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泰愚 전 대통령의 6.29 증언

『바로 그 부분이 사실과 달라요. 6월24일에 내가 全대통령을 만나 가장 중요한 사안을 논의했고, 그 후에는 (全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6월27일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온 적은 있습니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지시였는데, 내가 안 갔지』
*판매중인 '盧泰愚 육성증언'에서 발췌


<당시 全대통령의 지론은 우선 발등에 떨어진 혼란을 막고 보자는 것이었다. 타협이나 대화보다는 물리적인 힘으로 막아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全대통령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각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全대통령은 6월22일 오후 尹潽善(윤보선), 崔圭夏(최규하) 전 대통령을 만난 데 이어 이틀 뒤인 6월24일에는 金泳三 민주당 총재, 李敏雨 신민당 총재, 李萬燮 국민당 총재를 잇따라 만났다. 나는 그 회담을 지켜 보면서 「무슨 변화가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가질 수는 있었다. 全대통령은 6월24일 저녁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올라가 시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全대통령은 불쑥 『직선제를 해도 마, 이기지 않겠소?』 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직선제로서 이긴다고요? 안될 말씀입니다』 하고 부정적으로 반문했다. 全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 왔으므로 나는 全대통령이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全대통령의 이야기를 「앞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결심」으로 굳혀야겠다는 마음에서 『그게 되겠느냐』는 식으로 反語法(반어법)을 쓴 것인데, 후에 이 대목에서 내가 반대한 것으로 알려지는 이유가 된 것 같다. 하여튼 全대통령은 내가 반문하자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金大中씨를 사면 복권시킨다 해도 盧대표가 그 동안 국민들에게 심어 놓은 좋은 인상으로 보아서는 이길 것 같다. 내가 최선을 다해 밀어줄 테니까 직선제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나는 『변함없는 생각이십니까』하고 全대통령의 말을 재확인했다. 그랬더니 『그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서 『알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지 모르겠지만 이왕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으니 선거에서 이기든 지든 앞으로의 문제에 대한 책임은 모두 다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각하의 뜻을 알았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나한테 맡기고 관여하지 말아 주세요. 앞으로의 운명은 제가 책임지고 개척해 나가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 자리에 全대통령의 아들 宰國(재국)이든가 영부인(李順子 여사) 이 두 사람 모두, 아니면 한 사람은 배석했던 것 같다. 그 날 재국이가 나에게 큰 절을 했는데, 그 자리였는지 그 대화 이전이었는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는 다짐 받아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987년 들어서서 나는 줄곧 여러 사람들로부터 건의를 받으면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방안을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10일 이후부터는 직선제와 金大中 사면 복권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만약 全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와 金大中씨 사면 복권 문제를 꺼내지 않는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결단을 全대통령에게 밝혀 그의 동의를 얻어야겠다고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全대통령은 나의 이런 배경을 모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여튼 그 자리에서 6·29 선언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는 「직선제를 한다, 金大中씨를 사면 복권한다」는 두 가지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선 『전부 내 책임하에 내가 한다. 내가 해야만 국민들이 제대로 받아들인다』고 다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극비로 보안조치를 취하고 중간 중간 선언문 초안 내용을 검토하면서 약간의 보완을 한 후 최종 문안은 6월27일에 결정을 보아 李丙琪(이병기) 당 대표 보좌역에게 淨書(정서)를 시켰다. 일부 보도에는 내가 발표 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6월24일 이후 6·29 선언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 선언 직전 주말인 6월27일 청와대에서 내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도 올라가지 않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청와대의 몇몇 비서관이 『어떻게 이것을 盧대표 단독으로 하게 합니까. 합작품 내지는 全대통령 각하의 작품으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全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중대선언이 금명간에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全대통령에게 『기자들이 집을 둘러싸고 진을 치고 있어 갈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애당초 (내 책임하에 추진하고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했지 않습니까』하고 말했고, 全대통령도 『알았다』고 해서 전화 통화만으로 끝냈다. 그리고 선언 내용을 (우리 쪽에서) 청와대에 보낸 일도 없었다. 6·29 선언과 관련해 청와대와의 관계는 이것이 전부였다. 선언 당일 아침 나는 안채 2층 서재에 올라가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必死卽生」(필사즉생)을 붓글씨로 썼다. 그리고 그것을 서재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집사람에게 『여보 미안해. 내가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해 나가는 희생물로서 역사의 제단에 오르려 하니 거두어 들일 준비를 하세요』 하고 말했다.>

