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언 대통령 이어 폭행 대통령?

자신의 兄과 관련된 私的인 일로 부하 공무원을 폭행한 이해찬씨는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가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오늘 이해찬 전 총리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폭언에 시달린 국민들은 다음 차례엔 폭행 前歷이 있는 대통령을 맞을 것인가? 공직자의 폭행은 受賂(수뢰)보다 더 나쁘다.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은 그 순간은 짐승이다. 자제력이 부족하여 짐승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인간이 국군통수권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 正義의 폭행이라면 정상은 참작된다.

자신의 兄과 관련된 私的인 일로 부하 공무원을 폭행한 이해찬씨는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가 '폐를 끼치는 인간이 되어선 안된다'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그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고 한다. 누가 검증을 했던가? 유권자들이 새디스트가 아니라면 이해찬씨를 대통령으로 뽑을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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兄의 일로 부하 공무원 폭행한 이해찬


『의자에 앉아 있던 李부시장이 무릎 꿇은 직원을 향해 책인지 서류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뭔가를 집어던졌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가 한 차례의 손찌검을 하는 겁니다. 그 순간 감사관이 달려들어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며 말렸어요. 그런 후 李부시장은 「이자들 재산등록 서류 가져와」 하더군요. 그런 후 감사관에게 「내일 당장 송파구 특별감사 해」라고 했습니다.』

월간조선

서울시 부시장 시절 私的인 일로 공무원을 때린 이해찬 전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이 좋아하는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금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을 향하여 명패를 던진 사람이니 그런 李 총리를 좋아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재벌회장이 보복폭행을 했다고 온 나라가 야단이다. 전 총리가 私的인 일로 공무원을 폭행한 것은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아닐까? 폭행과 폭언을 쓰는 인간은 절대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어선 안된다. 자제력을 잃는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져선 안된다.

더구나 사적인 일로 공무원을 때린 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이 나라는 차라리 組暴 두목을 대통령으로 모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직 대통령을 향해서 명패를 던진 국회의원을 정치적으로 매장시키지 못한 국민들은 나중에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건망증이 많은 유권자들이 부하를 때린 총리를 대통령으로 뽑는 사태가 또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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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05년


李海瓚의 暴言·暴行 사례 연구

서울시 副시장 시절, 兄의 부동산 등기件으로 구청 공무원 뺨을 때렸다!



주먹 휘두르기, 물컵 던지기, 暴言·暴行에 관한 증언 이어져…그는 과연 公人의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1987년 민통련 시절 기자의 뺨을 때린 적이 있느냐」는 야당 의원의 서면 질의에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라고 서면 답변

白承俱 月刊朝鮮 기자 (eaglebsk@chosun.com)

『차떼기 하지 않았습니까』


#장면 1: 2004년 10월28일 국회 본회의장

<李海瓚 총리: 한나라당은 지하실에서 차떼기 하고, 수백억 들여온 정당 아닙니까.

安澤秀 의원(한나라당): 흠없는 정당, 정부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李海瓚: 차떼기 하지 않았습니까.

安澤秀: 작은 부분을 가지고 평가하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李海瓚: 한나라당은 다수의 위력으로 다른 의원들의 투표를 방해하면서 대통령을 탄핵하지 않았습니까.

安澤秀: 답답하고 편협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李海瓚: 의원님 생각은 자유입니다.

安澤秀: 망언에 대해 총리는 어떤 책임을 지겠습니까.

李海瓚: 책임질 사안은 없습니다>

#장면 2: 1998년 4월22일 국회 교육委 회의장

<金貞淑 의원(한나라당): 요즘 정부기관에 임명되고 있는 人事, 특히 국영기업체의 人事를 볼 때 이런 지적(호남편중 인사)이 많기 때문에 교육부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거고, 계속 이런 人事를 하실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중략).

李海瓚 교육부 장관: (중략) 이 자리에서 全羅道다, 이런 얘기를 하신다는 것은 대단히 불쾌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金貞淑: 바깥 여론이 정말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李장관께서 사과하라는 그 내용은 사과를 할 수 없습니다.

李海瓚: 교육부가 언제 호남편중 인사를 했습니까. 제가 들어와 가지고 人事한 사람이 차관하고 재단 이사장하고, 그 다음에 두 사람은 따로 제가 청와대에 신청했는데, 두 사람은 경상도고 두 사람은 호남입니다.

金貞淑: 조사를 해봤는데 (그분들이)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50%는 전문성이 있고, 50%는 도덕성과 기타 등등 이야기를 하시는데 50%의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주장도 인정을 하셔야 될 것 아닙니까, 무슨 사과입니까.

李海瓚: 호남이기 때문에 人事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金顯煜(김현욱) 교육위원장: 장관, 조금 진정하시고…>

국회 본회의장에서 야당 의원을 향해 『한나라당이 차떼기 정당 맞지 않느냐』고 날카롭게 맞섰던 李海瓚 총리 때문에 국회가 13일간 공전됐다. 하지만 이게 처음은 아니다. 그는 교육부 장관 시절 한나라당 의원에게 「호남편중 인사」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다가, 국회 교육위원회를 22일간 공전시킨 前歷(전력)이 있다.

그는 지난 11월9일 등 떼밀리듯 사과를 했다. 「謝意」라는 단어를 사과의 뜻으로 써 가면서.

李海瓚 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政局돌파용이라는 게 첫 번째 해석이다. 盧武鉉 대통령이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진하겠다』는 遷都(천도)가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판결이 나오자, 코너에 몰린 정권을 구하기 위해 총대를 멨다는 것이다.


원칙과 성깔

『독선적인 성격에서 나온 자연스런 발언』이라는 게 두 번째 해석이다. 李총리의 운동권 선배이자, 오랫동안 의정활동을 한 정치인은 이렇게 얘기했다.

『李海瓚 총리의 성격을 안다면 「李海瓚 총리가 총대를 멨다」는 식의 얘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위아래」가 없다. 심하게 말하면 안하무인이다. 국회의원이 깐깐하게 따지는데, 쉽게 물러설 성격이 아니다. 그가 총리로 있는 동안 국회의원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李海瓚 총리의 취임과 동시에 그를 분석한 책이 출간됐다. 10년 이상 정치권을 취재해 온 한겨레신문 박창식 기자는 수 차례의 인터뷰와 주변인물 취재를 토대로 「쿨하게 출세하기」라는 李海瓚 비평書를 냈다.

朴기자는 李총리가 대중적 인기가 낮으면서도 5選 국회의원·장관·총리를 했다는 점에 착안해 「이해찬式 출세비법」을 추적했다. 그는 李총리의 성공원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일찌감치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한 우물을 팠다. 그는 재야운동을 할 때도 자신의 출신 성분을 살려 지식인 정치운동에 충실했다. 13代 초선의원 시절 야당통합 운동에 팔을 걷어붙였다가 쓴맛을 본 뒤로는 조직운동과 같은 「외도」는 하지 않았다. 李海瓚이 기획가로 성공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그는 문제의 핵심을 빨리 파악하는 知的 능력을 발휘해 왔다. 그는 계획성 있게 일을 꾸려가는 데도 강했다. 그는 일하는 방식이 필요할 때 딱 잘라 매듭짓는다는 특징도 있다>

李총리의 보좌관·지구당 사무국장 출신으로 12년간 그를 옆에서 지켜봤던 김석철(44)씨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李총리는 원칙적이고 私心이 없으며 기획력이 뛰어나다. 정치적 상황 판단력도 뛰어나다. 여러 정보들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해 예상했던 대로 맞아떨어진 경우가 많다. 수리력과 기억력, 추진력도 뛰어나다. 그는 「公人은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남에게도 엄격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

朴기자는 李총리의 정치적 실패 사례도 분석했다.

<그의 실패 사례는 13代 국회의원 시절 야당통합 운동을 벌이다 탈당한 후 무릎 꿇고 다시 복당한 일, 원내총무 경선이나 최고위원 선출에 도전했다가 물먹은 일, 교육부 장관 시절 교원단체들한테 원성을 사다가 끝내 장관 퇴진운동까지 벌어진 일 등이 그것이다. 그는 기획가와 정책가로서의 재능 이상을 요구하는, 대중적 동의를 끌어내는 조직가와 협상가적 재능을 요구하는 일들에서 실패했다>

「쿨하게 출세하기」에 나타난 李海瓚 총리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李총리는 公과 私를 확실히 구분한다. 즉 정치인, 公人으로서 公的 서비스에 만전을 다한다. 公的 서비스로 평가하고, 사사로운 서비스로 평가하지 마라. 私的인 요구를 해봤자 국물도 제공할 생각이 없다>


「인간성이 모나거나 나쁜 쪽」

李총리 보좌관 출신 김석철씨는 李총리의 公私구분 원칙을 실천한 사례를 들려줬다.

