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수술대 위에서 총쏜 젊은이를 위해 기도하다.

1981년 3월30일자 日記. 이 글을 미움으로 똘똘 뭉친 정치인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趙甲濟의 정보파일



1. 수술대 위에 누워서 암살기도범을 위해 기도한 레이건


요사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레이건 日記’를 읽다가 1981년 3월30일자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이날 그는 저격을 받는다.
<힐튼호텔 볼룸에서 열린 土木勞組 전국대회에서 연설하고 옆문으로 나와 車로 가는데 왼쪽에서 총성이 났다. 경호원이 나를 車안으로 밀어넣고 車 지붕에 뛰어올라갔다. 나는 등 위쪽을 맞고 얼마나 아픈지 기절할 지경이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생각했다. 차가 출발했고 나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피가 나왔다. 부러진 갈비뼈가 허파를 찔렀다고 판단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나는 응급실로 들어갔고 수술대 위에서 옷을 벗겼다. 비로소 총알이 허파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숨을 쉬려고 해도 공기가 빨려들지 않았다. 겁이 났다. 나는 천장을 응시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를 쏜 젊은이를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두고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의미를 생각했다. 나와 그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똑 같이 사랑받는 존재이다. 나는 그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다. 어린 양이 다시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눈을 뜨니 낸시가 보였다. 아내가 없는 세상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내려주신 모든 축복중에서 낸시를 보내주신 것 이상은 없다. 나에겐 과분한 선물이다.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수술이 진행되는 시간은 몽롱하게 지나갔다. 오늘은 4월11일, 퇴원하여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최선을 다해 섬겨야겠다>
퇴원하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날 그는 피격 날의 기억을 되살려 쓴 것이다. 정치인이라고 하면 利害관계에 목을 매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레이건은 총알이 박힌 허파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수술대에 누워 자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자신의 목숨을 거의 앗아갈 뻔했던 살인미수범을 위해서 먼저 기도한다. 한 위대한 人格의 겸손한 모습이다. 그가 惡의 제국 소련을 무너뜨렸다. 한반도의 巨惡 김정일을 제거하고 북한동포를 해방할 사람도 레이건이나 트루먼 같은 위대한 人格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역사의 암시가 아닐까?
레이건은 197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현직 대통령 포드에게 적은 표차로 져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했다. 이때 그는 감동적인 낙선 연설을 했다. 포드의 수락연설보다 훨씬 더 인기를 끌었다. 대의원들은 이 연설을 듣고는 '우리가 잘못 뽑았구나'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레이건은 선거기간중 진심으로 포드를 지원했다. 포드는 낙선하고 민주당 카터가 당선되었다. 1980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레이건이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는 이때 포드를 부통령 후보로 영입하려 했다. 부통령에게 國政운영의 상당부분을 위임하는 일종의 '공동 대통령제'까지 구상했다. 포드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실망한 레이건은 평소 싫어했던 부시에게 부통령 후보 자리를 제안하여 동의를 받았다. 레이건은 대통령이 된 뒤 부시의 참모이던 제임스 베이커를 비서실장으로 영입했다. 겸손한 사람이니까 이처럼 유연하고 너그러운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미움으로 똘똘 뭉친 몇몇 한국 정치인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2. 黃長葉 증언: '김일성이 스탈린 앞에서 박헌영과 함께 시험쳤다고 하더라'


