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일종의 통치기능을 하게 된 셈이지요. 그 과정에서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언隙?이제 비공식적인 통치기능을 다하고 있는 셈입니다. 일상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언론 아닙니까. 그런 언론을 보고 듣고 있으면 가끔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우리나라 지식계 전체가 과거체제의 영향으로 인해 현실의 복잡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해서 현실을 매우 단순화시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언론도 그런 면을 보이고 있어요.
두 번째로는, 나라의 안팎 사정을 유기적으로 보는 시각이 약하지 않나 느껴져요. 마치 이 나라가 국제관계와는 독립된 고도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발전적인 요소들을 부각시키는 데 매우 인색하지 않나 느껴져요. 어떤 때에는 노상의 데모가 지상의 데모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끝으로, 언론도 기본적으로는 기업인데, 기업이익과 공공이익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책임은 어떻게 물어질 것인가가 궁금합니다』
북한, 핵개발 포기할 것
―우리 언론이 여론이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핵문제입니다. 지난 89년 미국에서 핵문제가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언론은 그것을 외신기사처럼 취급했었습니다.
『언론에서 어떤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핵문제도 그러한 예인데 그것은 모두 탈냉전시대에 적개념이 혼란된 결과 생긴 것입니다. 북한의 핵에 관해서 우리 정부가 독자적인 정보수집능력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체정보는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 있었고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도 예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적하신 것처럼, 우리 언론의 사고 구조가 좀체 국경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이미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문제를 가지고 북한을 견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의 대응개발을 막는 데도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대응자세가 너무 순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핵재처리 시설을 갖지 않겠다는 선언을 미리 해버리는 식으로….
『국제정치의 상식으로 볼 때 동북아는 가장 역동적인 곳이지만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지리멸렬한 상태지요. 유럽의 NANO(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지역안보체제가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국가가 개별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핵을 갖게 되면 그 여파가 엄청나 4대 강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그리고 핵이라는 게 갖기만 하면 되는 그런 간단한 무기가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리라고 보십니까.
『쉽게 예측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만 지금으로 봐서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핵은 정치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그 체제의 성격상 핵이 어떻게 사용될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북한 자극 않고 개방시켜야
―조금 전에 [적개념]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대통령이야말로 적개념의 혼돈을 막아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盧대통령은 공식적으로 북한의 대남 도발의 가능성 등에 대한 경고 등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대통령의 대(對)북한 자세와 대(對)국민자세는 달라야 되는 것 아닙니까.
『정치특보 시절 盧대통령을 수행해 헝가리를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지극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동안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점, 올림픽 이후 알려진 이미지 등도 중요한 이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서방체제의 보편적인 조직 속에 편입되었다는 점입니다. 서방국가들이 한국에 대해 과거와는 다르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한국이 자신들과 같은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안보에 대한 구체적인 지원이 강해졌습니다. 거기에는 조건이 있어요. 북한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고 가능하면 개방을 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다른 나라는 탈냉전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한국은 아직도 냉전 상황 속에 있습니다. 대통령은 군사와 외교에서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하는데, 그것은 외견상 태평성대를 이야기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은 국제정치적 행위에 대한 이해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북한의 대남도발 가능성을 언제나 전제로 하고 그 바탕 위【?정책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에 지불해야 할 대가, 그리고 통일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될 대가를 미리 예측하고 현재의 상황을 타개해 가려는 당연한 입장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학자에서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보좌관,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로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옮기셨는데 성격이 다른 일을 하는 데서 오는 충격은 없었습니까.
『둔해서 그런지, 예상과 같아서 그런지 별로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저는 정치학자로서 이론과 현실을 접합시켜보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어떤 일이 벌어지면 나름대로 빨리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학자나 특보는 혼자서 움직이는 일이지만,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는 조직을 끌어가는 일 아닙니까. 학자는 대개 사람 다루는 일을 어렵게 생각한다고 하는데, 학자로서 조직을 이끌어가는 데도 성공하셨던 요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그 일에 성공했다고 보십니까? 조직에서는 조직의 목표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 도움이 되는 장점만 동원해가면 된다고 봅니다』
합당 후 행정부의 힘 회복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을 때, 盧대통령이 특별히 당부하신 점이 있었습니까.