『李총리가 교육부 장관 때였다. 하루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 아저씨의 아들은 부부교사였다. 이 부부교사는 근무지가 달라 서로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李장관에게 「아들 부부가 같이 살 수 있도록 근무지를 변경해 달라」고 부탁했다. 李장관은 가능한지 여부를 알아봤다. 그런데 아들 부부가 근무 연한이 미달돼 전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李海瓚 총리는 나름대로 성공했다.

파벌이 중시되던 3金시대에도 그는 특정 그룹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 주요 당직과 부처 장관을 경험했다. 「성격이 좋지 않다」는 평가가 계속 이어졌지만, 그는 5選 의원이 됐다. 젊은 시절 「민청학련 사건」(1974)과 「金大中 내란음모사건」(1980)에 연루돼 3년 5개월 동안 복역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했다.

일부 야당의원과 재야운동가들이 5·6共 때 수시로 감옥을 넘나들던 것과는 달리 그는 1982년 출옥 이후 투옥된 적이 없다.

李총리는 2002년 大選 당시 민주당 선대기획본부장을 맡아 盧대통령의 당선에 核心역할을 했다. 盧정권 출범 당시 국정원장 자리를 거절했던 그는 현재 행정부의 총괄책임자이다.

「쿨하게 출세하기」는 李총리의 성격에 대해 「인간성이 모나거나 심하게 말하면 나쁜 쪽」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평판은 숱한 사건이 점철되면서 쌓인 것으로 보인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 李총리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형의 부동산 매입 건으로 구청 관계자 호출

李총리가 서울市 정무부시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서울市 송파구청 재무국장이던 鄭泰福(정태복·70)씨는 1995년 12월18일 「李海瓚 정무부시장실」에서 발생한 그날의 사건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국장인 나를 포함해 담당과장·계장·직원이 李부시장실로 불려갔습니다. 李부시장의 형이 대기업에 다니다가 퇴직금으로 송파구 가락동 근처에 7억8000만원짜리 건물을 구입했지요. 그런데 부동산 등기과정에서 행정적 착오가 있었어요. 그게 문제가 됐습니다』

―무슨 문제였습니까.

『건물價額(가액)과 토지價額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관한 것이었지요. 금액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세금이 달랐습니다. 우리 직원과 李부시장의 형 측과 견해가 달랐어요』

―형이 부동산을 구입했는데 왜 李부시장이 나섭니까.

『정무부시장실에서 근무하던 한 비서관이 우리 구청 담당 계장에게 전화를 했어요. 「건물을 구입한 사람이 李부시장의 형이니까 잘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지요. 형이 아마도 동생에게 얘기를 했겠죠. 전화를 받은 계장은 신경을 썼지만 담당직원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예요』

―무슨 실수였습니까.

『법원 등기소에서 등기를 하는 과정에서 서류가 반려됐어요. 알고 보니 토지가액과 건물가액을 합한 액수가 서로 달랐던 거지요. 계산上의 착오였습니다. 담당과장 전결 사항이었는데 더하기를 잘못 했던 겁니다. 바로 수정조치를 해서 등기가 완료되기는 했습니다』

―큰 실수였나요.

『담당직원이 잘못한 건 맞지요. 그러나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李부시장실에 왜 갔습니까.

『저는 그날 오전에 區의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당과장이 「빨리 부시장실로 가자」며 저를 찾아왔어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상황을 설명하더군요. 「서류를 가져오라」고 한 후 직접 확인해 봤어요. 담당직원의 실수가 한눈에 들어왔고, 납득이 가는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나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李부시장이) 국장까지 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李부시장에게 서류를 보여주며 설명을 하면 충분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고 곧장 달려갔습니다』


『사람이 순간적으로 돌변』

―李海瓚 정무부시장과 송파구청 소속 鄭선생과는 어떤 관계라고 봐야 할까요.

『업무상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요. 저와 상하관계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서울시가 우리 구청에 대해 감사권을 가지고는 있지요』

―李부시장실에 간 게 몇 시였습니까.

『오후 1시쯤이었어요. 李부시장이 부재 중이라 부속실에서 한 30분쯤 기다렸더니 그가 들어오더군요. 담당직원을 제외하고 저와 과장, 계장이 부시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차분히 설명하니까 李부시장이 이해를 하던가요.

『가져간 서류를 펴 놓고 설명을 하려던 순간 李부시장이 갑자기 반말로 제게 「네가 뭔데, 얼마 받아먹으려고 그렇게 지시했어」라며 고함을 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순간적으로 돌변하기에 「이 사람 왜 이러나」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더니 「(서울시) 감사관 오라고 그래」 한 후 「담당직원 어디 갔어」라고 했습니다』

―부속실에서 대기 중이던 담당직원은 그때 들어왔습니까.

『네. 그 직원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는지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고는 「잘못했습니다」라고 했어요. 李부시장은 제 부하 직원에게 몇 마디 폭언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서울시 감사관이 들어왔습니다』

―그러고 끝났습니까.

『의자에 앉아 있던 李부시장이 무릎 꿇은 직원을 향해 책인지 서류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뭔가를 집어던졌어요. 그러고는 그에게 다가가 한 차례의 손찌검을 하는 겁니다. 그 순간 감사관이 달려들어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며 말렸어요. 그런 후 李부시장은 「이자들 재산등록 서류 가져와」 하더군요. 그런 후 감사관에게 「내일 당장 송파구 특별감사 해」라고 했습니다.

감사관은 「국장만 해당되고 나머지 직원은 직급이 낮아 재산등록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저는 그 순간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李海瓚 부시장이 「당장 가져오라」고 해서, 곧장 송파구청에 있던 제 재산등록 서류를 서울市의 다른 직원이 가서 가져왔습니다』(손찌검과 관련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당사자는 『한 차례가 아니라 여러 차례 손찌검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숨긴 것 없어. 이게 다야?』

―뇌물을 받기 위해 일부러 서류를 조작한 것은 아닙니까.

『저는 그 이듬해에 30년이 넘는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는 퇴직을 앞두고 있었어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슨 뇌물입니까. 감독 책임이 있는 제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李부시장은 저를 도둑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속이 아주 상했어요. 당시 그의 나이 40代 중반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부시장이라고 하지만 젊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제 인생이 처량해지더군요』

―당시 재산은 얼마나 됐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현재 살고 있는 집 하나뿐이었습니다. 李부시장은 제 재산등록 서류를 檢事처럼 꼼꼼히 보더니 「숨긴 것 없어. 이게 다야?」라고 하더군요』

―李부시장실에서 언제 나왔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후 5시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송파구청으로 바로 돌아왔습니까.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한 후 감사관실에서 경위서를 작성하고 추가로 조사를 받았어요. 그렇게 끝난 시각이 밤 10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생 공무원하면서 그런 일은 처음』

―9년 전의 일을 어떻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제 일기에 그날 일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어요. 그게 아니더라도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으니 기억을 못 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특별감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감사거리가 안 됐는데 무슨 감사가 있었겠습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감사관도 「단순한 실수를 가지고 부시장이 난리다」고 했어요. 누가 봐도 단순한 실수를 고의로 몰아 넣은 데 대해 너무 화가 났어요』

―부하 직원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고의가 아니고 단순한 실수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묻습니까. 부하 직원이 제게 미안해하며 「사표를 쓰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작은 실수를 가지고 사표 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만류했지요』

―그 일이 있은 후 李부시장이 「미안하다」는 뜻을 전달해 오던가요.

『사과는 무슨 사과…』

―이후 李부시장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제가 왜 그 사람 얼굴을 봅니까. 그 일이 있은 후 선거기획단장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黨으로 가버렸어요』

―李부시장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어요. 1998년 그가 교육부 장관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교육부, 참 잘도 되겠네」라고 혼자 중얼거렸지요. 총리가 된다고 했을 때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총리하나. 나라가 좀 시끄럽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형 문제로 난리 친 사람이 어떻게 국정을 논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총리 하나』

鄭泰福씨는 20代 공무원 초년병 시절 겪었던 일을 하나 들려줬다.