1987년 6월29일.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는 오전 8시30분 연희동 자택을 출발, 8시50분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민정당 중앙당사에 도착했다. 이어 9시3분에 대표위원실을 나서 9시5분,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실에 나타났다. 이날 회의실에는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마이크 앞에 앉은 盧대표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됐습니다』라고 서두를 뗀 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金大中 사면 복권 등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 선언) 8개항을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다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으로 돌아가 본다.

<선언문을 읽고 나니 홀가분했다. 발표장에서 나오면서 어느 기자에겐가 『나는 이제 완전히 발가벗었다. 또 다른 아무런 마음도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국민들 뜻대로 한다는 생각뿐이다』하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국립묘지에 가서 헌화하고 묵념하면서 수십만 영현들에게 『여러분들은 목숨을 던져 戰火(전화)에서 조국을 구하셨습니다. 이제 나도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내 몸을 희생해 이 나라에 민주화의 꽃을 피우고자 합니다』 라고 독백했다. 나는 현충사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서 李丙琪(이병기) 보좌역에게 『내 인생의 최고 절정이 오늘 이 순간인 것 같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이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李보좌역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고 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에 돌아와 보고를 받아 보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정계, 종교계, 학계 할 것 없이 각계각층이 환영일색이었다. 특히 金大中 民推協(민추협) 공동의장이 『인간에 대한 신뢰감이 생긴다』, 金泳三 총재가 『훌륭한 결정이다. 이 시대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발표로, 전적으로 환영한다』고 논평한 것을 보고 가슴이 뿌듯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金宗輝 교수가 가장 먼저 직선제 건의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6·29 선언에 대해 「상황에 밀려 마지못해 받아들인 결과」 또는 「全斗煥 대통령의 작품을 낭독한 데 불과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나의 심정은 「선거에서 지더라도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면 기꺼이 내 몸을 바치겠다」는 확고한 것이었다. 나중에 보도를 보니 金容甲(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이 내게 직선제를 건의했다느니, 金復東(김복동)씨가 나를 설득했다느니 하는데, 그들 말고도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많다. 그런데 정작 직선제를 내게 제일 먼저 건의한 사람은 선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金宗輝(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였다.

金교수는 1987년 초 우리 집에 새해 인사를 하러 와서는 『직선제를 받고 金大中씨를 사면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軍 연구원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은가』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이 친구가 아주 용기가 있구나』 하고 감동해마지 않았다. 李鍾贊(이종찬) 의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李의원은 여러 차례 내게 여론을 전하면서 직선제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직선제 건의를 수없이 들었지만, 무언가 결론을 내려고 하면 『올림픽이다, 혼란이다』 해서 걸리적거리곤 했다.

6·29 선언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자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는 자신도 뭔가 6·29 선언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해서인지 신문, 방송, 잡지 등에 인터뷰를 하곤 했다. 그러니까 6·29 선언이 발표된 후 「내가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 것도 전혀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6·29 선언이나 5共청산에 관련된 글을 보면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처럼 되어 있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구차스런 변명을 하는 것 같아 진실을 밝히기 어려웠다>