『당시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해이해져 대통령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대통령이 일반적인 노선만 제시하면 그것을 재해석하고 정책화해서 시행하는 것은 아래서 단계별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역으로 보고를 해야 합니다. 제가 비서실장이 되고 나서는 수석회의를 매일 했습니다. 우선 청와대 직원부터 상황의 변화를 인식시키고 시행방침을 정한 뒤 우리의 역할을 설정해갔습니다』
―비서관 회의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청와대 비서관이 50∼60명 정도 되는데 이들을 모두 모아놓고 난상토론을 벌였습니다. 비서실 운영에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털어놓고 이야기해보자고 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통령이 외부에서 비서진을 데리고 와서 일하다가 대통령이 그만 두면 같이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각 부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국정 전반의 이슈가 부처간 이익에 걸려 이들이 자기 출신부서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경우, 비서실장은 균형된 감각을 갖고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현재 대통령 비서실의 규모가 작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렇게 큰 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서실을 작은 규모로 만들고 일은 행정부로 보내는 방향으로 했기 때문에 그 정도면 운영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3당 합당 후에 행정부를 밀어주는 정치권의 힘이 커져 든든하다고 느끼셨습니까. 국민들 눈에는 합당 후에도 계속 내부적인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만 보였는데…. 실질적으로 뭔가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까.
『국회가 달라졌으니 우선 정부안(案)이 그대로 통과될 수 있었고 그 결과 행정이 수월해졌습니다. 공무원들도 힘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러다가 최초로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 김영삼씨와 박철언씨간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일뿐 큰 흐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각제와 金泳三의 야심
―그 직후 내각제 개헌 합의 각서가 보도되었습니다. 盧의원께서도 관계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때 알려진 것과는 다른 사실이 있었습니까.
『비서실장이 된 직후였는데 일단 문제가 생겼으니 수습을 해야 했습니다. 국정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으려면 당도 운영이 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설득을 했지요. 문제가 생겼던 것은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는 어떤 의미를 말합니까. 각서 내용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만드는 과정입니까.
『당시 그 문제를 수습하느라고 굉장히 고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씨가 탈당을 할 만한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재확인하는 절차를 밟았고 어렵지 않게 합의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합의가 당 강령에 반영되었고 그 결과 전당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화학적 융합]이 잘 안됐다고 할까. 그 합의에 대한 서로간의 정치적 이해에 차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합의 결과 강령에 반영된 것이 결국 내각제 아닙니까.
『김영삼씨는 내각제를 해서 자신을 이용만 하고 버린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김영삼씨를 몇 번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민자당을 결집시키려면 권력을 하나로 독점하는 방식 즉, 대통령제로는 안된다. 그러나 내각제를 들고 나가면 모두 합의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합일된 힘은 당신 뒤에 있다. 당신이 수상이 되면 그 힘은 대통령의 힘보다 큰 것이 된다. 당신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의심을 버려라]고 했으나 金泳三씨는 믿지 않았습니다. 瀏【?제가 [야당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의심이 많으시군요]라고 말했더니 [그럴지도 모르지요]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당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5대 4정도로 대통령제를 지지하는 쪽이 우세했는데 만일 그 때 여당이 단결돼 내각제를 공론에 부쳤더라면 여론이 역전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십니까.
『본격적인 논의로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당내 논의에서 깨졌으니….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큰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으니 그 점에서는 대통령제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제를 계속할 경우 되풀이될 싸움과 지역감정 등을 생각해보니 차선으로 내각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영구집권의 의도]라는 식으로 해석했으니까…』
―각서 안에 [수상은 金泳三씨]라는 말이 있었습니까.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묵계 사항이었습니다』
―金泳三씨가 마산으로 갔을 때 김윤환씨가 중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데 비해 盧의원은 상당히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보도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굉장히 화를 많이 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김영삼씨 측근을 만나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金泳三씨의 마산행은 盧대통령과 金泳三씨와의 관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盧대통령이 양보를 했다고 할까, 金泳三씨에게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당시의 정치세력 관계로 봐서 대통령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방법은 없었습니까.
『그 시점에서는 합의를 이루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김영삼씨를 눌러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양보를 한 것이지요. 언론에서도 내각제 자체에 대한 찬반논의는 별로 없었고 그저 사건만 확대되어 내각제에 대한 논의는 국민 차원으로 가보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내각제를 완전히 포기했습니까.