『강원도 지방과 행정계에 있을 때였어요. 1958년 제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지요. 강원도 지방공무원 교도원(지금의 공무원연수원) 업무를 맡고 있었어요. 연수가 끝난 공무원들에게 강원도지사 명의의 수료증을 주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료증 수여식이 있던 당일 내무국장의 결재가 안 났던 거지요. 저는 결재를 미리 올렸는데 국장이 멀리 출장을 가는 바람에 처리가 미뤄졌던 겁니다.

저는 당연히 결재가 난 줄 알고 도지사 직인을 찍어 수료증을 전달했습니다. 결재 없이 도지사 직인을 찍었으니 당연히 징계감이었지요. 그런데 그 국장이 돌아와서 보고를 받은 후 「괜찮다」며 그냥 넘어갔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국장은 나중에 서울市로 발령이 났어요. 이후 그는 稅制(세제)개혁을 통해 서울시의 財政상황을 크게 호선시켰습니다. 당시 서울市에서 그를 신화적 존재로 인정했다고 들었습니다』

李총리 보좌관 출신 김석철씨는 『(李총리가) 성격이 급한 면이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고집이 센 점도 있지만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인간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지요. 그는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아요. 한 가지 예를 들죠. 14代 때 한의학 파동 당시 李총리는 보건복지委에 소속돼 있었어요.

당시 후원회가 있었는데 행사가 끝난 후 저는 후원금을 되돌려 주는 데 며칠을 보냈지요. 후원회 내규를 만들어 10만원 이상을 받지 않기로 했거든요. 그때는 지금과 달리 익명기부도 무제한 허용되었고, 돈 받을 생각이었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어요. 그는 私的인 이득을 취하지 않는 깨끗한 인물입니다』

李海瓚 총리가 나름대로 원칙을 중시하는 인물임을 보여 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1997년 5월13일 일이다. 당시 李海瓚 의원이 탄 승용차가 서울 마포구 아현동 로터리에서 불법 유턴을 하다가 교통의경에게 적발됐다. 의경은 국회의원이 탄 사실을 알고 『액수가 적은 스티커를 발부하거나 그냥 없는 일로 할 수 있다』며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 그러자 李의원은 『왜 규정대로 스티커를 발부하지 않느냐』며 의경을 마포경찰서에 인계했다. 해당 의경은 10일간 영창을 살았다.

이 일에 대해 李의원은 한겨레신문 박창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법 유턴이야 (내 차가) 잘못했지요. 그런데 의경이 스티커는 끊지 않고 자꾸 시간을 끄는 겁니다. 돈을 뜯으려고 흥정을 하는 거지, 바빠 죽겠는데. 「스티커를 빨리 끊으라」고 하니까 「7000원짜리를 끊을까요. 얼마짜리를 끊을까요」라며 또 시간을 끌어. 그래서 국회의원 신분증을 보여 줬지.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가시라」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났어요. 「너 안 되겠다. 차에 타라」 이렇게 된 거예요. 우리 사회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원칙을 지켜야 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타협을 잘 안 하는 편이죠』


교통의경을 경찰서장에게 넘겨

김석철 前 보좌관은 당시 일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그 당시 일을 운전기사한테 들어 압니다. 의원이 탄 차가 교통경찰관(교통의경을 말함)에게 잡혔어요. 운전기사가 「의원이 타고 있다」고 하니까 경찰관이 「어디 보자」고 했다는 겁니다. 국회의원인 것을 알고 「안 끊을 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李의원이 「왜 안 끊느냐. 걸렸으면 끊어야지」라고 한 후 그를 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려가 서장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일로 운전기사가 많이 혼났어요. 그냥 끊으면 되지 「의원이 타고 있다는 말을 왜 하느냐」고 말입니다』

李총리와 보좌관의 해명대로, 교통의경이 대낮에 외부 시선이 많은 아현동 로터리에서 국회의원을 상대로 과연 「돈을 뜯으려고 흥정하려 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李총리는 그 이후 도로교통법을 위반했을 때 본인 명의로 스티커를 발부받았다고 한다. 2001년 6월부터 지난 5월까지 李총리 차는 아홉 차례의 속도위반과 한 차례의 고속도로 갓길통행 위반으로 과태료를 납부했다.

李海瓚 총리는 화를 낼 상황이 발생하면 「욕」도 간혹 한다고 한다.

「쿨하게 출세하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1995년 서울市 정무부시장 때이다. 그의 보좌관 출신인 李康珍(이강진·現 총리실 공보수석) 市의원이 李海瓚의 딸이 다니던 학교의 문제를 市의회에서 질의하려 했다. 딸의 학급에서 性희롱이 있었으니 문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서울시 교육청 장학관이 李海瓚에게 달려왔다. 李海瓚은 설명을 듣고 화를 냈다. 그는 늙수그레한 장학관에게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 한 목격자는 이때 「李海瓚이 따귀를 올려붙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李海瓚도 전후 사실관계는 대체로 시인한다. 다만 「따귀를 때렸다」는 대목은 강하게 부인한다. 「따귀를 때린 것이 아니고요, 어떻게 사람을 때립니까. 장학관에게 쓸데 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욕은 했지. 결국 그 市의원은 발언을 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부교육감이 항의하러 왔어요. 그래서 「이 자식이 어디다 대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싶어 쫓아냈지요>


「뭣들 해, 이 새끼 당장 끌어내지 않고」

<13代 국회 노동위원으로 활동할 때 일화도 있다. 한 업체의 고위간부가 의원회관 사무실로 찾아와 「노동쟁의 문제를 상임委에서 다루지 말아 달라」고 청탁하면서 돈봉투를 꺼냈다. 그러자 李海瓚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야, 뭣들 해, 이 새끼 당장 끌어내지 않고」

바깥방에 있던 보좌진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쫓아 들어왔다>

李海瓚 총리는 상대방이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별로 상관하지 않고 따질 때는 따지는 성격이다.

李海瓚 총리는 1988년 13代 총선에서 金大中 前 대통령이 이끌던 평민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乙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盧武鉉 대통령은 당시 金泳三 前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다.

1990년 1월 민정당·민주당·공화당의 3黨 합당으로 정치권의 大지각변동이 있자, 李총리는 고립된 평민당의 존립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재야를 포함한 야권 大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소신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1991년 5월 광역의원 공천과 관련해 DJ의 私黨化를 비판하며 신민당(평민당은 일부 재야세력을 흡수한 후 黨名을 바꿈)을 탈당했다.

<金총재(DJ)의 가장 큰 단점은 자신에게 불리한 얘기나 좋지 않은 얘기를 듣기 싫어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면 유심히 경청해 듣고는 즉석에서 자기 논리로 반박하여 말한 사람을 매우 무안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분위기에서 누가 총재와 논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신동아 1991년 7월호 李海瓚 의원 기고문)

李총리는 私的인 선후배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다. 친하게 지내는 동료의원도 많지 않다. 權魯甲(권노갑) 前 고문과 골프멤버였지만, 인간적으로 친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대학선배인 현직 정치인 A씨에게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A씨의 말이다.

『제가 장관 시절 그는 해당 상임委 의원이었습니다. 업무와 관련해 질의하고 추궁하는 것은 좋아요. 그런데 나이로 보나 학번으로 보나 기본적으로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상임委 같은 公席에서는 의원이니까 반말투로 질의하는 걸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公務관계 밖에서는 선후배 관계로 대할 수 있잖아요. 저는 그 사람을 「위아래가 없는 사람」으로 봅니다.

최근 국회 파문을 가져왔던 그의 발언은 그의 人格(인격)에서 나온 거라고 봐요. 李총리는 서울시 정무부시장·교육부 장관을 거치면서 행정가로서 나아지고 있지만 품성 면에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李총리는 서울 관악구청장을 지낸 인사에게 물컵을 던진 사례가 있다고 한다. 관악구에서 10년 넘게 근무했던 한 현직 공무원의 증언이다.

