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도 두 손 든 고문관

얼마나 쓸모가 없었으면, 아니, 오히려 오죽이나 거추장스러웠으면 그들마저 포로인 그를 돌려보냈겠는가?
<우리 민족의 5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깊게 남과 북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6.25전쟁. 북조선의 선전처럼 과연 6.25전쟁이 미국과 남조선의 북침으로 일어난 것일까? 생생한 역사의 산 증언으로 6.25전쟁을 파헤쳐 본다.
자유북한방송은 조선일보가 두 번에 걸쳐 응모한 전 민족 체험수기를 모아 책으로 엮은 “6.25 우리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내가 제5사단 제36연대에 발령을 받아 복무할 때 연락병 한 사람을 열외로 나에게 배정했다. 요구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는데 왜 열외로 배정했는지를 몰라 그 이유를 인사장교에게 물었더니 이미 나에게 배치된 연락병은 미군 고문관의 연락병 노릇까지 하기 때문에 하나를 더 보충해 주니 군복 빨래라도 시키면서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정신박약아에 가깝다고나 할까? 戰時에는 무학자도 징집을 하였으므로 무학인 사병이 상당수 있었지만 이 연락병은 무학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징집했을까 하고 의아심을 가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은 징집을 하지 않지만 戰時에는 배우고 안 배우고는 따지지 않고 수 채우기에 바빴다.

이 연락병이 내 속을 얼마나 썩혔는지 한두 가지 예를 들자. 늦어도 8시까지는 가져와야 할 아침 식사를 10시에나 가져오는가 하면, K사병을 데려오라고 하면 P사병을 데리고 오는 등, 만사가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인사장교에게 그 연락병은 필요 없다고 불만을 吐露(토로)했더니 그는 껄껄 웃으면서 그를 없는 셈 치고 잘 가르쳐, 보다 나은 군인으로, 아니 사람으로 만들어 보자는 뜻에서 내가 적임자로 생각되어 나에게 맡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사병에 관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 사병은 원래 보병 제35연대 소속으로 최전방에서 복무하다 동부전선 351고지 전투시 인민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51년 추석 전날 적 진지에서 인민군 복장의 한 군인이 무겁게 보이는 배낭을 지고 步武堂堂(보무당당)하게 백기를 높이 들어 흔들면서 아군 진지를 향해서 오고 있음이 목격되었다.

따라서 아군은 감시만 하다가 당도한 그를 보니 얼마 전까지도 이 부대 소속 사병으로 전투시 행방불명된 바로 그였다는 것이다. 그가 지고 온 배낭에는 떡이 가득 들어 있었고 대치하고 있는 인민군 대대장이 아군 대대장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그 편지의 내용은 말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떡을 보낸 것은 心理戰(심리전)의 일환으로 양측이 다 이용하였다. 통상적인 방법은 양측 진지의 중간 정도에 무인고지라고 하는 낮은 봉우리가 있게 마련인데 야간에 선물을 몰래 갖다놓고 백기를 꽂아놓으면 상대측에서 가져가곤 하였다. UN군측에서는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와 더불어 과자 같은 것을 비행기에서 수시로 적 진지에 투하하기도 했다.

심리전 이야기를 여기에서 논하고자 함이 아니고 요는 포로가 된 그를 인민군이 귀환시킨 일이다. 그를 포로로 잡은 인민군은 解放戰士(해방전사)로서 인민군에 편입시켜 이용코자 무척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쓸모가 없었으면, 아니, 오히려 오죽이나 거추장스러웠으면 그들마저 포로인 그를 돌려보냈겠는가?

여하간 이 사병은 35연대에 그대로 두어서는 놀림감 밖에 되지 않겠기에 36연대에 전입되어 나의 연락병이 되었으며 함께 있는 동안 무던히도 나의 속을 썩힌 사병이었다. 내가 끊임없이 반복교육을 한 탓인지 점진적으로 복무 자세가 좋아졌으니 한편 보람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친 걸음이니 한글이나 한번 가르쳐 볼까 시도를 해보았는데 내 속이 터질 것 같아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군에 입대한 지 오래되었으나 행방불명 기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연락병으로 데리고 있을 때 첫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휴가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를 혼자 어디 보내는 기분이었다. 迷兒(미아)가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 같으면‘○○도(道)’라든가 ‘○○도 ○○군(郡)’이라고 대답할 것인데 이 사람은 동리 사람들이 부르는 식으로 그냥 ‘○○마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찾아가는 방법은 알겠느냐고 물었더니 “南原(남원) 기차 정거장에만 가면 찾아갈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자신하느냐고 물었더니 남원 장날이면 여러 번 남원읍에 가보았으며 기차 가는 것을 구경하기 위하여 정거장에 가본 일이 있었고 군에 입대할 때도 남원읍에 집합하여 기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역에서 집까지는 찾아갈 수 있다고 했다.

용산역에서 군용열차를 타는 데까지는 다른 휴가병을 대동시키면 되겠지만 익산역(당시는 이리역)에서 내려 전라선으로 갈아타야 되는 것을 아는지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시원찮았다. 그래서 호남선을 타고 가는 다른 휴가병과 대동시켜 보내면서 그 휴가병에게 이리역에서 내리도록 도와주라고 부탁을 하였다. 휴가기간이 끝나자 귀대일에 맞추어 어기지 않고 부대에 도착한 것이 대견했다

휴가를 갔다 오더니 숙소 주변 공터에 텃밭을 10평 가량 일구더니 고추와 상추를 심었다. 그리고는 여름에 이런 것들을 끼니 때마다 약간씩 따다 주어 식욕을 돋워주었다. 입대 전에 지리산 두메산골에서 농사만 짓다 와서 밭에 무엇을 심고 가꾸는 일은 잘했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天下之大本(천하지대본)인 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攝理(섭리)에 묵묵히 순종하여 오직 흙만을 사랑하며, 알뜰히 가정을 꾸며 아들 딸 낳고 손자들의 재롱도 보면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한편, 그가 과연 장가는 갔을까 하는 의문도 생긴다. 그가 만약에 정상적인 군인이었다면 그때 어김없이 인민군에 편입되어 무진 고초를 겪다가 죽었거나, 억류 포로로 고생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가 지능이 낮았기에 오히려 하나뿐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낮은 지능이 최대의 복이 된 셈이니 이런 혜택을 천운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6.25 우리들의 이야기] 제82회 원작 고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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