극적인 효과 위해 演技한 것 없다

6·29 선언에 대한 盧 전 대통령의 육성증언에 이어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全대통령이 金聲翊(김성익)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에게 술회한 내용 중에는, 『일단 盧후보께서 全대통령에게 직선제를 건의하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처음에는 全대통령이 그것을 거부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는데 全대통령이 『그것은 좀 곤란하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뭔가 演技(연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민주화의 祭壇(제단)에 내 스스로를 던져버린 겁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盧 전 대통령께서 6월27일 安家(안가)에서 全대통령을 만나 최종적으로 6·29 선언내용에 합의한 것으로 나옵니다.
『바로 그 부분이 사실과 달라요. 6월24일에 내가 全대통령을 만나 가장 중요한 사안을 논의했고, 그 후에는 (全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6월27일에 청와대에서 전화가 온 적은 있습니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대통령의 지시였는데, 내가 안 갔지』

배석한 孫柱煥 전 장관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6월27일 두 분의 만남 계획은 그 당시 청와대 참모들 몇 사람만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안이라고 추측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도 盧후보가 안 들어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문제니까, 그날 모임을 알고 있었던 몇몇 참모들은 두 분이 6월27일에 만난 것으로 알고 기정사실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리를 해 봅니다』

全대통령 가족이 나를 밀었다

─그 당시 盧 전 대통령께서 작성한 6·29 선언 문안은 발표 전에 全斗煥 대통령에게 전달이 됐습니까.

이 질문에 孫柱煥 전 장관이 답했다.
『문안을 최종 정리한 분이 李丙琪 보좌역입니다. 李보좌역의 증언에 의하면 6월28일 오후에 安武赫(안무혁) 안기부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나에게는 좀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6월28일 저녁에 安부장에게만 선언문 복사본 한 부를 보냈답니다. 그 외에는 청와대쪽으로도 일체 보낸 것이 없어요』

盧 전 대통령은 『安부장에게 전달된 것이 청와대에도 보고된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도 내가 선언을 발표하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몰랐어요. 내가 청와대에도 일체 알리지 않았으니까』

─盧 전 대통령께서 全대통령과 金大中씨 사면 복권문제를 논의할 때 兩金(양김)씨가 단일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의가 있었습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없는데, 어쨌든 全대통령은 내가 1985년에 당에 들어와 3년 동안 이미지를 닦아 왔으니 그만하면 되지 않겠느냐. 또 직선제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다가 전격적으로 받은 데 대한 반대급부로 인기가 높아질 테니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의견이었죠』

─6월29일 오전에 선언을 하신 후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 7월1일인데요. 그 때 全대통령과 어떤 이야기가 오갔습니까.
『내가 6·29 선언을 하면서 全대통령에게 미안했던 것은 「이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겠다」는 표현을 썼어요. 이건 국가원수에 대한 결례인 셈이라 마음에 걸렸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양반이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주었기 때문에 부담을 덜었습니다』

─全대통령 아들 全宰國씨가 盧 전 대통령에게 절을 한 것은 무슨 뜻이었습니까.
『全대통령이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가 많이 들려오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측근 중에서 나를 후계자로 진지하게 건의한 사람이 全대통령 가족이었어요. 재국이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자기 아버지에게 「盧대표가 최선의 길」이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후계자 결정 과정에서 아들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절을 시키지 않았나 생각돼요』

―6·29 선언 후 13대 大選(대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기간 중에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軍에서 일부 강경파들이 일종의 친위 쿠데타 비슷한 것을 일으켜 대통령 출마한 분들을 다 배제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그것이 끝나면 병영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盧 전 대통령께서 그들을 설득해 좌절시켰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루머 수준에 지나지 않는 얘기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軍 지휘관들은 6·29 선언의 성격을 알고 공감했어요. 이제 軍이 정치에 이바지할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었지요. 우리 軍이 너무 권위주의적인 집단으로 국민들의 거부감을 조성한 데 대한 반성, 그런 역할을 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이런 것까지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때문에 군부에서 나에게 「全대통령이 권위주의자로 매도를 당했는데, 그 분을 올바르게 받들지 못한 몇몇 사람은 6共에 참여시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탄원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나에게 反하는 친위 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는 분위기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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