며칠 전 黃長燁 선생과 대화하다가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되었다.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불러 직접 면접을 보고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주장이 러시아측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黃 선생이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이가 그런 말을 합디다. 제가 직접 들었어요. 스탈린한테 두 사람이 불려가 시험을 쳤다는 겁니다. 스탈린이 출제한 것을 가지고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에 들어가 답안을 썼다고 해요. 여기서 김일성이 쓴 답안이 합격된 셈이지요'
黃 선생의 이 증언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다. 따라서 학자들이 하는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사자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김일성, 朴憲永 두 사람이 불려간 시기에 대해서 러시아 전문가들은 1946년 7월이었다고 증언하다. 이때 朴憲永은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니 비밀리에 북한을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그해 10월에 미 군정의 추적을 따돌리며 북한으로 피신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데일리 엔케이 손광주 편집국장은 자신의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 앞에서 시험을 본 적이 있다. 누가 공산주의 지도자로 더 적합한가를 놓고 시험을 본 것인데, 사실은 누가 더 스탈린에게 충직한가를 따져본 것이다. 당시 스탈린이 무슨 문제를 ‘출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험이 끝난 후 스탈린은 박헌영의 답안지까지 김일성에게 주면서 “알아서 처리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북한정권을 세울 때 스탈린은 김정일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國號(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와 헌법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희대의 독재자 앞에서 시험을 친 뒤 북한의 독재자로 결정된 김일성, 美 軍政과 대결하여 대한민국을 자유民主의 초석 위에 세운 李承晩, 그 차이가 오늘의 한국과 북한의 차이이다.

3.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핵물질 밀수입했을 가능성 있다

미국 CIA 부장을 7년 동안 지내면서 9.11 사건과 이라크 전쟁을 겪었던 조지 테넷이 3년 전 은퇴한 후 올해 회고록을 출간했다. '폭풍의 한 가운데'란 책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秘話가 있다.
파키스탄의 원자력 위원회에서 核관련 기술 담당 이사로 근무했던 마무드와 核물리학자 마지드가 알 카에다의 빈 라덴에게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기술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CIA가 알고 이 사실을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알려 이들을 체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2001년 말 테넷 부장이 부시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파키스탄을 방문하여 무샤라프 대통령과 이 문제로 담판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무샤라프는 테넷에게 '나는 러시아의 이른바 '느슨한 핵물질'이 알 카에다에 넘어갔을 위험성이 더 높다고 본다'고 말했으나 곧 수사를 지시했다. 마무드는 파키스탄 신문관에게 자신이 빈 라덴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마무드는 빈 라덴에게 '핵폭탄을 만드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은 핵물질을 입수하는 일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빈 라덴은 '우리가 핵물질을 이미 갖고 있다면?'하고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테넷은 회고록에서 소련이 붕괴할 때 소련의 핵무기나 핵물질(플루토늄이나 우라늄)이 밀수조직에 의해 다른 나라나 테러조직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썼다. 부시 대통평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러시아는 핵물질이 하나도 유출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푸틴은 신중하게 용어를 골라가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내 임기중엔 아무 일이 없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푸틴은 전 정권 시대에까지 보증을 서지는 않았다. 이는 소련이 붕괴하고 옐친 정부가 들어섰을 때의 혼란기에 핵폭탄이나 핵물질이 외국이나 테러조직으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핵무기를 개발하던 북한정권은 러시아로부터 플루토늄 등 핵물질을 밀수해들어오지 않았을까? 최근 필자가 인터뷰했던 과학자 출신의 한 탈북자는 '핵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러시아로부터 플루토늄 등을 입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보기관은 북한정권이 약50kg의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영변 원자로에서 생산된 것이다. 이 이외에 러시아로부터 밀수해온 플루토늄이 더 있다면 김정일 정권은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고 보유한 50kg을 신고하고도 핵능력을 보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은 주한미군 철수 및 韓美동맹 해체와 이미 개발하거나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한 핵폭탄 및 핵물질의 폐기를 서로 맞바꾸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도 북한정권이 핵물질을 보유한 상태가 된다면 한국은 벌거벗겨진다. 문제는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노무현 정권의 어느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4. 昭和천황이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싶다'고 맥아더에 제의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빌리 그레험의 회고록을 읽다가 재미 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1952년에 그는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그 몇년 전 일본의 昭和 천황이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일본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싶다'면서 지원을 요청하더란 것이다. 맥아더는 며칠 생각해본 뒤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인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믿어야 합니다'
맥아더는 그 뒤 미국의 敎界에 1만 명의 선교사와 1000만 권의 성경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미국 기독교界는 1000명의 선교사와 수백만 권의 성경을 보냈다. 수년 뒤 빌리 그레험은 뉴욕의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던 맥아더를 만났다. 일본에서 들은 소문에 대해서 물었더니 맥아더는 '사실이다'고 확인해주더라고 한다. 현재 일본의 기독교인은 全인구의 1%도 되지 않지만 神學의 수준에선 세계적이란 평을 받는다.