『李총리의 지역구가 관악구청 관할이 아닙니까. 현재 청와대·총리실에 근무하는 李총리 보좌진들과 소주도 한잔할 정도로 비교적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李총리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요. 구청장을 지낸 한 분이 있습니다. DJ 정부 때 비교적 잘 나갔지요. 업무와 관련해 李의원과 충돌이 있었어요. 자세한 내용을 밝히긴 어렵지만 당시 李의원이 그 구청장을 향해 물컵을 던졌어요. 당사자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겠지요.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를 「非인간적」이라고 평해요. 반면 李총리의 보좌진들의 평가는 일관됩니다. 철학이 확실하고,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지 않으며, 업무처리가 철저하다고 말합니다』


前 관악구청장 P씨: 『인간적으로 기본이 안 된 사람』

서울 관악구청장을 지낸 P씨는 李총리와의 관계에 대해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일입니다. 제 나이도 벌써 육십이 넘었네요. 세상에 뭐가 무섭겠습니까. 하지만 기억도,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습니다. 그 당시 기도하며 모든 것을 잊으려고 했지요. 한마디만 말씀드리면 지난 번 총리 인사 청문회 때 그분에 대해 「인간적으로 기본이 안 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온 걸로 아는데 그 말이 딱 맞아요. 모든 것이 함축돼 있지요. 저는 盧武鉉 대통령을 찍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盧대통령이 어찌 그런 사람을 총리로 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李海瓚 총리는 언론에 좋은 이미지를 심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모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호의적인 기사를 썼든, 나쁜 기사를 썼든 그는 원칙대로 처리한다. 지난해에는 모 신문사를 상대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부분 승소했다.

그래서인지 가끔 기자들과 충돌이 있었다.

<李海瓚 교육부 장관의 막무가내 언행이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李장관은 지난 3월11일 밤 서울 관악구 자신의 집을 찾아온 기자에게 「기자면 다냐. 대한민국 장관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느냐」는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당시 이 기자는 李장관의 부인 허락을 받고 거실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李장관은 「한번 해보자는 거냐」며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기자에게 달려들려고 해, 그의 부인이 가까스로 말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자신만 언제나 똑똑하고 옳다는 생각을 하는 게 李장관의 병」이라고 꼬집었다> (한겨레21. 1998년 3월26일)


기자폭행사건에 대한 해명

한 시사주간지의 J기자는 1996년 총선을 앞두고 李海瓚 당시 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황당한 경험을 했다』고 밝혔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인터뷰를 했지요. 저와 모 방송국 기자 그리고 李海瓚 단장 세 명이 그의 방에 앉아 질문과 답을 했지요. 기자가 번갈아 가며 질문을 하고 李단장이 답변을 했습니다. 제가 당시 趙淳 서울시장에 대해 물었을 때였어요. 「趙淳 시장이 서울시내에 별도로 사무실을 냈다」는 소문이 있어 사실관계를 물었던 거지요. 답변이 나올 줄 알고 취재수첩을 보며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 사이 아마 몇 초가 흘렀을 거예요.

李단장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더군요. 순간 「이분이 왜 이러지」하는 생각을 하며 옆에 있던 방송사 기자에게 화를 내는 줄 알았지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는데 벌건 얼굴을 한 李단장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랑 눈이 마주치자 「너 같은 게 기자야」 이러는 거예요. 「제가 무슨 큰 실수라도 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인터뷰는 엉망이 됐죠. 고함 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갔는지 밖에 있던 비서진이 들어와 말렸어요. 비서가 저보고 「인터뷰가 힘들 것 같으니까 나가라」고 해서 나왔습니다.

그날 저녁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실수를 했다면 사과를 하겠다. 그런데 무슨 큰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화를 낸 이유라도 들어보고 싶다」는 메모를 남겼지요. 답변을 기다렸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어요. 그 후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며 잊으려고 노력했지요. 순간적으로 변해 버리는 그의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솔직히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난 6월 李海瓚 총리에 대한 인사청문회 당시 沈在哲(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은 「민통련 간부로 재직하던 재야 시절 잘못된 기사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모 중앙지 취재기자의 뺨을 때린 적이 있느냐」는 서면질의를 했다. 李총리는 서면답면에서 이렇게 말했다.

「1987년경으로 기억합니다만, 당시 민주화운동과 兩金 단일화를 위해 노력하시던 文益煥 목사님에 대해 모 언론에서 『文목사가 대통령에 출마하려 한다』는 취지의 보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재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잘못된 보도에 대해 항의하고 언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李총리는 비슷한 질문을 한 鄭斗彦(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서면답변에서 「폭행 사건에 연루된 사실은 없다. 다만 오랜 기간 공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원칙을 중요시하여 일처리를 하다 보니까 사안에 따라 관계자 등에게 질책하는 일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했다.

李海瓚 총리는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편이다. 지난 10월18일 베를린 발언(『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의 퇴보다. 朝鮮·東亞는 내 손아귀에 있다. 까불지 말라』)과 지난 10월28일 국회 발언이 대표적이다.

교원단체회장 출신인 李君賢(이군현) 한나라당 의원은 『교육부 장관 시절인 1998년 5월9일 李총리는 직원체육대회 인사말에서 「나는 교육부의 덕을 입고 이만큼 성장한 사람이 아니다. 나를 키워 준 곳은 서대문 형무소이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李의원은 또 『李총리는 1998년 6월23일 「함께 하는 교육개혁」이라는 주제로 외부인사를 초청한 회의에서 자신의 의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직 교장(당시 65세)을 회의 도중 「나가시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李총리는 인사청문회 당시 『형무소에서 읽은 책이 더 많다는 경험을 농담삼아 한 것』, 『회의가 진행이 안 돼(그 교장에게) 「나가시오. 진정하고 들어오시오」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쿨하게 출세하기」에 따르면, 李총리는 『능력은 있는데 仁德이 없다』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걸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평판에 신경 쓰기보다는 내가 하는 일을 할 뿐입니다.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 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요. 내 스스로 나의 도덕률에 따라 움직여 나가는 것이지,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왜 남의 도덕률에 따릅니까. 정치라는 것은 贊反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마련이죠. 仁德이 많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말을 함부로 못 하게 됩니다』

자신의 도덕률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는, 李海瓚 총리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말을 쉽게 바꾸었다.

李海瓚 총리는 지난 7월2일 자신이 「차떼기黨」이라고 했던 한나라당에 찾아가 朴槿惠(박근혜) 대표를 만났다. 신임총리로서 「차떼기당」 대표에게 인사하러 간 것이다.

李총리는 「차떼기당」의 대표에게 『인준동의안을 처리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다음은 朴槿惠-李海瓚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대화의 일부이다.

<李海瓚: 어제 국정현안조정회의를 했는데, 야당에게도 설명을 잘해 공감을 얻으라고 했고, 국가안보 정보도 공유하도록 했습니다.

朴槿惠: 외교나 안보는 與野가 따로 있을 수 없거든요(중략).

李海瓚: 지금 지나고 나서 보니 말을 함부로 못 하게 됩니다. (중략) 先親 말씀드려 죄송한데, 제가 민주화 투쟁할 때 朴대통령을 한쪽 측면만 격렬하게 비판했습니다. 朴대통령이 이룬 경제적 성과 없인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지금은 思考의 균형이 생긴 편입니다.

朴槿惠: 말씀 들으니 든든합니다.

李海瓚: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채청 동아일보 부국장은 지난 11월10일 「그답지 않다」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李총리는 필요할 경우 몸을 굽히곤 했다. 단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을 뿐이다. 이번 성명(11월9일자 謝意 성명서)도 정치적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식 굴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책임총리와 거리가 멀다. 독일과 국회에서 얼굴을 붉히던 李총리답지도 않다>

李海瓚 총리는 한나라당 의원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주장하며 충돌을 피하지 않지만, 총리로서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을 때는 균형 있는 말을 했다. 한 대학의 심리학 교수는 李海瓚의 이중성을 이렇게 해석했다.

