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불자조(鏡不自照). 거울은 항상 남의 것만 비춰주고 자기 모습은 볼 수 없다는 슬픈 경구다.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뇌물을 받아 배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답지 못하게 됩니다.”
조선 왕조 명종 5년(1555)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선무랑(宣務郞)으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되자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에게 올린 사직상소문(辭職上疏文)의 요약이다. 지금 읽어봐도 시공을 뛰어넘어 간담을 서늘케 하는 강직한 선비정신의 면모가 번뜩이고 있다. 산천초목도 벌벌 떨게 할 비장함이 감돌고 있다.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충정이 구구절절 배어 있다.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가 임금이 벼슬자리를 내려줬는데도 감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도 단순한 관직의 사양이 아니다. 국정의 문란함과 도탄에 빠져 있는 민생의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임금의 처신이 어떠해야 함도 목숨 걸고 읍소했다. 어명이 곧 법이요, 임금의 말씀이 곧 법도였던 왕조시대에 추상같은 어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불충이요, 불경이다. 군주에 대한 불충과 불경의 결과가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는 불 보듯 뻔한 그 시대에 임금이 내린 벼슬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남명의 용기와 기백이야말로 살아 있는 선비정신의 귀감이라 하겠다. 벼슬길에 들어서는 것은 본인으로서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보장되는 것이다. 자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조상으로서의 명예를 누대에 걸쳐 가지게 하는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내린 관직을 미련없이 반납하고 무너져가는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바로잡으라고 직소한 남명의 당당한 기개는 청사에 빛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높은 벼슬자리를 바란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다만 그 옛날에는 지조 있고 절개 있는 선비들이 관직을 미련 없이 내버릴 줄도 알았다. 직언도 서슴없이 했지만 요즘은 그런 관리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줄서기에 분주하고 자화자찬 뿐이다. 내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 정신이 없다.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고 국정의 난맥상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데도 책임지기는커녕, 변명하고 덮어씌우기에 능숙하다. 만백성을 품어 안아야 할 높은 어른께서는 편가르기에 열심이고 군주를 받들어 나라를 잘 이끌어 가야 할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첨하기 바쁘다. 남명이 걱정했던 450여년 전의 세상과 오늘의 시대 상황이 다른 바 무엇인가? 나라꼴은 혼란스럽고 지도자가 된 사람이나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나 가릴 것 없이 진정한 지도자상의 면모를 찾아 보기 어렵다.
남명은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온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나라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을 바로 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라”고도 했다.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워야 하고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고도 했다.
남명은 전하께 물었다.
학문을 좋아 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 하십니까?
소인을 좋아 하십니까?
푸른 대궐 어른께 국민들이 물어본다.
취임당시 천명한 국정지표인
“원칙과 신뢰”는 실천하고 있습니까?
“공정과 투명”은 지키고 있습니까?
“대화와 타협”은 잘하고 있습니까?
“분권과 자율”은 약속대로 시행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이 또 물어본다.
“언론이 그렇게도 밉습니까?”
언론의 기본사명은 감시기능과 사회통합기능, 문화예술의 전수기능이다. 요즘 한창 세상이 시끄러운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선진화는 모범적이고 앞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앞서가고 모범적인가? 억지 주장은 아닌가? 취재원 접근권 봉쇄 정책은 언론자유의 기본을 짓밟는 것이다. 언론으로부터 권력행사에 대한 감시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을 감시견(Watch dog)에 비유하고도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언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캄캄한 암흑이요, 답답한 지하 동굴이 되고 말 것이다. 기자실에 대못이 박히는 날 한국 언론은 조종이 울리고 말것이다. 언론이 눈감으면 누가 권력남용을 감시해 줄 것인가? 누가 부정부패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 줄 것인가? 짖지도 않는 개들이 해 줄 것인가? 민주 언론 운동을 내세우는 사이비 시민단체가 해 줄 것인가?
그래도 언론은 민주사회를 밝혀 주는 등대와 같은 것이다. 취재원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도 종군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다. 취재현장을 찾아가는 기자의 발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권력지향적인 철부지 언론인들에게 권력을 맛보게 하고 그런 언론계 출신 관료로 하여금 언론활동에 재갈을 물리게 하는데 앞장서게 한 처사는 부끄러운 것이다. 역대 정권에 참여한 언론계 출신 관료나 공공기관의 간부들이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언론탄압에 용감히 앞장섰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것이 우리 언론 역사의 슬픈 부분이다. 권력이란 아편과 같은 것, 권세 또한 몰핀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폐인이 되고 만 그들의 말로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 불쌍한 무리들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고 있으니 가련할 뿐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자신이 사육신과 같은 존재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사육신은 왕권찬탈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다가 떳떳하게 죽음을 택한 절의지신(節義之臣) 들이다. 권력을 감싸고 도는 시종들이 감히 자신을 어떻게 사육신에다 견주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후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자만인가? 무지인가? 만용인가? 권력이 그렇게 길들여 놓았는가? 경거망동이다. 가소롭다. 무엄하다.
