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운 것은 가짜 민주인사들과 좌익분자들이 아니다. 내년 8-15에는 '자유대한 60주년'을 기념해야.
민주항쟁20주년 기념 음악회
어제 아침 출근길에 서울시청앞 지하철역을 나서는데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광장에는 가설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나?’라고 생각하며 회사로 향했다.
저녁 퇴근길에 보니 서울시청앞 광장에서는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6-10민주항쟁 20주년 기념음악회’란다. ‘아, 그래서 아침부터 그 요란을 떨었던 것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잠시 멈춰 서서 음악회를 지켜보았다. 사회자는 제법 비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곳 서울시청앞 광장 무대 앞에는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가득하지만, 20년 전에는 최루개스가 가득했습니다. 조금 전 불렀던 ‘아침이슬’,‘늙은 군인의 노래’ 같은 노래들을 부르며... 이한열 열사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순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집에서 할 일을 하나 가득 싸 가지고 왔으면서도, 이 시간 프리존에 글을 올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건대사태- 운동권의 거짓말을 보다
20년 전 나는 대학2학년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86년부터 학생운동은 그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6-25 개전 초기 국군이 일시 해주를 점령했었다”면서 은근히 6-25북침설을 주장하거나,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니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을 입에 달고 다니는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문무대 입소 때에는 한참 소란을 떨고서야 문무대행 버스가 출발할 수 있었다. 그때 구호가 “양키 용병교육 반대!”였던가?
특히 1986년 가을에 있었던 ‘건대사태’는 내게 당시 학생운동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당시 건대 옥상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던 학생들의 구호는 “반공이데올로기 까부수자!“였다. 그 이전에도 대학가에서 ‘반공이데올로기=파쇼군사독재정권의 폭압논리’라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건대사태’는 글자 그대로 반공이데올로기를 까부수기 위한 도발이었다.
그들의 표어가 자극적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자극적’이었던 것은 경찰이 건대농성학생들에 대한 진압작전을 벌이던 날 내가 본 대자보였다. 그날 점심 무렵부터 ‘대자보’는 급박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몇 명이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거나, 경찰에게 떼밀려 죽었다거나 하는 얘기였다. 물론 그 뒤에는 ‘학우들이여, 궐기하자!’는 선동이 따랐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날 그들이 주장했던 것 같은 투신자살이나 추락사망사건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대자보가 붙은 것은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기 훨씬 전이었다.
스탈린의 숙청사를 읽다
고등학교 동문회가 열렸다. 술이 들어가면 노래를 불렀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떨어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젓가슴...”
그 숭고한(?) ‘광주민중항쟁’을 ‘광주사태’라고 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선배 하나가 찌개가 담긴 냄비를 던지려 하다가 옆에서 말리자 씩씩거리며 앉았다. 내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군가를 불렀다.
“피와 땀이 스며 있는 이 고지 저 능선에 쏟아지는 별빛은 어머님의 고운 눈길...”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의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 될 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화가 내가 알고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런 거짓말쟁이들이 ‘주인 되는 세상’은 소위 ‘군부독재’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맑스-레닌과 김일성 선집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스탈린의 숙청사를 읽었다. 나는 거기서 나름대로 이상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보려 했던 인간들이 벌거벗은 권력욕 앞에서 어떻게 굴절되고, 비겁해지고, 추해지는지를 보았다.
‘민주화’를 외치는 인간들이 만들어낼 세상이 거기 있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이북’을 고무찬양하는 대자보들을 보면 속이 뒤집혔다. 밤새 용공적 역사관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써서 게시판에 붙였다. 그걸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박종철의 죽음, 그리고 전방입소
1987년이 됐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기가 막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KBS와 MBC에서 애써 단신으로 처리하려 할 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고문치사임을 밝혀내고 있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밤늦게 돌아오는데 길바닥에 박종철 사건을 규탄하는 전단지가 뿌려져 있었다. 그것을 주워드는데, 누군가가 달려들었다. 사복경찰이었다. 그는 내 가방을 뒤져보더니 그냥 놓아주었다. 아마 내 얼굴이 앳되어 보인데다가, 가방 속에서는 성문종합영어책이 나왔기 때문에 고3이나 재수생정도로 본 모양이었다. 영어책 옆에 있었던 박홍립 경제학원론 책을 그가 눈여겨봤더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전방입소. 다시 한번 “양키 용병교육 반대!” 함성이 메아리쳤다. 양키용병교육이라니? 내겐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순례였다. 전방행 버스 안에 올라가 있는 나를 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초극우(超極右)네!”
