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12일 월간조선 기자이던 필자는 서울 도심부를 돌아다니면서 데모 취재를 하고 있었다. 6월10일 오후에 시작된 反정부 시위는 학생들이 그 밤중에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면서 1회성이 아닌 지속성 사건으로 변하고 있었다. 12일에도 도심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대학생들 시위에 行人들이 가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종로 2가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하여 최루탄을 던졌다. 이때 60代로 보이는 行人이 최루탄 파편을 정갱이에 맞았다. 그는 화난 목소리로 시위대를 욕했다. 이때였다. 학생들과 行人들이 몰려와 이 노인을 둘러싸더니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데 지금 그 따위 사소한 불평을 하느냐는 힐난이었다. 노점상들도 이 불쌍한 노인 규탄에 합세했다. 노인은 말도 못하고 사라져야 했다. 이 장면을 보고 나는 회사에 보고했다.
'아무래도 제2의 4.19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民心이 거대하게 돌아가는 역사적 현장이었다.
그 3일 뒤인 6월15일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진행되었다. 金 추기경은 전두환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성당 주변의 시위대엔 필자도 자연스럽게 합세했다. 기자건 학생이건 경찰이 던진 최루탄 가스를 같이 마시면서 도망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가 시위대와 한 덩어리가 되었는데도 '이것이 기자의 正道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시위대가 가장 미워한 사람은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盧泰愚 대표였다. 6월 그날의 시위 현장엔 지역도, 종교의 차이도 없었다. 모두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으로 뭉쳤다.
그 보름 뒤 노태우 대표의 6.29 선언이 나왔다.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노동자의 권익 보장, 김대중 사면 복권 등을 약속한 민주화 선언이었다. 가장 미움 받던 노태우씨는 가장 사랑 받는 정치인으로 돌변했다. 몇 달 뒤 김대중, 김영삼씨는 분열되어 각자 출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지역감정이 폭발했다.
1987년의 지역감정은 정치인이 조장한 것이다. 지역감정의 희생자를 자처하는 김대중씨가 87년 사태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전두환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요사이 집권 좌파를 비판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의 위대한 變轉인 것이다. 발전하는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87년 6월12일 오후 종로 2가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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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6-29, 15: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