견공(犬公)에 대한 사자성어가 이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회자되고 있다.
주구천하(走狗天下). 들판을 달리며 먹이를 물고 오는 사냥개들 세상이다.
분견분탕(糞犬焚蕩). 잡종견들이 먹이 찾아 분탕질하며 헤매는 썩어빠진 세상이다.
맹견주의(猛犬注意). 사나운 개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다.
광견폭주(狂犬暴走). 미친개들이 한낮의 도심을 설치고 다닌다.
분견에게는 먹이감만 주면 짖어대지 않고 엎드려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사나운 개는 훈련을 받았으니 주인의 지시가 있을 때만 물어 뜯고 짖어댄다. 그러나 미친 개는 훽 돌아 버렸으니 아무 것이나 물어 뜯고 짖어대며 길거리를 설쳐대니 위험천만이다. 하루살이 부나비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
권불십년이 권불오년이 됐다. 대통령 임기가 그렇다. 화무십일홍이 화무오일홍이다. 공해오염 때문이다.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은 먹이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하이에나'를 보여준다. 줄무늬 말을 향해 사납게 덤벼드는 호랑이의 모습도 보여준다. 숨을 할딱거리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노루의 불쌍한 모습. 약육강식의 비정한 먹이 사슬, 무시무시한 살풍경, 이것이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고대광실 높고 높은 어른이여! “입을 다물고 비판을 자제하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을 절대 가까이 하지 마시라.
권력 앞에서 알랑거리는 패거리들은 먹을 것이 없어지고 나면 소식도 없이 사라질 배역의 갈가마귀 떼가 되고 말 것이다.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찾아내는데 언론의 역할은 막중하다. 이 시대를 잘못 이끌어 가고 있는 자칭 지도자들의 빗나간 인식과 행동은 과연 누가 바로잡아 줄 것인가? 깨어있는 백성과 언론뿐이란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푸른 대궐 높은 어른이시여!
남명 같은 큰 어른이 이 시대에 없음을 한탄하시라! 통곡하시라!
남명은 목숨 걸고 엎드려 읍소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 만약 하루라도 새로운 정신으로 깨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는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경불자조(鏡不自照).
거울은 항상 남의 것만 비춰주고 자기 모습은 볼 수 없다는 슬픈경구다. 깊이 새겨볼 일이다.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뇌물을 받아 배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에게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 답지 못하게 됩니다.”
조선 왕조 명종 5년(1555)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선무랑(宣務郞)으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되자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에게 올린 사직상소문(辭職上疏文)의 요약이다. 지금 읽어봐도 시공을 뛰어넘어 간담을 서늘케 하는 강직한 선비정신의 면모가 번뜩이고 있다. 산천초목도 벌벌 떨게 할 비장함이 감돌고 있다.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충정이 구구절절 배어 있다.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가 임금이 벼슬자리를 내려줬는데도 감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도 단순한 관직의 사양이 아니다. 국정의 문란함과 도탄에 빠져 있는 민생의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임금의 처신이 어떠해야 함도 목숨 걸고 읍소했다. 어명이 곧 법이요, 임금의 말씀이 곧 법도였던 왕조시대에 추상같은 어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불충이요, 불경이다. 군주에 대한 불충과 불경의 결과가 어떻게 돌아올 것인가는 불 보듯 뻔한 그 시대에 임금이 내린 벼슬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남명의 용기와 기백이야말로 살아 있는 선비정신의 귀감이라 하겠다. 벼슬길에 들어서는 것은 본인으로서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이 보장되는 것이다. 자손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조상으로서의 명예를 누대에 걸쳐 가지게 하는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내린 관직을 미련없이 반납하고 무너져가는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바로잡으라고 직소한 남명의 당당한 기개는 청사에 빛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높은 벼슬자리를 바란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다만 그 옛날에는 지조 있고 절개 있는 선비들이 관직을 미련 없이 내버릴 줄도 알았다. 직언도 서슴없이 했지만 요즘은 그런 관리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가 줄서기에 분주하고 자화자찬 뿐이다. 내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 정신이 없다.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고 국정의 난맥상이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데도 책임지기는커녕, 변명하고 덮어씌우기에 능숙하다. 만백성을 품어 안아야 할 높은 어른께서는 편가르기에 열심이고 군주를 받들어 나라를 잘 이끌어 가야 할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첨하기 바쁘다. 남명이 걱정했던 450여년 전의 세상과 오늘의 시대 상황이 다른 바 무엇인가? 나라꼴은 혼란스럽고 지도자가 된 사람이나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나 가릴 것 없이 진정한 지도자상의 면모를 찾아 보기 어렵다.
남명은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온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나라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을 바로 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라”고도 했다.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워야 하고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고도 했다.
남명은 전하께 물었다.