5. 왜 昔씨는 滅門之禍를 당했나?


왜 昔氏는 稀姓이 되고 말았나?

우리나라의 姓氏 랭킹을 보고 있으면 수수께끼 같은 一点을 발견할 수 있다. 2000년 인구 센서스에서 인구수 1등은 金氏로서 약993만 명이었다. 全인구의 21.6%이다. 2위는 李氏로서 약679만 명. 14.8%이다. 3위는 朴씨로서 약390만 명, 8.5%이다. 金, 李, 朴씨는 王姓이다. 金씨는 신라와 금관가야의 王姓이고, 李씨는 조선, 朴씨는 신라의 王姓이다.
본관별 랭킹은 1위가 金海金氏로서 약412만 명, 2위는 밀양朴氏로 303만 명, 3위는 전주李氏로 260만 명이다. 4위는 경주金氏로서 174만 명이다.
그렇다면 金, 朴씨와 함께 신라의 3大 왕성인 昔氏는 몇등인가? 신라 56代 왕 가운데 朴씨 왕이 6명, 昔씨 왕이 8명, 金씨 왕이 42명이다. 朴씨보다 더 많은 왕을 배출한 昔씨이니 그 후손들도 번창하여 인구가 많아야 될 것이다.
그런데 昔씨는 2000년 인구 센서스에서 110등이었다. 인구가 2907호에 9544명이다. 王姓인 昔씨가 史씨(109등)나 夫씨(111등) 같은 稀姓이 되어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많던 昔씨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일본에서 더 유명한 역사학자 朴炳植씨는 미발표 논문 '昔氏王族의 600년 秘史'에서 昔氏 滅門之禍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 있다.
朴선생은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三國史記 문무왕條에서 구했다.
<本彼宮의 財貨(재화), 田莊(전장), 奴僕(노복)을 갈라서 그 半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주었다>
문무왕 2년(662년) 2월條에 적힌 내용이다. 本彼宮은 최초의 昔氏王인 昔脫解 집안의 근거지 반월성 근방을 가리키거나 昔氏 집안일을 관리했던 관청으로 추정된다. 朴 선생은 문무왕條의 이 문장이 金氏王朝에 의한 昔씨 탄압과 학살, 추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무왕이 昔씨 집안의 재산과 땅과 종들까지도 다 압수하여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이다.

昔脫解는 신라系 出雲國 출신

그때는 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지 2년이 되는 해였다. 백제 지역에선 부흥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羅唐 연합군이 작전을 펴고 있었고, 倭는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함대를 준비중이던 시절이다. 국내외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왜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신라정권은 昔씨 탄압에 나섰던가?
昔氏族은 170년간 8代의 왕을 배출하면서 신라를 다스리다가 4세기 초 金氏族에게 王權을 빼앗긴 뒤 일부는 지금의 일본 시마네 지방에 있던 이즈모(出雲)國으로 돌아갔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昔脫解는 '倭의 東北 1천리에 있는 花夏國 출신'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倭는 지금의 北규슈에 있었다. 이즈모는 北규슈로부터 東北쪽 해안(일본 서해안)지방에 있다.
지금의 시마네, 돗도리 지역엔 辰韓(나중에 신라) 사람들이 많이 건너갔다. 弁韓(나중엔 가야) 사람들은 北규슈로 많이 건너갔다. 시마네 지역엔 신라系 왕국이, 北규슈 지역엔 가야系 왕국이 세워졌다. 北규슈의 가야系 왕국은 倭로 불렸다. 4세기부터 이 두 지역의 세력이 지금의 나라, 교토 지역으로 진출한다. 고대 일본의 심장부가 되는 이곳에서 두 세력은 각축전을 벌여 가야系 北규슈 세력이 주도세력이 되고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 나중에 日本으로 改名), 즉 지금의 일본을 세운다. 따라서 일본의 天皇家는 가야系이고, 姓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가야金氏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그럴 듯하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유독 金海金氏의 족보 발간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이는 天皇家와의 연관성을 은폐하기 위함이란 추리를 한 사람이 언어적 관점에서 일본 고대사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전개한 朴炳植 선생이다.