『그것은 포기했다 안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상황으로 보아 안된 것입니다』
대통령 탈당에 사후 의미부여
―김종필씨가 얼마 전 영국에서 한 연설 내용을 보니 내각제에 대한 이야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내각제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모양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탈당을 함으로써 권력구조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리 헌정사상 [중립권력]이 최초로 등장한 것입니다. 정치기능은 정당정치의 차원으로 넘어가고 만일 여기서 문제가 생겨 해결이 안되면 중립권력이 개입할 수 있게 됩니다. 과거 미국 경우처럼 사회가 이념면에서 일치하고 이익을 배분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가 많으면 대통령제는 안정이 됩니다. 그러나 비(非)구미국가의 경우에는 그런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므로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은 국정을 이끌어갈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노대통령의 탈당은 바로 그러한 [여유]를 만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내각제로 갈 수 있는 구조를 갖게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그런 부문에서의 계기도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이제부터 정당정치가 활력을 찾아 정착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됐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살리느냐 하는 것은 결국 정치권에 달려 있는데, 어쨌든 전반적인 구조로는 내각제 발달의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기가 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루어진 변화에 또 다른 변화가 가해져야겠지요. 지금은 단지 기초공사만 해놓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통령이 여유를 갖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대통령이라는 것이 처음 생길 때도 [중립권력]의 개념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모든 파당 위에 선다는 것으로 정당의 개념도 없었지요』
―盧대통령의 탈당에 대해 찬반의 말이 많은데, 우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보면 대통령이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다음 정권의 정통성이 강화된다는 점, 그리고 야당이 어떠한 명분으로도 선거를 거부하지는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부에서 탈당은 정당정치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정당제도와 사회변화는 물과 기름과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정당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는데,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盧대통령이 탈당을 결정하기 전에 만나서 자문을 해주셨지요.
『아닙니다. 내가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후에 만난 적은 있습니다. 만나서 동기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객관적인 결과는 이렇다는 식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탈당은 분명히 중요한 결정일텐데 그 결정이 국민들에게는 너무 기습적으로 비칩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최고 지도자의 고독이지요. 대통령의 마지막 결정은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 책임을 지울 수도 없는 것이니까』
―다음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접전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예측변수가 자꾸 달라지니까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지만…』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면 큰 변화가 없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김대중씨가 당선되면 어떻게 되리라고 보십니까.
『정치는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반발을 떼기 어려운 것이 정치지요. 두 발을 다 딛고 있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두 발 다 떼면 허공의 정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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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더라 - 노재봉의 노태우 변호(3)
세대교체론과 관련된 오해
―지난해 봄 강경대군 폭행 치사사건으로 국무총리를 그만두실 때의 과정을 보니, 처음에는 야당에서 이야기가 나오다가 언론이 여기에 편승하고 나중에는 민자당이 요구하는 식이 되었지요. 언론이 이를 기정 사실화해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압력을 가하고….
『일단은 제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합니다만 오해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저보고 젊은 총리라고 했지만 제가 젊은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들의 나이에 비해 그렇다는 뜻이었지요. 그 문제는 세대교체론과 연결되어 오해를 샀습니다. 그리고 총리가 된 후 큰 사건이 몇 가지 있었지요. 의원 뇌물 외유사건 그리고 수서 사건 등이 있었는데,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 잡혀 들어가는 사태가 벌어지자 기성 정치권을 바꾸기 위한 전초전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기초의회 선거 때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당시 盧대통령이 선거혁명을 주장했었지요. 제가 그 명을 받아 하위선거부터 잘 잡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행정을 믿고 정치를 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위반자들을 다 검거했는데 여당 쪽에서 더 많이 잡혔습니다. 그것이 또 긴장을 유발시켰지요』
―국무총리가 되셨을 때 내각제 개헌이니 기성 정치권의 개혁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으셨습니까.
『행정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慮대통령이 한마디 던져준 의무였습니다. 비서실장을 하다가 총리를 했기 때문에 이미 많은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행정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비서실장을 할 때 보니 청와대 비서실이 행정부의 업무를 너무 많이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행정부의 일은 행정부로 넘겨주는 재조정 작업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했는데 그것이 제가 실장으로 마지막 한 보고 중의 하나였습니다』
대통령의 설득권력
―1990년 초에 재벌의 부동산 투기가 이슈가 되어 盧대통령과 재벌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민주화 과정의 일환이었습니까. 아니면 응급조치였습니까.