4월말인데도 동부전선 최전방 고지에는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깊은 밤 철책선을 따라 1200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나의 적은 철책선 북쪽에 있었다.
비상총회, 수업거부
데모는 더욱 심해졌다. 학교 정문 앞에는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최루개스가 가시는 날이 없었다.
데모가 있는 날에는 단대별로 ‘비상총회’가 열렸다. 참석인원은 대개 100명 안팎이었을 것이다. 대개 의사정족수가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이라고 할 때, 1~4학년 전체학생수를 800명이라고 쳐도 전체 학생들의 총의를 물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였다.
나는 단대 비상총회 때면 그런 ‘절차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회의 사회를 보던 운동권 학생은 시계를 보며 “1시 반까지 학생회관 앞 광장에 집결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고 있다”고 했다.
“학생들 총의를 모으기 위해 비상총회를 열였다면서, 총회를 열기도 전에 집결시간부터 정했단 말이냐? 이 총회는 학생회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거냐? 당신들은 학우들을 ‘동원의 대상’으로밖에 안 여기는 거냐? 그렇다면 당신들이 전두환 정권과 다른 게 뭐냐?”고 따졌다. 하지만 그건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내가 하도 딴지를 거니까 운동권 상급생이 내게 주먹을 날리려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주위 사람들이 말린 덕분에 맞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는 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진정성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데모가 심해지면서 수업거부도 잦아졌다. 강의실에 운동권 학생이 들어와서 칠판에 ‘수업거부!’라고 써 놓고 나가면 그게 곧 법이었다. 학생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몰려 나갔다.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들은 텅 빈 강의실을 보며 망연자실해 했다.
내가 볼 때 그건 교수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최소한 누군가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교수님께 “이러이러한 사유로 수업거부를 한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양해을 구해야 했다. 나는 ‘범생이’ 친구 2~3명과 강의실을 지키고 있다가, 교수님이 들어오시면 사정을 말씀드리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의를 강행하는 교수님은 없었다.
박종철 사건은 그냥 끝나지 않았다. 사건 축소은폐가 드러난 것이다. 평생 공산당과 싸워왔고, 김일성이 여러 차례 암살하려 했다는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담당 차장을 비롯해 대공경찰관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 그렇게 대공경찰이 망가지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그해 6월
6월. 평소 도서관에서 공부 열심히 하던 친구들까지 스크럼을 짜고 가투에 나섰다. 매일 아침 일부러 본관 앞에 들려 태극기를 우러르며 조국의 안녕을 빌었다.
6-10대회가 끝나고 며칠 후, 옛날에 아버지께서 다니시던 회사에 볼 일이 있어 들렸다. 옛날에 아버지 밑에서 근무했다는 직원이 걱정과 기대가 엇갈리는 표정으로 “어떻게 될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6-29선언. ‘이젠 됐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국민의 직선으로 선출되는 새 정부는 당당하게 좌익세력들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29선언 며칠 후 이한열이 죽었다. 그는 박종철처럼 죽어서 ‘열사’가 됐다. 이한열을 마지막으로 보내던 날, 노제는 거창했다. 하지만 이미 6-29선언으로 뇌관은 제거된 뒤였다. 운동권 학생들은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
“아깝다. 며칠 먼저 죽었으면, 이 정권을 그대로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한 인간의 생명조차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노태우 당선, 그리고 선동과 거짓말
후보단일화를 약속했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요상하게 말을 바꾸더니 결국 따로따로 출마했다. ‘비판적 지지론’이니 ‘민중후보론’이니 하는 소리가 나돌아다녔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부정투표에 항의하는 시민 궐기 발생.”
