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후보의 대운하 구상을 두고 소설이라 우기는 반대자들이 많다. 그런 그들에게 소설을 현실화하고 수백년 동안 프랑스 중부 지대의 국민들에게 바다로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매년 수천억에서 일 조 이상의 실익을 벌어들이게 기여해준 드 미디 운하를 소개한다.
프랑스는 운하의 나라나 같다. 알려진 것만 50 개 이상이다. 그런 중에도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드 미디 운하와 가롱 운하, 정식 총명칭, 뒤 메르 운하는 총 길이가 본운하에 연결된 지류를 제하고도 장장 433 킬로미터가 넘는 대운하다. 경부대운하의 길이가 완공되면 대략 이 길이가 될 것이라 보인다.
해적과 돌풍이 출몰하던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단 간의 위험스런 지브롤터 항로 아닌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직접 연결되는 운하에 대한 꿈은 갈리아를 개척하던 로마시대부터 꾸어져 왔던 소설이나 같은 일이었다.
그 대공사를 시작하여 프랑스 국민들로 하여금 세계적 문화유산을 재산으로 갖게 한 인물은 황제도 귀족도 아닌, 피에르 폴 리퀴에라는 루이14세의 세금징수원이다.
드 미디 운하는 처음 1681년 5월 랑퀴독 운하이란 이름으로 공식 개통하였다. 대서양쪽에 위치한 보르도에서 지중해의 세떼까지 대운하 전체의 절반을 더 넘는 거리인 뚤루즈에서 지중해 동쪽 세떼항까지의 운하다.
이런 형태의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운하는 로마시대 네로와 아우구스트 황제, 샤를마뉴 대제 등 일세기가 넘는 기간동안 여러 황제들에 의해 구상했었다. 위험한 스페인 앞바다를 돌아오는 것을 피하고 항해거리도 1/10로 단축하는 대서양-지중해 직운하는 1500 여년간 번번이 여러 황제들에 의해 구상되었으나 이룰 수 없던 꿈이었다. 착수할 수 없던 가장 큰 이유는 해수면보다 대부분 120미터 이상 높은 지표면들 위 및 갈수기에도 어떻게 지속적으로 운하물이 흐르게 하는가의 문제였다.
리퀴에가 구상한 것은 대서양의 보르도에서 툴루즈까지 흐르던 갈롱강에 지중해까지 연결할 운하를 뚫는 것이었다. 리퀴에는 이 계획을 열정적으로 루이14세를 설득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 적극적인 독려를 받았지만, 막상 시작되자 루이는 그가 약속한 재정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리퀴에는 나이 60 이 넘은 노구임에도, 그의 재산을 투입하여 인부를 만2천명 이상 고용하고 수로에 해치기 쉬운 그들의 건강을 같이 보살피며 공사를 독려했다. 본격적인 공사는 1666년 런던 대화재가 벌어진 그해부터 시작되었다.
드 미디 운하의 전체 공사는 14년이 걸렸다.

대서양 보르도항과 뚤루즈을 잇는 가롱 운하 = 녹색선 부분
뚤루즈에서 지중해 세떼항까지 이은 드 미디 운하 (인공위성 사진에서 붉은 사각형 부분) - 청색선 부분
운하가 완공되기 수개월전에 건강이 몹시 나빠진 리퀴에는 완공을 보지 못한 채로 1680년10월 눈을 감았다. 미디 운하는 총길이 240킬로미터에 2미터의 깊이, 10미터의 폭으로 완성되었다. 지금 시대로 보더라도 엄청난 양인 7백만 입방미터의 토석이 채굴되었다. 기계가 없이 전부 사람의 손으로 해야만 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공사였던 것이다.
랭카독 구역을 관통하는 수로는 가장 험난한 코스였다. 수백명 이상 되는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토석을 날랐다고 전해진다.
미디 운하에만 328개의 갑문설비 및 댐들, 수다리, 터널, 저수보 등이 건설되었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부속 지류운하들과 물을 가두기 위한 부속 저수보들이 건설되었다.