학문을 좋아 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 하십니까?
소인을 좋아 하십니까?
푸른 대궐 어른께 국민들이 물어본다.
취임당시 천명한 국정지표인
“원칙과 신뢰”는 실천하고 있습니까?
“공정과 투명”은 지키고 있습니까?
“대화와 타협”은 잘하고 있습니까?
“분권과 자율”은 약속대로 시행하고 있습니까?
백성들이 또 물어본다.
“언론이 그렇게도 밉습니까?”
언론의 기본사명은 감시기능과 사회통합기능, 문화예술의 전수기능이다. 요즘 한창 세상이 시끄러운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선진화는 모범적이고 앞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연 앞서가고 모범적인가? 억지 주장은 아닌가? 취재원 접근권 봉쇄 정책은 언론자유의 기본을 짓밟는 것이다. 언론으로부터 권력행사에 대한 감시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을 감시견(Watch dog)에 비유하고도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언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캄캄한 암흑이요, 답답한 지하 동굴이 되고 말 것이다. 기자실에 대못이 박히는 날 한국 언론은 조종이 울리고 말것이다. 언론이 눈감으면 누가 권력남용을 감시해 줄 것인가? 누가 부정부패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 줄 것인가? 짖지도 않는 개들이 해 줄 것인가? 민주 언론 운동을 내세우는 사이비 시민단체가 해 줄 것인가?
그래도 언론은 민주사회를 밝혀 주는 등대와 같은 것이다. 취재원을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도 종군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다. 취재현장을 찾아가는 기자의 발길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권력지향적인 철부지 언론인들에게 권력을 맛보게 하고 그런 언론계 출신 관료로 하여금 언론활동에 재갈을 물리게 하는데 앞장서게 한 처사는 부끄러운 것이다. 역대 정권에 참여한 언론계 출신 관료나 공공기관의 간부들이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언론탄압에 용감히 앞장섰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것이 우리 언론 역사의 슬픈 부분이다. 권력이란 아편과 같은 것, 권세 또한 몰핀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폐인이 되고 만 그들의 말로를 우리는 보고 있다. 그 불쌍한 무리들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고 있으니 가련할 뿐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자신이 사육신과 같은 존재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사육신은 왕권찬탈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다가 떳떳하게 죽음을 택한 절의지신(節義之臣) 들이다. 권력을 감싸고 도는 시종들이 감히 자신을 어떻게 사육신에다 견주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후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자만인가? 무지인가? 만용인가? 권력이 그렇게 길들여 놓았는가? 경거망동이다. 가소롭다. 무엄하다.
견공(犬公)에 대한 사자성어가 이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그리고 회자되고 있다.
주구천하(走狗天下). 들판을 달리며 먹이를 물고 오는 사냥개들 세상이다.
분견분탕(糞犬焚蕩). 잡종견들이 먹이 찾아 분탕질하며 헤매는 썩어빠진 세상이다.
맹견주의(猛犬注意). 사나운 개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다.
광견폭주(狂犬暴走). 미친개들이 한낮의 도심을 설치고 다닌다.
분견에게는 먹이감만 주면 짖어대지 않고 엎드려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사나운 개는 훈련을 받았으니 주인의 지시가 있을 때만 물어 뜯고 짖어댄다. 그러나 미친 개는 훽 돌아 버렸으니 아무 것이나 물어 뜯고 짖어대며 길거리를 설쳐대니 위험천만이다. 하루살이 부나비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
권불십년이 권불오년이 됐다. 대통령 임기가 그렇다. 화무십일홍이 화무오일홍이다. 공해오염 때문이다.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은 먹이를 찾아 들판을 헤매는 '하이에나'를 보여준다. 줄무늬 말을 향해 사납게 덤벼드는 호랑이의 모습도 보여준다. 숨을 할딱거리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노루의 불쌍한 모습. 약육강식의 비정한 먹이 사슬, 무시무시한 살풍경, 이것이 이 시대의 자화상이다.
고대광실 높고 높은 어른이여! “입을 다물고 비판을 자제하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을 절대 가까이 하지 마시라.
권력 앞에서 알랑거리는 패거리들은 먹을 것이 없어지고 나면 소식도 없이 사라질 배역의 갈가마귀 떼가 되고 말 것이다.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찾아내는데 언론의 역할은 막중하다. 이 시대를 잘못 이끌어 가고 있는 자칭 지도자들의 빗나간 인식과 행동은 과연 누가 바로잡아 줄 것인가? 깨어있는 백성과 언론뿐이란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푸른 대궐 높은 어른이시여!
남명 같은 큰 어른이 이 시대에 없음을 한탄하시라! 통곡하시라!
남명은 목숨 걸고 엎드려 읍소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다. 만약 하루라도 새로운 정신으로 깨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는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경불자조(鏡不自照).
거울은 항상 남의 것만 비춰주고 자기 모습은 볼 수 없다는 슬픈경구다. 깊이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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