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시대에도 大運河가 있었다!

낙동강-조령-남한강으로 연결된 大水路는 만주의 심양과 일본의 하카다(후쿠오카)까지 연장된 한반도의 從貫교통로였다.
누가 '우리나라 三國시대에도 大運河가 있었다'고 말하면 '무슨 잠꼬대인가'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도 서울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남한강과 낙동강 水路를 이용하여 김해를 지나 대마도를 거쳐 일본 규슈의 하카다(지금의 후쿠오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부연설명을 하면 '어디 한번 들어보자'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삼국시대의 이 대운하를 이용하여 낙동강변의 弁韓-가야에서 생산된 철이 북으로는 낙랑(지금의 평양부근)과 대방(지금의 황해도 부근)까지 수출되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倭에까지 팔려갔다'는 설명에 이르면 귀를 쫑긋하면서 듣기 시작할 것이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교수 崔永俊씨의 力著인 '한국의 옛길-嶺南大路'(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남한강과 낙동강은 소백산맥을 分水界로 하여 정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따라서 두 하천 사이의 약40km를, 連水陸路를 연결할 경우에 약500km가 넘는 從貫수송로가 한반도의 중앙에 형성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두 하천을 연결해온 대표적인 교통로는 단양과 안동, 충주와 상주 사이에 발달하여 왔다. 한강~낙동강 從貫교통로를 북쪽으로 연장하면 예성강, 대동강, 압록강 하류를 지나 만주의 심양에 이른다. 이 線上에는 북쪽으로 한양, 개성, 황주, 평양, 안주, 의주가 있고 남쪽으로는 광주, 충주, 상주, 대구, 동래 등 주요도시들이 배열되었다.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결정론적 논리가 성립된다.>

崔 교수가 이 책을 쓴 것은 1990년이므로 李明博 전 서울시장의 대운하 계획과는 무관하다. 李 전 서울 시장은 충주-문경을 연결하는 약40km의 터널을 뚫어 남한강과 낙동강 상류를 연결하면 약540km의 물길이 열린다는 주장을 한다. 李明博씨의 대운하 계획에 반대하는 이들중엔 서울에서 부산까지 大運河를 새로 판다고 오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남한강 上流와 낙동강 上流를 40km만 연결해주면 두 강물이 서로 이어져 500km가 넘는 水路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한 데서 李씨의 苦戰이 시작되었다. '40km만 이어주면 500km의 물길이 열립니다'라고 간단하게 요약해주지 않은 탓이다.

崔 교수는 삼국시대 이전의 古代부터 남한강-낙동강의 水路는 서로 연결되어 이용되었음을 일깨워주었다. 서울에서 물건을 실은 배가 충주에 닿으면 그 물건을 내려서 말이나 수레에 싣고 鳥嶺(문경 새재)을 넘는다. 약40km만 육로를 이용하면 경북 상주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배에다가 물건을 옮겨 싣고 낙동강을 타면 김해까지 갈 수 있다. 김해에서 배를 바꾸든지, 정비를 하면 멀리 보이는 대마도를 거쳐 현해탄을 건너 규슈의 후쿠오카에 이른다. 대마도에선 일본의 이키섬이 보이고 이키섬에 이르면 후쿠오카가 보인다. 바다가 거치지만 눈으로 목표지점을 정해놓고 항해하는 것은 쉽다.

낙동강 주변의 창령, 고령, 함안, 김해 등지에서 가야부족국가가 일어났다. 가야는 낙동강 水路를 이용하여 현해탄을 건너 규슈로 진출했다. 가야 세력이 규슈에서 힘을 길러 다시 일본의 심장부인 오사카-나라-교토 지방으로 나아가 고대 일본을 세우는 主力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이젠 상식화되고 있다.

낙동강-남한강 水路를 북으로 연장하면 그 교통로는 낙랑, 대방지역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瀋陽으로까지 연결된다. 즉 만주심양에서 대각선으로 한반도를 지나 일본의 규슈에 이르는, 1000km가 넘는 從貫수송로가 형성된다. 고대에 대륙-한반도-일본열도에 걸쳐 명멸했던 고조선, 낙랑, 대방,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는 이 종관수송로를 이용하여 交易하고 전쟁했다.

신라는 낙동강-남한강 水路를 장악함으로써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진흥왕은 소백산맥을 넘어 충주에 있던 고구려의 전초기지를 점령했다. 거의 동시에 지금의 옥천 지방(당시는 관산성)에서 백제의 聖王이 이끄는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전멸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소백산맥 북쪽으로 진출하여 남한강 水路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 북진정책의 주인공인 진흥왕은 서울까지 차지하여 漢江 유역을 통제하에 넣었다.

漢江 河口는 바로 서해로 이어진다. 신라는 서해를 지나 직접 중국과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진흥왕은 낙동강 水路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가야연합국의 마지막 거점이던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킨다. 신라는 가야의 생명선이던 낙동강 水路도 완벽하게 장악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던 倭에 대해서 우위에 서게 된다. 한강-낙동강 유역을 동시에 점령한 신라는 여기서 파생된 생산력과 제철능력과 무역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100년 뒤에는 삼국을 통일한다. 낙동강-남한강의 水路는 국가 흥망의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신라는 낙동강-남한강의 水路를 통제함으로써 그 연장선상에서 서해와 남해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반도인 한국의 대운하는 바로 바다와 연결된다는 장점이 있다. 내륙지방에 있던 가야의 철제품이 이 水路를 이용하여 바다를 건너 일본에까지 수출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李明博 캠프에서 주장하는, '대운하가 뚫리면 충주가 항구가 된다'는 말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고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던 현상이다.

李明博씨의 대운하 계획은 결국 남한강과 낙동강을 서로 연결시키고 준설을 하여 강이 제대로 흐르게 하고 배를 띄우겠다는 이야기이다. 요사이 낙동강 상류는 물이 부족하여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이다. 강은 흘러야 강이고, 배가 다닐 수 있어야 水路 역할을 한다. 大운하 계획은 물을 흐르게 하여 낙동강-남한강이 三國시대 상태로 복원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강을 흐르게 하는 것은 환경파괴가 아니라 환경복원이 아닌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힘이, 낙동강과 남한강을 연결시킴으로써 국가의 생산력과 군대의 기동성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킨 데서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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