『李海瓚 총리가 나이 36세에 국회의원이 된 이후 현재 5選 의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李총리처럼 신념이 강한 사람은 公的인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私的인 감정을 배제해 왔다는 이유로, 「내 생각이 객관적이고 옳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나만이 옳다는 독선에 쉽게 빠진다. 자신의 신념을 시험하는 공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선다. 「인간 李海瓚」에게 도전한다는 생각이 들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싸운다. 「총리 李海瓚」에 대한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면, 「개인 李海瓚」의 신념을 쉽게 접어들인다』


아쉬운 것 없었던 어린 시절

지난 4월 總選 당시 李海瓚 의원 지구당 사무실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李의원은 자신의 선거사무실에 나온 선거관리위원회 소속 공명선거 감시요원에게 험한 소리를 했다. 당시 상황을 취재했던 중앙 일간지 기자의 얘기다.

『사무실로 제보전화가 한 통 왔어요. 지난 4월 總選이 한창일 때였어요. 선관委 소속 감시요원이 李의원 사무실을 찾았답니다.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이었어요. 감시요원은 선거 관련 자료를 의원 보좌관, 지구당 사무국장에게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李의원 측이 「직접 찾아서 보라」며 非협조적으로 대했나 봐요. 그러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답니다.

사무실이 소란해지자 옆 방에 있던 李海瓚 의원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고성을 지르며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소란이냐. 높은 사람 데려와」라며 감시요원을 혼냈다는 겁니다. 여성 감시요원은 「좋은 일을 하려다가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해 놀라 뛰쳐나가 펑펑 울었다」고 했어요. 그 여성은 「李의원을 평소 훌륭한 분으로 생각했는데 公務로 나온 사람에게 그렇게 험한 말을 하는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고 했지요』

李海瓚 총리는 청소년 시절 남에게 부탁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 195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그는 5남2녀 중 다섯째이다. 위로 형이 둘, 누나 둘이 있었다. 그의 집안에는 정치인이 한 명 있다.

할머니의 동생인 이상철씨는 朝鮮日報 기자 출신으로, 2·5·6代 국회의원을 지냈다.

<李海瓚 총리의 4대 祖父는 진사였다고 한다. 진사급제로 100석의 전답을 나라로부터 받아 청양에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청양에서 제법 큰 식당을 했고, 일제 때 일본 중앙大 유학을 했던 아버지는 초대 면장, 이어 민선 면장을 지냈다. 집에서 양계도 했다. 李海瓚의 어머니는 충주의 부잣집 출신이었다>(「쿨하게 출세하기」 中)

학창 시절 李海瓚 총리는 공부를 잘했다. 그는 모범생이었다. 1971년 서울大 섬유공학과에 진학한 후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듬해 서울大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金大中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된 후 1982년 출옥한 청년운동가 李海瓚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1983년 결성)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정세분석과 운동기조 수립 등 이론활동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조건에 맞는 입장을 선택하고 거기에 충실했다고 한다. 그는 제도권 정당인 평민당에 일찍 몸을 담아 개량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13代 국회에서 광주사건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李총리는 1991년 탈당했던 4개월 반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큰 우여곡절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100% 싸움은 절대로 안 한다』며 『감옥에 들어가면 그만큼 활동을 못 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투쟁의 여지를 남겨 놓고 현실을 생각하는 것이다.


李총리 측, 『私的 질문에 답할 가치 없다』

기자는 李총리를 취재하면서 들은 여러 사건들에 대해 李총리의 입장을 듣고자 총리실 李康珍 공보수석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했다. 李수석은 『李총리에 대한 私的 질문에 대해 답변할 가치가 없다』며 『나는 대한민국 총리의 공보수석이지 私的 질문에 답변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 한 심리학자의 李海瓚 분석

「에고가 강하고 자기 원칙을 중시, 盧武鉉과 같은 코드」


심리학은 일관성을 보이는 행동특성에 주목한다.

理想(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의 행동이 정당하고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인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자기를 버릴 수 없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또 다른 「에고(Ego·自我)」의 표현이라고 본다.

신념이 강한 사람을 향해 그 신념을 공격하면 해당 인물은 신념을 더욱 강화해간다.

인간 「李海瓚」은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판단해 볼 때 소신이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원칙」과 「소신」을 강조한다고 했다. 원칙에 反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것은 심리적으로 당연한 반응이다.

소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소신이 강한 사람에게 「당신이 틀렸다」라고 하면, 이 사람은 강한 내적 에너지를 동원해 끝까지 주장을 편다. 이런 사람은 인간관계보다 원칙을 더 중요시한다. 李海瓚 총리에게 「性情이 바르지 못하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리학적으로 李海瓚 총리와 盧武鉉 대통령은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에고」가 강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소신과 원칙을 중시한다. 그 원칙에 어긋난 사람을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盧대통령은 5共 청문회 때 全斗煥씨에게 명패를 던졌다. 李총리도 광주청문회를 통해 조작된 사진을 들이대면서까지 5共 권력자들을 공격했다. 그는 金大中 前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탈당했다.




[ 2007-05-04, 20:08 ] 조회수 : 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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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gis6 이해찬 총리시절 / 보수단체의 인공기 훼손 행위를 단호하게 조치하도록 지시, 남북통일 축구에서 태극기 사용 금지, 대한민국 구호 금지, 국보법은 전형적인 악법이고 잘못된 법으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 전국연합과 통일연대 한총련 전동 등의 반미운동에 속으로 좋아하며 비판 절대안함. 북한붕괴를 원하지 않는다는 발언. 북한 공개처형과 인권에 침묵

이해찬 소개 / 빨간 조직 전국연합의 전신인 반미단체 '민청련'의 부위원장과 민통련 총무국장 역임한 빨간 인물 / 민청련은 '한국사회는 독점자본에 기반을 둔 모순이 있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식민지 지배를 안정화시킨다' 등 극단적 반미단체 / 조선동아까불지 마라 이해찬 발언 / 미군철수 조기화를 위한 임명.


이해찬이 중직을 맡던 '민청련'과 민통련 소개 / 민청련은 강한 반미단체로 남한을 미국의 제국주의 식민지로 보고 남한정권을 미국예속된 파쇼정권으로 봄. 미제타도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 노선. 민통련은 남북한 연방제통일을 최종폭표로 함 / 이해찬은 보수, 우파에 강한 거부감 가진 발언을 함. 2007-05-05 오전 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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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폭언 前歷者 3인: 노무현, 이해찬, 유시민


柳時敏씨는 2004년 17代 총선 당시 선거 홍보물 문구에 1984년 「서울大 민간인 폭행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표현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全基東씨에게 고소를 당했다.


趙甲濟

盧 정권의 3大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盧武鉉 대통령, 李海瓚 전 국무총리, 柳時敏 현 보건복지부 장관은 폭언, 폭력행위의 경력자란 공통점이 있다. 盧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이던 1989년 12월31일 밤 국회에 증언하러 나온 全斗煥 전 대통령 쪽을 향해서 명패를 집어던졌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폭언에 가까운 인신공격으로 한 기업인을 폄하했다. 그 직후 기업인은 한강에 투신 자살했다. 李海瓚 전 총리는 서울 부시장 시절에 자신의 兄과 관련된 私的인 일로 부하 공무원의 뺨을 때린 적이 있다. 柳 장관은 서울대학교 학생회 간부 시절에 민간인을 경찰 프락치로 몰아 감금, 폭행하는 데 가담했다가 옥살이를 했다.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폭언, 폭행에 대해서 한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柳 장관의 경우는 자신의 범행을 마치 민주화 운동인 것처럼 선전하고 다녔다. 李 전 총리와 柳 장관은 차기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론되고 있다.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돌지 않는 한 얻어맞을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국민들 앞에선 난폭해지지만 김정일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것은 무슨 이유에선가. 작은 폭력은 더 큰 폭력 앞에선 기가 죽는 법이다. 그들은 김정일의 무한대 폭력을 내심 부러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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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柳時敏 폭력 피해자 4명의 망가진 人生
*2006년 2월호 월간조선



『민간인 감금·폭행을 현장에서 지휘한 사람이 장관이라니… 柳時敏의 사과라도 한마디 듣고 싶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들의 가슴에 끊임없는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柳時敏은 사건 당시 제일 나이가 많은 자로, 현장을 오가며 교묘하게 치고 빠지고 하면서 폭행 사건을 주도한 사람입니다』(폭행피해자 全基東씨)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현재 진행형인 22년 前의 폭행사건


鄭龍範(사진 왼쪽)씨는 1984년 서울大 학생회 간부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감금·폭행사건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2005년 6월7일, 鄭씨는 서울고등법원에 「柳時敏 선거법 위반」 재판을 보기 위해 어머니(사진 오른쪽)와 함께 왔다. 뒤에 뒷짐을 진 사람이 柳時敏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화살표).