“시위진압에 나선 소방대가 소방용 갈고리로 시민들 찍어 죽였다.”
“공수부대, 광주로 출동!”
‘건대사태’ 때처럼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교문 앞에서 만난 친구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게 말이 되냐! 반드시 제2의 4-19가 일어날 것이다”라며 흥분했다. ‘4자 필승론’을 내세우며 승리를 장담했던 김대중은 대선에서 2등도 아니고 3등에 그치자 ‘컴퓨터 조작설’을 유포했다. 하지만 ‘제2의 4-19’는 발생하지 않았다.
1988년. 이제는 ‘세상이 조금 조용해지려나’ 싶었는데, 남북학생회담 얘기가 튀어나왔다. 대학동기들은 홍제동 도로를 점거하고 누워서 연좌농성을 했다.
‘위수김동’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이 북한에 다녀왔다. 물태우가 ‘공안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용공분자들을 척결하겠다고 나섰지만, 그 때 뿐이었다.
20년 후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그때의 386들은 이제 40대가 됐다. 이인영, 우상호, 임종석 등 당시 총학생회장급으로 활동했던 운동권들은 금뱃지를 달았다. 지하에서 활동하던 운동권들 가운데 몇몇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공로로 청와대 비서관이 됐다. 그들 가운데 하나는 청와대 여직원과 정분이 나서 운동권 출신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
그때 부산에서 요트를 즐기다가 우연찮게 운동권 변호를 맡아 ‘운동권’이 된 변호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에서 팔리던 조악한 북디자인의 이념서적에 담겨 있던 역사관과 세계관은 이제 잘 꾸며진 교과서 속으로 들어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박종철 사건을 보도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수구꼴통’으로 낙인찍혀 세무사찰을 받고 사주는 감옥에 갔다왔다. 그때 ‘땡전뉴스’의 본산 KBS에 있던 이 아무개는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되고, MBC의 정 아무개는 여당 의장과 장관을 거쳐 대통령 자리를 넘보고 있다. KBS와 MBC, 서울신문은 그때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
박종철의 죽음에 그토록 분노했던 신부와 목사와 승려들은 북한의 기아와 고문과 납치에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매일 상대 앞 화단에 앉아 열심히 ‘꽃병(화염병)’을 만들던 고교 동창은 “졸업하면 직업혁명가가 되겠다”더니 수백, 수천억원대의 부동산을 주무르는 외국계 부동산개발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나를 놀리느라고 그런지는 몰라도 여전히 ‘혁명’과 ‘진보’를 얘기한다. 그에게 나는 ‘한 줌도 안 되는 수구파시스트’ 중의 하나다.
서울대 재학 시절 과격한 운동권으로 알려졌던 고등학교 동창은 지금 모재벌그룹 산하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보다 두 배 이상 더 버는 그는 여전히 “6-25개전 초기에 국군이 해주를 점령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한다.
1987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다는 직장 후배는 “ 그 당시에는 분노하는 것이 정상 아니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분노’에 동참하기에는, 그 ‘분노’를 조장하는 자들의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거짓말쟁이였고, 비민주적이었으며, 인간을 목적이 아닌 ‘운동의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사람 사는 세상’을 노래했지만, 그들이 만들려는 세상은 노래와는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았다. 그 당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는 인간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 20년 동안 탐욕과 무능과 독선과 아집을 드러냈다. 김일성-김정일의 하수인이라는 그들의 마각을 여지없이 드러낸 자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입과 속내는 여전히 불그죽죽한 인간들의 이중성도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20년 전 대학 안에서 ‘비주류’였던 나는 사회에 나와서도 ‘비주류’다. 흔히 하는 말로 ‘수구꼴통’이라던가?