『당시 주택문제가 상당히 심각해 그 해결방법을 찾느라고 고심 중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검토를 해보니 숫자상으로 5공 때 생긴 흑자가 다 땅투기에 들어가 있었어요. 6공 들어 해준 은행융자도 그렇고…. 기업결산을 살펴보니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윤보다 기업 외적 활동을 통해 얻은 이윤이 세 배나 많았습니다. 투기는 시장경제에 치명적인 현상입니다. 자유시장경제의 3대 문제는 투기적인 지하경제와 정치 스캔들 그리고 저속한 문화입니다. 투기로 인해 시장경제가 왜곡돼 있는데 그것을 정상으로 되돌리자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진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방침에 모두 찬성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나니 마구 반대를 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왜곡된 상황 속에서도 체질화된 것이 있어 그것을 변경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힘들다]고 느꼈지요. 비판이 많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재벌소유토지의 처리문제를 놓고 정부가 법에도 없는 일을 한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헌정의 테두리 안에서 보면 대통령의 권리중 하나인 설득권력을 사용한 것입니다. 합법이니 위법이니 하는 것을 따질 차원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범죄와의 전쟁 그리고 재벌과의 전쟁을 통해 범죄율도 낮아지고 아파트 가격도 떨어졌는데 언론이 그 점을 제대로 부각시켜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추진방법을 정부 주도로 하지 않고 민간주도로 해서 조용히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론도, 글쎄요. 언론은 보통 사건을 대상으로 해요. 사건은 보통 잘못된 일을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그것으로 센세이셔널리즘을 팔지요. 무언가 개선되어가는 것을 추적하는 것은 뉴스가 아니라고 보는 듯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현대적 의미에서 전통을 만드는 일에 인색합니다. 되돌아보면, 모두들 정부가 잘못했다고 했지만 결과를 보세요. 우리나라가 전 세계 1백60여개 국가 중에서 상위권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잘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도 없어요』
사람을 키우지 않는 사회분위기
―항상 나라가 당장 망할 것 같이 이야기를 해왔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제대로 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가는 혁명적인 변화는 엄청난 마찰을 야기시키고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불편이 생기고 대가를 지불해야 할 일이 생기는데,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항상 과장하기 마련 아닙니까. 6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산업화의 기반 위에서 민주화로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념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구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한국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달라졌지요. 그 과정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각 분야의 지도자가 배양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람을 잘 키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무 급격한 변화를 겪다보니 평균주의적인 인식이 너무 강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남을 인정하고 장점만 취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점에 대한 인식이 모자랍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지도자들이 적어도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는 것과 국민들이 그것을 잘 따라주었다는 점이 한국의 기적적인 발전에서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이외에 다른 요인으로는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요.
『흔히들 교육된 인력, 시장경제라는 바탕, 지도자의 의지, 국민의 호응도 등을 드는데 그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안되는 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창조적인 요소를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든 조직이나 행위 양태의 효용은 이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점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될 정도입니다. 그것을 대체해나가는 새로운 국가경영 전략의 모색이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잘 하면 급성장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어려운 일입니다』
―비서실장 하실 때 소련과 수교를 했는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와 했던 회담은 너무 어색한 모양새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정상적인 국가간의 관계라면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대국가였던 관계로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제한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북방외교, 앞섰다는 점이 중요해
―盧대통령의 북방외교에 대해서는 안 해도 되는 것을 너무 서둘렀다는 비판이 있지 않습니까.
『뒤따라가는 것과 앞서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요』
―구 소련에게 경협자금 30억 달러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까.
『합리적인 수준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소련은 엄청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는데, 만일 소련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국제 정치 전반이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서방 국가들도 소련을 도와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소련도 자존심이 있는 나라고 워낙 자원 규모가 큰 나라 아닙니까. 문제는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약소국으로서 국제적인 역할을 별로 해본 일이 없다는 데도 있지요. 이제는 UN과 GATT에도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있으니 예전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국민들은 국내정치나 경제에 대해서 실감하고, 그 의미도 잘 파악하고 있는 데 비해 국방이나 외교에 대해서는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국제적인 역할을 해본 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족이라는 시각을 좀 더 넓혀야 합니다. 다른 나라들은 EC 통합의 경우처럼 이제 민족이라는 차원을 떠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민족국가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盧대통령과 金日成의 정상회담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밑에서는 행정차원의 권한밖에는 행사할 수 없으니 교착상태에 빠지기 쉽지만, 정상끼리 만나면 타결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정상회담이 무턱대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盧―金 정상회담을 위해 합의각서 핵문제 등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 않습니까.
『양보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차원에서 받아들인 것이지요』
―盧대통령의 주된 관심사는 주로 어느 쪽입니까.