뚤루즈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저수보인 생페레올 저수보가 있다. 앵서랭 지역에서는 언덕 밑을 파고 173 미터나 흐르게 하였다.
퐁쟈렝에 건설된 갑문은 드미디 운하에서 최고 걸작이다. 21 미터에 이르는 낙폭을 위해 7개의 갑문으로 구성되었으며 물의 지속적인 공급을 위해 6백만톤을 가둘 수 있는 댐, 저수보 등을 연결했다.
가장 큰 저수보는 700 미터 길이, 3 미터의 강바닥, 120 미터의 두께로 되어 있다. 출토물을 처리하기 위해 인근지역의 수백명의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바스켓으로 토석을 날랐다고 한다. 쌩페레올 저수보는 지금까지도 인공저수보로는 가장 큰 저수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첫번째 공정은 뚤루즈에서 뜨레베였으며 첫 구간이 완성된 후 두번째는 뜨레베에서 에땅 드 포까지로 1668년 시작되었다. 세번째 구간이 에땅에서 지중해의 세떼까지였다.
총 240킬로미터의 길이에 103개의 갑문이 설치되었으며 운하의 고저차는 190 미터다. 리퀴에는 이 운하가 완공되기 수개월 전 재정이 바닥난 상태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1856년에는 툴루즈에서 보르도항(대서양쪽 항구)까지의 가론운하가 1856년 완성됨으로써 꿈의 대서양-지중해 직항로 시대가 시작되었다.
서해안에서 동해쪽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해를 거쳐야 한다.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가려면 해적이 출몰하기로 유명한 스페인 앞바다를 지나야 하는데 이 부분을 해결키 위해 로마시대 아우구스투 황제로부터 샤를마뉴 등의 쟁쟁한 힘을 가진 황제들이 꿈을 꾸었음에도 정작 그 실현은 일 개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드 미디 운하는 1996년 유네스코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운하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리퀴에는 운하의 완공은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이름은 그의 희생으로 영구히 남겼다. 1604년6월29일에 태어난 걸로 알려진 리퀴에를 기념하기 위해 브지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툴루즈에는 1680년 두번째 동상이 건립되었다. 지중해의 세떼 항구는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가론강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바다의 만조가 몰려 올라오는 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다는 서해안의 낙폭이 최대 9.5 미터 인데 리퀴에가 1600년대에 건설한 운하의 최대 갑문은 그 2배가 넘는 21 미터를 수용하도록 해 놓은 것을 볼 때, 그리고 가론강이 바다의 만조가 몰리는 지역임에도 운하로 원활히 기동하고 있음을 볼 때, 강하류로부터 역류되는 조수간만 차 등을 이유로 경부운하 불가론을 펴는 반대자들의 논리는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인 것이라 본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이제는 지구환경 변화로 인해, 몇십년, 몇백년 만의 순간최대폭우가 해마다 내리는 빈도가 잦아졌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과 동시에, 가뭄 또한 수시로 찾아오고 있다. 이런 지구환경 급변 상황에서 물에 대한 장기적 관리를 전국토적으로 운용하는 시스템화를 이룰 수 있는 될 운하건설론은 이후보가 주장하듯, 이후보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서는 현실로 이루어져야 하는 소설이라는 점을 프랑스의 드 미디 운하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려움은 극복해내기 위해 있는 것이지, 그 앞에 주저앉고 소설타령이나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드 미디 운하가 1681년 완성되면서 운하에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보에 대한 많은 지식들이 축적되었다. 선박이 항해하기 힘들었던 갈롱 강을 운하화 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프랑스 내전 등으로 공사가지체되는 과정을 거쳤으나 1844년 툴루즈에서 몬텍과 몬타반까지 구간이 완공되고 이어 1853년 부제수르베세가 연결된 후 1856년 대서양 지중해 직운하로써 전면 개통되었다.
갈롱 운하의 폭은 수면을 기준하여 18 미터이고 정박시설 깊이는 1.8 미터, 교각의 높이는 3.6 미터다. 갈롱운하에 설치된 갑문수는 53 개이고 운하의고저 차는 128 미터다.
