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한반도 평화비전'이라는 새로운 대북정책을 내놓은 한나라당이 요즘 보수단체들의 극렬한 저항으로 곤혹을 치루고 있다. 보수정당을 자임해 온 한나라당이 이처럼 보수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는 창당이래 흔치않은 일이다. 보수의 정체성을 스스로 버린 한나라당이 자초한 일이기는 하지만 대선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재향군인회(향군) 등 보수층의 지지를 잃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향군이 그간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것은 당내 특정 인물이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다. 당의 대북정책과 안보정책이 향군의 정체성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향군이 주장해 온 국가보안법 존치, 선(先) 핵포기가 대북정책의 선행조건, 상호주의 및 핵포기를 전제로 한 대북지원, 전시작전권 단독행사 및 한미연합사 해체 반대, 한미동맹 강화 등에 대해 한나라당이 이념적 동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당의 안보정책에 대한 동지적 유대감 때문에 한나라당을 지지해 온 것이다. 정책에 대한 지지였지 당에 대한 지지가 아니였다는 말이다.
향군의 감독관청인 국가보훈처는 향군이 때때로 나타내는 안보의견을 정치활동으로 오해하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왜 특정 정당 편을 드냐는 것이다. 향군의 주장이 한나라당의 주장이나 정책과 같다는 이유다. 그래서 향군회법 상의 '정치활동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오란 말도 안했는데도 향군이 주도한 집회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몇명씩 불쑥 나타나 관심을 보인 것도 향군에게는 사실 말못할 부담으로 작용했다. 보훈처의 곱지않은 눈총 때문이다. 오해는 금방 풀렸지만 '한나라당 편을 든다'는 욕을 먹어가면서도 한나라당과 이념적 유대를 가져왔던 향군이다. 이러다보니 한나라당이 향군을 자기들 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착각이다. 향군이 한나라당 정책에만 지지를 보냈던 것도 아니고, 정부·여당의 안보정책에 무조건 반기를 든 것만도 아니다. 열린우리당과 정부의 국보법 철폐 움직임에는 강력히 저항 했지만 이라크 파병 결정에는 적극적인 지지와 찬성을 보냈고, 故 김선일씨의 테러 희생으로 철군여론이 높아질 때 정부·여당이 낸 '철군 불가' 입장에 대해서도 향군은 지지를 보냈다. 향군을 한나라당 2중대라고 비난해서도 안 되고, 한나라당이 향군을 자기 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19일 '한반도 평화비전'을 만든 한나라당 평화통일정책특위 위원장인 정형근 최고위원이 향군 원로들을 설득하기 위해 향군회관을 방문했다가 계란세례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향군과는 무관한 단체에서 벌인 일이지만 보수단체들이 믿고 의지해 왔던 한나라당에 대한 배신감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김용갑 의원과 함께 당내 보수의 중심에 있던 정 의원의 변절(?)에 대한 보수층의 분노는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계란 투척을 두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사건 후 인터넷에 표출된 보수들의 반응이 계란을 던진 사람들을 욕하기 보다는 정 의원의 변절을 나무라는 쪽에 무게가 실려있음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당해도 싸다'는 반응이 주류다.
향군을 방문했던 날 정 의원은 계란만 맞은 게 아니다. 향군 원로들로부터 무수한 '말(言)폭탄'을 맞았다. 아마 계란 보다 더 아팠을 것이다. '열린당이나 민노당으로 가라' '믿었던 정형근이가 이렇게 우리를 배신할 줄 몰랐다' '당신을 믿었는데 배신감 때문이 잠을 못 잔다' '왜 난데없이 김대중이 내놓은 햇볕정책을 재탕하는가' '정 의원 설명을 듣고도 납득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고집 부리고 밀고 갈거야?' '정 의원, 정신차려!' 등등 3시간 동안 고문(?)이 이어졌다.
박세직 향군회장이 차마 보지못해 원로들의 말을 막지 않았다면 고문은 더 길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정 의원은 얼굴색하나 안 변하고 들었다. 향군이 자기들 편이라고 생각해서 편안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그는 '보수가 이런 용기가 있어야 정권도 교체할 수 있다'며 계란을 던진 단체들을 두둔하고 나서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엔 박세직 회장에게 '주변에서 향군회관에 가면 봉변 당한다, 가지말라'고 말렸는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왔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정 의원의 이같은 자랑은 21일 부산에서 이명박 후보측이 개최한 여성당원 교육에 참석해서도 나왔다. 그는 '계란 공격을 받던 당일 보수단체들이 위해(危害)를 가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그래도 갔다'고 했다. '오늘은 보수단체들이 나를 칼로 찔러 죽인다는 첩보가 있어 경찰에 얘기하고 왔다'고도 했다.
정 의원은 '한반도 평화비전'이 수차례 당내 의견 수렴과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당론이라고 말하지만 아직은 공식적인 당론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그의 지금 행보는 자신이 입안한 새로운 대북정책을 오는 9월 당론으로 정하기 위한 여론 결집의 과정이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이 대북문제에 있어서 정부와 집권당에 비해 방어적·수세적이였다며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수구꼴통'의 이미지를 벗고 적극적 대북개방과 소통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래서 만든 것이 '한반도 평화비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향군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서 대패한 그가 다른 보수계층을 상대로한 설명에서는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의문이다. 보수들의 공통적 생각은 '한반도 평화비전'이 '실패한 햇볕정책의 표절'(정용석 교수 주장)이라는 데 멈춰있기 때문이다. 정 의원의 대북정책은 북한으로부터도 맹렬한 비난을 받고 있는 처량한 꼴이다.
향군은 지난 19일 정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안보정책자문회의에서 자문위원들이 낸 의견을 종합하여 곧 '한반도 평화비전'에 대한 향군의 입장을 낼 예정이다. 향군의 입장은 한나라당에 공식 문서로 제출될 예정이며, 이 의견이 묵살된 채 당론화된다면 향군은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물론 신대북정책 철회를 위해 집회 등을 포함한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저항에 나설 방침이다.
국내 최대 보수단체인 향군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대선에서 승리하겠다면 그것은 한나라당의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은 한나라당이 아직도 향군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이 자기들 편인 줄 알고 있는데서 비롯된다. 향군을 집토끼로, 붙박이 지지세력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향군이 그동안 한나라당을 묵시적으로 지지한 것은 당의 정책을 지지한 것일 뿐이다. 향군이 비정치법인체라는 특성으로 인하여 안보문제를 국가정책화 하는데 한계가 있었기에 안보관을 같이하며 보수정당을 표방해온 한나라당을 지지한 것이였다. 따라서 당의 정책이 향군과 다르면 향군이 한나라당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konas)
김 철 기자 konasnet@korva.or.kr
향군이 한나라당 편인 줄 아는가
- 코나스(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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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24, 1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