『특별히 우선 순위를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안에 따라 다르지요. 대통령은 격무에 시달립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집무를 시작하는 것은 8시30분인데, 퇴청 후에도 서류를 가지고 가십니다. 저녁식사 후 9시부터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하지요. 취침시간은 대개 12시 이후입니다』
―盧대통령은 결단이 느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단순사회가 아니니 어떤 결정을 내리면 그 결정이 야기하는 결과가 상당히 큽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다가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결단 그 자체보다 결단의 결과를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더 큰 문제입니다. 권위주의적 결단과 민주주의적 결단의 차이에 대해 국민적인 이해가 좀 깊어졌으면 해요』
―대통령의 집무 스타일을 보면 朴대통령이 자기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에 비해, 全대통령과 盧대통령은 매우 바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한가하게 지내면서 중요한 일만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중요한 결단이 필요할 땐 대통령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저녁시간을 완전히 비워두고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는데, 그것은 의전실에서 조정합니다』
―대통령제의 문제는 결국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일을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먼저 사회의 여러 분야가 자리를 잡아야 그런 방법이 가능합니다. 결국 사회의 자율성이 커져 스스로의 힘이 생겨야 하는데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대통령의 업무량이 많아지지요. 어느 정치인이 지금까지 노대통령만큼 냉엄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감정에 좌우되는 일이 없습니다』
통일, 낙관하되 자만하지 말아야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있다보면, 대통령만이 알 수 있는 정보와 통찰력이 생길텐데, 盧대통령은 남북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독일통일이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겪게 되는 통일의 의미를 중요시합니다. 낙관하되 교만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결국은 흡수통일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동질성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동질성이라면, 정치와 경제부문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 자급자족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북한도 개방이 될 겁니다. 거기에 도움이 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두 개의 다른 체제가 통합될 수는 없습니다. 저쪽의 체질 변화를 유도하고, 구멍이 있으면 어디든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통일정책의 이중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입니까.
『대북한정책의 최대장애는 우리의 내부분열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지하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데, 운동권이 시끄러우니까 기다리다 보면 북한이 배짱을 부리게 됩니다. 앞으로 시간을 갖고 내부결속을 다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은 국민결속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합니다. 독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교훈은 상대방의 자존심을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안기부의 역대 북한국장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 결론은 북한이 앞으로 자체붕괴할 것인가 아니면 도발을 할 것인가로 요약됩디다.
『북한에서는 한국이 북한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밑으로부터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권부 내에서 일어납니다』
―북한 권부의 변화를 유도하려면, 친남한세력을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10·26식의 권력층 내부 암투 가능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지금 북한에서는 金日成에게 현 상황을 사실 그대로 보고하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단편적인 것으로 金日成의 신경을 건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한꺼번에 알게 된다면 모르지만….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니 金日成이 오판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金日成이 보고받지 못한 사실을 우연히, 하나 알게 돼 간부들을 모아놓고 호통을 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흘을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세금면에선 고대국가
―총리가 되신 후에는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와는 입장이 또 달라집니까.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비서실장은 간접 통제를 하지만 총리는 직접 통제를 합니다. 그 점이 차이지요. 저는 국무회의를 파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국무회의에 들어가기 전에는 비서실에서 사전준비를 해주는데 저는 그것을 가끔 무시하고 집행했습니다. 한번은 임금협상이 문제가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3월까지 5%로 끝내라고 지시했는데 3월 말이 되도록 지지부진하길래 이달 내로 끝내지 않으면 인사조치하겠다고 했더니 비서실에서 혼비백산했어요. 총리가 어떻게 인사문제를 가지고 운운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총리에게는 각료제청권이 있습니다. 盧대통령도 그 이야기를 듣고 [총리에게 제청권이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라고 했지요』
―6공의 장관들이 너무 단명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정가의 체질이 바라정치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고 하고 또 여기에 언론이 같이 밀고 나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행정개혁에 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관료에 대한 대우는 현실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총무처에서는 우리나라의 공무원 수가 적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공무원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 수를 줄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더라도 산업화에 적합한 새 기능에 맞게 재배치를 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봉급인데, 우리 경제의 20%를 차지하고 있다는 지하경제를 세원으로 잡을 수 있으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현대 국가의 기본은 국민개병제와 국민개세제 아닙니까. 세금 면에서 본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고대국가나 다름 없습니다』
―앞으로 책을 쓰실 계획은 없습니까.
『생각중입니다. 우선 그 동안 공부하던 걸 계속하는 의미에서 학문적인 쪽의 글을 쓸 수도 있겠고, 현실정치에서 경험한 것을 이론화하는 작업도 있을 수 있겠지요』
〈정리·姜仁仙 월간조선부 기자〉
인터뷰/盧在鳳의 盧泰愚 시대 정리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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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08, 1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