열린당 柳時敏(유시민·47)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자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林信鉉(임신현·48), 孫瀅九(손형구·41), 鄭龍範(정용범·47), 全基東(전기동·51)씨 등 4명의 시민이다. 이들은 1984년 柳時敏 당시 서울大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 서울大 학생회 간부들에게 감금당한 채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으며 폭행당했다.

폭행을 당하던 중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갔던 全基東(당시 29세)씨는 『柳時敏처럼 부정과 불의를 자행한 자가 인도주의자인 척 행동할 수 있는 세상에 분노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柳時敏은 지금까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변명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기회만 되면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들의 가슴에 끊임없는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柳時敏은 사건 당시 나이가 제일 많은 자로, 현장을 오가며 교묘하게 치고 빠지고 하면서 폭행사건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全씨는 2004년 17代 총선 때 柳의원을 「허위사실 공표 혐의(선거법 위반)」로 검찰에 고소했다.

柳의원은 선거 홍보물에서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이미 명예회복하였다」, 「이 사건은 全斗煥 정권이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은 사건」이라고 기재했다. 全씨는 柳의원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검찰에 고소한 것이다.

柳의원은 1심에서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은 『선거 홍보물에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 회복을 했다」는 것은 허위 사실이지만, 이를 기재할 당시 柳時敏이 이것이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또 『「全斗煥 정권이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었다」는 표현도 다소 과장되긴 했으나,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단순한 의견 표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일반인에게 흔히 「서울大 프락치 사건」으로 알려진 「서울大 민간인 감금·폭행사건」으로 柳時敏을 비롯 6명의 학생들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처벌받았다.

이 폭행 가담자들 중 柳의원은 열린당 국회의원을 거쳐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되었고, 윤호중은 열린당 의원(경기 구리), 이정우는 변호사, 백태웅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大 교수가 되었다.


삶이 뒤죽박죽된 4명의 청년

1984년 당시「서울大 민간인 감금·폭행 사건」에 대한 조선일보 기사.

반면, 폭행당한 네 젊은이들의 삶은 이후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7급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었던 鄭龍範씨는 柳時敏 일행에게 당한 폭행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 현재까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鄭씨는 현재 종로에 있는 대형 음반 가게에서 매입한 음악 CD를 서울 시내의 카페를 돌아다니며 파는 일을 하고 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CD 한 장을 못 팔 때도 많다고 한다.

鄭龍範씨는 1978년 형이 軍에서 죽자 그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한 달 반 정도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후 鄭씨는 1년 가량 집에서 요양을 했기 때문에 폭행을 당할 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鄭龍範씨의 어머니 전영재(79)씨는 『우리 용범이가 너무 억울하게 당했다』며 『폭행당한 후 정신이 이상해져 결혼도 못 했는데 내가 죽으면 누가 돌봐줄지 그것이 제일 걱정』이라고 말했다.

『애가 맞고 집에 왔을 때 온몸이 시퍼렇게 돼 있었어요. 두들겨 맞기 전에는 공무원 시험 공부도 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거든요. 얻어맞은 후부터는 애가 헛소리를 하고 완전히 병신이 되었지요. 후유증으로 몇 년 동안 밤에 제대로 못 자고 약을 입에 달고 살았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鄭씨는 폭행당하는 과정에서 앞니 하나가 절반 정도 부러졌다.

鄭씨 어머니는 『그때 맞아서 부러진 이 치료를 잘못해서 그 후에 계속 고생을 했다』며 『몇 년 전 2500만원을 들여 이를 전부 새로 심어야 했다』고 말했다. 1994년 사망한 鄭씨 아버지는 살아생전 『장가도 못 간 놈이 병이나 도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며 늘 아들 걱정을 했다고 한다.


대인기피증 심해져 대학 진학 포기한 林信鉉씨

全基東씨는 1984년 서울大 학생회 간부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감금ㆍ폭행 사건 당시 실신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폭행 가해자들이 이 사건을 「민주화운동」 혹은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고 주장할 때마다 이에 맞서 법정 투쟁을 해왔다.

나머지 폭행 피해자들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全基東씨는 폭행 후유증으로 고시공부를 접어야만 했다. 全씨는 폭행당한 후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몸이 아파 책상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자주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다. 全씨는 뒤늦게나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현재 관악구청 보건소에 근무하고 있다.

林信鉉씨는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심해졌고, 이로 인해 대학 진학 꿈을 접었다.

林씨는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죠. 이놈이 들어와서 한 시간 패고, 저놈이 들어와서 한 시간 패고…. 자기들도 내가 프락치가 아니란 것을 알았을 겁니다. 민간인을 다짜고짜 패 놓았으니 문제가 될까봐 어떻게든 프락치라는 기록을 남겨 놓으려고 자백을 강요한 것 같아요』

그는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입시 공부를 포기하고 절에서 알게 된 사람을 통해 丹靑(단청) 기술을 배웠다. 단청 일은 겨울철에는 일감이 없어서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그때 일은 잊고 살지만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 납니다. 그 사람(柳時敏)을 보기 싫어 TV를 안 본 지 오래됐습니다. 거짓말을 좀 했다고 가두어 두고 폭행을 하는 것들이 인간입니까. 정신병자들이죠. 그런 사람을 공직에 임용하는 나라가 한심스러워요. 내가 사는 곳이 하필이면 柳時敏의 지역구인데 여유만 좀 있다면 이사 가고 싶습니다』

孫瀅九씨는 현재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연락이 닿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사업에 여러 차례 실패한 후 외국에 나가 연락을 끊고 지낸다고 한다.

孫瀅九씨 어머니는 『다 지난 이야기를 뭣 하러 묻느냐』며 『그 이야기만 나오면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柳時敏) 인상만 봐도 싫어요. 아무리 나라에 人材가 없어도 그렇지 그런 자를…. 얼마 전 全基東씨가 柳時敏을 선거법 위반으로 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무리 그런 거 해 봐야 법원에서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주겠어요. 우리 아들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이 모르니까 기사에 이름은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鄭龍範씨

2005년 6월7일 낮 12시,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에서는 17代 총선에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된 柳時敏 의원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柳時敏 의원은 양복차림으로 서너 명의 일행과 함께 재판정에 모습을 나타냈다. 柳時敏 의원을 고소한 全基東씨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鄭龍範씨, 그리고 鄭씨의 어머니 전영재씨가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나와 있었다.

柳時敏 의원은 법원 복도에 서 있는 폭행 피해자들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고 자기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柳의원에게 다가가 몇 마디 물으려 했지만, 그는 『바쁘다』며 자리를 피했다.

鄭씨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그는 柳時敏씨가 국회의원이 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중얼중얼 이런 얘기를 했다.

『그 새끼가 현역 국회의원이란 말이야?』

『옷도 잘 입었던데. 벌금 많이 내도 되겠네. 그전에 TV에 나올 때 금테 안경 쓰고 양복도 멋있었는데』

『결혼했어? 柳時敏』

『그 사건이 1984년 9월이지? 그럼 21년째인데…』

『柳時敏이 벌금 받으면 우리 보상은 없나?』

鄭씨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하는 듯했다. 미움도 증오도 모르는 듯이 그저 남 이야기 하듯 재판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말만 드문드문 내뱉고 있었다. 옆에서 듣기가 안타까웠던지 全基東씨가 한마디했다.

『때린 놈이야 신체와 정신이 안 다쳤으니, 마음껏 공부하고 돈을 벌 수 있지만, 나와 龍範씨는 그 사건 이후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져서 결혼도 못 하고, 鄭龍範씨는 정신이 이상해졌고…. 그 사람들의 행위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한 것입니다』

법정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柳時敏 의원에 대한 항소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柳時敏 의원 뒷자리에 全基東·鄭龍範씨가 앉았다. 鄭씨 어머니는 『얌전하게 가만히 있어, 떨지 말고』 하며 아들의 손을 잡았다. 鄭씨는 눈을 한 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재판정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2005년 6월 서울고등법원, 柳時敏의 변명

검사의 심리가 시작되었다. 이날 심리 중 주로 1984년 폭행 사건과 관련한 부분만 옮겨 본다. 柳時敏 의원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

<검사 후보자 공개 자료 내용 중 「당시 폭행 사건은 조작」 운운 한 적이 있습니까.