7세기의 보트 피플

昔脫解 집안은 원래 신라 지역에 살다가 바다를 건너 이즈모로 가서 세력을 이루었다. 이 세력은 일시 귀국하여 신라를 다스리다가 권력투쟁에서 金氏族에게 패배하자 일부가 이즈모로 돌아갔다. 그 중 일부 昔氏族이 다시 신라로 건너와서 王權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昔씨는 백제, 가야, 왜와 내통하여 신라의 지배층을 괴롭혔다고 한다. 金氏王權은 왕족인 昔氏 세력을 언젠가는 제거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가 羅唐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2년 뒤 행동을 개시하여 昔氏族을 전국적으로 학살, 추방했다고 朴炳植씨는 주장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일본측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17세기의 고문서 穩座拔記(온좌발기)는 '天武天皇 시절(서기 672-686년)에 일본과 한국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으로 귀화해오는 수효가 매우 많아서, 일년에 수백, 수천명이나 바다에서 조난하였고, 오키섬(隱岐島)에 표착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 적고 있다.
오키섬은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등장하는 시마네縣 소속의 섬이다. 신라로부터의 보트 피플이 일본으로 몰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의 기술이다. 朴炳植 선생은 이 기술이 박해를 피해서 昔씨들이 일본 서해안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추정한다.
재미 있는 것은 이때의 천황 天武가 신라系인 이즈모 세력 출신이란 점이다. 그는 일본내 신라 도래인 세력의 결정적 도움을 받고 쿠데타(임신의 亂)를 일으켜 집권한 다음에는 親新羅-反唐 정책을 썼다. 그때 신라는 對唐결전일 벌이고 있을 때였다. 天武천황은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통일국가를 이룩한 선진국의 제도를 배워가서 일본의 古代국가를 완성한다. 이 약30년이 韓日 두 나라가 가장 사이 좋을 때였다. 신라에 남아 있던 昔氏族은 金氏王權으로부터 탄압을 받다가 同族출신이 일본의 천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대거 탈출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昔氏姓은 稀姓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최근 일본에서도 이런 추리와 맥을 같이 하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고대의 韓日관계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 핵심은 가야 신라 세력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나라들을 세웠고, 이 세력들이 나라 지방으로 모여 고대통일국가를 만들었으며 가야系가 집권한 뒤엔 한반도에 남은 가야세력 및 백제와 손잡고 反신라 정책을 펴면서 한반도에 出兵해왔다는 점이다. 일본은 우방국인 가야, 백제가 잇따라 신라 손에 망한 뒤엔 마지막으로 서기 663년에 3만 명의 대함대를 보내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하려다가 白村江 해전에서 전멸한 뒤부터 한반도 개입의 야망을 포기했다.
신라한테 망한 백제의 지식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정신적으로 지도하는데 특히 일본의 첫 正史인 日本書記 편찬에 참여한다. 日本書記는 신라를 매도하기 위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의 시각 틀을 결정했다. 신라와 백제 감정이 신라와 일본의 감정으로 移轉하고 이것이 오늘날 韓日감정의 뿌리가 되는데 이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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