1879년 프레이키넷 수상에 의해 입법된 프레이키넷 내수로 기준척에 의해 가롱운하 드미디 운하를 비롯, 프랑스 내 5,800 킬로미터에 이르는 각종 운하들과 갑문들이 규격화된 이래 운하운송비가 지속적으로 내려감에 따라 내륙화물운송 총량의 23%를 처리하고 있다.
| 유럽 내수 운항 규격 | ||||
|---|---|---|---|---|
| 등급 | 선박용량 | 길이 | 폭 | 하상 |
| 0 | 300톤미만 | N/A | N/A | N/A |
| I | 300 톤 (the péniche) | 38.5m | 5m | 2.5m |
| II | 600 톤 | 50m | 6.6m | 2.5m |
| III | 1000 톤 | 67m | 8.2m | 2.5m |
| IV | 1350 톤 | 80m | 9.5m | 2.5m |
| V | 2000 톤 | 95m | 11.5m | 2.7m |
| VI | 3000 Tonne and over | N/A | N/A | N/A |
뚤루즈를 지나는 운하 미디 운하에서 가장 높은 지역 갑문을 통과중인 선박 선박이 나가고 난 갑문 가장 높은 지역의 갑문에서 낮은 지역을 향해 내려가는 중의 선박 아젱시를 흐르는 운하 까스뗄랑드르 지역의 운하 퐁쟈렝의 21 미터의 낙차를 견디기 위해 설치된 7개의 갑문 엠보체르 지역을 운항 중인 선박 호쁘스 지역의 운하위에 설치된 독특한 색깔의 교각 드 미디 운하에서 가장 높은 지대(해수면에서 200 미터)에 위치한 나루즈 지역(까스뗄나우다리의 서쪽). 이 곳으로 리퀴에의 영감에 의해 설치된 생페레올 저수보의 물이 흘러든다 뚤루즈 지역의 운하
72년 이래 드 미디 운하 인근의 도시들과 마을들은 지속적으로 연 10% 에서 60% 까지 성장하는 중이며 가롱운하에서만 수익창출이 연간 2천6백만 유러화(약 360억 )에 이르고 있다.
1000여척 이상의 선박들이(절반 가량은 무인가로 추정됨.) 관광객을 실어나르고 있으며 70년 12척의 선박으로 시작된 공식 관광선단은 현재 450여 척에 이른다. 1996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 이후 관광업은 더욱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1872년 최초로 아젱시를 기차가 떠난 이래 보르도항에서 세떼항까지의 운하와 나란히 철로도 개설되었다. 프랑스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관광노선이기도 한 것이다.
대운하는 한번 건설되면 반영구적인 국민들을 위한 큰 부가 형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류의 문명 발상이 전부 강을 끼고 한 것도 교통과 수원의 원활한 활용성 때문이다. 일시적 목재 등의 운송을 위해 건설되었던 미동부의 소소한 운하 류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지금도 미국은 아리조나 대수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프랑스인은 1660년에 아무 기계적 공사도구가 없이 대운하를 건설하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남을 영구적인 경제문화유산을 물려 주었다. 유럽, 특히 서부유럽이 선진국으로 쉽게 된 이유는 본격적인 산업혁명 이전 운하가 다양하게 건설됨으로써, 대서양과 각지에서 오는 화물들이 원활하게 내륙 각지로 고루 배송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해와 동남해를 직접 연결하고 내륙 중부를 관개하는 경부 대운하 건은, 이명박전시장의 발언 마따나, 그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언젠가는 추진할 사업인 것이 맞다.
인도 내륙에 수백년전 진작에 대운하가 중국이나 프랑스 처럼 건설되었다면, 과연 수백년간 빈부 격차가 극심한 후진국으로 있었을까 를 생각해보면 금새 알 일이다.
2007.7.1. 파아란 한은경.
파아란홈카페 http://cafe.daum.net/paaran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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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파스 지역을 지나는 터널 구간












매년6월 퐁세랑 지역의 운하에 설치된 9개의 갑문에서 벌어지는 축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