柳時敏 그렇습니다.

검사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柳時敏 그 사건을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도적으로 감금과 폭행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와 공모한 것도 아닙니다. (全基東씨를) 병원에 데려가거나, 가족들과 접촉하는 등 나는 오히려 사건의 수습에 관여했습니다. 판결문에 내가 마치 사건을 주도한 것처럼 되었는데 진실과 다른 판결입니다.

검사 그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인가요.

柳時敏 무관이 아니라, 판결문 자체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검사 폭행 사실에 관여한 적이 있는가요.

柳時敏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붙들려 온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그 가족과 협의하고 학교 당국과 연락해서 앰뷸런스를 부르고 차를 태워 보내는 데 관여한 적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폭행을 안 했으니 폭행에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검사 법률적인 판단은 무시하고, 폭행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는 것인지.

柳時敏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습니다. 내가 주도했다는 부분이 보안기관의 조작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20년간 늘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검사 당시 피고가 쓴 항소이유서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건 전체가 조작이란 말인가요, 피고인이 가담한 부분만 조작이라는 것인가요.

柳時敏 폭행은 심각했지만 우발적이고, 그것이 당시 판결문처럼 공모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주도된 것은 아닙니다. 공모했다는 것은 보안기관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내 개인이 그 속에서 차지하는 부분도 조작입니다.

검사 관여가 없었는데 유죄판결이 난 것이 조작이란 것인가요.

柳時敏 당시 법률상 나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형법상 저촉되면 벌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한 것은 없지만, 내 행위가 죄가 된다면 유죄판결을 받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사 실제로 학생 폭행 사건에 관여한 부분은 뭔가요.

柳時敏 연행·감금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현장에 없었는데 학교에서 후배가 이야기해 줘서 학생회관에 오가면서 몇 차례 목격한 사건입니다. 관련이 있는 사건은 첫 번째 건(林信鉉)은 가족이 와서 가족에게 인계한 부분….

세 번째(鄭龍範) 사건은 전혀 모르고, 네 번째(全基東) 사건은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가 심각한 폭행을 당해서 학생처에 전화해서 병원 앰뷸런스 불러서 태워 보낸 것에 관여했습니다. 軍 제대 후 친목 비슷한 복학생협의회를 만들어 대표를 하고, 사무실이 4층에 있어 매일 들르는 입장이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후배들이 물어 오면 이야기해 주고…, 사건 수습한 것밖에 없습니다>


「주도하지도, 때리지도, 관여하지도 않았다」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된 柳時敏 의원.

이날 재판에서 밝힌 대로라면, 柳時敏 의원은 「그냥 학생회관에 오다가다 현장을 목격했고, 후배들이 물어 오면 답을 해 주고,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일을 앞서서 수습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柳時敏 의원은 그동안 『나는 당시 폭행 사건을 주도하지 않았으며, 피해자들을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폭행에 관여한 바 없다』고 주장해 왔다. 柳時敏 의원의 이런 주장은 1984년 그가 당시 1심 판결에 불복해서 쓴 「항소이유서」에서부터 시작됐다.

柳의원이 쓴 「항소이유서」는 그가 최초로 이 사건에 대해 체계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밝힌 것이고, 이후 그의 시각도 여기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前略) 문제의 9월26일 밤 전기동·정용범 兩人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짧은 감금과 非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後略)>


검찰조서 등에 나타난 柳時敏의 폭행 관여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못한다」는 柳의원의 주장과 달리 당시 폭행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진술서·판결문·관련자 진술을 보면, 그가 이 사건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행적이 나타나 있다.

1. 林信鉉 감금·폭행

● 임신현 진술(柳時敏이 임신현을 직접 조사한 부분): <柳時敏이 『당신, 틀림없이 기관원 같은데 기관원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돈을 받고 동향을 살피러 왔는지 이야기하라, 이야기만 하면 아무일 없이 돌려보내 주겠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아이들이 구타하는 것을 책임지지 못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 임신현의 형 진술(가족의 신병 인도 요구를 거절한 부분): <휴게실에서 저의 동생을 빨리 석방해 달라고 항의하니, 柳時敏이 『기관원이라는 의심이 있으니까 조사를 하는 것이며, 석방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회의를 해야 한다』고 석방을 거절했습니다>

● 柳時敏 진술(임신현의 폭행 보고서 검토한 부분): <자술서를 제가 검토해 보았는데 내용이 학교 온 목적은 놀러왔다. 복학생협의회 놀이에 참가한 것은 막걸리를 마시려고 참석했다…>

● 신수철(자원공학과 4년, 복학생협의회) 진술: <柳時敏 형 등 몇 명이 나가 대책을 세운다고 한다. 보호자도 온다고 하여 신병확보가 어려우니 보내기는 해야 되는데 확증이 없으니 좀더 두고 보자고 전해 들었습니다>

2. 孫瀅九 감금·폭행

● 柳時敏 진술: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인 백태웅으로부터 자기는 바쁘니까 대신 진술서를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일 19시까지 2시간 가량 조사했습니다>

● 柳時敏 진술(감금 지시 여부 부분): <본인이 수시로 사무실을 들락날락했기 때문에 孫瀅九 자신이 백태웅 다음으로는 (저가 조사를 지시했다고) 느낄 수는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 鄭龍範·全基東 감금·폭행

● 심윤남(인문대 철학과 4년, 복학생 협의회) 진술: <柳時敏·심재철 형이 있는 가운데 회의를 열고 정용범과 전기동의 조사를 담당할 팀을 각 6명씩 2팀으로 하고 본인과 柳時敏 형은 전기동을 조사한다고 승낙만 하고, 실제로는 조사를 하지 않고, 가끔 2개소를 돌아다니면서 조사상황만을 살펴보았습니다>

● 심윤남 진술: <호국단 집행부 연구실로 가서 심재철과 柳時敏에게 전기동의 조사결과 거짓말을 한다고 하고서 그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 오재영(인류학과 4년, 사회대 학생회장, 프락치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진술: <전기동과 정용범은 복학생 중심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그날 밤 복학생협의회 위원장인 柳時敏이 관장했는지는 확실치 않았고, 그 후에 신병문제에 대하여 柳時敏이 하는 말을 들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모든 것은 자기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 오재영 진술: <그날 밤 의사권은 선배와 간부들이 하였기에 때문에 주로 柳時敏 형이 하였고, 저희는 그때 동조를 하게 된 것입니다>

● 오재영 진술: <전기동과 정용범의 조사는 프락치 사건진상조사 위원회에서 직접 조사하지 않고, 柳時敏과 조원봉으로부터 조사결과를 전달받았습니다>

● 오재영 진술: <柳時敏·남승우·윤호중·본인 등 6명이 집행부 연구실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 본인이 『프락치라는 물증도 없는데 때려 가면서 조사를 강행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였는데, 柳時敏과 남승우가 『조사하는 사람들이 조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말하여 본인이 동의하였습니다>


全基東의 외로운 투쟁

2004년 4월 17代 총선 때 柳時敏 후보의 선거 홍보물. 그는 1984년 「민간인 감금·폭행 사건」으로 구속된 것을 민주화운동과 관련 있는 듯이 표현했다가, 피해자 全基東씨의 고소로 재판을 받았다.

방송大 법학과 3학년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全基東은 1984년 9월26일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大 법대 교수에게 책을 빌리러 왔다가 7~8명의 학생들에게 납치를 당했다.

학생들은 全씨의 가린 눈을 납치 다음날인 9월27일 오후에 풀어 주었다. 그러나 이때쯤 全씨는 폭행과 고문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실신했다.

당황한 학생들은 학교 측과 상의한 후 앰뷸런스를 불러 全씨를 서울大병원으로 옮겼다. 全씨는 이 폭행으로 전치 8週의 상해를 입었다.

다음은 柳時敏이 검찰에 설명한 鄭龍範과 全基東의 폭행 현장모습이다.

