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한기 백골유격대장(73)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고창에서 중학생(현재 고교생)으로 이뤄진 「백골유격대」를 조직해 인민군과 빨치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던 인물이다.
전북 고창은 1950년 7월20일 인민군들에 의해 점령됐다. 남한 대부분 지역이 9월26일을 전후해 적치(赤治)에서 벗어났지만, 고창은 1950년 11월에야 일부 지역만 수복됐다. 인민군 패잔병들과 빨치산들이 고창으로 몰려들면서 다음해인 1951년 4월까지 공산당의 장악 하에 있었다. 군인들은 북상하는 전선으로 떠나고 고창군에는 치안을 담당하는 70여명의 경찰과 백골유격대만 남았다.
『경찰과 백골유격대는 고창경찰서 둘레에 고압선을 설치할 정도였어요. 고창경찰서 주변만 대한민국이었을 뿐, 고창군 일대는 인민공화국이었죠. 고창군 전역을 수복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어요. 경찰들은 「처자식이 있어 죽을 수 없다」며 제대로 전투조차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고창을 장악했던 좌익들은 4000여 명의 민간인들을 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국군이 양민을 학살하다니요?』
고창군 일대는 좌익의 발호가 극심했던 지역이다. 여순반란사건 패잔병들의 본부가 있던 전북 영광군과 인접해 있어 빨치산들의 활동도 극렬했고, 특히 남로당 산하 학생조직인 민주학생동맹의 활동도 고창중학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고창군 일대가 「좌익 세상」이다 보니 다른 곳에선 휴지가 된 인민화폐도 유통됐었다.
5일 고창 행에 동행했던 백웅기氏(76)는 『인민군과 빨치산들은 부녀자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걸리면 무조건 다 죽였다』며 『고창군 일대는 좌익들에 의한 인간도살장이었다』고 말했다.
김광득氏(77)는 『고창에서 1950년 6월26일 아버지가 처형당했고, 9월26일 어머니 13세 남동생1명, 15세, 10세, 7세, 4세, 2세 여동생5명 등 7명이 살해당했다』며 『그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창으로 찌르고 곡괭이로 두들겨 패 죽였느냐』고 했다.
白대장은 『전쟁에서 유탄을 맞을 수도 있고, 오폭을 당할 수도 있지만, 고창은 다른 지역과 달라 좌익들에게 양민들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곳』이라며 『교전 중 사살된 빨치산들 속에 부녀자와 어린이 시신이 끼어있었다는 주장을 근거로 이들을 양민으로 둔갑시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공음면은 「靑보리밭」으로 해마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체험학습을 오는 곳입니다. 여기 오는 학생들이 「국군이 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비문을 보고 무엇을 배우고 돌아가겠습니까? 조국과 국군에 대한 저주, 증오 아니겠어요? 이 말도 안 되는 빨치산 추모탑은 당장 철거돼야 합니다. 반드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