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할 수도 있습니까?”
지난 1월 초, 버시바우 미대사가 한 세미나장에서 물었다. 그의 질문과 동시에 ‘순진한’ 나의 답이 나왔다. “아뇨, 그런 일 절대로 없어요(No, definitely.).”
그때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외교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손학규 전 지사는 내게도, 온 대한민국의 국민 앞에서 “내가 벽돌이냐”며 “한나라당이 바로 나 자신”이라며 “주인인 내가 왜 한나라당을 나가느냐”고 했다.
그러나 봄날이 다가오자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한때 ‘행동하는 흑심’ ‘정신 이상자’라고 DJ를 비난했던 손학규 전 지사는 충성어린 햇볕정책지지자로 발언을 시작했다. 그리고 한나라당표 후보를 열렬히 꿈꿨던 손학규는 한나라당에 ‘저주의 왕소금’을 뿌리며 떠났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정치인에게 거는 희망은 언제나 배신의 부메랑으로, 배덕의 추임새로, 그리고 절망이란 답장으로 돌아오는가?’라고.
내게는 찜찜한 또 하나의 질문이 남아있다. 작년 9월 말에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문제로 미국에 갔을 때였다. 뉴욕에서 우리는 예정에 없던 힐 차관보를 만나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힐은 아주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한국정치에 대해 물었다. 질문은 단 하나였다. “한나라당은 경선이 끝나면 모두가 승자를 도울 겁니까?” 나는 즉각 답했다. “물론이지요(Yes, Absolutely).” 함께 있던 다른 의원들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나 혼자만 순진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노사연의 유행가 가사 그대로 그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었다.
아직 경선은 끝나지 않았지만-나는 ‘내가 또 바보 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 한다. 내가 아는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내 뒤통수를 쳤다. 나는 ‘기대를 배반하는 직업이 바로 정치인가?’하고 되묻기도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통 다음 대통령선거로 죽 끓듯 한다. 현재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사람만 60명이나 된다고 한다. 정치는 분명 사양산업인데 이 대한민국만은 예외인 듯싶다. 다 합쳐도 10%도 안 되는 범여권이 ‘컷 오프’ 운운까지 하는 ‘코미디가 아니라 비극’이 상연되고 있다. 대개는 총선이 불안하고 지역구에서 내쳐진 이들이 ‘억-소리 나는 돈’만 내면 ‘악-소리 나게 사전 (총선)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너도나도 나서는 모양이다.
문제는 한나라당이다. 지금 이명박과 박근혜-두 후보가 있다. 나는 처음에는 이들이 ‘왜 대통령이 되고 싶어할까?’ 알 수가 없었다.
이명박 전 시장은 매우 유능한 기업의 CEO였다. 나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다. 나 역시 조그만 회사를 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의 최고의 선은 ‘이익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기업가가 지불해야 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없이 판단하고 예측하고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래도 기업에는 ‘눈에 보이는 생산=업적’이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기업인이 왜 여전히 ‘시대정신’을 찾아 헤매는 후진적인 정치판에 뛰어들었을까? 이상했다. ‘선진’했던 이가 ‘후진’을 하는 것은 ‘진화’가 아니라 ‘퇴행’을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박근혜 전 대표도 그렇다. 대통령의 꿈을 키우는 박 전 대표를 지켜보며 ‘여성 대통령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깊은 가슴 속에서는 ‘아버지가 대통령을 하는 것을 지켜봤는데 왜?’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곁을 죽 지켰던 김병준 정책실장이 ‘나도 대통령 한번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 나는 진짜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쉽게 했나 보다 생각했다. 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독하고 고통스럽고 고민스러운 자리인데 그 과정을 지켜본 측근들이라면 ‘난 죽어도 못해’하고 달아나야 정상이다. 게다가 박 전 대표의 부모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권력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았고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가를 잘 보았다면 나 같으면 정치 근처에도 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지금 이 두 사람이 문제이다. 이 둘은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은 이 나라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하는 생각에 대권에 도전했다. 그러나 단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치열한 ‘권력의지’이다. 그 치열함은 남녀 차이도 없고 나이 차이도 없다. 정권교체의 동지애도 없을 뿐더러 ‘적보다 더 미운 내 편’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들의 권력의지를 부추기며 수많은 한나라당 의원들은 모세가 홍해 바다를 가르듯 두 편으로 쫙 갈라져 있다. 문제는 바다를 건너 애굽을 탈출해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하는데, 서로 ‘우리만 자격이 있다’며 싸우고 있는 점이다. 이러다가 바닷물은 다시 합쳐지고 두 사람 다 물에 빠져 죽는다. 검증공방은 ‘물귀신작전’이 될 수 있다. 나아가 한나라당의 ‘비명횡사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 전략은 없이 ‘정략’만 가지고 참 잘도 싸운다.
‘이러다가 또 진다’. 어느 날 내 입에서 신음과 함께 새어 나온 말이다. 다시는 안 볼 부부처럼 거울 깨고 맥주병 던지며 ‘장미의 전쟁’처럼 치사하고 치졸하고 치열하게 싸운다.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할 ‘서바이벌 게임’ 같다. ‘애당심’과 ‘애국심’ 그리고 ‘국민’이 실종됐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오만과 방종과 횡포에는 ‘노예근성’을 보였던 그 의원들, 어찌 이 내전에는 ‘헝그리 정신’으로 중무장해서 피를 보겠다며 링에 뛰어들 수 있는가? 적(敵)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한 법이건만 왜 한나라당 의원들은 ‘진짜 적’ 앞에서는 가드를 내렸던가? 그리고 ‘우리끼리’ ‘같은 당끼리’는 어쩌면 이리도 처절하게 쥐어뜯고 싸우고 중상을 입히고 있는가?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콤플렉스’와 일맥상통한다. 기자실에 대못질하는 것으로 대통령 업무를 마무리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속내는 간단하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다름아닌 ‘조중동의 사랑과 칭송’이었다. 게츠비가 원했던 것은 파티에 모인 추종자들의 환호가 아니라 옆집에 사는 옛 애인 데이지의 사랑이었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당 의원들의 열등감’은 바로 저들의 존재 자체였다. 나는 이상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왜 ‘저들’ 앞에서는 작아지기만 할까? 한나라당 사람들은 그들이 지닌 ‘부’와 ‘학식’과 ‘지위’에 자신이, 자부심이 없었던 것이다. 수치심을 모르는 무지와 게으름이 빚는 가난과 사이비 민주화의 완장 앞에서조차 그들은 작아지고 약해지고 무너졌다. 당당히 맞설 만큼 그들은 땀과 눈물이 부족했단 말인가? 그렇게 자신이 없었나 보다.
그러나 내 편은 만만했다. 온실에서 싸움은 할만한가 보다. 온실만 나서면 한나라당 사람들은 저들의 버럭 지르는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고, 회오리 전에 맥을 못 추고 공작에 다시 무너질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한나라당에 필요한 것은 진정한 동지애이다. 치밀한 전략이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무슨 한이 있어도 이루겠다는 투지이다.
왜 한나라당은 내리 두 번을 졌는가? 질 만한 이유와 원인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그때 한나라당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바로 지금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여옥이 본 한나라당 내부 사정: '적보다 더 미운 내 편’ 李와 朴
- 田麗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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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07, 2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