<초저녁에 정용범과 전기동은 플래카드에 사용했던 광목으로 눈을 가려놓고, 손은 뒤로 역시 플래카드에 사용했던 천으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 발로 등과 복부 부분을, 주먹으로 가슴과 머리 등을 7~8명이서 교대로 구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 5시30분경에는 정용범은 눈만 가려놓은 채 바닥에 꿇어 앉혀 있었고, 전기동은 눈도 가리고 손목도 묶여 있는 상태에서 바닥에 꿇어 앉아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운 상태에서 간간이 주먹으로 가슴을 맞고 있었습니다(편집자 注: 전기동과 정용범은 각기 다른 방에서 조사를 받음)>

새벽에 두 사람의 감금 현장에 온 이유에 대해 柳時敏은 『밤 사이 조사가 정보원과 관련한 것이 밝혀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왔다』고 진술했다.

검찰조사에서 柳時敏은 『불법 감금을 하여 가혹행위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았느냐』는 질문에 『민사·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하고 그에 따른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問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구태여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答 제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었고, 처음 발생한 임신현 사건이 복학생 주동이 되어 일어난 것이고, 그 뒤 사람들에 대해서도 복학생이 한두 명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제가 빠질 수 없어 4명의 사건에 계속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사건 전체의 목적은 앞에서도 제가 말을 했지만 그 사람들이 정보원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問 전기동·정용범이 감금당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왜 제지를 하지 않았나요.

答 제가 非폭력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그 신념이 부족하고, 폭행하는 현장이 너무나 살벌했기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 가해 학생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問 4명을 감금하고 폭력을 행사하여 허위 자백을 받아 학생 선동에 이용하려고 한 것인가요.

答 사건의 전체적인 목적은 그것이었지만 사실은 확인하여 그 기관에 대해 항의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問 가짜 프락치 사건을 데모에 이용하면 학생시위가 가열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요.

答 네, 그렇습니다.

問 이상 진술은 사실대로며, 할 말 있으면 하십시오.

答 그 4명이 정보원이든 아니든 구금·폭행의 권리가 학생들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폭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죄스럽게 생각하고, 특히 전기동씨에게는 더욱 그런 감이 듭니다.

학생들이 원래부터 폭력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고, 비폭력을 신봉하나 배움에 있는 상태라 불안전한 상태로 당시 흥분한 분위기 속에서 저지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서 후배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합니다>


柳時敏, 「민주화운동으로 두 번 투옥」

柳時敏씨는 2004년 17代 총선 당시 선거 홍보물 문구에 1984년 「서울大 민간인 폭행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표현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全基東씨에게 고소를 당했다.

당시 柳씨가 선거 홍보물에 기재한 내용이다.

<부끄럽지는 않지만 이제는 버리고 싶은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폭력범」으로 몰려 잡혀갔을 때 어느 신문사 기자가 찍은 사진입니다. 이미 특별 복권되었고, 다른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을 한 사건이지만, 이 기록은 마치 묵은 흉터처럼 아직도 저를 따라다닙니다.

20년 前 서울大 학생들이 경찰정보원 혐의를 받은 가짜 학생을 교내에서 붙잡아 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全斗煥 정권은 당시 서울大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저와 총학생회 간부들을 배후조종자로 몰아 구속했습니다. 저는 길다란 구치소 담장 아래서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손으로 누군가를 폭행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은 진실입니다.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제 인터넷 홈페이지(www.usimin.net)에 올려놓은 저의 「항소이유서」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믿었던 군사독재 시절, 제 젊음의 한 조각을 바쳐 쓴 기록입니다>

柳의원은 또 선거 홍보물에서 전과 기록 소명란에 「全斗煥 정권 시절 서울大 학생들이 가짜 학생을 폭행한 일에 당시 복학생 대표였던 저를 조작으로 엮어 넣은 사건으로, 1987년 특별복권된 바 있음」이라고 기록했다.

柳의원은 2003년 16代 再선거 홍보물 자기 소개란에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이라고 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등 말썽이 일자 이 표현을 17代 총선에서는 삭제했다.

全基東씨는 1994년부터 서울大 폭행사건 관련자들이 언론 등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프락치 사건」이라는 표현에 대해 반론보도를 청구나, 진성서 제출, 헌법소원 등으로 맞서 오고 있다.

全씨는 1997년 柳時敏이 기록한 저서 「아침으로 가는 길」에서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 반발 柳時敏과 책 발행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사과를 받아 낸 적이 있다.

全基東씨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측의 입에서는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란 표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2003년 4월 16代 국회의원 재선거 때 柳時敏 후보는 자신의 경력란에 1984년 민간인 감금ㆍ폭행 사건으로 감옥에 간 것을 「민주화 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되었다고 표현하여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를 당했다.


柳時敏의 좌우명,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

2003년에도 全基東씨는 柳의원의 저서와 홈페이지 등에 소개된 柳의원의 약력 중 「서울大 프락치 사건」,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투옥」 등의 표현을 사용한 것은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이라며 국가인권委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2004년 17代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당으로 출마한 윤호중씨가 선거 홍보물에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란 표현을 썼다가 全씨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고소건은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아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윤호중 의원도 서울大 폭행 사건 주동자의 한 명으로 처벌받은 바 있다.

全씨는 『이 사건은 민주화운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민간인 불법 감금ㆍ폭행 사건일 뿐』이라고 분개했다.

『무고한 시민을 감금하고 폭행해 프락치였다는 자백을 받아 내려 한 행위가 민주화운동이면 얻어 맞은 우리는 反민주세력입니까. 도무지 반성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민주화운동」, 「프락치 사건」 하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것은 우리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과 싸울 것입니다』

취재를 마치고 살펴본 柳의원의 이력서에서 유독 그의 좌우명이 눈에 크게 들어 왔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자」●



▣ 서울大「프락치 사건」이란?

『「프락치 사건」이 아니라 「민간인 감금·폭행·고문사건」이다』

1984년 9월17~27일 사이에 林信鉉·孫瀅九·鄭龍範·全基東 등 4명의 젊은이들이 서울大 학생회 간부들에게 감금된 채 「프락치」라는 자백을 강요받으며 폭행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폭행 사건으로 25명이 넘는 서울大 학생회 간부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당시 서울大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柳時敏(경제학과 3년)을 비롯해 白泰雄(백태웅·공법학과 4년), 李政祐(이정우·공법학과 4년), 尹昊重(윤호중·철학과 4년), 吳在瑛(오재영·인류학과 4년), 趙元鳳(조원봉·국사학과 4년) 등 모두 6명이 폭행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징역 10월에서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은 재수생이거나 고시 준비생으로 서울大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학생회 간부들에게 체포되어 교내 곳곳에 감금된 채 폭행당했다. 폭행을 행사한 서울大 학생회 간부들은 검찰 진술에서 『프락치라는 자백을 강요받으면, 이를 이용해 기관에 항의하거나 학생 데모에 한층 더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柳時敏은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자 이에 불복 항소했고, 2심에서 1년 형이 확정되어 복역했다. 그가 항소 당시 쓴 「항소이유서」는 운동권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柳時敏을 일약 운동권 스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폭행 사건이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고 언론에 보도되곤 했지만, 피해 당사자들은 『「프락치 사건」이 아니라 「민간인 감금·폭행·고문사건」』이라고 강하게 항의한다.




[ 2007-05-05, 23:25 ] 조회수 :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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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 이 정권이 잘 해보겠다고 한 일이 그 반대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소규모, 자영업 하는 사람들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고 아홉 차례나 정부의 발표가 있었지만 서민들은 집 한 채 장만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잘 해보려고 했지만 결과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우선 경험이 없는 정부이기 때문입니다. 능력도 부족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신뢰마저 상실했습니다. 국민에게 무례했고 방자했으며 교만했습니다. 2007-05-06 오전 10:41:00

redvirus 아래 박빠같은 좌빨 보시오. 당신같은 위장 좌익이 우파를 분열시키고 한국을 망조로 이끈다. 이명박이 중도보수라 치자. 당신은 주적이 김정일이냐 이명박이냐? 김정일이 같은 악마보다 중도보수 이명박이 더 나쁜 놈이라는 말투냐? 의도가 뭐냐 2007-05-06 오전 9:02:00

hkim '폭행-폭언 前歷者 3인: 이명박, 이재오, 김진홍'
조갑제님!
이명박정권하 에서도 위와같은 글을 쓸수있다고 自信합니까?
아니면,
'能力-中道保守이신 愛國者 3인: 이명박, 이재오, 김진홍'
으로 쓰시 겠는지요?
2007-05-06 오전 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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