하지만 부끄러움도, 후회도 없다. 나는 적어도 20년 전 대학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최소한의 일관성은 지키고 있다. 나는 대학 시절 내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했고, 지금도 내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동하고 있다. 말 따로, 생활 따로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지금은 비록 잠복해 있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결국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고, 이 나라를 번영과 자유통일로 이끌리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나를 떳떳하게 하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운동권의 실체, 그리고 그들이 ‘주인 되는 나라’의 모습은 지금 여실히 드러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다고 자랑하는 대통령은 바로 그 ‘6월 민주항쟁’의 산물인 대한민국 헌법을 ‘그 놈의 헌법’이라며 짓밟았다. 그 순간 그는 이미 그가 비난해왔던 ‘군부독재자’들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헌법을 무시하고 김정일과 야합한 김대중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운동권 핵심에 있었던 이들 가운데 마음을 돌린 이들이 “그 때 우리는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고 자복하고 있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오늘날 20년 전 ‘6월 민주항쟁’을 자신들의 것으로 전유하려는 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애초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었다고. 또 그들 가운데 상당수에게 있어 ‘직선제 개헌 쟁취’나 ‘민주화’는 ‘공산화’로 가는 길에 스쳐가는 ‘간이역’에 불과했다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킨 사람들
그렇다고 이 땅의 민주주의가 저절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김광동 나라정책원장의 적절한 지적처럼 이 땅의 민주주의는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간단없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발전해 왔다. 국민주권과 복수정당제 등 민주주의의 제(諸) 원리가 단절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땅의 민주주의는 1961년 이후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난 60년간 공장에서, 광산에서, 새마을 운동의 현장에서, 월남의 전쟁터에서, 열사의 사막에서 이 나라의 부(富)를 일구어낸 이들이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는 1987년 6월,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넥타이부대’ 못지않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애덤 쉐보르스키와 페르난도 리몽키의 연구를 토대로 “1인당 국민소득 3000~6000달러의 소득 수준에서 민주주의 전환을 시도한다면 성공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한국의 민주화는 ‘도덕의지’의 산물, 다시 말해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투쟁의 산물이라는 한국 민주인사들의 주장에 대해 일견 수긍하면서도 이렇게 반문한다.
“그러나 우간다와 벨로루시, 그리고 이집트는 결의에 찬 도덕적 명사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의 운동가들도 1960,1970,1980년대에 모두 실패했다. 실제로 반체제 인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그 당시 대부분 기간 동안 투옥되어 있었다. 왜 그가 1970년대에는 실패했으며, 1990년대에는 성공했는가? 그가 1990년이 되자 갑자기 ‘도덕의지’를 갖게 되었는가?”
아울러 1945년 이래 자유수호전선에서 산화한 군인들, 6-25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린 5만여 미군과 유엔군들 역시 한국 민주주의의 공로자들이다. 특히 1950년 6-25 발발 직후 대한해협에서 인민군 무장병력수송함을 격침시켜 부산교두보를 지켜낸 백두산함의 해군장병들의 공로는 특기해야 마땅하다. 2002년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여섯 해군장병들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각종 폭력시위에 맞서다가 죽거나 다친 경찰과 전경들도 민주한국의 공로자들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전선을 지키고 있는 60만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이야말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가장 든든한 수호자들이다.
이상의 사람들이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켜 온 사람들이다.
이 밤 나는 꿈을 꾼다. 어제 저녁 ‘6-10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하던 저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내년 8월15일에는 지난 60년 동안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투쟁해온 모든 사람들, 즉 6-25와 월남전 참전용사들, 전몰장병 유가족들, 상이군경들, 6-25와 그 이후의 납북자 가족들, 개발연대의 산업전사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분투해온 ‘민주인사’들, 그리고 지난 10년간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맞서 싸워온 '자유투사'들이 모여 우리가 뽑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함께 ‘자유대한 60주년 기념식’을 치르는 꿈을,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애국가를 부르는 꿈을.....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킨 사람들
- 강철군화(프리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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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11, 12: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